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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썼다고 추정하는 이 히브리서를 기록한 목적이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그 목적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봄으로써 성숙한 구원의 삶을 살게 하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시종일관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집중적으로 변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서두인 1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이른바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삶으로부터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삼가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첫 구절을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을 하고 있죠. 이른바 히브리서 1장 전체를 요약하면서 2장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1장에서 바울이 무엇을 강조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만유의 상속자이시고, 이 세계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고,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심을 이야기했죠. 그리고 그 분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천사들의 경배를 받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수종들게 하는 모든 만물의 통치자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죄와 사망의 권세를 쥔 사탄의 머리를 밟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뜻이었죠.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분으로부터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1절 초반부에 권면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본문 3절에서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하고 권면합니다. 주님의 큰 구원에서 이탈하면, 어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의 구원을 ‘큰 구원’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왜죠? 왜 주님의 구원이 ‘큰 구원’입니까?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얻게 된 구원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직접 희생의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구원이 어디에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 큰 구원의 희생 위에서 그리스도인이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분의 구원을 ‘큰 구원’이라고 표현한 것이죠.
그런데 바울이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왜 바울이 주님의 구원을 ‘큰 구원’이라고 기어코 언급하는 것입니까? 그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황제의 박해를 받고 있는 기독교에서 다시금 과거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너희가 하늘의 은혜를 덧입고, 구원의 은총을 덧입었는데, 어찌 예전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면 되겠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히브리서 6장 4-6절을 통해 바울은 그렇게까지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하늘의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받아 성령에 참여한 바 된 이들,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이들이, 타락한 자들처럼 과거로 돌아가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죠. 마치 삼손이 성령의 능력과 권능 속에서 시작했다가 자기 육체로 마친 것처럼, 그렇게 유대교로 돌아가서야 되겠느냐고, 바울이 말하는 것이죠. 그큰 구원을 덧입고도 과거로 돌아간다면, 예수님을 다시금 못 박는 일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에서 표류하지 말라고, 떠밀려가지 말라고 권한 것이죠.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권성권
하루 한 장 욥기서 읽고 묵상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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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 5-9절에 바울은 예수님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분”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말하는 바 장차 올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심이 아니니라 그러나 누구인가가 어디에서 증언하여 이르되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여기에서 바울은 영광과 존귀로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광’은 본래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의 속성이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은 하나님의 거룩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죠.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거룩할 수 없기 때문에 본래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없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고 바울이 밝혀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바울이 강조하는 단어는 ‘존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 안에 있는 것이 영광이라면, 그 영광이 넘쳐나는 것이 ‘존귀’입니다. 존귀 안에는 최고의 명예와 존경심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처럼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고 계신 분’이시기에, 성령님을 모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들어갈 때 그 영광과 존귀를 높여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찬양이고 또 예배입니다. 예배란 최고의 영광과 존귀를 지닌 주님을 경배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영광과 존귀를 찬양하고 경배하는 자들이 그 분의 영광과 존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죠. 바꿔 말해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는 자는 그 분의 영광과 존귀의 은혜를 덧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분의 영광과 존귀에서 떠나가지 말라고 바울이 권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 권성권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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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영광과 존귀를 어떻게 누리게 됐습니까? 9절 중반절을 다시 보면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라고 밝혀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은 분이셨기에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본래부터 신이시기에 그 고난에서 자유한 분이셨습니까? 아니죠. 그 분도 인간처럼 육신의 제약을 받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시옵소서.”하고 세 번씩이나 간구하셨죠.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기꺼이 십자가 고난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분의 십자가 죽음이 없었던들 어찌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셨게냐는 것입니다.
더욱이 본문 14-18절에서는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셨기에 영광과 존귀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고난당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친히 도우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말구유통에 태어나셨기에, 그 분이 배고픔과 굶주림을 아셨기에, 그 분이 친히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분입니다. 왜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받은 너희들이 어찌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하는 것이죠. 너희가 아무리 로마의 압제를 받더라도, 궁극적으로 그 분만이 너희 인생을 도우시고, 건져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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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묵상하기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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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이 인생의 태풍을 맞이하더라도 에스겔서 16장 3절처럼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하신 것처럼, 오늘도 우리 삶에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닥쳐와도, 나의 고통에 공감하시고 도우실 수 있는 그 분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 안에 거하는 삶이 머잖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게 되는 그런 날이 오게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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