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예화) 목포가 행정구역상 조금은 복잡한 것 같습니다.
같은 산정동이라 해도 우리 감찰회가 소속된 좋은 만남교회가 있는 그곳도 산정동이라고 나오니 말이죠.
왜냐하면 그 위쪽에 목포 가톨릭의 성지이기도 한 ‘산정동성당’이 있습니다.
제가 며칠 전 그곳 산정동성당, 정확히 말하면 레지오마리애 역사박물관에 다녀왔습니다.
‘레지오 마리애’란 1921년 9월 7일 아일랜드 더블린에 본부를 둔 프랭크 더프에 의해 창시된 가톨릭교회교회 평신도 사도직 단체입니다.
그 뜻이 ‘마리아의 군단(The Legion of Mary)’인데, 고대 로마의 군단(Legio Romae)에서 사용한 이름을 따온거죠.
성모 마리아의 지휘 아래 세속의 악과 맞서는 영적 군대라는 뜻입니다.
제가 그곳을 안내하는 분에게 물어봤더니, 아주 놀라운 역사에 대해 소개해 주셨습니다.
한국 최초의 레지오마리애는 1953년 5월 31일에 목포 산정동성당에 세워졌다고 말이죠.
당시 서리 하롤드 헨리 신부와 산정동 주임 토마스 모란 신부가 3개의 콘실리움 직속을 세우고 첫 주회를 시작했다죠.
그 당시 레지오 마리애 평신도 사도 단체에서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당시는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라, 전쟁 고아와 행려자와 병려자들이 많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그들을 치료해주고 돌봐주고 함께 아픔을 나눴는데, 바로 그 자리가 ‘옛날 콜롬반 병원’을 세운 자리였다고 하죠.
(깨달음)보통 유명한 조직과 단체는 위에서 아래로,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명한 레지오마리애란 조직은 목포에서 출발해 광주로, 그리고 서울과 우리나라 등지로 퍼져나갔다고 하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당시 레지오마리애에 소속된 이들이 목포를 깃점으로 전국의 전쟁고아와 병자들과 행려자를 먹이고 입혔던 것 말이죠.
왜 그들이 그 같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주님께서 이 세상에 그런 빛과 소금의 삶을 본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이죠.
주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이 세상에 나눠주셨기에, 그들도 그 삶을 본받아 목포와 전국에 실천했던 것이죠.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돌보고 치료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죠.
더욱이 깨끗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 조차 꺼려합니다.
그만큼 자기 자신을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만 행려자와 병려자에게 자기 삶을 나눌 수 있는 것이죠.
(적용)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런 삶을 원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땅에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모든 자들에게도 그런 삶을 원하시는 것이죠.
나 홀로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 뿐만 아니라 아프고 병든 이들과 함께 하며 살아가는 것 말이죠.
상처나고 힘든 이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나누고 베풀며 사는 그 삶 말입니다.
물론 그런 삶을 살면 때로 냄새나고 더럽다고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때로 냄새도 나고 더럽다고 오해받는 것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노인을 섬기는 삶을 사는 요양보호사들에게는 노인의 냄새가 나는 것은 당연하듯이 말이죠.
고아원에서 섬기는 분은 고아들의 냄새가 나는 게 당연하듯 말이죠.
양로원을 섬기는 이들은 양로원의 그 특유의 냄새를 풍기는 게 당연하듯 말이죠.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더럽고 추한 냄새를 풍기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이죠.
그런 우리를 구원코자 우리 주님께서 하늘보좌를 버리고 친히 더럽고 냄새는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이 더럽고 추한 이 땅에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우리도 내 곁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이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나누는 것이죠.
그것 때문에 때로는 냄새난다고 더럽다고 오해받아도 기꺼이 감수하며 사는 삶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예루살렘 모교회가 이방인 크리스천의 할례문제에 대한 공의회의 매듭을 지었죠.
이른바 이방인이 주님께 나아오는 것을 기쁨으로 받되, 그들에게 할례와 같은 율법의 멍애를 매지 않도록 하라고요.
물론 유대인들이 금기해 온 이방신전의 제사나 음행이나 짐승의 피는 함부로 먹지 말도록 하라고 했죠.
바로 그런 결론내용을 편지에 써서 바나바와 바울, 또 유다와 실라 편으로 보내줬습니다.
그때 그들 네 사람은 그 편지를 갖고 예루살렘에서 480km 떨어진 안디옥교회로 내려갔죠.
그리고는 안디옥교회 성도들을 다 불러모아 그 결론 내용을 다 읽어줬는데, 모두가 기뻐하고 위로를 받았죠.
물론 그들이 모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누군가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임을 지난 시간 살펴봤죠.
이른바 바울과 바나바의 수고와 헌신, 또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베드로 사도의 수고와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죠.
오늘도 가정이든, 교회든, 그 어떤 단체와 조직이든 그곳의 기쁨을 위해서는 누군가 수고와 헌신이 있는 것이라 했죠.
