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너희의 모임이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고전11:30-34)

by 똑똑이채널 2024. 10. 2.
728x90
반응형
SMALL

너희의 모임이 판단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hwp
0.16MB

 

(설교열기)(예화)한 장로님이 평소에 자신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성도와 함께 이웃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예배시간에 성찬식의 순서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로님과 성도는 주님의 몸과 피를 서로 나누면서 각각 떨어져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그 교회의 목사님이 이런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예배가 끝난 후에 장로님에게 물었습니다.

“장로님께서는 왜 같이 오신 성도님과 함께 성만찬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저는 그와 돈거래를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정직하지 않았고 약속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저는 그를 상대하기도 싫기 때문에 떨어져 앉았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장로님은 자신이 주님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서는 유다가 자신을 팔아 넘길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와 함께 앉아 만찬을 나누신 것 아닙니까?”

 

목사님의 말을 들은 장로님은 다시금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돈 거래에서 그가 딱 한 번 실수를 한 것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자신과 차별을 두는 것은 자신이 비난받을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장로님은 그 성도와 좋은 관계를 회복했고 함께 앉아 성찬을 나누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깨달음)그렇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살과 피를 때어주고 나눠줄 때 제자들의 죄와 거짓됨을 따져보신 후에 나눠주셨겠습니까?

아니죠.

그저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받아주시면서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눠주신 것이었죠.

우리도 그런 사실을 깨닫는다면 나보다 허물많고 죄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어쩌 품지 않을 수 있겠냐는 것이죠.

 

(적용)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7:3)

내가 나보다 훨씬 깨끗하고 의롭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오십보 백보 아니겠습니까?

그토록 연약한 나에게도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면 그 어떤 사람인들 주님의 품으로 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찬식을 제정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나에게도 묻지 않고 따지지 않고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눠주신 것을 안다면, 나와 함께 예배하는 성도들을 향해서도 그런 마음과 자세로 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줄 믿습니다.

그만큼 성찬식에 그 누구도 정죄하거나 소외됨 없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에는

product.kyobobook.co.kr

 

(역배)고린도전서 11장 2절부터 14장 마지막 절까지는 공적예배에 대한 바울의 목회적인 답변입니다.

그 중에 11장 2-16절은 예배 때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공적 모임에 여성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나가듯이 교회예배 때도 그것을 쓰도록 한 것이었죠.

그것은 남성이 우월하거나 월등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따르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성부성자성령도 삼위일체 하나님도 동등된 분이지만 성자의 머리를 성부라고 밝히면서 바울은 질서의 차원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했습니다.

 

11장 17-34절까지는 성찬식과 관련된 사도 바울의 목회적인 답변입니다.

그 중에 지난 시간에 살펴 본 23-29절 말씀은 애찬과 성찬식에 관한 말씀이었죠.

사실 초대교회에서 주님의 만찬을 한다고 할 때 애찬과 성찬으로 나뉘었습니다.

그 유래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최후의 만찬에서 찾을 수 있죠.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를 드릴 때마다 서로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서로 떡을 나누고 포도주를 나눕니다.

그것이 애찬이요 식사를 하는 것이었죠.

그러다가 서로 성찬식을 하자고 하면 성찬식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때 사람들이 음식을 가지고 와서 애찬을 하다가 성찬이 되는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유로운 사람들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자기네들끼리 다 먹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늦게 온 사람들 곧 노예와 노동자들을 포함한 가난한 사람들은 끝나고 나가면 뒤치다꺼리를 하고 참석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바울은 그 성찬식이 주님께서 제정하신 것을 전해 준 것이라고 밝혔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전해 준 통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식 때 떡은 배불리 먹고자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살을 ‘떼어주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죠.

주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떼어주시고 찢어주셨다면 우리도 그렇게 살라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성찬식 때 나눈다면 먼저 먹고 마시지 말고 다 함께 참석할때까지 기다려서 함께 떼어주고 나누는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겠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배가 고프다면 집에서 먹고 오는 게 낫지 않겠냐 하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왜 집에서 먹고 오라는 것입니까?

교회에까지 와서 다른 사람을 실족시키면 되겠느냐 하는 것이죠.

 

(깨달음)그렇기에 바울이 권면한 그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도 진정한 성찬의 사람들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매주일 성찬식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말씀 안에서 매일매일 주님의 살과 피를 떼어주고 나누는 자로 사는 것이죠.

그분의 살과 피가 나를 살리셨고 내가 그것을 먹고 마심으로 내 생명이 유지된다는 걸 안다면 내 삶도 그런 삶을 좇아 살라는 것이죠.

그것은 곧 약한 자를 배려하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성찬을 나누며 사는 성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오늘 본문 30-3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원해)여기에 ‘잠자는 자’란 헬라어로 ‘코이마오’(κοιμάω)인데 ‘죽은 자(마27:52,요11:11)’를 뜻하는 말입니다.

성찬식을 통해 약한 자가 생기고 병든 자가 많고 죽은 자가 많다(ἱκανός, sufficient)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성찬식 자체에 마술적인 능력이나 주술적인 능력이 있어서 갑자기 병에 걸리고 또 저주받아 죽기도 한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떼어주고 나눠주는 그 의미를 살리지 못한 채 성찬식을 행한다면 다들 병든 심령이지 않겠냐 하는 뜻일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비유에 해당되는 말이겠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를 흘리신 주님의 살과 피를 떼어주고 사는 것 알지 못하면서 성찬식에 참여한다면 그는 영적으로 병들고 죽은 심령이지 않겠냐 하는 것이죠.

그만큼 오늘날에도 그런 의미를 새기면서 성찬식에 참여하는 게 너무나도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깨달음)그래서 31절의 헬라어 원문에는 접속사가 기록돼 있습니다.

