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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창세기 12장은 실패작 인생을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부르신 소명장입니다.
바울의 소명장은 두말할 것도 없이 사도행전 9장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요 교회를 짓밟던 폭도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장면이 거기에 나오죠.
그렇다면 이사야의 소명장은 어디일까요?
이사야 6장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나타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찾은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와 불러주셨다는 것이죠.
특별히 이사야를 부르실 때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사6:1)였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분열왕국 중 남유다의 11번째 왕이었는데 16살에 왕이 돼서 52년간 통치했죠.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하나님을 경외했고 그래서 그의 삶을 형통케 하셨습니다.
하지만 말년에 그 형통에 도취된 채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려다가 문둥병에 걸려 죽고 말죠.
바로 그 때에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새로운 사명자가 된 것입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죽고 누군가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새로운 부르심을 받은 것이죠.
그런데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어떻게 했는지 이사야 6장 5절에 나와 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임재를 봤고 천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본 이사야는 도리어 자신의 죄악의 실체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죽었구나’ ‘이토록 부정한 자인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하고 탄식했죠.
그때 천사가 제단에 핀 숯불을 가져와 이사야의 입술에 대면서 이사야의 죄가 사했다고 선포하죠.
그러면서 “내가 누구를 보내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하고 하자 이사야가 그렇게 대답하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새로운 사명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고 답을 한 거죠.
(깨달음)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시면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다 고백하게 되는 거죠.
물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 죄를 고백하고 새로운 삶을 결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도, 바울을 부르신 것도, 이사야를 부르신 것도 마찬가지였죠.
여태껏 너를 위해 살다가 죽음의 길을 제촉해왔다면 이제는 새 생명의 삶 사명의 삶을 살라는 거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자기 실존을 깨닫는 자요, 그때부터 새 삶의 이정표를 그리며 살게 되죠.
그 삶의 원동력은 그 자신의 힘과 능력에 있는 게 아니라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적용)우리가 주님을 모를 때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마냥 세상의 그물질에 빠져 살기에 바쁩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시면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의 실존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런 죄인에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찾아와 만나주시면 나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그분의 은혜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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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우리가 4주째 살펴보는 누가복음 5장은 예수님의 제1차 갈릴리 사역 때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0세 무렵까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목수로 일하면서 어머니와 네 남동생과 두 명의 여동생을 보살폈습니다.
그 무렵 이 땅에 오신 본래의 목적 곧 하나님나라의 공적사역을 위해 집을 나서 요단강에 가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죠.
그때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1:11)
그 후에 성령님께 이끌려 광야로 나가 40일 동안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죠.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유혹,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받들 것이라는 유혹, 사탄에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겠다는 유혹이었죠.
예수님은 그 유혹들을 말씀으로 물리쳤고 그때부터 천사들이 수종들었습니다.
그 후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 가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왕의 신하의 아들까지 고쳐주셨습니다.
그런 뒤에 고향에 오셨지만 환영받지 못한 채 낭떠러지에 죽이려고 하자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가셨죠.
그곳에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고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니 그곳 갈릴리 가버나움 인근의 고라신과 벳세대와 게네사렛과 막달라까지 소문이 쫙 퍼졌죠.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아래 지역 게네사렛에 오셨을 때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몰려든 이유도 그것이었죠.
예수님께 병을 고침받고 귀신들린 자는 귀신을 쫓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모두가 자기 문제를 해결받고자 말입니다.
그런데 그 군중들과 달리 예수님과 무관하게 자기 일과 자기 성취욕에 빠져 있던 이들이 있었죠.
갈릴리 어부 출신인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 그리고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였습니다.
하지만 밤부터 날이 밝아오는 새벽까지 그물질을 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그물을 씻고 있었죠.
그때 예수님께서 그 군중들에게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군중들을 향해 말씀을 마친 후에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하고 말이죠.
그것은 평생 갈릴리 호수에서 잔뼈가 굵은 베드로에게는 들려오지 않는 말씀일 수 있었습니다.
