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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SundaySermon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엡6:1-4)_2022년 5월 어버이주일설교

by 똑똑이채널 2022.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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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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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PSj5vIPKQfo


(설교열기)(예화) 유대인 민화집에 나오는 아름다운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신혼부부가 아기를 하나 낳았습니다.

이 부부의 집에 어느 날 예언자가 찾아와 그 부부에게 길을 떠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는 길은 갈수록 좋아 질 것이고, 끝은 처음보다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했죠.

그 신혼부부는 하나님께서 보낸 예언자의 말을 믿고 방금 낳은 아기를 안고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얼마간 길을 가는데 거기에 가시밭길이 나옵니다.

부부는 아기가 찢길까봐 품에 꼭 안고 대신 몸을 찢기면서 그 길을 통과해 나갔습니다.

그때 아내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여보. 그 예언자가 말하길 갈수록 길이 좋아질 거라고 했는데, 이런 가시밭길이 나오다니,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러자 그 남편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니오. 여보. 우리의 희생 때문에 이 아기가 지금도 방긋방긋 웃고 있지 않소. 우리는 이 길에서 희생을 배웠소.”

이제 그 길을 통과해 조금 더 길을 가는데, 허허벌판 광야가 펼쳐졌습니다.

찬 바람이 부는 광야에서 그 부부가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보니까 어느새 소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의 바람 속에서 아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양쪽에서 아들을 꽉 껴안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아내가 그렇게 말을 합니다.

“여보. 그 예언자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길은 갈수록 나빠지는데요?”

그러자 그 남편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니에요, 여보. 우리가 붙들면서 지나가는 동안 힘들었지만 우리 아들도 당신도 웃고 있지 않소.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다시 길을 가다 보니 이제는 계곡이 나왔습니다. 그러는 사이 그 아들은 어느새 20대가 되었습니다.

그 계곡은 숲이 울창한 계곡이었습니다. 아내는 그 계곡이 언제 끝나냐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새 그들은 계곡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때 남편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보. 이 계곡에서 우리는 희망을 배웠소.”

또 다시 길은 이어졌고, 이번에는 험산 준령의 산맥이 나왔습니다.

산밑에서 보니까 아들은 어느새 30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부부도 어느새 늙어 산을 오르지 못해 헉헉거리는 모습이었는데, 30대의 그 아들이 양손으로 부모님을 받치면서 산을 올라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아내가 다시금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남편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보. 아까 우리 아들이 손잡아 이끌어주니까 당신은 너무 행복한 표정이었소. 우리는 진정한 삶의 보람을 느끼고 있는 것이오.”

그 가족이 산을 넘어 예언자가 말한 마을의 입구에 드디어 도착했을 때 그 아들은 어느새 40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이 몸저 눕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병간호를 하는 아내는 또다시 불평을 했습니다.

“여보. 그 낯선 예언자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요. 결국 이것이 우리의 목표였단 말이에요?”

그 순간 석양 노을이 출렁이던 하늘이 열리면서 천사들이 남편을 데리러 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남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군요.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에요.”

그러자 그 얼굴에 환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는 그 남편을 보고, 그때 비로소 그 아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제야 그 예언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길은 갈수록 좋아지고 마지막은 처음보다 아름다웠어요.”

(발췌) 로버트 브라우닝이란 시인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나와 함께 나이를 먹자/ 가장 좋은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나니/ 인생의 끝 그것은 처음을 위하여 만들어졌나니/ 하나님을 신뢰하라/ 전체를 보라 / 두려워 하지 말라”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까?

인생의 시작부터 숨을 거두는 마지막까지가 가시밭길 광야길 커다란 산맥과 같은 길이지만 나름대로 희망이 있다는 이야기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 어렵고 힘든 과정이지만 나름대로 보람이 있다는 것 아닙니까?

부부가 희생해 자녀에게 버팀목이 되고 광야의 바람도 막아주고, 그 사이 자식은 부모를 받쳐줄 수 있도록 성장하니 말이죠.

다만 그 어떤 부모라 해도 자식의 앞날에 대한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게 우리 인생의 한계 아니겠습니까?

