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예화)며칠 전에 두 분의 목사님과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분은 예전에 암태오상교회를 14년간 섬긴 박성훈 목사님이었습니다.
그 분이 송옥기 장로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송옥기 장로님은 교회에 나오기 전에 별명이 술보였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게 술을 마셨는데 그럴 때면 동네가 떠들썩했고 집안 물건이 남아나질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에 청천벽력같은 간암이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죽음 앞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분은 자기 아내가 믿는 예수님께 나아가 매달리며 기도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치료해 주시면 주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그렇게 간청하고 애원하며 기도했는데 예수님께서 찾아와 만나주셨고 또 깨끗이 치료해 주셨습니다.
이때는 할렐루야 하고 아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비로소 자신의 죄를 예수님께서 용서해주셨고 구원의 확신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분이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되시면 집사로 섬길 때와 달리 목사님의 뜻에 반하는 장로님도 없잖아 있는데 그 분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박성훈 목사님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렇게 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네 목사님. 그렇게 하시죠. 아멘입니다. 목사님”
그래서 그 장로님의 별명도 ‘술보’에서 ‘OK 장로님’이 되었고 그 분이 사인을 해도 ‘OK’로 사인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더욱이 교회 재정이 어려워 목사님의 사례비를 드리지 못할 지경이 되면 당신이 부족분을 메워넣는 일도 많았다고 하죠.
그러던 그 분이 어느 날엔가는 갑자기 박성훈 목사님을 불러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내가 지금 너무 아파 죽게 생겼습니다.”
“의사도 병명을 모르겠다고 합니다.”
“이제 죽을 날만 남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떳떳하지 못한 게 생각났어요.”
그러면서 묵직한 돈봉투를 내밀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인데요 장로님.”
“네 목사님. 제가 여태껏 십일조를 떼어 먹은 것이 생각나서 다 모은 것들입니다.”
“또 감사한 일들이 많았는데 그때 감사헌금을 드리지 못한 것들도 다 모은 거예요.”
이렇게라도 하나님께 드려야 제가 천국에서 갔을 때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을 것 같아요.
(깨달음)참 귀한 장로님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 후에 며칠 만에 천국에 가실 줄 알았는데 히스기야처럼 그로부터 15년 생명을 더 연장받아 천국에 가셨다고 합니다.
왜 그 분이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모아서 드린 지 알 수 있죠.
그 분은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히 체험했고 죽음 이후에 천국에 간다는 걸 확실히 믿고 살았기 때문이죠.
(예화2)박성훈 목사님의 아버님도 목사님이셨는데 아버님이 목회하던 교회가 암태도창교회였습니다.
도창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는데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는 한 분이 ‘뱀십일조’하고 올렸다고 해요.
부흥강사님이 무슨 ‘뱀십일조냐’하면서 사탄의 헌금이지 않냐고 하면서 그 헌금을 드린 분을 세우면서 설명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 헌금을 드린 분은 양미녀 집사님이란 분인데 그 교회는 양미녀도 있고 양처녀도 있고 박박쥐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름이 특이하지 않습니까?
'뱀십일조'를 드린 양미녀 집사님은 가난하지만 하나님께 늘 드리고픈 마음을 지닌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땅굴을 뒤지면서 뱀과 구렁이를 잡아 그걸 판 돈으로 하나님께 헌금을 드린 분이었던 거죠.
부흥집회가 한 창인데 그때 도창교회 뒤쪽의 산을 지나가는데 소나무 위에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게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뱀의 매가지를 잡고 쭉 훌터야 뱀이 힘을 잃으니까 쭉 훑어서 자기 팔뚝에 감고 내려왔습니다.
이제 곧장 암태 중부에 있는 뱀가게에 들러 당시 30만 원을 받아 그 중 십일조로 3만원을 드린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일이니까 오늘날로 치면 500만원 정도 하는 뱀 값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깨달음)왜 양미녀 집사님이 뱀십일조를 드린 지 알 수 있습니다.
그분도 자신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너무 컸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 이후에 천국에서 하나님을 뵈올 때 부끄럽지 않기 위함 아니겠습니까?
(적용)때로는 인생에 해답이 명확한데도 그게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을 때는 누구라도 의문을 품습니다.
왜, 어찌하여, 어째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하고 질문합니다.
하지만 그 질문 너머의 대답이 명확하다면 누구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 너머에 천국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고 체험한 신앙인은 지금 당장이라도 하나님 앞에 섰을때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선한 청지기처럼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질문하셨지만 그 질문 너머의 대답이 너무나도 명확했기 때문에 온전히 받아들였던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 북팟- 교보ebook
성경으로 문화읽기2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오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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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죄로 물든 인류를 구원코자 함이셨습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비천한 말 구유통에 태어나신 것도 그렇죠.