30세까지 목수로 살아온 예수님이 40대 중반의 어부 베드로에게 하는 말이 가당치 않기 때문이죠.
더욱이 고기떼들은 날이 밝을 때는 얕은 곳으로 가는 습성인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는 말이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렇게 대답을 하죠.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를 몰고 깊은 데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깁을 잡았고 요한과 야보고 형제의 배까지 가득 채웠죠.
(깨달음)이를 통해 지난 시간에 깨달은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께서는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실패와 좌절의 베드로에게 찾아오셨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자기 경험 자기 방식을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것이죠.
지금도 우리 주님은 우리의 실패와 좌절의 자리에 친히 찾아와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지금도 자기 경험과 자기 자이를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는 주님이심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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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오늘 본문은 두 배에 가득 채운 모습 앞에 베드로가 보인 반응인데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원해)여기에 ‘엎드리다’는 헬라어 ‘προσπίπτω’(프로스핍토)는 ‘경배하다’하는 단어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달라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다’(막7:25) 할 때 사용된 단어죠.
심지어 귀신들도 예수님의 신성을 알아보고 ‘엎드리다’(막3:11) 할 때 쓰인 단어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한 밤중에 기도할 때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자 간수장이가 자결하려 하자 “우리가 여기 있으니 자결치 말라”고 할 때 그가 ‘엎드리다’(행16:29)할 때 사용된 단어죠.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고백한 부분입니다.
베드로가 5절에서는 ‘선생님’했는데 8절에서는 ‘주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선생님’이란 단어는 ‘에피스타테스’(ἐπιστάτης)로 ‘갈릴리 호수의 감독자’ 정도의 의미입니다.
‘주님’이란 ‘퀴리오스’(κύριος)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과 소유권을 지닌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이전에는 이 갈릴리호수의 감독자 정도로 대했다면 이제는 온 우주 만물의 주관자로 맞이한 것이죠.
그러면서 베드로는 그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깨달음)왜 베드로는 주님께서 자기를 떠나달라고 자기 자신은 죄인이라고 고백한 것입니까?
구약성경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만나거나 천사를 만나면 경외심과 두려움을 표했습니다.
야곱도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천사를 보고 죽는 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창32:30).
기드온도 하나님의 천사를 보고 죽는 줄 알고 두려워했고(삿6:21) 삼손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죽는 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삿13:22).
신약성경의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눅1:12)도, 양을 치던 목자들도 천사를 보고 두려워했습니다(눅2:9).
구약시대부터 신약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천사를 보면 죽는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들은 죄인이라 그분을 보게 되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생각한 거죠.
본문의 베드로가 “주님 나를 떠나시옵소서.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반응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경험과 자기 상식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주님을 만난 것이 마치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옵는 것 같아서 베드로가 자기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한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이사야가 천사를 보고서 죄인임을 고백한 것과 똑같은 장면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욥이 욥기서 38장부터 42장까지 70개가 넘는 질문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질문할 때 고백한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욥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가서 너무나도 죄악된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서 한 고백입니다.
본문의 베드로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하듯 예수님을 뵙고 자기 죄인임을 고백한 것이죠.
(적용)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시고 천사를 보내 만나 주실 때 어찌 꼿꼿한 자세로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임재를 모시는 예배를 시작할 때 다함께 일어서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거나 말씀가운데 내 심령의 죄악을 후벼팔 때 어찌 회개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겠습니까?
야곱도 기브온도 삼손의 부모님도 욥도 이사야도 사가랴와 목자들도 그리고 본문 속의 베드로도 모두가 하나님의 나타나심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며 무릎을 꿇은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를 통해 주님 안에서 자기 실존을 깨닫고 죄 용서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를 통해 이 땅의 것만을 목적으로 살아온 삶에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도록 하신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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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죠.
(은혜)주님께서는 죄인인 내게 찾아와 내 실체를 깨닫게 하셔서 새로운 삶을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주님께서 너에게 찾아왔을 때 너의 죄인됨을 주님 앞에 고백하며 무릎을 꿇은 적이 있더냐?”
