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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SundaySermon

나를 따라오라(마4:18-22)_20220515스승의주일 설교

by 똑똑이채널 2022.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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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라오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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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 미켈란젤로의 이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20대에 피에타다비드상을 조각했고 50대에 메디치 예배당을 제작한 인물이죠.

더욱이 60대엔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 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려 명성을 떨친 인물입니다.

 

그러니 어찌 미켈란젤로의 명성을 기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스승인 보톨도 지오바니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지오바니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으로서 미켈란젤로가 14살이 되었을 때 그를 문하생으로 받아줬습니다.

 

그때 지오바니는 미켈란젤로의 놀라운 재능을 보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네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너는 네 기술로써 무엇을 위해 쓸 것인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지오바니는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나가 두 곳을 구경시켜 줬습니다.

처음 구경시켜 준 곳은 바로 술집이었습니다.

스승님, 술집 입구에 아름다운 조각이 있어요.”

이 조각은 아름답지만 조각가는 술집을 위해 자기 조각을 사용했단다.”

 

그리고서 미켈란젤로의 손을 잡고 아주 거대한 성당으로 가서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여줬습니다.

너는 이 아름다운 천사의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면 아까 그 술집 입구의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똑같은 조각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워졌고, 다른 하나는 술 마시는 쾌락을 위해 세워졌단다.”

너는 네 기술과 재능을 무엇을 위해 쓰기를 원하느냐?”

 

그와 같은 스승 지오바니의 물음 앞에 14살의 미켈란젤로는 세 번씩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죠.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사람에게는 여러 만남이 있습니다.

맨 처음 부모를 만나 이 세상에 태어나죠.

가장 중요한 만남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선생을 만납니다.

어떤 선생을 만나는가에 따라 그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죠.

저도 중학교 때 영어 선생을 잘 만나 영어에 무척이나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습니다.

 

세 번째 만남도 있죠.

바로 영혼의 구주이신 주님을 만나는 것 말입니다.

그래야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그 주님과 더 깊은 사귐을 이끌도록 인도하는 목회자를 만나는 것도 복입니다.

그 목회자가 상식과 도덕을 지킬 줄 알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도들을 하나님께로 깊이 인도한다면, 가장 좋은 목회자이겠죠.

 

(적용)미켈란젤로의 스승 지오바니는 14살의 제자 미켈란젤로에게 그야말로 선한 가르침을 준 스승입니다.

만약 지오바니가 어린 미켈란젤로에게 세상의 명성과 향략을 좇는 술집의 조각상을 빚어내도록 인도했다면 어땠을까요?

지금의 그 선한 영향력을 남긴 미켈란젤로를 우리가 만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오바니는 미켈란젤로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조각가가 되도록 비전을 심어줬기에 위대한 미켈란젤로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도 어떤 스승을 만나는가에 따라서 우리 자신의 인생 방향도 결정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된 성자 하나님이셨지만 스스로 낮추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난 것, 그것은 우리가 부모님의 몸을 통해 태어난 것과 같이 예수님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하심이었습니다.

 

그렇게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난 아기 예수님은 아버지 요셉이 이른 나이에 죽기전까지 어머니 마리아의 몸에서 성장했죠.

예수님께서 12살이 되었을 때는 유월절을 지키고자 마리아와 요셉을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간 일이 있었죠.

그런데 그 후에 아버지 요셉이 죽자 예수님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네 명의 남동생을 돌보고자 목수로 사셨죠.

 

드디어 30살이 되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가족을 떠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 곧 메시아로서, 구원자로서의 삶을 사셔야 했죠.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참된 목적이요 하나님의 뜻이요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자 너는 내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왔죠.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이끌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나아가셨습니다.

광야란 히브리어로 미드바르인데 그것은 다바르라는 말씀이 들려오는 곳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세상에 혼잡한 소음을 벗어나 깊은 숲속에 들어가면 피톤치드는 물론이고 맑은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유대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예수님은 그곳에서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함이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강화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이사야서를 통해 예언된 말씀을 성취하고자 함이셨습니다.

갈릴리 이방 지역인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 생명의 빛을 전해주고자 함이셨죠.

