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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엊그제 압해남부교회 목사님을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임직자 교육을 할 때 교육원 원장으로 섬긴 분이었습니다.
그 분을 찾아뵌 것은 함께 삼학초 앞에서 전도하는 목사님의 부탁 때문이었죠.
그분이 압해남부교회 목사님께 벌을 몇 마리 얻어서 무릎에 벌침을 맞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분이 혼자 찾아뵙기가 쑥쓰러워 함께 가자고 해서 십 리를 가는 심정으로 동행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암해남부교회에서 양봉을 하는 벌들이 ‘도벌’ 도망쳐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압해서부교회 목사님을 소개해줘서 그 교회에 가서 벌 50마리를 얻어왔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양봉을 15년간 했는데 벌에 대해서 완전히 꿰고 있을 정도였죠.
여왕벌이 있어야 모든 게 제 자리를 찾고, 꿀을 따오는 벌, 청소하는 벌, 적에 대비하는 벌들, 침이 없는 숫벌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 벌들이 움직이는 모습이 실은 거대한 조직의 세계와 같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각자 맡은 역할에 성실을 다할 때 벌통의 벌이 번식되고 맛있는 꿀을 따낼 수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한 나라도 기업도 회사도 하나님의 나라도 하나님의 교회도 다르지 않겠죠.
각자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직책에 성실을 다할 때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는 법이죠.
(깨달음)압해남부교회 목사님과 ‘꽃피는무화가’ 음식점에서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교회 텃밭에 보리수나무가 있는데 올 해 많은 열매가 열려 마음껏 따 먹었다고 말이죠.
그래서 우리 교회 텃밭의 보리수 이야기를 했더니 함께 간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 교회 텃밭의 흙이 좋지 않죠?”
“토양이 좋으면 열매들이 좋고 병들지 않는데 한 번 갈아 엎어서 좋은 흙을 뿌리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듣는데 제게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왔습니다.
뭐든지 좋은 씨를 뿌리면 다 풍성한 수확을 맺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씨라 함은 곡식의 씨 양식장의 새끼들 씨 그리고 부모의 정자와 난자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 씨가 좋다고 해도 토양이 좋지 않으면 결코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는 없는 법이죠.
공사현장 쓰레기기 가득 찬 밭은 다 걷어내고 좋은 흙을 뿌려야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는 것이죠.
(적용)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치고 누군들 좋은 열매 풍성한 수확을 바라지 않겠습니까?
수능을 본 고3생들도 성실을 다했다면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회사에서 주어진 업무에 팀웍을 이루며 성실을 다했다면 좋은 결과물이 나오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죠.
전도를 하고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전도의 열매가 있기를 바라는 것도 당연한 바람이겠죠.
누구든지 눈물을 흘리며 그 일에 씨를 뿌렸다면 한 해 풍성한 결실을 거두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제 뇌리에 스치는 또 다른 음성이 있었습니다.
“너의 마음 밭은 어떠한데?”
“너의 마음 밭은 좋은 토양이냐?”
“아니면 마음 속이 온통 잡동사니에 쓰레기로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냐?”
“네가 열심을 다해도 마음 밭이 불순물로 가득 차 있으면 어찌 풍성한 열매를 맺겠느냐?”
이것이 꼭 저에게만 해당되는 음성이겠습니까?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주님의 음성인 줄 믿습니다.
대림절 첫째 주일인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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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갈릴리 출신의 마태와 마가와 요한은 갈릴리를 바다라고 했지만 실제 바다를 건너온 누가는 호수로 칭했습니다.
갈릴리는 해수나 염수가 아니라 담수라 호수라는 표현이 적확한 말입니다.
갈릴리는 동서길이가 13km 남북이 21km 둘레는 50km 수심은 얕은 곳이 20m지만 깊은 곳은 43km죠.
갈릴리는 아프리카 모양이고 또 수금(시108) 모양도 하고 있어서 수금의 히브리어 ‘긴노르’(כִּנּוֹר)에서 따온 ‘긴네렛’으로 부르기도 하죠.
갈릴리 호수 남북의 북쪽중앙 왼쪽은 가버나움이고 그 오른쪽은 고라신 그 오른쪽은 오병이어 기적을 베푼 벳세다 지역이죠.
가버나움에서 왼쪽으로 내려오면 게네사렛이고 그 아래로 오면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 막달라죠.
막달라에서 갈릴리 호수를 가로지르면 서쪽 맞으편에 군대 귀신을 쫓은 거라사 지역이 나옵니다.
그 막달라 지역에서 왼쪽으로 더 내려오면 디베랴 지역이 나오죠.
갈릴리 담수는 헬몬산에 내리는 눈과 물이 계속 흘러내리면서 갈릴리의 물을 채우는 격이죠.