“너의 실패와 좌절의 자리에 주님께서 찾아오셨을 때 너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님을 맞이한 적이 있더냐?”
“누구든지 주님 앞에 자기 죄를 고백하지 못한 자가 어찌 주님의 은총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겠느냐?”
“주님은 사랑이시지만 이사야처럼 베드로처럼 자기 죄를 회개하는 자들에게 사랑의 주님이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주님의 자녀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네 죄를 토하고 고백한 적이 없다면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야 하지 않겠느냐?”
“이사야가 주님을 만나고 베드로가 주님을 만났다고 해서 그 형제 안드레나 요한이나 야고보가 묻어가는 게 아니지 않느냐?”
“그들도 각자 주님을 만나 자신의 죄인임을 고백해야 1대1로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것 아니겠느냐?”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와 자기 죄를 고백하게 한 것처럼 그 은혜를 네게도 베풀어주시지 않겠느냐?”
(찬양)멀고험한 이세상길 소망없는 나그네길
방황하고 헤매이며 정처없이 살아왔네
의지할 것 없는 이몸 위로받고 살고파서
세상 유혹 따라가다 모든 것을 다 잃었네
무거운 짐 등에지고 쉴곳 없어 애처로운 몸
쓰러지고 넘어져도 위로할 자 내겐 없었네
세상에서 버림받고 귀한 세월 방탕하다
아버지를 만났을 때 죄인임을 깨달았네
눈물로써 회개하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어
죄악으로 더럽힌 몸 십자가에 못박았네
구원함을 얻은 기쁨 세상에서 제일이라
영광의 길 허락하신 내주 예수 찬양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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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에드워즈 목사의 일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목회하던 교구 내에 주정뱅이고 도박꾼이고 교회에는 나오지 않는 타락한 신자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이른 아침에 파랗게 질려 에드워즈 목사에게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천사가 나타나서 그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너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내년 오늘에 너를 불러가겠다”하고 말이죠.
그날부터 그는 술을 끊고 도박도 끊고 교회생활에 충실했습니다.
그러나 그 삶이 몇 개월 가지 않더니 그 발걸음이 뜸해지고 점점 열심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술도 다시 조금씩 마시고 도박도 조금씩 손대기 시작했습니다.
에드워즈 목사는 그를 권면하고 그가 본 꿈의 환상을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글쎄요 글쎄요”하면서 더욱 신앙생활에서 멀어졌습니다.
드디어 그는 이전 상태로 완전히 돌아갔고 이제는 목사님께 반항적인 말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무얼요. 그 개꿈을 가지고 그걸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지 않습니까?”
그러던 어느날 밤 그는 어떤 빠에서 술에 만취가 되어 계단을 내려오다가 떨어져서 목이 꺾이며 급사를 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드워즈 목사가 일기책을 찾아보니 그날이 바로 1년 전 그가 자신을 찾아온 날이었던 것입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자신의 꿈에 찾아온 주님을 진정으로 만났다면 그는 다시는 죄악의 길로 들어서지 말아야 하는 것이었죠.
설령 잠시 예전 길에 빠졌을지라도 주님께서 그 목사님을 통해 다시금 그를 깨우치길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다면 돌아섰어야 했죠.
하지만 끝내 주님의 긍퓰과 자비를 제 발로 걷어찬 그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혹여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꿈속에 나타나신다면 베드로처럼 죄인임을 고백하고 새로운 삶을 결단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때 누군가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죽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긍휼 아래 새로운 인생을 살 줄 믿습니다.
(예화2)미국 어느 도시에 사는 남매 메리와 존이 주말에 시골의 할머니댁에 놀러가게 되었습니다.
존은 삼촌이 선물로 사준 고무총을 가지고 가서 이것저것 쏘는 연습을 하며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가장 아끼는 오리가 걸어오는 걸 본 존이 고무총을 겨누고 오리의 대가리를 명중시켜서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존은 겁이 났습니다.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얼른 죽은 오리를 가지고 큰 나무 밑에 파묻고 낙엽으로 가렸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두근거리고 두려워서 할머니께서 잘 준비하신 저녁 식사도 하는둥 마는둥 했습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도 잠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눈만 감으면 할머니가 보이고 죽은 오리가 눈에 선하게 나타났습니다.
