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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스라엘 왕국이 패망하고,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할 기색이 역력할 때였습니다. 그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서 고래고래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하나님, 왜 악인들이 저토록 형통합니까? 왜 저리도 잘 되는 것입니까?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을 등지고 배반하며 우상을 좇고 세상에 힘 있는 애굽을 의지하는 게 잘못했지만, 그래도 한때 우리 선조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저 악한 바벨론 제국은 하나님과는 전혀 거리가 먼 족속들이고, 온통 우상의 나라 아닙니까? 그런데도 왜 악한 저들이 다 형통한 것입니까? 하나님 듣고 계시나요? 제발 말씀 좀 해 주세요.” 하고 분통을 터트리며 하나님께 항변하듯 묻는 하박국 선지자의 절규입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질문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였던 이가 있습니다. 바로 아삽입니다. 시편 73편 2-6절은 그 아삽이 질문한 시가 있습니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무슨 뜻입니까? 어쩌면 아삽도 그렇게 하나님께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하나님, 솔직히 제가 뒤척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서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몹시 괴롭습니다. 악인들이 왜 저리도 형통한 것입니까? 저들에게는 고난도 없고, 아픔도 없고, 눈물도 없고, 심지어 죽음조차 없는 것입니까? 저들은 하는 것마다 오히려 잘 되고, 윤기가 잘잘 흐르고 있는데 말입니다. 하나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제발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악인의 형통함에 대해 질문하는 하박국 선지자와 성전의 찬양대장을 했던 아삽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답을 해 주셨겠습니까? 성경에 나온 말씀을 토대로 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답변해 주셨을 것입니다. “하박국아, 아삽아. 악인의 형통함이 그렇게도 쓰리고 못 마땅하느냐? 그런데 도대체 너희들이 생각하는 형통함이란 게 무엇인 줄 알고 말하는 것이냐? 너희들이 보기에 많은 것, 큰 것, 빠른 것, 높은 것, 화려한 것, 번쩍이는 것. 그것들이 형통함이라고 생각하느냐? 너희들이 바라고 원하는 대로 착착 이뤄지는 것, 그것이 형통함인 줄 아느냐?”
하나님께서는 먼저 형통함이 무엇인지 하박국과 아삽에게 바르게 깨닫게 해 주신 것인데,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형통함을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세상의 크고, 높고, 번쩍이고, 화려한 것만을 형통함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는 형통함이 아닙니다. 그런 기준으로만 형통함을 생각한다면, 요셉이 종으로 팔린 것, 감옥에 갇힌 것, 그것을 어떻게 형통함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높은 것, 세상에 잘 나가는 것만을 형통함으로 생각한다면,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히고, 순교당한 것을 어찌 형통함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조차 결코 형통함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죠.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깨우쳐주시고자 하는 형통함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회복한 그 상태에 있는 것, 결코 세상으로부터 오는 만족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형통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세상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형통함을 누리고 있는 바벨론도, 순식간에 멸망당한다는 것을,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에게 보여주시면서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보기에는 바벨론 제국이 강하고, 크고, 화려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쥔 것 같아 형통한 것 같고, 너희들은 지금 포로로 끌려와 허망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오히려 너희들이 더욱 형통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처한 자리에서 주 여호와 하나님과 바른 회복의 관계를 다시금 맺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것이 곧 진정한 형통함이라는 것을 바르게 깨닫게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벨론 제국의 입장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해가지지 않는 나라일 것이라고, 스스로 착각하는 교만함과 패역함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오만하고 교만하여 포로로 끌려온 자들을 학대했고, 늙은이들에게 무거운 고역을 시켰고, 유아독존처럼 사치하고 방탕한 삶을 일관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실상을 본문 6-8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 내가 내 백성에게 노하여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 말하기를 내가 영영히 여주인이 되리라 하고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도 아니하며 그들의 종말도 생각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포로로 끌고 온 유다 백성들을 욕되게 하고,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있고, 나이가 많은 포로들에게도 고역을 시키고 있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에게는 그 어떤 패망도, 패배도, 멸망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떵떵거리며 교만한 모습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벨론 제국의 실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바벨론 제국의 실상을 부러워하며, 그것을 형통함으로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형통은 결코 형통이 아님을 깨닫게 하십니다. 본문 1-3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와서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임이라 맷돌을 가지고 가루를 갈고 너울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네 속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복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그토록 강력하고, 그토록 크고, 화려하고, 천하무적인 화려함을 자랑하던 너희 바벨론 제국도 순식간에 무너지고, 패망하고, 너희들의 보좌도 왕좌도 다 꺼질 것이라고 선포한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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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B.C.605년 경 바벨론 제국은 이집트는 물론 세계 모든 나라를 장악한 상태였고, 세계 모든 나라로부터 조공을 바치게 했습니다. 심지어 B.C.586년에는 남왕국 유다까지 완전히 장악하여 성전을 무너뜨렸고, 성전의 모든 은금보물까지 다 긁어갔고, 유다 민족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66년이 지난 B.C.539년에 바벨론 제국은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화려함, 세상의 크고 능력 있고, 세상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는 세상 역사의 실제적인 흐름입니다. 그 모든 일을 주도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세상의 화려함과 크고 높은 것만을 형통함이라고 여기면서 자기 밖에 모르는 자들은 당신이 정하신 때에 패망케 한다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을 향해, 왜 그토록 강하고 능력있고 두려운 바벨론 제국이 망하게 될 것을 선포하게 하신 것입니까? 너희들이 스스로 강하고 크고 능력있고, 세상의 화려함만을 추구하다가 이 꼴이 되었는데, 지금 너희들과 똑같은 길을 걷고 있는 바벨론 제국도 머잖아 너희들 꼴을 당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이 세상에서 누구를 의지하며, 누구를 붙잡고 살아야 하며, 과연 어떤 것이 참된 형통함인지 바르게 깨달아야 하지 않겠냐는 뜻에서, 바벨론 제국의 멸망을 일깨워주신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패망하는 순간에 주문을 외우거나 주술을 부린다 해도, 그들의 패망을 이겨낼 길이 없다고 확실하게 말씀합니다. 그것이 본문 9-15절까지 기록된 말씀입니다. 본문 9절의 후반부에 “네가 무수한 주술과 많은 주문을 빌릴지라도 이 일이 온전히 네게 임하리라.”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을 그 누구도, 그 어떤 주술도 이겨낼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너희 유다 백성들아, 너희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 하나님의 자녀들아, 오직 나 여호와를 신뢰하고, 의탁하며, 나와의 관계를 바르게 회복하는 것, 그것을 형통함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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