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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일생과 선교여행과 그가 쓴 편지들- 2022년 6월 1일 다시 정리

by 권또또 2022.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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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상인 출신으로서 로마 시민권자를 샀다.

그 아버지 밑에서 바울이 태어난 것이다.

 

그 후 어린 나이에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왔다.

율법의 최고의 스승인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배웠다.

그 뒤에 유대 관원이 되고자 결혼을 했고, 교회를 박해하는 선봉장에 섰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 그가 증인으로 선 이유였다.

 

A.D34년 그의 나이 34살에 다메섹의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가다가 그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

사흘간 금식한 뒤 다메섹에 사는 주님의 제자 아니니아의 안수에 의해 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에게 변절자란 이유로 살해 위협을 받았고 아라비아 광야로 떠나 3년간 경건훈련을 거쳤다.

그때 그의 아내와 사별을 했던지, 기독교로 개종한 바울 때문에 이혼을 했던지 둘 중 하나는 했을 것(고전9:5)이다.

 

 그 후 바울은 아라비아 광야에서 다메섹으로 돌아왔지만 여의치 않아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곳에서 야고보와 베드로를 만났지만 다른 사도들과 교우들이 그의 그리스도인됨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더욱이 유대인들이 나서서 변절자가 된 바울을 죽이려고 들었다.

그때 바나바 나서서 바울을 고향 다소로 보냈다.

 

바울은 고향 땅 다소에서 7년간 칩거하며 묵상하며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그때 방언기도를 했고 삼층전의 세계를 체험하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고후12:2).

 

A.D.44년 그의 나이 44살에 바나바가 다소에 와서 바울에게 안디옥교회의 공동담임목회자로 초청했다.

그때부터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3년간 수리아 안디옥교회의 담임목회자로 섬겼다.

 

A.D.47년 그의 47살에 성령님의 강권하심 속에서 바나바와 함께 1차 선교여행을 떠났다.

처음 선교팀장은 바나바였고 첫 행선지는 바나바의 고향 구브로였다.

그때 바나바의 조카 요한 마가가 수행원으로 동행했다.

그런데 바울은 버가에서 풍토병에 걸려 무척 힘겨워했다.

더욱이 요한 마가는 타우로스 산맥을 앞두고 도적 떼와 두려움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다.

그때부터 선교팀장은 바울이 맡았다.

그때 바울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이고니온-루스드라-더베 지역을 돌면서 복음을 전했다.

수리아 안디옥교회에서 출발한 시각으로 치자면 오후 3시- 6시 – 9시 - 12시가 되는 방향이다.

이후 역방향으로 해서 다시금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돌아왔다.

3년에 걸친 1차 선교여행은 13개 도시를 지나며 총 2,300km를 누볐다.

그 길을 통해 갈라디아교회가 태동이 됐다.

그때가 A.D.50년으로 바울의 나이 50세 때의 일이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 돌아온 이후 교회 내에 할례문제가 대두됐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안디옥교회에 들어와 영적으로 소란케 한 것이다.

교인들은 그 문제를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해결을 보고 오라고 했다.

그때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그 문제를 논의했다.

그것이 제1차 예루살렘공의회였다.

그당시 의장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였다.

야고보는 예수님 살아생전에는 메시아로 영접치 않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고전15:7) 완전히 변화됐다.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서도 뜨겁게 기도했다(행1:14).

그 후 혈육을 중시하던 유대사회에서 예루살렘교회의 의장이 된 것이다.

야고보는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해 이방인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결의했다.

또한 유대인들이 중요시하는 우상과 음행과 짐승의 피에 관한 부분도 금하도록 지침을 내렸다.

그만큼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어 섬기도록 결의했다.

그와 같은 내용을 토대로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써서 제1차 선교여행지였던 갈라디아교회에 보냈다.

그때가 A.D.50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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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떠나고자 한다.

하지만 1차 선교여행의 이탈자 요한 마가를 데려가는 일로 바나바와 다툰다.

우리말 ‘다투다’는 헬라어 ‘파록쉬스모스’(παροξυσμός)는 ‘선동’(an inciting)이란 뜻과 함께 ‘자극(incitement)을 주다’는 의미도 있다.

그만큼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됐지만 서로 ‘자극’과 ‘격려’(히20:24)를 받게 된 셈이었다.

그때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구브로로 떠났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온 실라와 함께 육로로 제1차 선교여행지였던 수리아지역의 위쪽 갈라디아 남부지역으로 향했다.

그대 루스드라에서는 17살의 청년 디모데를 만나 할례를 행해서 전도팀에 합류케 했다.