할머니를 보면 공연히 무섭기만 하고 도무지 괴로워 살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이튿날 아침 존은 결심했습니다.
어차피 잘못한 바에는 할머니께 말씀드려서 벌을 받아야 마음이 편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존은 할머니 방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인자한 음성으로 “존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존은 용기를 내어 모든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을 듣고 있던 할머니는 존을 안아 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존, 착하다. 내가 너의 잘못을 다 용서해주마.”
“사실은 어제 오후에 2층에 있으면서 네가 하는 일을 다 보았단다.”
“그래서 네가 이렇게 나에게 고백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어. 이제는 아무 걱정하지 마렴. 내가 다 용서했다.”
(적용)그 할머니의 손자들 메리와 존이 똑같아 보여도 실은 속의 심령이 다른 것 아닙니까?
똑같은 그리스도인처럼 보여도 속 심령이 하나님을 속이고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혹여라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죄로 인해 뭔가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 내게 알게 하신다면 기꺼이 회개하며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베드로처럼 주님의 긍휼 안에 새로운 인생 복된 인생을 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주님. 그래요. 주님께서 나의 죄인됨의 실체를 드러나게 해 주셨을 때 베드로처럼 회개하길 원하셨네요.”
“주님께서 내 죄를 용서해주시고 주님의 긍휼로 자녀삼아주셨는데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어요.”
“주님께서 주신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 살아왔고 맡긴 사명을 주님을 위해 사용하지 못했어요.”
“주님, 술취하고 방탕한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을 때 그가 진정으로 돌아서야 주님의 긍휼을 덧입는다는 것을 깨닫네요.”
“메리와 존이 똑같은 그 할머니의 손주 같아도 그 할머니는 존이 진정으로 회개하길 기다리고 있었어요.”
“주님,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것도 그가 주님 안에 회개하여 새로운 인생 사명자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셨어요.”
“주님께서 이 죄인인 저에게 찾아와 저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도 이 천 한몸 세상 유혹 다 멀리고 주님을 위해 살도록 하심 인 줄 믿어요.”
“이제 남은 인생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베드로처럼 축복의 통로로 살게 해 주세요.”
(찬양)주님 것을 내 것이라고 고집하며 살아왔네
금은보화 자녀들까지 주님 것을 내 것이라
아버지여 철없는 종을 용소하여 주옵소서
맡긴 사명 맡긴 재물 주를 위해 쓰렵니다.
천한 이몸 내 것이라고 주의 일을 멀리했네
주신이도 주님이시요 쓰신 이도 주님이라
아버지여 불충한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세상유혹 다 멀리하고 주의 일만 하렵니다.
주님 사랑 받기만 하고 감사할 줄 몰랐었네
주님 말씀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못했었네
아버지여 연약한 종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님 명령 순종하면서 주를 위해 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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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음주는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리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태어나셨습니까?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심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왜 재림의 주님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입니까?
주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 영생을 목적으로 살아갈 때 그들에게 상급을 주시고자 다시 오시는 것이죠.
그 주님께서는 지금도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자 천사를 통해 당신의 음성을 통해 친히 찾아와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때 이사야처럼 베드로처럼 자기 죄의 실체를 깨닫고 주님 앞에 회개하는 자들에게 새 생명을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거룩하심 앞에 진정으로 회개한 자가 어찌 주님을 속이면서 거짓되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의 은혜로 다시 태어난 자들은 진정으로 영원한 생명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이요 그런 자들에게 상급을 주시고자 이 땅에 재림의 주님으로 다시 오실 줄 믿습니다.
이사야에게 베푸셨던 그 은혜, 베드로에게 베푸셨던 그 은혜를, 저와 여러분에게도 베풀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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