계획한 대로 자식의 인생이 척척 풀리기보다 지연되고, 그로 인해 답답해 할 때가 많죠.

왜 그토록 순진한 자식이 세상에 이리저리 치이며 힙겹게 살다가 남들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버리는지 이해할 길이 없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누이며 자식을 키우며 버팀목이 되었을지라도, 자식의 인생 전체를 가늠할 수 없는 게 부모의 한계죠.

오직 하나님만이 자식의 인생 전체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신 줄 믿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섬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며 사는 한, 자식의 인생을 전적으로 의탁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설령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고, 뭔가 늦어지고, 답답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모두가 이해가 되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믿음의 이해를 갖고 살 때 아무리 가시밭길 광야길 험난한 산맥이 놓여 있어도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부모의 도리를 다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죠.

(예화2)그렇다면 자녀의 입장에서는 어떻겠습니까?

모든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부모는 자식을 향해 아낌없는 사랑과 희생을 쏟아 붓는데, 그 사랑과 희생을 자식들은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한 게 자식들의 모습입니다.

한쪽 팔을 잃은 아버지와 철부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학급 운동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날 아들은 곤봉체조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은 곤봉을 살만큼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아들은 아버지를 볼 때마다 곤봉을 갖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곤봉을 만들어주기로 결심을 하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곤봉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그것을 가지고 기뻐할 것을 생각하며 밤새도록 나무를 깎았습니다.

한쪽 팔이 없던 그 아버지가 곤봉을 만든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두 발로 나무를 꼭 붙들고 한 손으로 낫을 잡으며 열심히 깎아 만들었습니다.

날이 새면서 드디어 곤봉 모양이 갖춰졌고 그것을 아들에게 보여줬습니다.

철부지 아들은 그것을 보자마자 삐딱하게 말했습니다.

“곤봉이 왜 이래”, 그러면서 그 곤봉을 던져버렸습니다.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하고 만든 아버지의 고된 모습을 전혀 생각지 않는 아들이었죠.

그때 그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향해 실망하지 않고 곤봉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인하고 다시금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도 밤새껏 그 곤봉을 열심히 깎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 만든 곤봉을 그 아들에게 주자 아들은 너무나도 좋아했습니다.

아버지가 열심히 만들어 준 그 곤봉은 다른 아이들의 것과 하등 뒤질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기뻐하는 아들을 보면서 운동회 날 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자기 아들이 곤봉을 휘두르는 모습을 아버지로서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팔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아들은 ‘안 돼요. 오지 말아요.“하면서 거절해버렸습니다.

운동회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 아들은 운동회에 나가 아버지가 만들어 준 곤봉을 힘껏 휘둘렀습니다.

그때 그 아들의 아버지는 먼 발치에서 아들이 곤봉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면서 남몰래 기뻐하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언제 그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되겠습니까?

인생에 철이 들 때죠.

자신이 결혼해서 자신과 같은 자식을 기를 때,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깨닫게 되겠죠.

(논지)물론 그 자식들이 한 명이 아니라 두세 명이나 여러 명일 경우는 또 다르겠죠.

제 형이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엄마. 엄마는 어째 성권이만 더 좋아하는 것 같으요?”

그때 제 어머니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뭐가 그런데.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있다든. 자식들은 다 아픈 손가락이어야.”

“그래도 성권이가 내 심부름도 해 주고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가고 이빨도 치료할 수 있도록 해 준게 글제.”

무슨 뜻입니까? “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서 멸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하는 말 아니겠습니까?

여러 자식들이 있어도 누군가 자주 찾아와 들여다보고 어려움도 해결해주고 자주 뵙고 그러면 마음이 더욱 간다는 뜻이죠.

이것은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도 자기 한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자녀를 어찌 귀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최근에 저도 그런 심정을 겪었습니다.

집사님이 자녀를 향한 기도제목을 갖고 하나님께 귀한 걸 올려드리고 간구하는데, 제가 더 애가 닳더라는 것 말이죠.

밤에 자다가 새벽에 깨면 “하나님, 들어주세요.”하고 저절로 기도가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더욱더 애닳파 하지 않게나 싶은 거죠.