드로아 인근 지역에서는 의사 출신의 누가를 만나 복음을 전하고 선교팀에 합류케 했다.

바울은 당시 2차 전도여행의 목적지를 소아시아의 중심지인 에베소로 삼았다.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꿈에 환상 가운데 마게도냐 사람이 손짓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 일로 바울은 드로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를 건너 유럽대륙의 첫 관문인 네압볼리 항에 도착했다.

이후 내륙을 따라 빌립보-데살로니가-베뢰아-아테네-고린도로 나아가 복음을 전했다.

빌립보에서는 상위 1%만 이용하는 자주색 옷감 장사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해 그녀의 집 식구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빌립보교회가 태동이 되었다.

바울은 의사 출신인 누가를 빌립보교회에 섬기도록 놔두고 일행과 함께 데살로니가-베뢰아-아테네로 이동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아테네에서 교회를 세우지 못했다고 하지만 실은 그 속에서도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이후 바울은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때 로마에서 쫓겨난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 천막을 만들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곳 고린도에 머물 때 바울은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써서 보냈다.

그때가 A.D.52년경이었다.

그때 바울은 나실인의 서원 기간이 끝나 고린도의 외항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이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배를 타고 소아시아의 에베소로 건너왔다.

그곳 에베소에서 바울은 브리스길라 부부를 남겨 놓은 안디옥교회로 돌아왔다.

그때가 3년에 걸친 제2차 전도여행길이었고 그때 방문한 도시가 21개 도시였는데 총 5,000km가 넘는 길목이었다.

그때가 A.D.53년으로 바울의 나이 53살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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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바울은 곧바로 3차 전도여행을 나섰다.

2차 전도여행지였던 수리아의 위쪽 더베-루스드라-이고니온-비시디아 안디옥에 이어 소아시아의 중심지 ‘에베소’로 갔다.

그곳 에베소에는 이미 터전을 잡고 있는 브리스길라 부부의 집에서 천막을 만들며 복음을 전했다.

3개월은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고 2년 넘는 기간은 ‘티란노스의 스콜레’ 곧 두란노 서원을 빌려 점심 낮잠 자는 시간에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할 때 천막 만들 때 땀닦던 천조각과 앞치마 격의 보자기로 귀신들린 자의 귀신이 떠나가고 병든 자가 고침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그러자 제사장 스와게의 7아들도 흉내를 냈지만 도리어 귀신들린 자에게 모두 제압당하고 쫓겨난 일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에베소의 마술사들도 은전 5만이나 되는 책값을 모두 불태우며 주님께 돌아온 일도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을 목격한 데메드리오 은장색이 동종업자들과 함께 에베소 시민들을 선동해 연극장으로 몰려가 2시간 넘게 아데미 신을 열광한 일이 있었다.

다행이 서기장이 군사들을 동원해 그들의 집회를 해산시켰다.

 

그 와중인 A.D.56년 무렵 바울은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의 여러 문제를 듣게 된다.

고린도교회의 음행의 문제, 파벌의 문제, 은사 문제, 제사음식문제 등 여러 가지였다.

그때 바울은 에베소에서 첫 번째 편지를 통해 고린도교회를 직접 방문할 계획을 알린다(고후1:15-17).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편지는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다.

그 뒤 바울은 젊지만 온순한 디모데를 파송해서(고전4:17)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바로잡고자 했다.

그러면서 한통의 편지를 써서 보내는데 그 편지가 오늘날의 고린도전서다.

물론 그 편지도 그리고 디모데도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황을 알게 된 바울은 자신이 직접 나서서 문제를 정리하고자 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전격적으로 방문했는데(고후2:1-2) 바울이 눈물로 호소하고 권면해도 성도들은 외면했다는 점이다.

그러자 바울은 괴로운 심정으로 에베소에 돌아왔는데 다시금 고린도교회 문제를 해결코자 세 번째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디도 편으로 발송(고후2:3-5)했는데 그 역시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나이가 많고 강단있는 성격의 소유자인 디도가 고린도교회에 가서 그 문제를 잘 매듭을 짓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바울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네 번째 편지를 썼는데 그것이 오늘날 고린도후서다.

물론 바울은 그 편지를 보낸 후 정말로 잘 매듭됐는지  여부를 확인코자 했다.

바로 그 무렵에 바울은 3년이 넘는 에베소 사역을 마치고 드로아 항구에서 배타고 마게도냐의 빌립보-데살로니가-베뢰아를 거쳐 고린도까지 갔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만나 기쁨으로 격려했고 3개월간 머물면서 로마서를 썼다.

