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논지)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이 있죠.
“좋은 일이 마가 낀다”는 뜻이죠.
좋은 일이 있으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는 의미죠.
그것은 세상의 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일도 마찬가지죠.
이를테면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빼앗길뻔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일이 잘 해결됐고, 졸지에 재산도 늘어났죠.
그렇게 좋은 일이 일어났는데, 곧바로 안 좋은 일이 생겼죠.
무슨 일이었는가 하면, 그렇게 의미없는 소유의 증가로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긴 것이었죠.
그때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양보했죠.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고 말이죠.
결국 조카 롯은 에덴 동산처럼 보이는 곳, 그러나 멸망직전의 소돔과 고모라 땅을 향해 나아갔죠.
그때 아브라함은 헤브론 마므레 수풀로 나아갔죠.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었습니까?
나중에 소돔 왕이 연합군에 의해 패배할 때 그땅에 살던 조카 롯도 사로잡혀갔죠.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브라함은 롯을 구하고자 318명의 가신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되찾아 온 일이 있었죠.
(깨달음) 바로 그런 일처럼 믿음의 사람들에게 ‘호사다마’는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무언가 관점의 차이로 인해 서로 다른 결정을 하는 아픔도 함께 찾아올 수 있는 법이죠.
그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관게를 통해 일깨워주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그렇게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결별했을지라도, 훗날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해낸 모습을 보였던 점이죠.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조카 롯이 아브라함과 달리 자기 보기에 좋은 것을 택했을지라도, 아브라함은 그 조카가 더 잘 되기를 바랐던 것이었죠.
그렇지 않았던들, 조카 롯이 사로잡히든 말든, 포로로 끌려가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테니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카 롯의 생명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기에, 조카가 선택한 그 길을 더 격려했던 것임을 알 수 있죠.
(적용)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믿음의 관점에서 모두가 같은 뜻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죠.
그런다 다른 관점으로 믿음의 길을 추구했을지라도, 서로 격려하며 사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사실이죠.
그런 신앙인을 아브라함처럼 귀하게 여기시고, 더 큰 복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로 안디옥교회의 문제가 정리가 되었죠.
안디옥교회에 이방인들이 주님의 자녀로 들어올 때 할례와 같은 율법의 멍애를 짊어지게 하지 말라고 말이죠.
다만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우상의 제물, 음행, 짐승의 피를 함부로 먹지 않는 부분은 존중해 주도록 했죠.
다만 그 결정을 구두로만 하지 않고, 직접 편지로 써서 보내줬죠.
그때 안디옥교회 목회자인 바울과 바나바뿐만 아니라,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 출신인 유다와 실라까지 함께 보냈죠.
더욱이 유다와 실라를 하루나 이틀 정도만 안디옥교회에 머물게 한 게 아니었죠.
수일 동안 함께 안디옥교회에 지내면서,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그 결정에 대한 신뢰를 주었죠.
그리고 이제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다른 사본에는 실라가 안디옥교회에 더 머물렀다고 기록돼 있었죠.
이유인즉 바울과 바나바가 제2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바울이 실라를 데리고 떠난 게 타당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본에 기록된 내용일 뿐, 그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했죠.
그 당시에 안디옥교회에 머물렀던 실라든지, 아니면 유다와 함께 예루살렘에 내려간 실라든지, 왜 실라였냐, 하는 거였죠.
유다보다는 실라가 이방인선교에 더 적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이죠.
그만큼 실라는 안디옥교회에 머물면서 이방인들과 더욱 잘 어울리고, 서로 융화되고, 섞여 사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죠.
만약 실라가 예루살렘 교회의 예언자 곧 지도자라면서, 혼자 의롭고 고고한 척했다면, 어땠을까요?
이방인으로 구성된 안디옥교회 성도들과 밥도 안 먹고, 차도 안 마시고, 이불도 함께 덮지 않았다면 말이죠.