그 갈릴리의 물은 아래로 흘러 요단강 냇가를 이루는데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죠.
그 요단강 냇가의 물은 더 아래로 흘러 사해로 모이게 되고 사해에서 그 물줄기는 끝이 나죠.
사해바다에서는 수영을 못하는 사람도 둥둥 뜰 수 있는데 실은 죽을 사(死)자를 사해(死海)라고 하죠.
해수면보다 400m나 낮은 사해바다는 미생물이나 박테리아만 살 뿐 고기떼는 볼 수 없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죽음의 바다가 아닌 인간의 지평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요단강 냇가에서 세례를 받으셨죠.
그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그 후 성령에 이끌려 유대광야로 나가셨고 40일간 마귀에게 세 차례의 시험을 받으셨죠.
돌을 떵덩이로 만들어 굶주린 유대 백성들을 먹여보라,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 천사들이 받들면슈퍼스타가 될 것이다, 내게 절하면 천하 만국의 영광을 보여줄 것이다, 는 유혹이었죠.
그때 예수님은 이 세상의 권세와 영광을 취하도록 하는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셨죠.
그 후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셨는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주목했죠.
그때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요한과 시몬이 주님을 따랐고 빌립과 나다나엘도 주님을 따라나섰죠.
그 후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때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주셨고 예루살렘에 가셔서 성전을 청결케 하셨죠.
그 뒤 갈릴리 나사렛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했지만 환영치 않고 낭떠러지에서 죽이려하자 가버나움으로 가셨죠.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고 각종 병든 자를 고쳐주셨고 베드로를 비롯한 네 제자를 다시 부르셨죠.
이제 두 번째 예루살렘에 방문하셔서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셨고 손 마른 자도고쳐주셨죠.
그 후 2차 갈릴리 사역을 위해 밤새 기도하신 후에 12제자를 세우셨습니다.
가버나움 위쪽 팔복산에 올라가 산상수훈을 가르쳤고 나인성에 와서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셨죠.
제자들과 따로 있을 때 천국비유를 일깨워주셨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 거라사의 군대귀신 들린자의 귀신을 쫓아내셨죠.
그 후 가버나움으로 올라가면서 12년간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쳐주셨고 가버나움에 도착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셨죠.
그 뒤 나사렛에 왔지만 다시 배척받았고 12제자를 파송하면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권세를 주셨죠.
그 후 세례요한이 죽자 3차 갈릴리사역을 시작하셨고 벳새다 벌판에서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셨죠.
그 뒤 갈릴리 호수를 걸으셨고 게네사렛에서 병자를 고친 뒤 가버나움에 가셔서 두로와 시돈과 데가볼리 곧 이방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셨죠.
그 후 헬몬산에 올라가 예수님은 영체로 변화되셨고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하는 고백을 들었죠.
이제 갈릴리를 떠나 수전절을 지키고자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3번째 유월절 맞아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고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공생애 3년 모습이자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한 사역입니다.
왜 갈릴리를 중심으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을까요?
갈릴리가 호수라 수많은 생물체가 살아 있듯이 주님 앞에 나온 자들이 모두 새 생명을 얻고 영생을 얻는 자가 되길 바라신 것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갈릴리는 히브리어로 ‘갈릴’(גָּלִיל)로서 ‘원’ 혹은 ‘고리’를 뜻하는 말로 모든 사람들이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 연결된 고리로 살도록 갈릴리에서 사역하신 게 아닐까요?
그곳 갈릴리는 예루살렘이나 월등한 지역에 비해 소외된 곳으로서 이 땅에서는 주목받지 못해도 하늘나라에서 주목받는 인생으로 살라고 갈릴리를 중심무대로 삼아 복음을 전하셨던 것이죠.
저와 여러분도 죽은 사해바다와 같은 삶이 아니라 살아 있는 갈릴리 호수와 같은 인생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생명이 하늘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된 고리를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설령 이 땅에서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무명의 그리스도인이라해도 하늘나라에서 인정받는 복된 인생이 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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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본문은 2차 갈릴리사역을 마치고 고향으로 가기 전에 가버나움에서 군중에게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13장 54절에 이 비유를 마치고 고향 나사렛 회당에 가서 복음을 전한 내용이 나오는 걸 알 수 있죠.
1절의 “집에서 나가사”하는 말씀은 나사렛이 아니라 갈릴리의 가버나움 베드로의 집이겠죠.
가버나움의 해변가에 예수님께서 앉아있을 때 각종 문제를 안고 있는 이들이 몰려들었죠.