 

그리고 다시금 갈릴리로 돌아오신 예수님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하고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어서가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심령에 천국이 임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자기 심령에 구원의 주님으로 모신 자들은 이미 천국이 임하게 되는 것이요, 앞으로 다가올 진정한 천국도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본문)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인데 18-2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원해)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는데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를 본 것입니다.

그들은 어부로서 그물을 던지고 있었는데, 그 형제가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한 마디 하신 것이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그러자 그 형제가 곧장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오늘 본문은 증언해줍니다.

 

여기에서 따르니라하는 헬라어 원어 아콜뤼오데오’(ἀκολουθω)입니다.

이 단어는 따르다’(follow), ‘도달하다’(reach), ‘제자로서 함께하다’(to join one as a disciple)는 의미입니다.

 

(깨달음)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데, 이때 주님의 부르심과 그들의 따름 사이에 어느 부분이 더 강력했을까요?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는 갈릴리 출신의 어부로서 고기잡이로 지금껏 살아온 이들 아닙니까?

그런 직업군에 속한 이들이 제자로서 따른다는 것은 처음 있는 일 아닙니까?

 

그만큼 베드로와 요한이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그들의 따르는 능력보다 예수님의 부르신 능력이 훨씬 컸던 것입니다.

마치 아버지 데라가 죽은 하란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하고 부르신 하나님의 부름과 동일한 것이죠.

이것은 열두째 겨리소로 밭을 갈고 있던 농부 엘리사에게 겉옷을 던지며 나를 따르라고 한 엘리샤 선지자의 불러냄과 같은 거죠.

 

우상장사 아브라함이 참된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아브라함을 불러내주지 않았던들 아브라함은 결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농부 출신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감을 갑절로 받아 하나님의 선지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엘리야의 불러냄에 기인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엘리사에게 보내지 않았다면 엘리야는 그 후로로 농부로서 소를 갈면서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엘리사에게 보내 불러내도록 하셨기에 엘리사는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로 쓰임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적용)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 본문의 베드로와 요한은 물론이고 다른 갈릴리 출신의 제자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그 열 두 명이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주님을 따른 의지나 행동보다도 그들에게 찾아와 불러내주신 부르심의 은혜가 훨씬 더 컸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내세울만한 믿음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이 정도로 주님을 따르게 된 것은 우리의 의지나 결단력보다도 주님의 부르심이 훨씬 컸다는 것 말입니다.

내가 지치고 힘들 때, 내가 무력해 있을 때, 내가 궁핍해 있을 때, 주님께서 내게 찾아와 구원의 은혜로 먼저 불러주심 말입니다.

베드로나 안드레처럼 이 세상에 내세울만한 게 없는 나를 주님께서 불러내 주님의 자녀로 삼아주지 않았다면 어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었겠습니까?

 

내가 부족하고 연역하지만 주님의 제자답게 세상 사람들과 그나마 구별된 삶을 살고자 하는 것도 주님께서 먼저 불러내 은혜를 베풀어주신 까닭 아닙니까?

미켈란젤로가 위대한 조각가요 건축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그의 스승 지오바니가 선한 목적으로 불러낸 것처럼 말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고 당신의 제자로 삼고자 먼저 불러내주신 은혜를 베푸셨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성령의 음성으로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갈릴리 어부 출신의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따라간 능력보다 주님의 부르심의 능력이 훨씬 크지 않더냐?”

우상을 깎아 만들어 팔던 아브라함이 믿음의 참된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의지보다 주님의 부르심이 절대적이지 않았떠냐?”

농부 출신의 엘리사가 위대한 하나님의 선지자로 쓰임받았던 것도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에게 보내 부르신 주님의 부르신 능력에 있지 않았더냐?”

미켈란젤로가 위대한 조각가와 건축가로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스승 지오바니가 선한 비전을 품도록 그의 심령을 불러낸 까닭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의 제자가 된 것 아니더냐?”

네가 힘들고 지쳐 있을 때, 좌절과 무력에 빠져 있을 때, 주님께서 너에게 먼저 찾아와 격려하심으로 너를 불러내지 않았더냐?”