(전개) 오늘 읽은 말씀은 바로 그 상황에서 유다와 실라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본문 32-34절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없음”
유다와 실라는 선지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만큼 그들도 초대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처럼 지도자급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더욱이 유대인들은 연장자를 먼저 소개하는 관습이 있기에 실라보다 유다가 더 연장자임을 알 수 있죠.
바로 그들 두 사람도 안디옥교회에 와서 바울과 바나바처럼 모든 성도들에게 그 결의된 내용으로 권면했다는 뜻이죠.
그리고 “얼마 있다가” 곧 여러 날 동안을 안디옥교회 성도들, 또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머물렀다는 뜻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만약 하루나 이틀 정도만 그 편지에 결의된 내용을 전하고, 떠나버렸다면 누군가는 그 내용을 의심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여러 날 동안 안디옥교회 성도들과 먹고 마시며 일하며 함께 지내면서 격려했을 때 어떤 느낌을 받을까요?
그들이 전하는 말을 신뢰하게 되고,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여러 날 있다가, 이제 예루살렘교회로 다시금 돌아가는데, 형제들 곧 성도들이 전송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34절 말씀은 ‘없음’으로 기록돼 있는데, 각주 3번을 보면 뭐라고 기록돼 있는 내용이 있죠.
“어떤 사본에, ‘실라는 그들과 함께 유하기를 작정하고’가 있다”는 내용입니다.
(깨달음)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본래 성경의 원본은 없고 사람들이 필사한 사본만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본들 중에 가장 원본에 가까운 사본을 구별해내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것이 사본학입니다.
그 중에 가장 원본에 가까운 것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죠.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 긴 내용보다 짧은 내용으로 된 것, 쉬운 내용보다 어려운 내용으로 된 것이죠.
그런 관점으로 보면 각주 3번의 그 내용은 누군가 첨가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그 부분의 필사자는 그렇게 기록을 했을까요?
바로 본문 40-41절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 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전도여행을 떠나는데, 그때 요한 마가 때문에 둘이 갈라서게 되죠.
그때 바나바는 다시 요한 마가를 데리고 떠나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떠났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실라를 데리고 떠났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안디옥교회 성도들과 여러 날 있다가 유다와 실라가 떠난 게 아니었다는 것이죠.
유다는 떠났을지 몰라도, 적어도 실라는 떠나지 않고 안디옥교회에 함께 살았다는 뜻이 되는 것이죠.
그래야 바울이 그 실라는 데리고 제2차 선교여행을 떠날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그 사본에만 담겨 있는 것이기에, 꼭 그렇게 실라가 안디옥교회에 함께 살았다는 것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실라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유다와 함께 예루살렘교회로 되돌아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더라도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에 되돌아간 그 실라를 다시금 데려와서 함께 2찬 선교여행을 떠난 셈이 되는 것이죠.
(적용) 그렇다면 왜 하필 유다가 아닌 실라를 데려갔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유다와 실라 둘 다 선지자라고, 곧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둘 다 여러 날 동안 안디옥교회에 머물다가,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먹고 자면서 살았는데 말이죠.
그러나 바울이 보기에 유다보다는 실라야말로 제2차 선교여행의 적임자라 판단했기 때문이겠죠.
왜죠? 유다보다는 실라가 이방 세계에 대해 열린 마음과 자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안디옥교회는 주로 이방인들이 모여든 교회요, 그들과 아무런 거리감도 없이 함께 지냈던 사람은 실라였기 때문이죠.
이를테면 노인정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 노인과 말 벗을 해 줄 수 있는, 노인에게 맞장구를 쳐줄 수 있는 사람이듯.
고아원에 어울리는 사람이 고아들과 함께 잘 놀아줄 수 있는 사람이듯 말이죠.
그렇듯 이방인들에게 좀 더 다가서고, 유대인이라는 자기 편협함을 떨치며 어울렸던 사람이 실라였다는 점입니다.
만약 그 실라가 그랬다면 어땠을까요?
“나는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인데, 어찌 이방인들과 어울릴 수 있겠냐?”
“나는 예루살렘교회의 선지자인데, 어찌 이방인들과 함께 잠을 잘 수 있겠느냐?”
그렇게 안디옥교회에서 여러 날 지냈다면, 결코 바울은 그를 2차 전도여행의 동료로 데려가지 않았겠죠?
바꿔 말해 실라는 그만큼 이방인들과 함께 먹고, 자고, 말하고, 배려하는 그 모든 삶에 자신을 내어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들을 통해서도 낯선 이방인, 곧 교회 밖 사람들을 품고 섬기며 사는 은혜를 베푸신 거죠.
(주음성) 그래서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으로 우리에게 지금 말씀하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나는 네가 레지오 마리애 평신도 사도 단체들처럼 전쟁 고아와 행려자와 병려자들의 친구로 살았으면 한다.”
“나는 네가 유다와 실라처럼 수리아 이방인들과도 어울리고 잠도 자고 말벗도 하는 모습으로 살면 좋겠구나.”