성찬의 참된 의미와 뜻을 새기지 못한 채 참여하면 영적으로 죽은 자들과 다르지 않지만 성찬을 바르게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께 판단받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살피다’는 헬라어 ‘디아크리노’(διακρίνω)는 ‘분별하다’는 뜻입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것을 분별하여 참여한다면 누군가를 소외시킬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죠.

그렇게 자기 자신을 살피고 주님의 성찬을 살피고 참여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께 판단받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32절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이 받는 정죄도 받지 않는다고 바울이 권면하는 것입니다.

 

(적용)그만큼 주님의 성찬에 참여할때는 먼저 너희 자신을 살피고 또 주님의 살과 피를 떼어주신 그뜻을 살피면서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어찌 가난한 자와 병약한 자를 제쳐놓고 너희들끼리 먹고 마실 수 있겠느냐 하는 거죠.

너희들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떼어주신 주님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눈다면 모두가 함께 참여하여 나누는 것을 주님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떼어주고 나누는 자는 결코 세상 사람들처럼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죠.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 교보문고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product.kyobobook.co.kr

 

(본문2)본문 33-34절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깨달음)‘그런즉’(therefore)으로 번역된 접속사 호스테’(ὥστε)는 앞에서 논의한 것을 마무리하고 이제 결론을 도출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제껏 성찬식에 관한 큰 이야기를 하고 결론은 간단하게 내리는 것이죠.

먹으러 모일 때에 기다리라고 말입니다.

없는 자들, 연약한 자들, 병든 자들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너보다 연약한 자를 위해 기다리라 하는 뜻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너를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신 뜻이고 성찬의 참된 정신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 ‘형제들아’하고 다정하게 말합니다.

바울은 17-22절을 통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성찬식 문제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논증했습니다.

23-32절을 통해 성찬식은 주님께서 시행한 것이고 자신은 그대로 전해주는 통로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새기지도 않고 먼저 먹고 마시는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격앙된 어조로 훈계차원에서 한 말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성찬에 관련된 주제를 마무리하면서 다소 누그러뜨리는 어조로 ‘형제들아’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들은 주님의 피로 구원받은 한 형제 자매가 아닙니까, 하는 뜻이죠.

가정의 한 형제 자매처럼 교회에서 소외받는 사람 없이 모두가 함께 성찬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부드러운 언조로 상기시켜준 것입니다.

 

그래서 34절에서는 정말로 배가 고프거든 집에서 먹고 오도록 해서 너희의 성찬 모임이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받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정말로 교회의 애찬과 성찬은 자신들과는 다르구나, 하는 것을 깨닫도록 하라는 뜻이죠.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의 모습이지 않겠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밖의 것도 말할 것이 있지만 그것들은 직접 가서 이야기하겠다고 말합니다.

 

(적용)그만큼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은 진정으로 성찬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매일매일 성찬식을 행하지 않는다 해도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누고 떼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회 안에서도 소외됨 없이 행하고 교회 밖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을 바라볼 때 참으로 사랑이 많구나, 하는 것을 느끼도록 말읿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약한 자를 배려할 때 가능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자만 말하는 게 아니라 삶의 모든 면에서 연약한 자를 말하는 것이죠.

그런 자를 품고 나누고 떼어주며 사는 것이 성찬의 사람들이 행할 바라는 것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 모두가 자신보다 연약한 자를 품는 주님의 마음으로 성찬에 임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친히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성찬식 때 그 장로님이 자기 옆에 성도를 멀리하는 그 마음과 자세를 주님이 기뻐하시겠느냐?”

누구든지 자기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다들 들보와 허물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렇기에 주님의 살과 피를 떼어주고 나눌 때 상처받거나 소외되는 이 없이 떼어주고 나누는 걸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겠느냐?”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성찬식 때 노예들이 뒤늦게 참석해 성찬을 나누지 못하는 걸 보고 호통친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성찬이 어떤 성찬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성도 많이 모이고 멋진 성찬예식을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정작 성도가 진정으로 하나되는 교회 하나되는 성찬식을 주님께서 원하지 않겠느냐?”

교회에서 애찬을 나눌때도 성찬식을 할때도 누군가 소외됨 없이 하나로 어우러질 수 있도록 너 자신을 살펴야 하지 않겠느냐?”

그 장로가 뒤늦게 깨닫고 함께 성찬식을 행하듯이 그런 교회의 성찬을 주님께서 기뻐하실 테니 말이다.”

 

 

(찬양)너 어디 가든지 순종하라 너 어디 있든지 충성하라

주 너의 하나님 왕 되신 주 영원히 주님만 찬양하라

너 무엇하든지 진실하라 너 무엇하든지 성실하라

주 너의 하나님 도우시리 어디를 가든지 정직하라

너 어느 때든지 기도하라 너 어느 때든지 감사하라

주 너의 하나님 돌보시리 너 어느 때든지 기뻐하라

너 고난 속에서 평화하라 너 핍박 속에서 감사하라

주 너의 하나님 함께하리 승리의 주님을 찬양하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의 죄와 허물을 보고 당신의 살과 피를 떼어주고 나눠준 게 아닙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서 품으시고자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눠주셨고 그것을 기념토록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저와 여러분들도 교회 안에서 행하는 애찬이나 성찬을 통해 누구도 판단치 않고 주님처럼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안에서도 판단하는 일이 없을 것이고 교회 밖 세상사람들도 우리를 함부로 판단치 않고 참된 교회로 칭찬할 줄 믿습니다.

그런 마음과 자세로 성찬을 행할 때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요 주님께서 칭찬하는 교회로 삼아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이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권성권 - 교보문고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

product.kyobobook.co.kr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