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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우리가 아는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기반을 잡도록 도운 인물이죠.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유명세를 날린 게 아니었죠.
오히려 그의 형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받아 애굽에 팔려나가 종살이와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때 요셉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했겠습니까?
자신을 구덩이 속에 집어 넣어 죽이려다가 미디안 상단에 돈을 받고 팔아넘길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어쩌면 나중에 살아남는다면 그 형들을 모조로 없애버리고픈 복수심이 들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요셉은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집에 들어갔을 때도 종살이의 삶을 충직하게 감당했죠.
그가 성실한 청지기로 일하는 모습을 본 보디발은 점차 자기 집안 전 재산을 그에게 맡겼죠.
그 후에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 때도 요셉은 그걸 뿌리치고 집을 뛰쳐나갈 정도였죠.
그 일로 누명을 쓴 요셉이 옥살이를 하게 됐지만 그때도 보디발은 요셉을 감옥의 총무로 맡길 정도였죠.
그 후에 애굽의 파라오가 꿈을 꿨을 때 애굽의 술사와 점쟁이들이 그걸 해결치 못하자 요셉이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하죠.
그로 인해 애굽의 국무총리로 발탁이 되었을 때 보디발의 가정 경제를 책임진 기반으로 애굽의 나라살림도 잘 해결했죠.
7년간의 풍년을 맞이했을 때도 또 7년간의 흉년을 맞이했을 때 작은 일에 충성한 요셉은 큰 일에도 잘 헤쳐나갔죠.
드디어 가나안 땅의 형들이 먹을 것을 찾아 요셉에게 절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형들은 17살 때 팔아버린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요셉은 30살이 되었어도 그 형들을 모두 알아봤죠.
그러자 자기 동생 베냐민을 만난 요셉은 그때서야 더 이상 정체를 숨길 수 없어서 형들에게 자기 정체를 밝히죠.
그때 요셉이 동생인 줄 알게 된 형들은 어안이 벙벙이 되었고 온갖 두려움이 밀려들었겠죠.
13년 전 자신들이 판 요셉이 애굽의 2인자였으니 그의 권력정도면 쥐도새도모르게 자신들을 죽일 수 있을 거라고 말이죠.
그러나 그때 요셉이 형들에게 고백한 게 있죠.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요셉은 비록 형들이 음모로 자신을 판 일로 종살이하고 옥살이하면서 고생고생 했지만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에서 나온 일임을 고백한 것이죠.
그때 그 형들이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았다면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가정 총무도 할 수 없었을 것이고 나라살림도 못 맡았을 것이란 뜻입니다.
궁극적으로 13년 전에 애굽에 팔릴 때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일이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은혜의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적용)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지금 내 삶에 어려움이 닥칠 수 있고, 가까운 사람과 마음이 맞지 않아 다툴 수도 있겠고, 배신을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훗날 돌이켜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더 강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589
(역배)바울과 몇몇 죄수들은 백부장 율리오와 휘하 군사들의 보호 속에서 아드라뭇데노 배를 탔습니다.
그 배는 가이사랴에서 ‘아시아 해변 각처’를 항해하는 무역선이었죠.
그 배는 오늘날의 터키 대륙과 시리아와 레바논의 항구를 왕래하는 무역선이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바울 일행이 승선한 그 배는 레바논의 시돈에 잠시 머물렀다가 통상적인 항로를 따라 북쪽으로 항해했죠.
아드라뭇데노 배의 목적지는 바울 일행이 이탈리아 반도로 직행하는 배를 갈아탈 수 있는 루기아의 무라였기 때문이죠.
루기아의 무라 항구는 터키 대륙 남서쪽의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었죠.
평소라면 아드라뭇데노 배는 시돈에서 해안선을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꺾어 서쪽 무라를 향해 나아갔겠죠.
하지만 아드라뭇데노 배는 평소처럼 북쪽 항로를 따를 수가 없었죠.
북쪽에서 맞바람이 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로 인해 그 배는 터기 대륙 남쪽 100km지점에 위치한 구브로 섬까지 밀려나 그 섬을 바람막이로 삼아 해안으로 항해해서 서서히 북쪽 루기아의 무가에 당도했죠.
(깨달음)이것이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깨닫게 된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 북쪽의 맞바람을 일으켜 바울이 탄 아드라뭇데노 배가 남쪽의 구브로 섬의 해안선을 끼고 항하하게 했는가 하는 점이었죠.