의로우신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위해 죄로 물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자 요단강에 내려가신 일도 그렇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와 연약한 자를 고치고 치료하고 어루만져주신 모습도 그랬습니다.
공생애 기간동안 12명의 제자를 불러 당신과 함께 살면서 천국의 가치를 일깨워주신 것도 그랬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찬식을 거행하며 제자강화의 시간을 통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랬습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그 고통이 너무나도 극심할 것이기에 그 십자가 잔을 할 수만 있으면 피하게 해 달라고 말이죠.
그렇게 세 번씩 기도하셨지만 끝내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라면서 수긍하셨습니다.
이윽고 그 기도가 끝날 무렵 가롯 유다가 데리고 온 대제사장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체포했습니다.
그때 자기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한 베드로는 물론이고 요한과 야고보도 함께 줄행랑치고 말았죠.
그때부터 날이 환하게 밝아오는 아침까지 예수님은 다섯 번의 법정에 끌려다녀야만 했습니다.
맨 처음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자 실세였던 안나스의 법정에 끌려가셨습니다.
이후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으로 끌려가셨죠.
당시 의사결정엔 70명의 산헤드린 의원이 있어야 했지만 그 새벽엔 23명만 있어도 결의할 수 있었죠.
하지만 그 자리에서 예수님의 죄를 고발한 사람들은 아무런 죄목을 발견치 못했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보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지만 그 어떤 죄목도 찾지 못했고 곧바로 헤롯 대왕에게 보냈습니다.
헤롯 대왕 역시 예수님에게서 어떤 죄목을 발견치 못하자 다시 빌라도 법정으로 보내버렸죠.
그렇게 예수님은 새벽녘부터 날이 환하게 밝아오는 아침까지 다섯 번의 법정에 끌려다녔습니다.
마지막 빌라도 법정에서 섰을 때 빌라도는 유대 군중들을 의식해서 예수님에게 십자가 사형을 선고해버렸습니다.
만일 유대 군중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폭동이 일어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책임의 대가로 로마 로마의 황제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로마 황제에게 버림받는 것보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이 얼마나 처참한 일인지 지금쯤 지옥에서 뼈저리게 고통을 겪으며 깨닫고 있지 않겠습니까?
죽음 너머에 어떤 판결이 기다릴지 그 대답이 명확하다는 걸 안다면 그는 그런 결정을 하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날 아침 예수님은 자신이 매달릴 육중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갔습니다.
하지만 밤새도록 기도하셨고 날이 밝기까지 다섯 번의 법정에 끌려다니느라 지쳐서 길에 쓰러졌습니다.
그 모습을 본 로마 군사는 그 길목에 구경하던 구레네 출신 시몬을 지목해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게 했습니다.
오전 9시 예수님은 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위에 양손과 양발에 대못이 박힌 채 매달렸습니다.
그로부터 3시간이 흐른 정오 12시 온 땅에 어둠이 내리깔렸고 3시간 동안 흑암이 온 땅을 뒤덮었죠.
그 3시간 동안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일곱마디의 ‘가상칠언’을 하셨고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하시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깨달음)그날의 흑암은 자연계의 7분짜리 일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흑암이었습니다.
그날의 흑암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빠져나와 자유와 해방의 빛을 맛보기 전에 애굽 땅에 임한 3일간의 흑암과 같은 것이었죠.
그날의 흑암은 구약의 요엘서처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질 것(욜2:31)라고 예언한 흑암이었습ㄴ다.
그 어둠과 흑암은 빛과 반대되는 것이요 그 어둠과 흑암은 생명과 반대되는 사망의 어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어둠과 흑암 속에 당신의 생명을 갈아넣으셨습니다.
왜, 어찌하여, 어떻게, 그런 일을 받아들이는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야 당신의 죽음을 통해 죄의 대속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혹여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어둠과 흑암의 일이 찾아올 때 우리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그 어둠과 흑암 속에 우리의 영혼을 갈아넣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광명한 빛의 세계, 생명의 세계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은총의 길인 줄 믿습니다.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 북팟- 교보ebook
하루 한 장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묵상하기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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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은 34절 말씀으로 ‘버림받은 예수님의 탄식’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죽어가면서 턴삭하신 외침이 있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뜻입니다.
‘사박타니’(σαβαχθάνι)란 ‘떠나다’ ‘홀로 두다’는 아람어로 예수님의 실제 육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말 구유통에 인간의 몸으로 오실 때 천군천사를 동원해 화답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나 변화산에서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때도 그렇게 소리쳤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마17:5)
그런데 십자가에 대못이 박혀 3시간 동안 어둠속에 있는데도 하나님은 아무런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마치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은 것은 아닌지 탄식하며 외친 것이었습니다.
(깨달음)그런데 정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를 이때 버리신 것이었습니까?