“주님의 너를 구원코자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세상 낮고 천하고 냄새나는 곳에 오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주님을 본받아 이 세상에 냄새나고 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벗으로 살았으면 좋겠구나.”
“그것 없이 어찌 주님의 빛과 소금으로 살 수 있겠느냐?”
“레지오 마리애 평신도 사도 단체 사람들이 6·25동란 이후 병든자와 행려자들을 먹이고 입혔던 것처럼 말이다.”
“유다와 실라, 그 실라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내려놓고 짐승처럼 냄새나는 이들과 어울려 먹고 잤듯이 말이다.”
“네가 그런 마음으로 살 때 네 주변이 천국이요, 네 주변 사람들이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겠느냐?”
(찬양) 주 사랑이 나를 숨쉬게 해 세상 그 어떤 어려움 속에도
주 은혜로 나를 돌보시며 세상 끝날까지 지켜주시네
주 사랑이 나를 이끄시네 내가 갈 수 없는 그 곳으로
주의 사랑 나를 붙드시며 세상 끝날까지 인도하시네
주님만이 내 아픔 아시며 주님만이 내 맘 어루만지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주님만이 내 능력이시며 주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발췌) 이재철 목사님의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초대예루살렘교회가 이 땅의 모든 교회의 표본이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유무상통의 삶, 가진 자는 그 만큼 가진 것을, 또 없는 자는 그 없는 것만큼 주님께 내어놓았죠.
그리고 그것을 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두가 함께 ‘통용’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통용’하다는 헬라어 단어가 ‘코이노스’(κοινός, common)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7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에 손을 대는 것을 부정한 행위로 간주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음식을 먹으면 곧 자기 자신을 더럽히는 행위로 생각한 것이었죠.
그것을 유대인들의 전통으로 여겨왔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씨지 않는 채 음식을 먹은 걸 부정하게 여긴 거죠.
그 부분에 대해 마가복음 7장 5절에 이렇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중요한 것은 그때 말한 ‘부정한 손’ 곧 ‘부정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가 앞서 말한 ‘통용하다’는 ‘코이노스’입니다.
(깨달음) 무엇을 생각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까?
누구든지 자기 물건을 혼자 사용하면 보다 깨끗하게 사용할 수 있죠.
하지만 같은 물건을 누군가와 공동으로 사용하다보면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것이 ‘코이노스’의 참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교제’ ‘친교’라는 단어가 바로 그 ‘코이노스’에서 파생된 ‘코이노니아’입니다.
교제나 친교를 위해서는, 누군가와 함께 어울리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공동의 것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적용) 유다와 실라가 아무리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안디옥교회 성도들과 함께 먹고 잤기에 코이노니아가 일어난 것이죠.
유다와 실라가 유대인이라면서, 자기 홀로 깨끗한 척 고상한 척 의로운 척 살았다면 누가 그들과 어울릴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죠.
내가 누군가와 친교를 나누고 교제를 나누고, 누군가를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함께 교제하는 걸 말하죠.
내 것을 그 사람과 나누고, 함께 쓰고, 함께 받아주고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설령 그 사람이 냄새가 나고, 세상적인 떼가 묻어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냄새하고 세상적인 떼가 묻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함께 품고 사는 것입니까?
본래 냄새나고 더럽고 추한 죄많은 나를 우리 주님께서 먼저 품어주시고 사랑으로 코이노스해 주셨기 때문이죠.
(내적음성)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기도드릴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죠.
“그래요, 주님. 저는 본래 냄새나고 추하고 더러운 때로 가득차 있던 영적인 죄인이었어요.”
“우리 주님께서 저를 품어주고 교제해 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여전히 죄가운데 있었을 거예요.”
“주님, 주님의 그 사랑에 힘입어서 살게 해 주세요.”
“유다와 실라가 이방인들이 더럽다고 냄새난다고 함께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주님께 인정받지 못했을 거예요.”
“주님, 지금도 세상에는 냄새나고 더럽고 추한 사람들, 세상적인 때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오늘부터라도 내 곁에 그런 세상 사람들을 품고 섬기면서 사는 코이노스의 삶을 살게 해주세요.”
“그리하여 한 영혼이라도 주님 품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찬양) 주님만이 내 아픔 아시며 주님만이 내 맘 어루만지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주님만이 내 능력이시며 주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본래 더럽고 추하고 냄새나는 죄인 중의 죄인 아니었습니까?
그런 저희들을 주님께서 사랑으로 품고 안아주시는 코이노스의 삶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안디옥교회에 들어오는 이방인들을 품는 코이노스의 삶을 살았습니다.
유다와 실라도 홀로 고상한 척 깨끗한 척 의로운 살지 않고 안디옥교회 이방인들과 어울리며 먹고 잤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나 홀로 고상한 척 깨끗한 척 의로운 척 하지 않고 누구라도 품는 바울과 실라처럼 사십시다.
그때 우리의 그 섬김과 사랑을 통해 주님께서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을 건져올리는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것이 레지오 마리애와 같은 사도들, 주님의 빛의 군사로 우리를 부르신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축복의 주인공들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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