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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발췌)오래 전 뉴스에 나온 사건입니다.
길에서 돈뭉치를 발견했는데 신고하지 않고 자기 주머니로 삼은 두 여인이 절도혐의로 검거된 이야기입니다.
부산에서 살고 있는 두 여인이 길에서 돈뭉치를 발견한 것이었죠.
5만 원짜리 지폐가 100장씩 묶여 있는 두 묶음, 총 천만 원이 든 돈뭉치였습니다.
두 여인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습니다.
그녀들은 사이좋게 500만원 한 묶음씩의 돈을 나눠 가졌습니다.
과연 그 돈이 어떤 돈이었을까요?
그 돈은 그 당시 77세의 노인이 손자들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4년 동안 돈이었습니다.
매달 20만 원씩 모은 피 같은 돈이었죠.
나중에 절도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두 여인 가운데 한 여인이 경찰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기독교 신자입니다. 그동안 너무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께서 내게 상을 주시는 줄 알았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그렇게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께서 상을 주시는 줄 알고 돈뭉치를 발견하고서도 신고하지 않고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돈뭉치를 잃고 넋이 나가 있을 주인을 먼저 떠올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남의 돈뭉치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으로 여긴다고 하니,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수는 없는 것이죠.
(적용)교회 임직식을 행하기 전에 임직자 교육이 있었습니다.
본래 그 날짜를 직장에 다니는 분들을 위해 토요일로 잡는다고 해서 아주 좋다고 했죠.
그런데 그 날짜를 갑자기 금요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나 난감하고 힘들었죠.
지방회 어른들이 결정한 사항이라 대놓고 볼멘소리를 못했는데, 왜 그렇게 날짜를 잡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세상에서 봉급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진 일터를 세상 속에 부름받은 선교지이죠.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부름받은 자신의 일터를 하나님의 통로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성실을 다해야 하는 거죠.
그래야 그곳에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빛과 소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금요일 날 교육을 받는다면 세상에 주어진 일을 박차고 나오도록 해야 하는 것이죠.
그렇게 할 경우 세상 사람들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향해 교회 일에 정신이 팔려서 저런다는 비난을 받을지 모르죠.
물론 어느 정도 위치에 있어서 출입이 자유롭다면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한 상황이라면 함께 일하는 일터 속에서 믿지 않는 자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성실을 다해야 하는 것이죠.
교회가 세상 속에 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렇게 배려하는 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0899457
(역배)알렉산드리아 배가 그레데섬의 미항을 출발해 좀 더 넓고 큰 뵈닉스 항구로 출항했죠.
처음엔 순풍이 불었지만 갑작스레 유라굴로 광풍이 휘몰아쳤습니다.
그 광풍은 바다에 익숙한 선원들도 처음 겪는 광풍이라 죽음의 광풍과도 같았습니다.
그로 인해 모든 곡물들은 물론 배의 기구들마저 자기들 손으로 모두 바다에 던져버렸죠.
그야말로 살 수 있는 희망조차 사라진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 상황속에서 바울이 일어서서 선포했죠.
‘여러분. 내가 속한 하나님,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어젯밤에 사자를 내게 보내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셨죠.’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할 것이고, 너와 함께 한 자들을 다 너에게 붙여줬느니라’
‘그러니 여러분 나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반드시 그렇게 되기를 믿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한 섬에 걸릴 것입니다.
바울이 그런 믿음으로 선포한 것은 자기 신념이 아니었습니다.
그때까지 바울도 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죠.
그도 사람인지라 그 배에 탄 275명의 사람들처럼 그 광풍 앞에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죠.
그런 바울을 알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바울에게 담대한 마음을 주신 것이었죠.
그렇게 14일째 되는 한 밤중이었습니다.
모두가 여러 날 먹지 못한 상황이라 초죽음이 된 상태였죠.
그런데 선원들은 바람과 파도소리의 반향을 통해 뭍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육감적으로 알게 되었죠.
그래서 두 번이나 수심을 재봤죠.
그러면서 선원들은 그 배가 암초에 걸릴지 몰라 배가 휩쓸리지 않도록 배 뒤편에 있는 닻을 4개나 내렸죠.
더 이상 떠밀려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고서 선원들과 승객들은 날이 새기를 고대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고대하다’는 헬라어 원뜻은 ‘기도하다’는 말이라고 했죠.
도대체 그들이 누구를 향해 기도했습니까?
본래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지만 바울이 한 말 때문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기도한 것이었죠.
그것 자체로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시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그들이 동시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셨을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도 이들이 하나님을 향해 해바라기처럼 간구하는 모습을 보였을까요?
그들이 기도하는 모습이 참된 신앙인들의 모습이었을까요?
(본문)오늘 본문 30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공들이 도망하고자 하여 이물에서 닻을 내리는 체하고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놓거늘”
그 사공들, 그 선원들은 이물에서 내리는 척하면서 거룻배를 바다에 내려 놓았습니다.
이물이란 뱃머리를 말하는 것이고, 거룻배란 구명정과 같은 작은 보트와 같은 배를 말하는 것이죠.