이 장면은 구약성경 시편 22편의 전반부와 같은 울부짖음과 똑같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10대 중반에 왕으로 기름부음 받았지만 사울 왕의 칼날에 피해 10년간 도망자로 살 때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것처럼 말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22:1-2)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탄식하는 다윗을 버리신 것이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10년간 유대 광야로, 아둘람 동굴로, 증조 외할머니 룻의 고향 모압으로, 이방 땅 블레셋 당에 숨어 들어가 침을 흘리며 목숨을 부지할 때도, 하나님은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내다보는 것보다 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었을 때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자 드디어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시편 22편 후반부에 다윗이 개의 세력에서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라고 찬양하는 이유가 그거죠.
(적용)지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아무런 말씀이 없지만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독생자의 죽음과 고통과 괴로움을 모르시는 게 아니라 알고 있지만 잠시 외면하신 것이죠.
그래야만 예수님이 마지막까지 인간의 죗값을 위해 완전히 십자가에 죽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를 위해 하나님께서 잠시 고개를 돌린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정말로 간절한 상황에 닥쳐 탄식하며 기도하는데도 응답하지 않을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의 선한 뜻이 드러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죠.
더욱이 그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 | 권성권 | 유페이퍼- 교보ebook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설교 말씀을 통해 나눈 예화다. 예화는 설교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다. 말씀의 이론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간증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예화는 설교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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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오늘 본문은 ‘어찌하여’라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34절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원해)여기에 ‘어찌하여’라는 말은 아람어 관용구입니다.
아람어는 앗수르 제국이 통치할 때 사용한 언어인데 히브리어와 비슷한 면이 많고 신약시대도 사용된 바가 있죠.
‘달리다굼’ ‘에바다’ ‘마라나타’ 등이 모두 아람어인데 예수님도 그 아람어를 직접 사용하셨습니다.
본문의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도 아람어인데 그중에 ‘라마’는 ‘어찌하여’라는 뜻으로 헬라어로 ‘레마’(λεμά)입니다.
예수님의 이 탄식은 구약의 시편 22편에도 동일하게 나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편에 나온 ‘어찌하여’는 구약의 히브리어로 ‘레모드’(לָמָה)입니다.
‘∼을 위하여(for)’라는 전치사 ‘라’(ל)와 ‘무엇(what)’이란 뜻의 ‘마’(מָה)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우리말로는 ‘무엇 때문에’, ‘왜’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라는 히브리어에는 ‘레모드’만 있는 게 아니라 ‘마두아’(מַדּוּעַ,출1:18)도 있습니다.
애굽의 파라오가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들이 태어나면 죽이도록 명령했는데 히브리 산파들이 다 살려냈죠.
그때 ‘어찌하여 죽이지 않았느냐’하면서 질문하는 그 말이 ‘마두아’입니다.
구약성경에 ‘마두아’는 71회 사용됐 대부분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원인을 묻고자 할 때 사용된 단어죠.
그에 비해 ‘레모드’는 일어날 일의 목적을 알고자 질문하는 성격이 강한 단어입니다.(출5:22,출32:11).
출애굽기 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지도자로 삼고 바로에게 나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데리고 나가 하나님께 제사드리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바로는 하나님이 누구인데 내가 너희 백성들을 보낼 걸로 생각하느냐며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가중된 노역을 시키죠.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데 모세는 하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출5:22)
(깨달음)왜 하나님께서 그런 고통스런 자리에 모세를 부르신 것입니까?
‘어찌하여’ 그런 막중한 책임을 짊어지도록 한 것입니까?
답은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그 길이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위한 길이요 억압의 삶에서 자유를 얻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레모드’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이요 앞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대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적용)지금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어찌하여’라고 질문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그 질문은 하나님의 뜻을 모른 채 던진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확실함을 알고 확인하는 차원의 질문입니다.
당신의 독생자가 십자가에 죽어야만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자유와 영생을 줄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예수님의 그 질문은 죄와 사망에서 부활하게 되었을 때 더욱더 선명한 대답으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권성권 | 북팟- 교보ebook
하루 한 장 욥기서 읽고 묵상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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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6.25전쟁이 발발하고 1.4후퇴 때 일어난 실제 사건입니다.
추운 1월의 어느 날에 미군 장교가 지프를 몰고 후퇴를 하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그만 기름이 떨어져 운전병에게 기름을 구해오라고 명령을 내리고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아기 울음 비슷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차에서 내려서 그 소리를 따라가 보았는데 그 곳에 어떤 여자가 옷을 벗은 채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의 품 안에는 갓난아이가 울고 있었습니다.
미군 장교는 그 여자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 아기는 자기가 입양하여 미국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미군 장교는 그 갓난아이가 어린이가 되고 소년이 되어 성인이 될 때까지 아들의 친어머니에 관하여 늘 가르쳤습니다.