당시 로마교회는 베드로나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라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날에 로마에서 온 이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로마에 돌아가 로마교회를 세운 자생적인 교회였다.

다만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이 중심축이 되어 로마교회를 세웠고 이방인들은 소수였다.

그로 인해 유대 율법주의 문제나 할례와 같은 의식의 문제가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A.D.50년 경에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그 일로 로마교회 내 로마시민권이 없는 유대인들은 로마를 떠나야 했는데 그 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수가 어느 정도 균형을 갖추게 되었다.

바로 그런 로마교회의 형편을 바라보면서 바울은 믿음편과 실천편에 해당하는 로마서를 써 보낸 것이다.

바울은 그 편지를 겐그레아 출신의 젊은 여집사 뵈뵈 편으로 보냈는데 그때가 A.D.56년의 일이었다.

 

바울이 이제 고린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자 했다.

그런데 고린도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을 돌면서 기근에 빠진 예루살렘교회를 구제하고자 헌금도 모았는데 600km가 넘는 빌립보에 도착했을 때 의원 출신의 누가가 다시금 합류하게 되었다.

그때 바울 일행은 배를 타고 아시아의 드로아 항구에 당도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노예 출신의 유두고가 창문에 떨어졌다가 다시금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이후 바울은 일행에게는 배를 타고 앗소로 가도록 했는데 그는 홀로 기도하면서 65km의 앗소에 당도했다.

애초에 고린도에서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갈때는 수리아안디옥교회에서 남은 여생을 편안하게 목회할 생각이었는데, 앗소로 가는 길목에 성령님께서는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나가도록 했다.

그런 주님의 인도에 순종키로 한 바울은 앗소에서 일행을 만난 미둘레네-기오-사모-밀레도에 당도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 격려한 뒤에 배를 타고 고스-바다라-베니게를 향했다.

바울 일행은 베니게에서 큰 상선을 갈아타고 서쪽에서 북동쪽으로 200km 넘게 뻗은 구브로 섬을 하루 종일 바라보면서 지중해를 건너갔다.

그 구브로는 13년 전 바울의 첫 선교지였고 그때의 감회를 통해 앞으로 닥칠 환란과 결박에도 주님께서 지켜주실 것을 내다보게 됐을 것이다.

이후 바울 일행은 두로에 내려 주님의 제자들을 격려했다.

그때 두로의 제자들은 처자를 데리고 바울 일행을 직접 환송했다.

 

그 후 바울 일행은 드디어 돌레마이 항구에서 모든 짐을 내렸고 곧장 가이사랴의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갔다.

그때 대예언자 ‘아가보’나 전도자 빌립이나 빌립의 네 딸들은 이구동성으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막았다.

그 중에 빌립은 28년 전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와 유대와 아소도를 거쳐 가이사랴에까지 나아갔던 그 뜨거운 신앙심이 점차 녹슬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환란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해도 자신이 가야 할 사명의 길이라면서 끝내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때 주님께서는 구브로 출신으로서 예루살렘에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는

나손이 동행하도록 예비해 주셨다.

 

그렇게 해서 바울은 15명 정도의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교회의 의장인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나고자 들어갔다.

야고보는 1차 예루살렘공의회 때부터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최고 의장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그렇게 3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은 그때 야고보와 장로들에게 모든 선교보고를 했다.

3차 전도여행 때는 24개 도시를 방문하면서 무려 6000km를 누빈 셈이었다.

그때가 바로 A.D.57년의 일로 바울의 나이 57세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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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그때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다가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들에 의해 붙잡힌다.

그로 인해 가이사랴에 이동해 2년간 구금된다.

그 후에 신임총독 베스도가 부임하자 바울은 로마 황제 카이사르 곧 제 5대 황제인 네로의 법정에 상소를 한다.

이후 바울은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로마로 이송되는데 그 배에는 276명이 타고 있었고 백부장 율리오가 총책임자였다.

평상시 같으면 한 달이면 도착할 뱃길이 유라굴라 광풍으로 인해 14일 동안 떠밀렸다.

더욱이 뜻하지 않는 멜리데섬에 도착해 3개월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로마의 외항인 보디올에서도 7일을 지냈다.

그만큼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로마의 뱃길로 이동한 기간은 총 4개월 11일이 걸린 셈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로마에 당도했는데 그때가 A.D.60년의 일 곧 바울의 나이 60세의 일이었다.

 

 

바울은 로마에서 2년간 자기 셋집을 얻어 가택연금 상태에 처했다.