그랬다면 바울이 그런 실라를 아무리 지도자라고 해도 2차 선교여행에 데려갈 생각을 했겠습니까?
(깨달음) 그렇기에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교회생활이 무엇인지, 전도가 무엇인지, 복음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새로운 사람과 어울리는 것,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도 어울리는 것, 그것이 교회생활이자 전도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받은 특별한 자녀라 해도, 홀로 거룩하고 고고한척 하지 않고 어울려 사는 것 중요하단 뜻이죠.
그것이 교회가 부흥하고, 그것이 하나님나라가 성장하는 비결 중에 가장 중요한 비결이기 때문이죠.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유다와 실라가 예루살렘교회로 돌아간 상황에,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를 잘 섬기고 있는 그 때 일어난 일 말이죠.
본문은 무엇을 전해주고 있습니까?
이제 바울과 바나바에게 꺼릴 것 없이 모든 일이 잘 정리된 상태라, 아주 평안한 상태죠.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주의 문제로 한 동안 풍파를 몰고 왔지만, 그것이 말끔하게 정리된 상태였으니 말이죠.
그렇다면 바울과 바나바가 마음껏 목회해도 되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듯이, 그 두 사람과의 관계 속에 안 좋은 일이 생깁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길 때문이었죠.
바울과 바나바가가 안디옥교회에 눌러 있어도 되는데, 1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한 이들을 돌아볼 마음이 생겼죠.
그래서 바울이 바나바에게 함께 1차전도여행지를 돌아보며 그곳의 믿음의 사람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격려하자고 하죠.
바나바도 바울이 의지를 갖고 말하는 것에 감동을 받았던지, 그렇게 하자고 서로 합의를 했죠.
그런데 그 좋은 일이 문제가 발생했죠.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때 함께 했다가 떠난 자기 조카 요한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고, 바울은 반대의사를 표했죠.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오늘 본문 39절 말씀을 다시금 보시기 바랍니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원해) 우리말 성경은 ‘심히’라는 단어가 삽입돼 있지만 헬라어 원문은 본래 ‘심히’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다만 ‘다투어 피차 갈라섰다’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 말씀 때문에 우리가 곤혹스러워합니다.
왜냐하면 바울과 바나바,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산 지 수년이 흘렀는데, 어떻게 다투고 갈라설 수 있냐는 거죠.
그 때문에 어떻게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지도자들이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할 수 있죠.
그런데 ‘다투다’는 헬라어 원어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말 ‘다투다’는 헬라어 원어는 ‘파록쉬스모스’(παροξυσμός)는 ‘선동’(an inciting)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만큼 자기 주장이 옳다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내세우는 모습이죠.
그런데 이 단어가 다른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자극’(incitement)을 주다는 뜻입니다.
‘자극’을 주고, 또 ‘격려’하다는 말입니다.
(원성) 그 예가 쓰인 곳이 히브리서 20장 24절 말씀입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바울은 주님의 날이 가까올수록 모이기를 폐하는 이들을 좇지 말라는 것입니다.
설령 주님의 재림이 늦어질지라도 주님의 소망을 굳게 붙잡고, 서로 돌아보고,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라는 것이죠.
바로 이때 사용된 단어가 ‘파록쉬스모스’ 곧 ‘격려하다’는 뜻입니다.
(깨달음) 그렇기에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길에 의견이 다를 때, 우리가 어떤 관점으로 바라봐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때 의견이 다르다고 무조건 다투는 것으로만 해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언가 서로가 의견이 다를 때, 그때는 상대방의 뜻을 생각하여 더욱 잘하라는 격려의 관점으로 해석하라는 뜻이죠.
마치 조카 롯이 자기 보기에 좋은 소돔 성읍을 향할 때, 아브라함은 다툼의 관점으로 롯을 바라본 게 아니듯 말이죠.
오히려 그런 조카 롯의 인생 속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더욱 잘 되길 격려하는 마음을 품었듯이 말이죠.