왜 그들이 뱃머리에서 닻을 내리는 척하면서 구명정을 내려놓는 것입니까?
276명 중에 배와 바다를 잘 알고 있는 그 선원들만 몰래 도망치기 위함이었죠.
그런데 그들이 누굽니까?
방금전까지만 해도 수심이 얕아진 것을 확인하고 하나님께서 구해주기를 간절히 기도했던 사람들 아닙니까?
하지만 그들은 기회가 왔다 싶어서 다른 승객들은 죽든지 살든지 상관치 않고 자기 목숨을 건지고자 도망치려 했던 것입니다.
그때 바울이 나서는데 본문 31절을 통해 바울이 말합니다.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이 백부장 율리오와 군인들을 향해 그 선원들을 보라면서 경고한 것이죠.
지금 그 선원들이 도망치려고 하는데, 그들이 이 배에 있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죠.
왜 그 선원들이 도망가면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그 선원들은 배와 바다에 관해 이골이 난 사람들이 아닙니까?
유라굴로 광풍을 맞아 배가 파손된 부분도 그 선원들이 고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 선원들이 자기네들만 살겠다고 구명정으로 도망쳐버린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죠.
바울은 그걸 갈파하고 율리오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말한 것이죠.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본문 32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
남들 몰래 도망치려던 그 선원들은 로마 군사들이 거룻줄을 잘라 버려서 이제는 도망도 못 가는 신세가 된 것이죠.
꼼짝없이 승객들과 바울과 같은 죄수들과 함께 배 위에 있어야 하는 처지죠.
그러니 그 선원들이 바울을 향해 얼마나 원망하고 비난했겠습니까?
(깨달음)그런데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상황과 환경을 믿음의 관점에서, 신앙의 관점에서 본다면, 과연 누가 비난받고 원망받을 일을 한 것입니까?
바로 그 선원들이죠.
그 선원들이야말로 믿음의 관점에서, 신앙의 관점에서 본다면, 나머지 승객들과 바울과 같은 죄수들에게 비난받아 마땅하죠.
왜 그렇습니까?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 배의 승객들로서 선박비를 내고 탄 사람들이죠.
그렇다면 그 선박비를 받고 일을 하는 그 선원들은 그 승객들이 도착할때까지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돌봐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죠.
그런 그들이 하나님께 구해달라고 날이 새기까지 기도했던 이유도 그것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막상 배가 잠잠해진 틈을 타서 그들은 자기들 목숨만 건지고자 도망치려 했던 것입니다.
그 선원들은 돈을 내고 자신들이 목숨을 맡긴 승객들의 목숨은 전혀 생각지 않은 것이었죠.
가장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그 선원들이 도망가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 선원들이라면 그들은 가장 이기적이고 한심한 선원들 아니겠습니까?
(적용)만약 본문의 알렉산드리아 배를 대한민국이라고 본다면 크게 두 부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요?
대한민국의 배에 선박비를 지불하듯 세금을 납부하는 국민과 그 세금을 받고 나라를 책임지는 공무원과 정치인들 말이죠.
그만큼 이 땅의 공무원과 정치인과 공기업 직원들은 국민의 안녕을 위해 성실을 다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공무원과 정치인지 나라의 위급한 상황이 닥쳤을 때 혼자 살겠다고 그 상황을 피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세월호 참사도 이태원 참사도 실은 그래서 일어난 것 아니겠습니까?
(적용2)그리고 알렉산드리아 배에 탄 사람들을 또 다른 두 부류로 생각해 볼 수 있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신앙인과 아직 구원받지 못한 세상 사람들로 말이죠.
그리스도인은 먼저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지 못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선원과 같죠.
그 소명을 감당코자 한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일터에서 그 누구보다도 성실을 다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일터에서 빛과 소금을 다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성실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만약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부름받은 하나님나라의 선원으로서 도리와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그리스도인로 인해 세상의 지탄을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길에서 돈뭉치를 발견하고 찾아주기는커녕 하나님의 선물로 여긴채 자기 주머니에 착복한 그리스도인과 다를 바 없겠죠.
그것은 마치 평일에 일터에서 빛과 소금을 감당해야 할 그리스도인이 교회 일을 핑계대고 하루를 공치사한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겠죠.
그러니 본문 속에 등장하는 그 선원들과 오늘의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나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인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우리 주님은 본문 속의 선원들을 통해 참된 그리스도인의 성실과 책임감이 어디에 있는지 일깨워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의 알렉산드리아 배에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선원으로 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겁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이 세상의 알렉산드리아 배에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선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느냐?”
“세상의 일터가 알렉산드리아 배요 그리스도의 선원답게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하는 것 말이다.”
“그러니 본문 속의 선원들과 달리 너는 너에게 부여한 일에 누구보다도 성실과 책임감을 갖고 임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공직에 근무한다면 세금을 낸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일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만약 네가 세상의 알렉산드리아 배에 부름받은 선원의 입장이라면 그 일에 배테랑이 되록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너에게 일을 맡긴 대표나 너에게 그 일을 의뢰하는 그 누구도 불편함이 없도록 성실과 책임감을 갖고 말이다.”