다만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옥중서신으로 알려진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써보냈다.

 

그대 에베소서는 몇 가지 목적을 갖고 썼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보편적인 교회’(universal church)가 돼야 함을 일깨우고자 했다.

그런 편지를 에베소교회를 넘어 소아시아의 7교회 모두가 함께 회람하면서 읽기를 원했다.

그만큼 소아시아의 7교회 성도들이 주님 안에서 통일성을 이루도록 격려한 것이었다.

또 하나의 목적은 하나님의 경륜을 알려주고자 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받은 것은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엡1:5, 엡1:11) 가운데 있는 은혜라고 말이죠.

그러니 누구든지 자기 구원을 자랑치 말고 그 분의 은혜안에서 서로가 성전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라고(엡2:22) 말하죠.

그래서 썩어져가는 옛 구습을 따르지 말고 의와 진리의 새 사람을 입으라고(엡4:24) 말이죠.

그것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영적인 공중권세 잡은 악한 영들과 영적인 싸움을 통해 가능하다고 권면하죠.

바로 그런 점들을 일깨우고자 이 편지를 쓴 것이죠.

그를 위해 바울은 쇠사슬에 갇힌 사신이 된 심정으로(엡6:20) 이 편지를 너희들에게 쓰고 있고, 두기고(Tychicus) 편으로(엡6:21) 이 편지를 보낸다고 알려주고 있죠.

 

 

그 뒤 바울은 무죄가 판명나자 A.D.62년에 자유의 몸이 됐다.

그때 바울은 디도를 데리고 크레타섬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 담임목회자로 그를 세운다.

그리고 아들 뻘 되는 디모데를 데리고 에베소교회의 담임목회자로 세운다.

그리고 자신은 골로새서를 써 보낼 때 약속한 것처럼 에베소에서 150km 떨어진 골로새교회로 가서 성도들의 안부를 묻고 격려한다.

 

 

이후 바울은 이전에 세웠던 마게도냐 지역의 교회들 곧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그리고 아가야 지역의 고린도교회까지 가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복음으로 격려한다.

그 다음에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세웠던 그 2차 전도여행 때 세우지 못한 고린도 위쪽 지역 곧 니고볼리(Nicopolis)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그것이 디도서 3장 12절에 기록돼 있다.

물론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는 그 이전에 쓴 편지로 알려져 있다.

어쩌면 드로아 항구나 밀레도나 고린도에서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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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됐던 바울은 드로아와 밀레도와 고린도를 거치면서 니고볼리를 복음의 전초기지로 삼고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그 무렵 문제가 터졌다.

바울이 니고볼리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울 무렵인 A.D.64년 7월 로마에 대화제가 발생했다.

당시 로마의 제 5대 황제인 네로는 그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린 채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잡아들이고 처형했다.

그때 당시를 회상하면서 역사를 썼던 ‘타키투스’는 그 당시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모욕하며 죽였는데, 짐승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개들에게 물려 죽게 했고, 십자가에 매달아 해가 지고 나면 어둠을 밝히는 산 횃불로 썼다고 기술했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불꽃 가운데 고문 받던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신음하지 않았고, 불평하지 않았고 어떤 말대꾸도 하지 않고 죽음에 처했다고 기록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짐승의 밥이 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고 불을 밝히는 횃불로 사용될 때 바울은 어떠했을까?

바울도 그 무렵에 집시법 위반의 정치범으로 체포되고 만다.

그래서 로마의 네로 황제가 자살하던 A.D.68년 전인 A.D.67년 봄에 참수형 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그 감옥은 1차 감옥처럼 가택연금에 처해진 게 아니었다.

반은 지하에 묻힌 상태요 반은 지상에 노출된 메마르틴 감옥으로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만 볼 수 있는 감옥이었다.

그만큼 살아날 수 있는 소망이 희박한 곳이었죠.

바로 그곳에서 마지막 죽기 직전에 쓴 편지가 디모데후서다.

바울은 67살의 나이 곧 A.D.67년에 참수형당한 것이다.

 

 

어떠한가?

34살에 주님을 만난 이후 참수형을 당하기까지 무려 30년간 복음을 전한 바울이다.

물론 복음만 전한 게 아니라 그 중간 중간 편지를 썼다.

총 13편의 편지를 썼는데 히브리서까지 합한다면 14편의 편지다.

우리가 갖고 있는 27권의 신약성경 중에 13권이 되는 것이다.

 

 

위 내용은 2022년 6월 1일에 다시금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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