(깨달음)열 손가락이 깨물어 아프지 않는 손가락이 없다고 하지만, 미묘한 차이는 있기 마련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자주 통화하고 들여다보고 맛난 것 사드리고 심부름하는 자식은 부모가 애지중지하기 마련이죠.

그것은 커가면서도 자식들이 느끼게 되죠.

왜 엄마 아빠는 형만 더 챙기고, 나는 잘 챙기지 않는 걸까?

왜 엄마 아빠는 집안의 대들보라며 큰 오빠만 잘 챙기는 걸까?

어디가 아픈 자식은 아픈 자식이라도 더 챙기고, 나는 건강하고 똑똑하다면서 잘 챙기지 않는 것 때문에, 속상해하는 어린 시절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이 성인아이가 되어 커서 결혼해 자식을 낳아서도 내재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부모님을 사랑하라, 하고 말해도 좀체 부모님을 사랑하고 이해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죠.

과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가정의 달이자 어버이 주일인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울은 60세가 되어 로마의 가택연금 상태 곧 자기 셋집을 빌려 감옥처럼 집 밖을 나서지 못한 감금된 상태에 처했죠.

다만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2년에 걸친 그 상황속에서 네 개의 옥중서신을 써 보냈죠.

그 중 하나가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에베소서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편지는 바울이 53살 때 3차전도 여행 때 3년간 복음을 전한 에베소교회 성도들과 소아시아 7교회 성도들이 돌아가며 읽도록 쓴 편지였죠.

에베소서 전반부(1-3장)는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여주신 은혜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주님의 은혜 안에서 더욱더 강건하기를 무릎을 꿇고 기도한다고 써 보냈죠.

에베소서 후반부(4-6장)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권면했죠.

서로가 한몸 한뜻이 되어 은사와 달란트대로 봉사와 섬김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해가라는 뜻이었죠.

더욱이 이전의 어둠과 방탕과 우상숭배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서 살아가는 삶을 살라고 권면했죠.

오늘 읽은 6장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합당한 삶에 대한 권면으로 부모와 자녀에 대한 말씀이죠.

하나님의 구원받은 가정의 부모와 자녀가 어떤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말씀이죠.

지난 시간에는 자녀를 향해 부모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살펴봤습니다.

오늘 말씀은 부모를 향해 자녀가 어떻게 도리를 다하며 살아야 하는지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본문)오늘 본문 1-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원해) 바울의 이 권면은 구약의 출애굽기 20장 1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강조한 말씀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부모를 공경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통해 친히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명령하신 내용입니다.

시내산에서 처음 주신 이 명령을 광야 40년을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잘 지키라고 주신 계명이죠.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십계명 중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게 핵심입니다.

제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 핵심이죠.

십계명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살라는 뜻이죠.

그런데 그 여섯 가지 계명 중에서 제일 첫 번째로 강조하는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하는 명령입니다.

왜 그 명령을 제일 앞에 두신 것일까요?

첫째로 자녀에게 있어서 부모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눈에 보이는 대리인으로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자녀의 생명은 부모를 통해서만 태어날 수 있고 부모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만 양육될 수 있기 때문이죠.

셋째로 부모가 심은 대로 그 자녀가 그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식이 훗날 부모를 어떻게 대할지 알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지금 내가 부모님을 대하는 그 모습 그대로를 내 자녀들에게 보여주면 되는 것이죠.

내 자식들은 지금 내가 부모님을 섬기고 공경하는 그 모습을 그대로 나에게 되풀이 할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공경하라’는 히브리어 ‘카바드’(כָּבַד)는 ‘무겁게 여기다’, ‘부담 갖다’는 뜻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님을 사랑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저 부모님 말씀을 무겁게 여기고 부모님에 대해 부담감을 안고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신 걸까요?

부모와 자식 간에 사랑만 가득하고 허물과 상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부모와 자식은 오랜 세월동안 함께 살아가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남남이었으면 주지도 받지도 않았을 많은 상처를 부모로부터 받을 수도 있죠.

그로 인해 자녀의 마음속에는 부모가 할퀸 상처 자국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다 큰 성인이 돼서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도 어린 시절에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와 아픔이 성인 아이처럼 내재돼 있는 경우가 그렇죠.