네가 세운 계획이 빗나가고, 너의 희망이 덧업이 쓰러질 때도, 주님께서는 너에게 먼저 찾아와 위로하심으로 너를 불러내지 않았더냐?”

지금 이 순간도 네 믿음이 크고 강한 믿음이 아닐지라도, 주님께서 너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불러내주시기에 온전한 믿음의 경주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니더냐?”

우리 주님은 인생의 수렁에 빠진 아브라함이라도, 농부출신의 엘리사라도, 갈릴리 어부출신의 무식한 베드로나 요한이라도 상관치 않고 모두 부르지 않았더냐?”

우리 주님은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사회적인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부르셔서 구원하시고 제자삼으시는 주님이지 않더냐?”

 

(찬양)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날 힘 전혀 없을 때에

조용히 다가와 손잡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나에게 실망하며 내 자신 연약해 고통 속에 눈물 흘릴 때에

못 자국 난 그 손길 눈물 닦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언제나 변함없이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십자가 고통 해산의 그 고통으로 내가 너를 낳았으니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으니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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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야긴과 보아스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BR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BR 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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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벨기에 플랑드르의 화가 루벤스가 큰 작품 하나를 완성하고 그 동안의 피곤을 풀 겸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의 집에는 문하생들이 여럿 있었는데 루벤스가 외출하자 스승이 완성한 대작을 보려고 앞을 다투며 루벤스의 화실에 뛰어 들어갔죠.

그런데 그 젊은 제자들은 서로 밀고 당기면서 들어가는 바람에 루벤스의 화실에 큰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맨 앞에 있던 제자가 그만 떠밀려 넘어지는 바람에 채 마르지도 않은 그림이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통에 루벤스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그림이 엉망이 되고 말았죠.

 

그 그림을 바라본 제자들은 당황했고 어쭐 줄 몰라했습니다.

스승이 오랜 시간을 두고 얼마나 애써 그려왔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귀중한 그림을 망쳤다는 사실 앞에 다들 두려움과 걱정으로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이었죠.

그때 루벤스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붓을 들고 작품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어쩌겠나. 내가 한번 고쳐보지!”

그렇게 말하고는 여기저기 수정을 해서 엉망이 된 부분을 고쳐나갔습니다.

저런, 오히려 더 망치면 어떡하려고!”

잘못을 두 번이나 저지르면 더 큰 꾸지람을 받을 텐데!”

모두들 걱정하면서 말렸지만 그는 계속해서 망가진 그림을 손질했습니다.

 

이윽고 스승 루벤스가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한 쪽에 몰려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죠.

이상하게 여긴 루벤스가 그림 쪽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폭풍같은 벼락이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승 루벤스는 작품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뜻밖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린 그림보다 더 좋게 고쳐놓았는걸!”

그 작품에 손질을 한 제자는 후일 영국 궁정 수석화가로 명성을 떨친 반다이크였습니다.

 

(깨달음) 어떻습니까?

타고난 재능이나 능력은 큰 선물이자 보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재능과 능력을 키워주고 가꿔줄 줄 아는 스승을 만나는 것은 더욱더 복된 일입니다.

만일 자신의 작품을 망쳤다면서 그 제자에게 수치심과 모욕감을 안겨줬다면 그토록 명성을 떨친 반다이크는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적용)물론 그런 스승의 극치는 우리 예수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로 불러내주셨는데, 3년간 예수님을 따라 제자로 살던 이들이 예수님께서 체포당할 때 어떻게 했습니까?

 

다들 모른다고 부인하고 주행랑치기에 바쁘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낸 이후에는, 그들 모두가 마가의 다락방문을 꽁꽁 걸어잠그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한 그들이 갈릴리에서 다시금 그물질을 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그들에게 수치심과 모욕감을 안겨주셨습니까?

오히려 주님은 그들에게 조반을 차려 주시고 생선도 구워서 아침밥을 먹으라고 해 주셨죠.

그러면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연거푸 세 번씩이나 물으셨고, 그때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민망한 마음으로 대답할 뿐이었죠.