“그것이 너를 알렉산드리아 배의 그리스도의 선원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뜻과 섭리요, 그를 통해 복음 전도자로 삼으신 것 아니겠느냐?”
(찬양)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 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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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어느 집을 짓는 건축현장에서 세 명의 벽돌공이 땀을 뻘뻘 흘리며 벽돌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던 행인이 그분들에게 물어봤죠.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다까?”
그러자 첫번째 벽돌공은 “보시다시피 벽돌을 쌓고 있지요”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두번째 사람은 “하루치 돈벌이를 하고 있답니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요”하고 대답을 했죠.
세번째 사람은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요?
“저는 지금 이곳에 와서 살 사람들의 안식처를 짓고 있습니다.”
“이 집에서 쉼을 얻고 꿈을 꿀 수 있는 그런 안식처 말입니다.”
“이 집에 들어오면 삶에 희망과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정신적인 영향을 미칠 위대한 집을 짓고 있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말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어떤 일을 하든지 알렉산드리아 배에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선원으로 사는 사람의 자세 아니겠습니까?
단순히 벽돌을 쌓는 것이 아니라, 돈벌이 차원을 넘어, 참된 안식처와 삶에 용기를 줄 수 있는 그런 집을 짓는 자세가 바로 주님의 부름받은 선교지죠.
이 세상에 부름받은 일이 어떤 일이든지 간에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성실과 책임감을 다하는 그리스도의 선원들을 주님께서도 기뻐하실 테니 말이죠.
(예화2)하버드 대학의 로제츠 로제탄 박사가 학생들과 쥐를 상대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로제탄 박사는 학생들을 세 그룹으로 나눴습니다.
첫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 쥐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여러분은 행운아입니다. 천재적인 쥐를 다루게 돼서 여러분에게 큰 기대를 할 수가 있겠군요”
두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도 쥐를 주면서 이렇게말 했습니다.
“여러분은 보통 쥐를 다루게 되었으니 보통 정도의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세 번째 그룹의 학생들에게도 남은 그룹의 쥐를 주면서 이렇게 말을 했죠.
“여러분은 바보같은 쥐를 주게 되었으니 별로 기대할 것이 없겠군요”
그 후 6주간 같은 조건으로 실험을 하고 결과를 알아봤다고 합니다.
과연 그 실험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실험 결과 천재라고 소개한 쥐들은 천재처럼 능란하게 행동했고, 보통이라고 소개한 쥐들은 보통의 실적만 올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보라고 소개한 쥐들은 형편없이 행동하는 걸 알게 되었죠.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천재 쥐, 보통쥐, 바보쥐는 없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분류해서 학생들에게 나눠 준 것인데, 학생들의 태도가 각각의 쥐를 그렇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우리를 알렉산드리아 배의 그리스도의 선원으로 부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천재 쥐, 보통 쥐, 바보 쥐를 주신 분이 아닙니다.
내게 맡기신 일이 어떤 일이든지 간에 그 일을 부여 받은 나 자신의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죠.
그 일에 성실과 책임감을 갖고 살아가는 태도를 주님은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런 성실과 책임감으로 사람들을 섬기고 일하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선원답게 기뻐하실 테니 말입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알렉산드리아 배에 승선하여 일하는 그리스도의 선원과 같은 줄 믿습니다.”
“제가 어떤 선원처럼 일하며 살아야 할지 일깨워주시는 감사해요.”
“승객들이 돈을 지불하고 그 배에 탄 이상 최선을 다하고 책임감 있게 돌보는 빛과 소금의 선원으로 살게 해주세요.”
“건물을 지을 때도 누군가의 안식처와 꿈을 꿀 수 있는 자세로 일하는 태도가 빛과 소금의 자세로 임하는 줄 믿어요.”
“천재쥐나 보통쥐나 바보쥐는 없듯이, 이 세상에 어떤 자세로 임하는 가 중요한 줄 믿습니다.”
“오늘 저희에게 부여하신 그 모든 일들을 주님께서 부르시고 맡기신 그리스도의 참된 선원으로 섬기면서 살게 해주세요.”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신실하게 살게 해 주세요.”
(찬양)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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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 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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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도 이 세상의 알렉산드리아라는 배의 선원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 속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십자가 정신을 발휘하도록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선원으로 말이죠.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그런 선원들만 넘쳐난다면 내가 속한 알렉산드리아 배는 휘청거리고 파선당하지 않겠습니까?
순교자의 정신을 지닌 사람이 있는 알렉산드리아 배라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교회를 세울 수 있는 것이죠.
내가 속한 일터와 직장과 현장에서 우리 모두 성실과 책임감을 갖고 섬기는 그런 그리스도의 선원들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 정신을 구현하는 자들을 통해 우리가 속한 알렉산드리아 배는 더욱 선하고 아름답게 운항해 나갈 줄 믿습니다.
그런 복음의 통로, 빛과 소금의 선원으로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님께 고백의 기도 다짐의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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