그때 예수님은 1차 갈릴리 사역 때 베드로의 배에 앉아 말씀을 전하셨듯이 이번에도 누군가의 배에 올라 바람을 등지고 확성기 효과를 내듯이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3절에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유’란 ‘파라볼레’(παραβολή)로 ‘옆에 나란히 놓인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일상의 삶에 있는 일과 사건을 빗대 군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씀하신 것이 비유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총 8개의 비유가 나오는데 공통된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입니다.
그 중에 오늘 나누는 말씀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마태복음(13:1-8)에도 마가복음(4:1-9)에도 누가복음(8:4-8)에도 나와 있죠.
그만큼 이 비유는 세 제자들과 그 군중들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 비유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씀하신 ‘씨’는 ‘천국 말씀’이라고 마태복음 13장 19절에 친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씨 곧 천국말씀을 밭에 뿌리는데 네 개의 밭 중에 첫 번째 밭은 어떤 밭입니까?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4절)
(원해)여기에 ‘길 가’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 호 호도스’(παρά ὁ ὁδός)는 ‘길을 따라서’입니다.
밭의 끝자락에 있는 길가를 말하는 게 아니라 밭 속의 도랑에 놓인 길을 말하는 것이죠.
이스라엘의 농경법은 우리와 달리 이른비가 내리는 10월 이전에 씻앗을 흩어뿌립니다.
이제 이른비가 내리면 쟁기질을 하면서 밭을 갈고 그 속에 씨앗을 품게 하는 방식이죠.
그런데 밭의 고랑과 같은 길을 따라 씨를 뿌렸으니 그 씨앗은 사람의 발에 발힐 수밖에 없는 거죠.
더욱이 4절 후반부에는 그 씨를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틴에는 삼백여 종(種)의 새가 있다고 하는데 제일 흔한 새는 우리와 같은 ‘참새’라고 하죠.
레위기(11:16)와 신명기(14:15)에서는 그 새들을 대부분 부정한 새로 분류합니다.
예수님께서도 19절에 그 새들을 ‘그 악한 자’(the wicked one)라고 하면서 마귀라고 칭하고 있죠.
하나님의 말씀을 그 심령에 뿌려도 마귀가 ‘낚아채 가는 것’(to snatch out)을 말합니다.
(깨달음)그렇기에 ‘길 가’와 같은 마음 밭이 어떤 밭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마음 밭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오만함과 완고함으로 뭉쳐 있는 심령이죠.
자기 의로움 자기 주장으로 똘똘 뭉쳐 있는 심령의 상태가 길 가와 같은 마음 밭입니다.
그런 심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자신의 마음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상태와 같은 것이죠.
그런데 그런 심령에 뿌리는 천국말씀을 새들 곧 사탄의 세력이 낚아채간다고 했습니다.
자기 의와 자기 주장과 자기 고집으로 똘똘뭉쳐 있는 심령은 사탄에게 마음이 빼앗기기가 쉽다는 뜻이죠.
(원성)지금도 사탄의 세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못하게 역사한다고 고린도 후서와 에베소에 말씀하죠.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고후4:3-4)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엡4:17-19)
(적용)사탄의 세력에 의해 사로잡혀 천국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이 과연 누구였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헤롯과 같은 정치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로 가득찼고 가진 게 많았으니 길 가의 마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행위를 자랑하는 회칠한 무덤과 같이 속은 썩을 때로 썩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천국복음을 선포해도 마음을 굳게 잠근 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었죠.
하지만 같은 바리새파 출신인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와 구원에 대해 묻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죠.
부유층 아리마대 요셉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모시면서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열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기에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누군가는 하나님의 구원과 멀어졌고 누군가는 구원의 은혜를 덧입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게 되지만 그 말씀을 겸손하게 품는 자들은 생명을 덧입은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품는 자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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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밭고랑의 길과 같은 심령이 아니라 좋은 밭이 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그 목사님이 교회 텃밭을 갈아업고 좋은 흙을 뿌려야 한다고 말할 때 어떤 생각이 떠올랐느냐?”
“밭에 죽은 갯뻘과 오물과 쓰레기가 가득 차 있다면 좋은 씨를 뿌려도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것 아니더냐?”
“그 심령이 자기 의로움과 자기 주장과 완고함으로 뭉쳐 있으면 어찌 천국복음이 들어갈 수 있겠느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회칠한 무덤처럼 쏙은 썩어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거부했고 그래서 사탄의 세력이 주님의 말씀을 낙아챈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그토록 완고하고 강팍한 심령이었는데 너는 어떤 심령인지 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너의 심령도 밭고랑의 길가처럼 자기 주장 자기 의로움 자기 자랑으로 똘똘 뭉쳐 있는지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치유하고 회복케하는 길은 길가 밭을 갈아엎는데 있지 않겠느냐?”