“네 친어머니는 널 구하기 위해 춥고 배고픈 피난길에서 오직 널 살리기 위해 당신의 옷을 벗어 당신은 얼어 죽고 널 대신 살린 거야”
“그러니 너는 어머니의 그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된다”
20살이 된 그 아이는 어느 날 아버지에게 한국에 가서 친엄마의 무덤을 찾아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 생각 잘했다. 암~ 꼭 가봐야지!”
아버지는 그 무덤이 있는 장소를 상세히 알려주었고 아들은 무덤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무덤 앞에서 아들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하나씩 벗어서 어머니의 무덤을 덮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아들은 어머니의 무덤에서 목놓아 울부짖었습니다.
“어머니! 왜 절 낳으셨나요. 어머니 왜 절 낳으셨나요? 어머니 왜 절 낳으셨나요?”
(깨달음)어떻습니까?
그 아들이 “어머니 왜 절 낳으셨나요?”하고 질문하는 ‘왜’라는 말은 원망과 탄식에서 울부짖는 질문입니까?
정말로 몰라서 하는 질문입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살리신 그 사랑에 대한 고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적용)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그 질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의 죽음 앞에 ‘왜요?’ ‘어찌하여’ ‘무엇 때문에요?’하고 질문하지만 그 질문은 부활 후에 이렇게 명확한 답으로 돌아오는 것이죠.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6-11)
예수님이 종의 형체로 사람의 모야으로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그때는 ‘왜’ ‘어찌하여’ ‘무엇 때문에’ 나를 끝까지 외면하여 죽게 만드는 것입니까, 하고 질문할 수 있죠.
하지만 부활 이후에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모든 자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할 때, 모든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시인함을 알 때, 그때의 그 질문은 감사로 돌아오는 것이죠.
서두에서 말씀드린 암태오상교회 송옥기 장로님과 암태도창교회 양미녀 집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하나님 앞에 감췄다고 생각한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몽땅 모아서 드린다는 것은 누가봐도 미쳤다고 생각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그 질문 앞에 그 장로님은 천국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서고 싶은 온전한 마음이 있었기에 드렸더 것이죠.
뱀 십일조까지 굳이 드려야 할까 싶은 질문 속에서도 양미녀 집사님은 그것조차 하나님 앞에 숨김없이 드리고자 하는 온전한 마음으로 드린 것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북팟- 교보ebook
하루 한 장 역대기서 읽고 묵상하기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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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질문하는 대답 너머에 답이 분명할 때에는 온전히 순종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송옥기 장로님이 죽음을 앞에 두고 여태 감춘 십일조와 감사를 몽땅 드린 것은 그 답이 분명하기 때문이지 않았겠느냐?”
“양미녀 집사님이 뱀십일조를 드렸던 것도 그 답이 명확하기 때문에 드린 것이지 않았겠느냐?”
“천국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앞에 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드릴 수 있었겠느냐?”
“예수님께서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질문하지만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부활을 확증하는 차원에서 하는 질문이었지 않겠느냐?”
“1.4후퇴 때 얼어죽을 아들을 살리고 죽은 엄마의 무덤을 찾아간 그 아들도 ‘왜 절 낳았어요?’하지만 그것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감사의 고백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네 인생에 궁금증이 생기고 신앙생활에 질문이 생길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를 생각하며 결단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지금 믿음의 삶을 사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있는지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정직한 자세로 살아가는지 말이다.”
“그 장로님처럼 하나님께서 오늘에라도 네 목숨을 거둬가신다면 네가 하나님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는지 말이다.”
“예수님께서도 죽음 너머에 부활이 있음을 확실히 믿고 있었기에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다 흘리며 십자가 죽음을 맞이한 것 아니었더냐?”
“너의 신앙생활에 의문이 들고 질문이 생길 때 그 일이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걸 알고 온전히 헌신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더 놀라운 축복의 통로로 삼지 않겠느냐?”
“지금은 안개 같고 어두운 밤 같아도 날이 밝으면 모든 게 드러나듯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과 상급은 분명히 드러날 때가 있으니 말이다.”
(찬양)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어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 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 희망 덧없이 스러질 수 있지만
나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 할 길을 잘 아심일세
어두운 밤 어둠이 깊어 날이 다시는 밝지 않을 것 같아 보여도
내 신앙 부여잡고 주님께 모든 것 맡기리니 하나님을 내가 믿음일세
지금은 내가 볼 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가물 어른거려도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 아니하리 만사를 주님께 내어 맡기리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차츰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바울의 일생과 편지 | 권 성 권 - 교보문고
바울의 일생과 편지 | 바울은 누가 뭐래도 복음 전도자였다. 그가 복음 전도자로 활동한 것은 그의 곁에 위대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나바, 디도, 실라, 디모데, 누가, 루디아, 야손, 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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