그것은 13년 전, 더 많다면 15년 전, 바울이 처음 선교한 곳이 구브로 섬이었기 때문이죠.
50대 후반에 접어든 바울, 이미 초로의 늙은이에 접어든 바울은 로마에 가면 그야말로 환송받고 왕노릇 할 수 있는 입장이었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초심을 잃지 않도록,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잃지 않도록, 첫 선교지인 구브로를 바라보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적용)우리도 그래서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주님을 향한 첫사랑, 주님을 향한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했죠.
(본문)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말씀은 5절 말씀입니다.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건너 루기아의 무라 시에 이르러”
(깨달음)터기 북쪽에서 불어오는 맞바람 때문에 바울이 탄 배가 구브로 섬의 해안가를 끼고 돌다가 서서 북상하여 무라 시의 항구에 당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만 기록하면 될 텐데,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그 중간에 ‘길리기이와 밤빌리아 바다’라는 내용을 넣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2천 년 전 로마제국의 소아시아 반도 곧 오늘날 터키 대륙 남쪽 해안에는 두 개의 중요한 행정구역이 있었죠.
바로 길리기아와 밤빌리아가 그곳입니다.
그 중에 길리기아는 바울이 태어난 다소가 있는 지역입니다.
길리기아는 바울에게 고향과도 같은 곳이죠.
그러니 지금 로마로 향하는 길목에 자기 고향을 바라볼 때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비록 자신은 유대인이지만 로마 시민권자로서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오묘한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1차와 2차와 3차 선교여행을 따닐 때도 로마 시민권자로서 어디든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지금 구브로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그곳 길리기아를 바라보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그것 아니겠습니까?
“바울이 네가 로마로 향하는 그 길목도, 이전에 내가 너와 함께 하였듯이, 지금 네가 가는 길에도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네가 어떤 어려움을 만날지라도, 하나님께서 너를 붙잡아주셨듯이, 앞으로도 너와 친히 함께 할 것이다”
“네가 길리기아에 태어난 것, 네가 로마 시민권과 헬라문화를 익힌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였지 않느냐?”
“그러니 너의 앞길에 어떤 장애와 난관이 펼쳐질지라도 너를 통해 할 일을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으실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해라”
(깨달음)그렇다면 밤빌리아 바다는 왜 누가가 기록한 것이겠습니까?
길리기아야 바울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기에 이해가 되지만 밤빌리아는 고향도 아닌데 왜 성령님께서는 누가를 감동시켜 굳이 밝힌 것일까요?
밤빌리아는 길리기아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곳입니다.
밤빌리아는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구브로 섬 다음으로 배를 타고 간 곳이 버가였습니다.
그 버가가 속한 지역이 밤빌리아였죠.
밤빌리아의 버가가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부터 바울의 선교사역이 확장돠었기 때문입니다.
1차 전도여행때 그곳 버가에서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때 바울과 바나바, 바나바와 바울의 수행원으로 따라나선 바나바의 조카 요한 마가가 버가에서 그만 집으로 돌아간 사태가 발생했죠.
그가 부잣집 외아들이라 고생해본 적이 없어서 그곳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려면 험한 타우로스 산맥을 넘어야 하죠.
더욱이 그 산맥에는 수많은 도적떼들도 출몰하는 일이 잦은 곳이었죠.
그 뿐만 아니라 바나바의 조카 요한 마가는 할례파 출신인데 반해 바울은 무할례파를 고수하고 있어서 둘 사이에 충돌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죠.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요한 마가가 밤빌리아 버가에서 그만 선교지를 이탈해 집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그 이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바울은 그 당시 해안 저지에서 발생하는 말라리아라를 풍토병을 앓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나바와 함께 그 산맥을 넘어갔죠.
그래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까지 나아갔다가, 다시금 선교지를 돌면서 되돌아왔죠.
그 후에 2차 선교여행을 떠나는데, 바울과 바나나는 1차 선교여행 때 선교지를 이탈한 요한 마가를 데려가는 일로 다투고 헤어졌죠.
바로 그것이 바울이 이방 선교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점입니다.
그때 바나바는 요한마가를 데리고 다시금 1차 선교여행지였던 구브로로 향하는데,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루스드라 이고니온을 거쳐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유럽대륙으로 향했다는 점입니다.
유럽 대륙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 곳인데, 성령님의 인도로 유럽대륙을 밟게 된 것이었죠.
