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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 빌립(행21:7-13)

by 똑똑이채널 2024.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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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일행이 일주일 동안 머물렀던 두로를 떠나갈 때 항에서 주님의 제자들과, 그들의 처자들이, 바울 일행과 작별을 했습니다. 바울은 지금 결국 죽음으로 끝날 결박과 환란의 길에 나서는 격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얼굴 표정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평소처럼 담대했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의 장로들처럼, 두로의 제자들도, 자신들의 시야에서 바울 일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겠죠. 그리고 각자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면서 그 가족들 간에 신앙적인 유무언의 대화를 나누었겠죠?

 

그 이후의 일을 본문 7절에서 밝혀줍니다. “두로를 떠나 항해를 다 마치고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바울 일행이 다시 승선한 배는 두로 남쪽 30km 지점에 위치한, 그 배의 마지막 종착지인 돌레마이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은 돌레마이에서도 믿음의 형제 자매를 찾았습니다. ‘안부를 묻다’는 동사는 ‘영접하다’, ‘환영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돌레마이에서 믿음의 형제 자매들를 찾아 형식적으로 안부를 물은 게 아니라, 그들과 일일이 포옹하면서 하룻밤 믿음을 함께 나눈 것이었습니다.

8절입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머무르니라” 날이 새자 돌레마이에서 약 60km 떨어진 지중해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르는 가이샤라로 갔습니다. 걸어서 이틀이나 걸린 거리였습니다. 가이사랴는 헤롯 대왕에 의해 건설된 도시로서, 당시 로마 총독이 거주하는 유대 지방의 정치적인 수도였습니다. 그 도시 이름이 가이샤라로 명명된 것은 로마 황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기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가이샤라에 도착한 바울은 일행과 함께 빌립의 집을 숙소로 삼았습니다. 빌립은 사도행전 6장에서 기독교회역사상 예루살렘 모교회가 최초로 선출했던 7집사 가운데 한 명이었죠. 본문은 그 빌립 집사를 ‘전도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빌립이 가이샤라에서 전도자로 불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직계 제자였던 사도 빌립과 구별하기 위함도 있었겠죠. 빌립이 2천년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집사로 선출되어, 주님의 이끄심을 따라 맹활약할 당시 바울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습니까? 바울은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 연행 투옥시키는 것을 천직으로 삼았던 폭도였습니다. 그만큼 빌립과 바울은 물과 기름처럼 융합할 수 없는 대척점에 있는 견원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빌립의 집을 자기 일행의 숙소로 삼을 정도로, 바울은 빌립과 믿음의 우정을 쌓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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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9절 이후는 그 집에서 일어난 일을 보여줍니다.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머물러 있더니 아가보라 하는 한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지금 전도자 빌립의 집에 유대에서 내려온 선지자 ‘아가보가’ 왔습니다. 아가보는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치하에서 일어날 대흉년을 정확하게 예언한 유명한 선지자였습니다. 그 선지자가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오게 해서 자신의 손과 발을 결박합니다. 그 허리띠의 임자인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고발로 로마의 감옥에 투옥될 것을 예언하죠. 그만큼 바울의 예루살렘 행이 결박과 환란의 길임을 예언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12절입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여기에서 말한 ‘우리’란 누구입니까? ‘우리’란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 자신을 포함한 바울 일행을 말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곳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빌립과 네 딸들을 말하는 것이죠.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투옥될 것이라는 야가보의 그 예언 앞에, 그 동안 바울을 수행한 바울 일행과, 빌립의 가족들이, 그래서 바울에게 가지 말라고 만류한 것입니다. 그들이 말로만 그런 게 아니라, 1절에서 ‘울면서’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거듭거듭 만류하는 상황입니다.

13절입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바울은 자기 일행과 빌립의 식구들이 눈물로 만류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반문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찌 울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말이죠. 여기에서 ‘상하게 하다’는 원문의 뜻은 ‘산산히 으깨다’는 뜻입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을 만류하는 그들을 보는 바울이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낀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에베소의 장로들이나 두로의 제자들처럼, 바울을 잘 아는 것 같지만 바울의 깊은 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바울을 만류했는데, 이번에는 정말로 자기를 잘 안다는 일행들이, 그리고 전도자라는 호칭을 갖고 있는 빌립까지 나서서 전도자의 소명을 완수하려는 바울의 앞길을 눈물로 막아선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보는 바울의 심정이 갈갈이 찢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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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바울은 다시금 자기 일행과 빌립의 가족들에게 간곡하게 선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했습니다.”하고 말이죠.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결박과 환란이 기다린다해도 나는 주님게 내 인생을 온전히 맡기며 나아가겠다는 바울의 결심을 재천명한 것이죠. 동시에 결코 자기 앞길을 가로 막아서는 안 된다는 자기 일행과 빌립을 향한 질타이기도 할 것입니다.

과연 이 상황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빌립 집사는 초대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넘어설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을 때 성령님의 이끄심에 따라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로 나가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짐승 취급하던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말이죠. 그야말로 빌립은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복음을 전한 전도자였습니다. 그리고 곧장 예루살렘에서 약 70km 떨어진 유대 광야로 불러내시는 성령님께 순종하여 그곳에 마차를 타고 온 에디오피아 내시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물이 있는 곳에서 세례를 베푼 사람입니다. 이방인들에게 최초로 세례를 베푼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활약상이 끝나는 사도행전 8장 38-40절은 빌립이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에 복음을 전하고 ‘가이샤라’에 이르렀다고 전해줍니다. 그만큼 그는 지중해 해안을 따라 북상하면서 ‘가이샤라’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때까지도 주님의 이끄심에 단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그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믿음의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8장에서 그렇게 맹활약을 펼쳤던 빌립이 오늘 본문에 다시 등장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과 오늘 본문의 말씀 사이에는 약 30년의 시차가 있습니다. 젊은 시절 주님의 이끄심에 따라서 전도자로 살면서 가이샤라에까지 이른 빌립이 그곳에 정착해 30년 동안 살고 있는 상황입니다. 더욱이 그에게는 아직 시집가지 아니한 성인이 된 네 딸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 집이 협소했다면 바울 일행이 숙소로 삼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았겠죠. 그만큼 전도자로 살고 있는 빌립의 집은 바울과 바울 일행, 유대에서 내려 온 아가보까지 재워주고 먹여 줄 수 있는 넉넉한 집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빌립은 전도자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긴 했지만 이미 세속적인 의미의 유복한 가장으로 살고 있는 모습입니다. 만약 젊은 시절의 빌립이었다면 바울이 결박과 환란의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했을 때 그도 기꺼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따라나서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나이든 빌립에게 그 십자가가 사라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런 빌립에 비한다면 인생 말년에 달하기까지 주님께 자기 생을 맡긴 바울은 어떻습니까?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 아닙니까? 사도행전 9장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그 이후 오늘 본문의 가이샤라의 빌립에 집에 이를때까지 주님을 향한 초심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의 그 모습이 어쩌면 초심을 잃은 빌립 집사의 영혼을 깨우는 일로 작용하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심령을 깨우는 주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시작과 과정이 중요하다면 믿음의 끝은 더욱더 중요하다는 사실이죠. 끝이 믿음으로 마무리되지 않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과거형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한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의 이끄심에 전적으로 내어 맡기는 현재진행형의 삶 말입니다. 오늘도 그런 은혜가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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