부모님과 관련하여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들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죠.

바로 이것을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부모를 사랑하라고 하시거나 존경하라고 명령하신 게 아닙니다.

부모를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하지 못할 자녀도 있고 부모를 존경하라면 존경하지 못할 자녀도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웃집 노인을 사랑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지만 나보다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노인을 공경하는 것처럼 말이죠.

(깨달음)그렇게 부모님을 공경하면서 철이 들고, 부모님이 살아온 환경을 이해하게 되면, 그때부터 부모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왜 그때는 나보다 큰 오빠를 더 챙겨줬는지, 왜 나보다 남동생을 더 애지중지 했는지, 부모님의 환경을 이해하게 되면 말입니다.

하지만 자식을 키우면서도 부모님에게 서운한 감정이 남아 있을 수 있기에 우리 주님께서는 “공경하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철이 들기 전 부모님을 사랑하지 못한다 해도 부모님을 공경하며 이해하길 원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거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우리 각자에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의 부모를 너는 사랑하고 이해하고 존경하고 있느냐?”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 중에 몇 손가락을 더 아파하는 부모님이 있지 않았더냐?”

그 때문에 어린 시절에 괜한 상처를 받았는데, 그것이 쉽게 가시지 않아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도 그게 네 가슴에 남아 있지 않더냐?”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 너에게 네 부모님을 주 안에서 공경하라고, 부모님의 말씀을 무겁게 여기라고 말씀하지 않더냐?”

지금은 상처가 남아 있어서 쉽게 사랑할 수 없다 해도 부모님을 공경하고 이해하다보면 사랑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아무리 똑똑하고 잘 났어도 너의 부모님이 없이는 네가 존재할 수 없었고 성장할 수도 없었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해라

하나님께서 네 부모를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먼저 세워주신 것을 결코 잊지 말도록 해라.”

너의 부모님이 너를 낳아 키우며 이 세상에 쓰디 쓴 소리를 다 들으며 지금껏 헤쳐나올 수 있었던 것은 너를 바라보고 왔기 때문이지 않더냐.”

자식의 앞날에 대해 전체의 삶을 주관할 수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너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님이지 않더냐?”

한쪽 팔을 잃은 불구의 아버지라 해도 자식의 곤봉을 위해 밤새도록 깎은 그 아버지의 모습이 때로는 너의 아버지의 모습이지 않더냐?”

내가 이 땅에 자식인 너보다 너의 부모님을 먼저 세워둔 이유를 기억하며 네 부모인 것만으로도 너는 공경하며 부모님의 말씀을 무겁게 여기면서 살았으면 좋겠구나.”

(찬양)어머니의 넓은 사랑 귀하고도 귀하다 그 사랑이 언제든지 나를 감싸줍니다

내가 울 때 어머니는 주께 기도드리고 내가 기뻐 웃을 때에 찬송부르십니다

온유하고 겸손하며 올바르고 굳세게 어머니의 뜻 받들어 보람있게 살리라

풍파 많은 세상에서 선한 싸움 싸우다 생명 시내 흐르는 곳 길이 함께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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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일반적으로 자식은 나이에 따라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변한다고 합니다.

네살 때: 아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일곱살 때: 아빠는 아는 것이 참 많다.

여덟살 때: 아빠가 모든 것을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었다.

열두살 때: 아빠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버지는 너무 늙으셨다.

열네살 때: 아빠에게 신경 쓸 필요 없다. 너무 구식이고 세대 차이가 난다.

스물한살 때: 우리 아빠는 구제불능일 정도로 시대에 뒤져 있다.

서른살 때: 아마도 아버지의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무엇보다도 경험이 많으니까.

마흔살 때: 아버지라면 이런 때 어떻게 하셨을까?

쉰살 때: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었을텐데, 아버지는 정말 훌륭하셨어.

(깨달음)어린 시절엔 아빠를 슈퍼맨으로 알았다가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를 무시한다는 뜻이죠.

하지만 자식을 낳고 세상에 힘든 상황에 놓였을 때 아버지는 어떻게 헤쳐나갔을까, 존경하게 된다는 겁니다.