그것이 바로 밤빌리아 버가에서 요한마가의 일로 2차 선교여행 때 갈라선 이후에 그렇게 유럽대륙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비록 그 당시에는 바나바와 의견이 충돌해 갈라졌지만, 지금 로마로 향하는 길목에서 바라보는 밤빌리아 버가는 어떻겠습니까?
어쩌면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에 종살이하고 옥살이하던 그 과정을 통해 국무총리가 되어, 13년 전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13년 전 밤빌리아 버가에서 요한 마가의 일로 갈라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유럽대륙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었겠냐는 것이죠.
실은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더 크신 섭리임을 비로소 깨닫지 않았겠습니까?
바로 그 사실을 인지하도록 하기 위해 바울이 탄 배가 항해하는 길목에 밤빌리아 바다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죠.
(적용)이때 바울이 밤빌리아 버가를 바라보고 1차 전도여행 때 도망친 요한 마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아, 그때 그가 선교지를 이탈한 것, 그 역시 하나님의 섭리에서 일어난 일이었구나.”
“그때 만약 그가 선교지를 이탈하지 않았다면, 2차 전도여행때도 바나바와 함께 구브로와 1차 선교여행지였던 터키 대륙만 밟았겠구나.”
“하지만 그가 선교지를 이탈함으로 인해 바나바와 갈라섰고, 그 일로 유럽대륙까지 복음의 보폭을 넓히도록 하나님께서 인ㄷ하셨구나.”
“그러나 요셉이 그 형들을 품고 이해하듯이, 나도 로마에 가면 요한 마가를 이해하고 품어야 하겠구나.”
바로 그렇게 생각한 바울이었겠죠.
그리고 실제로 바울이 로마의 메마르틴 지하감옥에 갇힐 때 ‘요한 마가를 데려오라’고 그가 복음에 ‘유익하다’고 말을 하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함께 하나님의 뜻을 받들다가 뭔가 뒤틀려 결별할지라도 그를 통해 더욱 큰 은혜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그렇기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지금 로마로 향하는 배편 위의 바울에게 왜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바라보게 하시는지 이제는 알 수 있지 않겠느냐?”
“길리기아는 바울에게 고향과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고향을 뛰어넘어 로마 시민권자로 그를 통해 온 세계를 상대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 아니더냐?”
“바울은 유대인의 관점만 생각하고 살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전세계를 상대로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부르신 것 아니었더냐?”
“더욱이 밤빌리아 버가에서 요한 마가가 선교지를 이탈할 때도 괴로웠고 힘들었지만 그를 통해 2차 전도여행때 유럽대륙까지 뻗어나갈 수 있지 않았더냐?”
“그 당시만 해도 형들에게 애굽으로 팔린 요셉처럼 너무나도 씁쓸한 바울이었지만 13년이 지난 지금은 그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지 않았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와 뜻을 같이한 누군가 너를 팔거나 너와 결별한다면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를 통해 더 큰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봐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팔아넘긴 형들 넘어에서 애굽의 국무총리는 물론이고 야곱의 모든 식구들까지 책임질 수 있는 길로 인도하셨으니 말이다.”
“바울도 요한 마가가 괴씸했지만 그와 결별함으로 인해 유럽대륙까지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요셉도 형들이 자신을 판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더냐?”
“바울도 지금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와 같은 신묘막측한 하나님의 섭리 앞에 감동하며 감격하고 있지 않겠느냐?”
“2023년에 비록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날지라도 너는 낙심하지 말고 더욱더 주님의 은혜 안에 굳게 서도록 해라.”
(찬양)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일꾼으로 섬기는데도 바울과 요한마가처럼 때로 마음이 맞지 않아 뒤틀리기도하고 결별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시기와 질투심으로 누군가를 속이고 요셉처럼 팔아넘기기도 하죠.
그 당시에는 가슴 아프고 매우 고통스럽지만 훗날 그마저도 하나님의 깊은 섭리 속에 있는 일임을 깨달을 때가 있죠.
형들에게 팔려 애굽에서 종살이와 옥살이를 한 요셉도 국무총리로서 형들을 맞이했을 때 그 모든 게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고백하며 화해하고 품어줬죠.
로마로 향하는 뱃길에서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를 바라보는 바울도 13년전 요한마가와 헤어진 일이 실은 유럽대륙으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더 큰 섭리임을 알고 훗날 요한마가를 품에 품게 되죠.
그렇기에 2023년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 모든 것을 믿음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 모두가 하나님의 더 큰 섭리임을 기억하며 살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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