 

(깨달음)주님은 그렇게 당신 자신을 부인하고 배신한 제자들까지도 품으시고 다시금 사랑으로 그들을 불러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내 어린양을 잘 먹여라.”, “내 젊은양을 잘 이끌어라”, “내 늙은 양도 잘 먹여다오하고 다시금 부탁하셨던 것이죠.

주님의 그 신뢰와 사랑의 부르심 속에서 제자들은 다시금 제자다운 사명을 완수해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내음성) 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베드로와 제자들처럼 넘어지고 실수할 때가 많아요.”

저도 루벤스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 할때가 있고,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지 못한 때가 많아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와 제자들을 찾아와 믿어주시고 격려하심으로 부르신 것처럼 저에게도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제가 세상에 흔들리고 넘어지고 쓰러질 때, 주님께서 더 큰 은혜와 믿음을 불어넣어주셔서 주님의 참된 제자로 살게 해주세요.”

 

(찬양)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주님은 여인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여인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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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BR 그 속에서 페르시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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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예)몇 해 전에 우리 교단 목회자선교축구대회가 있어서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 경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서산에 들렀죠.

그레이스비전교회를 담임하고 허정무 축구교실을 운영하는 김유관 목사님께 축구기술 전수를 받기 위함이었죠.

1시간 가량 기술 전수를 받고 이후에 1시간 가량 실제 시합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목포로 내려왔는데, 그때 어떤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한 게 있었습니다.

김유관 목사님이 기술전수 해 준 것은 사실 제가 다 알려준 것 아닙니까?”

평소에 제가 하라는 대로 했으면 좋을 텐데, 외부의 코치 같은 목사님이라 대단해 생각한 것 아닙니까?”

 

(깨달음)목회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자기 교회 담임목회자만큼 성도들의 가정과 자녀들과 일터와 사업장과 형편을 잘 아는 목회자는 없겠죠.

 

그런데 간혹 부흥강사나 외부 강사의 유튜브 말씀에 큰 도전을 받았다면서 눈물 흘리는 성도도 있죠.

하지만 외부 강사가 전하는 말씀의 원리나 담임목회자가 전하는 말씀의 원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나예)언젠가 우리 교회에서 외부 강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와우, 강사님 목소리가 너무 좋은데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분이 나는 우리 목사님 목소리가 훨씬 좋은데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직도 그 한 마디를, 어쩌면 평생 잊을 수 없는 한 마디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목회자가 잘 하면 얼마나 잘 할 수 있겠으면, 목회자가 못 하면 또 얼마나 못하겠습니까?

목회자가 상식과 도덕을 지키며,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도들이 주님과 깊어질 수 있게 한다면, 그것이 전부이지 않겠습니까?

그런 담임목회자를 존중하고 아겨준다면, 그런 성도들 때문에, 그 목회자는 신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스승과 제자와 관계요,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입니다.

오늘은 스승의 주일이라, 한 번도 전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꼭 필요한 말씀이라 드립니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하는 동안 12명의 제자들 외에 또 다른 무리들도 제자로 따라나섰습니다.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당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죠.

더욱이 자기에게 오는 제자들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는다면 누구도 함께 할 수 없다고 하셨죠.

그러자 주님의 제자로 자처한 이들 중에 많은 이들이 주님을 떠났는데, 그때 주님은 12제자에게 물었죠.

너희도 가려느냐?”

그때 시몬 베드로가 12제자를 대표해 그렇게 대답을 한 바 있습니다.

주님. 영생의 말씀이 주님께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6:68)

그 대답을 들은 우리 주님께서는 어떤 표정이셨을까요?

우리 주님은 주님을 최고로 알아봐주는 제자들 때문에 신바람 나지 않았겠습니까?

 

아내가 자기 남편을 존중해주지 않으면 이 세상 누가 자기 남편을 존중해 줄 수 있겠습니까?

남편이 자기 아내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이 세상 어떤 사람이 자기 아내를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자기 교회 목회자를 성도들이 아껴주지 않으면 이 세상 어떤 교인이 자기 목회자를 아껴주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모신 제자들을 가장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는 이 세상 어떤 신보다도 주님을 가장 귀한 분으로 모신 자들에게 지금도 은혜와 격려의 부르심으로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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