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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시리아 안디옥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우리가 이미 읽었던 사도행전 11장 후반부에 나옵니다. 이방선교의 거점역할을 하게 될 교회였죠. 스데반 집사의 순교와 교회의 박해로 인해 주님의 제자들이 욥바와 가이사랴의 위쪽인 베니게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위의 사마리아와 다메섹의 위쪽인 수리아 안디옥에 그리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는 같은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었죠. 후에 그곳 구브로와 구레네에 있던 주님의 제자들이 수리아 안디옥에 와서 복음을 전하는데 이방인들 곧 유대인이 아닌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그것을 계기로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고, 그곳에 교회를 세우게 되었죠. 그때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은 바나바를 담임목회자로 파송했는데, 점점 그 수가 많아지자 바나바는 다소로 가서 사울을 데리고 와서 공동담임목회자로서 교인들을 이끌었고, 비로소 그 교인들을 향해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교회가 바로 그 안디옥교회였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그 시리아 안디옥교회에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데, 그 교회에 선지자와 교사로 불리는 지도자 그룹에 대해 소개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각각 바나바,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 구레네 사람 루기오,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사울 이렇게 5명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니게르라고 하는 시므온이 있었는데, ‘니게르’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온 ‘검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흑인을 칭하는 영어 ‘니그로’가 바로 그 ‘니게르’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시므온은 흑인 개종자였던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리고 ‘루기오’라는 사람이 안디옥교회 지도자 그룹에 속해 있었는데, 그는 구레네 사람 즉 지금의 아프리카 리비아 지역 출신입니다. 마나엔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이라는 수식이 붙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헤롯과 어릴 때부터 함께 양육 받고 자랐다는 말인데, 비록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부유한 귀족적인 환경에서 자랐을지 몰라도, 불의한 지배계층 출신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울은 어떤 자입니까? 그 역시 초대교회를 심하게 핍박했던 자였습니다. 마치 메뚜기가 옥수수밭을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로 교회를 잔멸하던 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빛을 만나 거꾸러지고, 그가 주님 안에서 변화되어 주님의 제자가 된 인물이죠.
안디옥교회 지도자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과연 그들이 하나가 되어 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입니다. 인종적인 배경이나 출신이나 신분이나 계급이 다 달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차이를 넘어 그들이 하나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주님 안에 거하고 있기 때문이요, 주님의 복음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을 더더욱 받았던 것이죠. 그만큼 그들은 주님의 복음을 통해 은혜를 누리고 있었고, 그 은혜 안에서 서로의 다름을 넘어 하나 됨의 공동체를 일구어나갔던 것입니다.
실은 우리 자신들도 다 다르지 않습니까? 고향도, 출신지도, 신분도, 살아가는 환경도 다 다릅니다. 그런데도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하나가 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생명의 복음 때문입니다. 그 복음이 서로 다른 우리를 하나로, 한 공동체를 세워가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복음은 그처럼 신분과 학력을 뛰어넘게 하고, 복음은 모든 차별을 뛰어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다름을 통해 서로의 부족을 채우게 하는 게 복음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본질을 좇으면 우리의 상황이나 환경을 뛰어넘어 진정으로 하나되는 공동체를 세워가게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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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3절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지도자 그룹을 중심으로 하나 됨을 이루어 ‘주를 섬겨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죠.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말씀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교회가 선지자와 교사라는 조직까지 세워서 부흥하고 있고, 또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까지 누리고 있는데, 성령께서 금식하면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신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또다시 금식하면서 기도합니다. 왜죠? 혹시 주님의 음성을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고 금식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이죠. 이렇게 잘 되고 있는 마당에 하필 두 담임목회자를 따로 세우라고 하니, 그것은 필시 잘못된 음성이지 않냐, 하면서 다시금 금식하면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금식하고 기도해도 여전히 성령님의 음성이 동일한 것을 알고 그때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냈다”고 선교사로 떠나 보냈다는 뜻입니다.
그때 바나바와 바울이 어디로 선교여행을 떠납니까? 두 사람은 먼저 ‘구브로섬’으로 들어가 그 섬 도시 중 하나인 ‘살라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 살라미에서 바나바의 조카인 요한 마가를 수행원으로 두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섬을 횡단하며 복음을 전하던 중에 마침내 바보라는 도시에 당도하게 되죠. 그런데 그곳에서 어떤 사람을 만납니까? 본문 6절에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 그곳 바보에서 거짓 선지자이자 마술사인 ‘바예수’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바’는 ‘아들’을 뜻하는 말로서 ‘예수의 아들’이라는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그 당시 바보라는 도시는 음란과 부도덕의 대명사였던 여신 비너스 숭배로 유명한 곳입니다. 미신이 성행했던 당시에 그곳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고위층 인물들은 개인 마술사를 두었습니다. 그런 마술사는 점을 치거나, 신비한 마술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돈을 벌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짓 선지자요 마술사인 바예수라는 사람은 총독 서기오 바울의 개인 마술사였습니다. 그 총독의 수하에서 거짓 예언을 하며 상당한 부와 권세를 누리고 있었던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본문 7절에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
마술사가 모시는 총독 서기오 바울이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한 것이죠. 만약 총독이 이 계기로 기독교를 믿게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마술사 바예수는 자신의 부와 권력이 한순간에 날아가버린다고 생각을 했겠죠. 그래서 그는 바나바와 사울을 대적하여 총독이 믿지 못하게 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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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은 어떻게 대응했는지, 본문 9-11절의 새번역성경이 이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이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술사를 노려보고 말하였다. ‘너, 속임수와 악행으로 가득 찬 악마의 자식아, 모든 정의의 원수야, 너는 주님의 바른길을 굽게 하는 짓을 그치지 못하겠느냐? 보아라, 이제 주님의 손이 너를 내리칠 것이니, 눈이 멀어서 얼마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곧 안개와 어둠이 그를 내리덮어서, 그는 앞을 더듬으면서, 손을 잡아 자기를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았다.” 바울은 성령님의 능력 가운데 그 마술사의 눈을 어둡게 함으로 제압하게 된 것입니다. 복음전하는 일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그러자 그 모든 장면을 지켜보던 총독이 어떻게 합니까? 그 일어난 일을 보고 주님을 믿게 되었고, 주의 가르치심을 놀랍게 여겼다고 증언해 줍니다.
성령님께서 왜 이런 일을 일으키신 것입니까?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요, 복음은 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복음의 능력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복음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앞에서 변화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온 마음으로 믿고 의지하며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인생에 작은 파도만 쳐도 우리는 흔들립니다. 이때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의 복음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저희들을 덮어 주시고, 저희가 아는 이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온 몸으로 전할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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