“혹여라도 너희 심령이 밭고랑의 길가와 같다면 그 심령을 갈아 엎어 주님의 말씀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겸손하게 품어야 하지 않겠느냐?”
“똑같이 말씀을 들어도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생명의 말씀으로 축복을 누렸으니 말이다.”
“너도 니고데마와 아리마대 요셉처럼 주님의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품을 때 주님께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지 하지 않겠느냐?”
(찬양)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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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영국의 청교도 작가이자 설교자였던 존 번연이 본문의 말씀과 비슷한 누가복음 8장 12절 말씀을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그 당시 존 번연은 교회를 계속 출석하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신론자였던 시기였습니다.
어느 날 존 번연이 성경을 대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나는 교회에 이렇게 오랫동안 출석했고 수없이 설교를 들어왔는데 어찌 내 마음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없을까?’
‘어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여전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걸까?’
그러다가 존 번연이 이 말씀을 읽고는 충격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자기 마음속에 떨어지는 ‘말씀의 씨’를 빼앗아 가는 것이 마귀라는 말씀에 놀란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혼잣말로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만약 사단이 내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빼앗아가는 게 사실이라면, 그래서 나의 삶이 변화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는 분명 사단에게 속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바로 그 생각이 존 번연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존 번연은 예배를 드리는데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의 설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었고 베드로처럼 자신의 죄인됨을 회개했고 비로소 참된 믿음에 도달하게 되었죠.
그 이후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은혜를 받은 설교를 하는 순회설교자가 되었습니다.
정식으로 목회자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그의 간증설교를 통해 놀랍게 역사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당시에 영국의 국교회 곧 성공회 지도자들은 국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모든 집회를 불법으로 간주했고 감옥에 가둬버렸습니다.
그래서 태동된 게 영국의 청교도운동이었는데 소위 비국교도에 속하는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일어난 종교개혁운동이었습니다.
존 번연도 그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당국에 체포되었고 12년간 감옥생활을 하게 됩니다.
감옥에서 잠시 나왔다가 또 들어가고 다시 들어가고 해서 12년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수감생활 때문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기도하다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마음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내가 자유롭게 전도할 수 없는 지금 전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때 그는 감옥에서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생각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만약 이것을 소설로 옮길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환상을 발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 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펜을 들어 쓴 것이 그의 나이 47살에 쓴 불후의 기독교 고전〈천로역정〉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것보다 더 귀한 열매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냥 들으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사단의 세력이 얼마나 많은 방해공작을 펼칩니까?
내 마음 속의 의로움과 자아로 말씀을 못 받아들이게 하고 내 주관과 내 경험으로 말씀을 차단하게 만들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점점 말씀에 벽을 치게 하고 궁극적으로 밭고랑의 길가와 같이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게 만드는 게 사탄의 세력이 하는 일이죠.
그러니 저와 여러분 모두는 존 번연처럼 좋은 마음 밭이 되도록, 그래서 말씀을 잘 품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내기도)그러니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 마음 밭이 갈릴리 호수처럼 살아 있는 심령의 밭이 되게 해 주세요.”
“하늘 하나님과 연결된 고리를 지니며 살 수 있는 은혜로운 심령이 되게 해 주세요.”
“어떤 경우에도 밭 고랑의 길 가와 같은 굳은 심령 교만한 심령 내 의로 똘똘 뭉쳐 말씀을 배척하는 심령은 되지 않게 해 주세요.”
“존 번연처럼 사탄에 속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서서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시험과 환란이 몰아쳐와도 결코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더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찬양)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믿음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대림절 첫 번째 주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심령에 태어나시고자 하셨겠습니까?
주님께서 어떤 심령에 다시 오시고자 하시겠습니까?
그 심령이 밭고랑의 길 가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사탄의 세력에 사로잡힌 자에게 오시고자 하지는 않겠죠?
자기 의로움 자기 주관 자기 오만함으로 똘똘 뭉쳐 있는 심령의 상태에는 아기 예수님을 모실 수도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혹여라도 그런 심령의 상태라면 우리 모두 나의 자아와 나의 의로움 나의 교만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품을 수 있는 좋은 심령의 밭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내 속에 있는 오물과 쓰레기와 잡동사니를 다 걷어낼 때 살아 있고 운동력있는 말씀이 내 삶에 역사하셔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총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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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11)_2023년11월26일 주일설교 (0) | 2023.11.24 |
그물이 찢어지는지라(눅5:1-7)_2023년 11월 19일 추수감사주일설교문 (0) | 2023.11.17 |
그물을 씻는지라(눅5:1-11)_2023년 11월 12일 주일설교문 (0) | 2023.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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