그만큼 부모님께서 살아계실 때 공경하고, 존중하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예화2)안산제일교회를 섬겼던 고훈 목사님이 교인의 초청을 받아 갈비를 먹으로 식당으로 가는 길이었죠.

그는 길에 82세 되신 어머니가 교회 앞에서 양말을 팔고 계신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일찍 과부가 되어 행상하며 자녀들을 뒷바라지하신 어머니였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자신이 담임하는 교회 앞에서 행상을 하신다는 게 말이 되겠습니까?

교인들이 알면 목회는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혼자 돌아와 그 어머니의 손을 딱 잡으면서 말했습니다.

“어머니, 이러시면 안 돼요.”

그런데 어머니가 아니라 모르는 할머니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눈물이 나더랍니다.

“누구요? 나는 아들이 없는데” 하시는 그 할머니 말씀 앞에

“아니에요. 저희 어머니인 줄 알고요.”

“저희 어머니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제가 열 두 살에 장사하면서 가르쳤거든요.”

“이것 모두 주세요.”하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이렇게 말을 하더랍니다.

“아니요. 다 살 필요는 없는데요.”

“아니에요. 다 주시고 어서 집에 가서 쉬세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는 양말 값을 충분히 지불하고 모두 집에 가져왔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 부인이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이런 것을 다 사왔어요?”하고 말입니다.

그때 고훈 목사님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신어요. 감사하니까 신어요.”하고 말했다죠.

그런데 그 순간 성령님께서 그 목사님에게 묻더랍니다.

“아들아. 네 어머니가 누구냐? 네 형제자매가 누구냐?”

“네 어머니가 이곳에서 장사 안 하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감사하냐?”

“여기 이곳에 있는 모두가 너의 어머니다.”

“네 자식만 생각하고 네 어머니만 생각하면 어떻게 나의 종이냐? 모두가 네 어머니니라.”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부모님 살아생전에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주님의 음성 아닙니까?

다만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이웃의 노인들을 교회의 어른들을 부모님처럼 공경하며 살라는 뜻이죠.

(내음성)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내 부모님을 저보다 먼저 이 세상에 세워주셨으니 부모님 살아 생전에 더욱 공경하고 효도하며 살게 해 주세요.”

그것이 내 자식들이 훗날 부모인 나에게 대하는 태도가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부모가 심은 대로, 부모가 보여준 대로 자식이 닮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내 주변 어른들과 교회 어른들을 내 부모님처럼 공경하며 살게 해 주세요.”

내 주변 어른들과 교회 어른들을 사랑하거나 존경하지는 못해도 공경할 수는 있사오니 그렇게 공경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 원합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비결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사오니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찬양)낳으시고 기르시며 손등 야위신 내 어머니 그 모든 슬픔 삼키시어 눈가엔 주름이네

마구 놀던 어린시절 종이리 걷어 꾸짖으사 그 사랑 속에 나의 가슴 정의로 가득찾네.

말로다 할 수 없어라 어머니 그 사랑 주님의 축복 내리시라 사랑 깊은 어머님

어리던날 푸른꿈도 그 사랑속에 익어오고 가녀린 팔뚝엔 자랑스런 새 힘이 자라났네.

말로다 할 수 없어라 어머니 그 사랑 주님의 축복 내리시라 사랑 깊은 어머님

어리던날 푸른꿈도 그 사랑속에 익어오고 가녀린 팔뚝엔 자랑스런 새 힘이 자라났네.

그 깊은 사랑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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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야긴과 보아스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BR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BR 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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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자식보다 부모를 먼저 앞세 세워주셨습니다.

그 부모의 사랑과 헌신없이 어찌 자식이 태어나 자라고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부모님에게 서운함도 없잖아 있을 수 있고 부모님에게 상처를 안고 산 자식들도 없잖아 있을 수 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모님을 사랑하거나 존경하지는 못할지라도 이웃 어른처럼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공경하다보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다보면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 부모님이 안 계시다면 이웃 어른과 교회의 어른들을 부모님처럼 공경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비결이요, 그런 축복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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