만약 그런 마음이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망시킬 때, 어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드렸겠습니까?
(적용) 지금 바울과 바나바의 관점이 달라 다퉈서 갈라섰다고는 하지만, 왜 그것이 격려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이때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1차 전도여행 첫 도착지였던 구브로로 떠납니다.
그런데 이때 바나바와 결별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바나바와는 다른 길목, 곧 수리아의 위쪽 길리기아 지역을 향하죠.
중요한 것은 그 2차 전도여행 때 바울의 목적지는 소아시아의 중심지인 에베소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그때 바울 일행의 2차 선교지를 누구도 예상치 못한 유럽대륙 빌립보로 향하게 하셨죠.
그때 빌립보로, 데살로니가로, 베뢰아로, 아덴으로, 고린도로, 그리고 에베소에 잠깐 들렀다가 다시금 안디옥으로 오죠.
그렇게 성령님께서 인도하실 때, 바울이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
바나바와 의견이 다른 것은 틀린 게 아니었구나, 그 일을 통해 성령님께서 우리를 격려하는구나, 하는 걸 깨달았겠죠.
우리가 가는 유럽 대륙의 길목을 향한 선교를 더욱 잘 하도록, 바나바의 그 다툼을 통해 격려하는 일이라고 말이죠.
더욱이 그때 그 일이 다툼이 아닌 격려로 받아들였다는 생각은, 말년의 바울이 마가를 대한 태도에서 알 수 있죠.
디모데후서 4장 11절에 바울이 로마의 마메르틴 감옥에 있을 때 디모데에게 쓴 편지를 통해 그렇게 밝혔습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울은 비록 1차 전도여행 때는 성숙하지 못한 마가로 인해, 2차 전도여행 때 갈라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바나바와 갈라선 그 일을 주님의 격려로 받아들였기에, 말년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일을 할 때 관점이 달라 다투는 모습처럼 비칠지라도, 그것을 격려로 받아들이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점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우리 각자의 심령 속에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호사다마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헌신할 때도 서로에게 좋지 않는 관점이 생길 수 있다는 것 말이다.”
“그때 서로 다른 관점을 틀리다고 생각지 말고 다르다고 생각하여, 그 다른 점을 더 잘하도록 하는 격려로 받아들이길 원한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다른 관점으로 나아갈 때,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격려하는 마음을 품었듯이 말이다.”
“바울이 바나바와 다른 길목을 택할 때, 그 속에 성령님의 격려하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듯이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믿음의 사람들이라도 얼마든지 다른 관점을 갖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네가 인정하고 살아야 한다.”
“그로 인해 다른 것든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일로 더욱 도전받고 격려를 받았으면 좋겠다.”
“때로는 너와 다른 관점 때문에 네가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그 모든 일을 하나님의 나라의 일로 생각하고 더 힘을 냈으면 좋겠구나.”
“그때 네가 헌신하는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같이 더 큰 영광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더욱이 나중에서는 그 사람이 네게 얼마나 큰 격려로 작용했는지,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찬양) 약할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100이면 100, 다 동일한 생각과 관점을 갖게 하신 분이 아닙니다.
100인 100색이듯이, 다들 다양한 생각과 관점을 갖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다만 그때 호사다마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더욱이 서로 다른 의견 차이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그때 서로 다른 관점의 차이를 다툼으로 볼 게 아니라, 서로를 향한 격려의 관점으로 받아들이길 원하시는 주님이시죠.
마치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다른 관점으로 나아갈 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롯을 격려하도록 하는 마음을 품게 하신 것처럼요.
바울과 바나바가 다른 방향으로 2차 선교를 떠날 때, 바울의 그 길목이 실은 바나바의 격려였다는 것을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 나라를 위해 다른 관점이 생길 때, 그 관점을 서로를 향한 격려로 받아들이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풍성한 복음의 증인으로 삼는 축복을 누리게 하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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