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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에서 실시한 식민지 정책 중에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있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의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는 게 그것이었죠. 그렇게 조선 사람들을 일본식 성과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게 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조선인이라는 생각 자체를 지워버리기 위함이고, 또한 중일전쟁에 필요한 병사들을 자유자재로 징집하고자 함이었죠.
바로 그런 예가 바벨론 땅에서도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니엘서를을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점령한 이후, 다니엘과 세 친구를 잡아갔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유다 땅에서 고급 관료나 지배계층에 속하는 유능한 청년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그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한 것인데, 그 첫단계로 시작한 게 그들의 이름을 바꾼 것이었습니다. 그 중 다니엘은 ‘벨드사살’로, 아사랴는 ‘아벤느고’로 바꿔 부르게 했습니다.
과연 ‘벨드사살’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벨드사살’이란 바벨론이 신으로 섬기던 “벨(마드둑)이 보호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아벳느고’란 이름은 어떤 뜻이겠습니까? 그 역시 바벨론이 섬기던 신 들 중의 하나인 “느보 신의 종”이라는 이름 뜻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유다 땅에서 끌고 온 포로들의 이름을 바벨론 식 이름으로 개명한 것 역시 종교를 말살시키고, 자신들의 종교문화를 그들의 뼛속 깊이 주입코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나오는 말씀 “벨은 엎드려졌고 느보는 구부러졌도다”하는 이 말씀의 ‘벨’이 바로 바벨론 제국의 ‘벨 신’입니다. 그리고 ‘느보’도 바벨론 제국의 신 들 중의 하나인 ‘느보 신’을 일컫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벨’이든 ‘느보’든 둘 다 바벨론 제국이 섬기던 신이요, 유다 백성들에게는 우상과 같았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벨’과 ‘느보’는 바벨론의 지역을 다스리던 ‘지역신’ 혹은 ‘국가신’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상천하지에 온 세계와 온 우주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유일신입니다. 바벨론의 ‘벨’과 ‘느보’신은 그 지역과 그 나라를 벗어나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고 믿는 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유다 땅을 벗어나 바벨론 땅도,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도 다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능하신 신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금신상을 세워놓고 신처럼 절하게 했을 때, 다니엘의 세 친구 곧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절하지 않았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 하루 세 번씩 기도했죠. 그러자 그 나라의 대신들이 다니엘의 세 친구를 고발했는데, 그로 인해 뜨거운 풀부물에 던져졌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 세 친구를 그 풀무불에서 건져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대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가 바벨론을 장악했을 때, 그는 120명의 고관을 두고서 전국을 다스리게 했고, 그 위에 세 명의 총리를 두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다니엘이었습니다. 그만큼 페르시아의 대왕 다리우스는 다니엘을 신임했는데, 문제는 그를 시기하던 페르시아 출신의 대신들이 다니엘을 고소고발했죠. 다리우스 왕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자는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사자굴에 던져 사자의 밥이 되게 하도록 말이죠. 그때 다니엘은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하루 세 번씩 기도를 올렸죠. 그러자 그 신하들의 시기심에 의해 다니엘은 결국 사자굴에 던져졌죠. 하지만 그 페르시아 땅에서도 하나님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진 다니엘은 털끝하도 상하지 않도록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들이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들의 지역신과의 차이점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나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이 아무리 자기 나라의 신을 떠받들고 우상처럼 신성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나라와 그 모든 왕들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을 본문 1절부터 보여주고 계시는데, 바벨론 제국이 ‘벨’신과 ‘느보’신을 숭배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한낱 우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족속들, 지금 포로로 끌려온 유다 백성들을 향해, 우상을 떠나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벨론 제국이 신뢰하며 의지하던 그 신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본문 6-7절에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금을 쏟아 내며 은을 저울에 달아 도금장이에게 주고 그것으로 신을 만들게 하고 그것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을 들어 어깨에 메어다가 그의 처소에 두면 그것이 서 있고 거기에서 능히 움직이지 못하며 그에게 부르짖어도 능히 응답하지 못하며 고난에서 구하여 내지도 못하느니라.” 바벨론 사람들이 섬기고 있는 그들의 우상이라는 것의 실체를 유다 백성들에게 깨우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우상들은 금을 쏟아서 도금장이들이 만든 것이요, 그것을 만들어 경배하지만, 그것들은 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부르짖어도 응답치 못한다고, 바벨론 족속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아무리 그들이 부르짖어도 결코 고난에서 구해내지 못한다고,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 우상들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까? 왜 그들이 신처럼 떠받들고 있어도 그들을 도와주지도, 그들을 구원해내지도 못한다고 말씀합니까? 믿음이란 상호간에 인격적인 교류가 가능할 때만 존재하는 법이죠. 따라서 사람과 물질 사이에는 절대로 인격적인 교류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나무나 돌로 만든 조각상을 아무리 신으로 우상으로 떠받들어도 한낱 물질에 불과한 조각상들은 인간의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 상황은 어떻습니까? 기원전 시대의 구약시대나 이사야가 활동하던 주전 8세기나, 그때로부터 2800년이 흐른 지금의 시대나 여전히 물질을 형상화한 우상숭배에 빠져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물질을 신으로 떠받들고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크리스천들의 삶은 다릅니까? 세상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드러난 우상을 좇는다면, 크리스천은 드러나지 않게 우상을 숭배한다는 그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지나친 교육열이나, 비정상적인 재테크 열기, 그리고 지나친 스펙지향주의 등이 주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이 오늘날 좇고 있는 우상화 열풍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이 세대의 세속 문화에 동조하고 동화돼 버린 모습들 말입니다.
그런 유다 백성들, 그런 우리 자신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8절에 “너희 패역한 자들아.” 또 본문 12절에서는 “마음이 완악하여 공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하고 말씀하시면, “이 일을 마음에 두라”고, “내게 들으라”하고 요청하십니다. 바벨론 제국의 백성들이 온갖 우상을 만들어 탐욕을 좇고 있지만 다 헛것인 것처럼, 너희 유다 백성들아, 너희들도 그것을 마음에 두고 헛된 우상숭배자들이 되지 말고, 나 여호와를 마음에 두고 내 말을 들으라고 요청하는 거죠.
궁극적으로 그것은 2800여년 전의 유다 백성들,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향한 하나님의 외침과 경종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을 향한 외침과 경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좇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나의 탐욕이라는 우상을 좇고 있다면 여전히 우리도 하나님 앞에 ‘패역한 자식들이요’, ‘마음이 완약하여 하나님의 법도에서 떠난 자들’임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포기하시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들을 향해 러브콜을 보내고 계십니다. 그것이 3-4절에 있는 말씀 “야곱의 집이여 이스라엘 집에 남은 모든 자여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 한마디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너희들은 내 자식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다르지 않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하여 세상의 흐름과 풍조를 좇고 세상의 탐욕에 휩쓸려갈지라도,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 주님이심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그 분께서 우리를 품으시고, 업으시는 러브콜을 보내고 있음을 잊지 않는 하루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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