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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집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부인이 받지 않고 다른 여자가 받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네, 저는 파출부입니다”
이제 남편이 주인아주머니 좀 바꿔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파출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 아주머니는 남편분과 침실로 드셨는데요? 들어오지 말라고 했어요. 누구시죠?”
그러자 그가 말합니다.
“헉! 남편이라고 했습니까?”
“예, 야근하고 오셨다던데요?”
“아주머니. 이백, 아니 오백, 드릴 테니 좀 도와주세요. 부탁입니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는데요?”
“몽둥이 하나 들고 몰래 침실에 가서 남편 뒤통수를 사정없이 내리쳐서 기절시키세요.”
“그리고요?”
“만약에 마누라가 발악하면 마누라도 같이 때려눕히세요. 뒷일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부탁입니다”
파출부는 잠시 망설이더니 한번 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전화기도 그냥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전화 수화기를 통해 그렇게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으악, 아이구. 으악, 으악.”
잠시 후 파출부가 다시금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요. 둘 다 기절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아주머니. 잘했습니다. 두 사람을 묶어두세요.”
“그리고는요?”
“거실 오른쪽 구석에 다용도실이 보이죠? 그 안에 끈이 있으니 가져오세요”
파출부는 끈을 찾으러 다용도실을 찾았습니다.
한 참을 찾아도 다용도실이 보이지 않아 전화기에 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집엔 다용도실 없는데요?”
그러자 그 남편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거기 532-3788 아닌가요?”
그때 파출부가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어머. 아닌데요? 잘못 거셨는데요?”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 같습니까?
번지수를 잘못 찾으면 이런 사단이 난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죠.
아무리 공을 들이고 노력해도 번지수를 잘못 찾으면 헛수고라는 사실입니다.
(적용)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서 큰 결실을 이루어냈어도 그게 무가치한 삶이었다면 그야말로 헛수고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나의 창조주요 나의 구원의 주님으로 모신 인생과 자기 자신이 인생에 주인이 되어 사는 차이가 바로 그것이죠.
내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인생은 이 땅의 것만을 위해 애쓰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생의 끝은 이 땅에서 허무하게 죽는 것으로 끝나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머잖아 하나님께로 돌아갈 인생임을 아는 인생은 영생의 나라를 위해 애쓰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생의 끝날에 그 인생의 숨을 거두어가시는 하나님나라에 영원히 안식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번지수를 잘 알고 사는 복된 인생이지 않겠습니까?
그런 인생을 사는 사람은 어떤 환경이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시편은 총 150편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그 시편의 시들은 율법시도 있고 비탄의 시도 있지만 찬양시가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중에 모세가 쓴 시도 있고, 다윗과 솔로몬, 또 아삽과 에단과 고라 자손이 쓴 시편도 있죠.
150편의 시편 중에 다윗이 쓴 시는 73편이나 됩니다.
물론 150편의 시편 중에 작자 미상의 시는 50편이나 됩니다.
시편 95편-100편도 실은 작자 미상의 시죠.
그런데 그 시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에 대해 찬양과 감사의 고백을 하는 신정시(神政詩)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00편은 신정시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찬양는 시편들 중에 6번째 시편입니다.
이 100편의 표제어는 ‘감사의 시’입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물을 들고 성전문을 향할 때 불렀던 감사와 찬양의 시입니다.
(전개)이 시편기자는 이스라엘 백성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전을 향해 하나님께 예배하러 갈 때 어떻게 하라고 외칩니까? 1-2절에 나와 있죠.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온 땅이여’란 이스라엘 모든 자녀들 곧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죠.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하나님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 하고 말이죠.
‘즐거운 찬송을 부르다’는 히브리어로 ‘루아’(רוּעַ)는 여리고성을 정복할 때나 광야행진과 전투 때 외친 나팔과 큰 소리였죠.
그 정도로 큰 소리를 다해서 하나님께 즐거운 찬송을 부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권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개처럼 끌려다니는 인생을 살았는데 그곳에서 해방시켜주셨으니 어찌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죠.
한나가 자식을 낳지 못해 대적 브닌나에게 수모를 받으며 개처럼 끌려다녔는데 하나님께서 아들을 낳게 해 주셨을 때 어찌 기쁨으로 섬기지 않을 수 있었겠냐는 것이죠.
태풍 힌남노로 중학생 아들을 잃었지만 그 아들을 천국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때 어찌 그 어머니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로 나아가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깨달음)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 인생에 넘기 힘든 성벽과도 같은 장애물을 넘어서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큰 소리를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는 거죠.
내 인생에 개처럼 끌려다니는 인생에서 해방을 맞이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앞에 기쁨으로 섬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런 은혜를 받았을 때에만 하나님께 큰 소리로 찬양하고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까?
병상에서 수술을 하고 난 뒤에 그토록 갈망하던 방구 한 번 뀌였을 때나 물한 모금 커피 한모금 마실 수 있는 것에도 감사하고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더욱이 인생의 태풍을 맞이할 때도 힘없이 휩쓸려가는 그런 상황에 처할지라도 그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맡기며 사는 자들은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은혜가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양)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로운 봄철에 감사 외로운 가을 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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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본문 1-2절은 우리가 어떤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면서 그 분께 나아가야 할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기쁨을 다해 섬기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 본문 3절은 이렇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함께 읽어보실까요?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왜 우리가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지, 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겨야 하는지, 왜 우리가 그 분 앞에 나아가야 하는지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그분의 것이요 그 분의 백성이기 때문이요, 그분이 기르시는 양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원해)여기에서 강조하는 단어, 반복적으로 나온 단어가 무엇입니까?
“그”라는 단어가 4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란 히브리어 ‘후’(הוּא)인데 ‘엘로힘’(אֱלֹהִים)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모시지 않는 자들은 그 인생의 번지수가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인생 아닙니까?
기껏 애쓰고 노력해도 그 끝은 이 세상의 무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원숭이의 후예처럼 살다가 짐승처럼 무의미하게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창조주로 모시고 사는 자들은 그 인생의 번지수를 잘 알고 살아가는 자들이죠.
그런 사람들은 원숭이의 후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다가 이 땅에서 사라지는 날 저 천국에서 두 눈을 뜰 것입니다.
바로 그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있으니 어찌 하나님께 찬양하며 나아갈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죠.
더욱이 “우리는 그의 것이요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죠.
‘그의 것’이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의 백성’이란 하나님과 언약식을 체결한 이스라엘 백성들,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말하는 것이죠.
‘그의 기르시는 양’이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목자되심을 믿고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목초지를 따라 사는 자들을 말하죠.
이전에는 원숭이의 후예처럼 내게 주어진 인생을 내 멋대로 짐승처럼 살았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사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죠.
그런 인생을 사는 자들에게 어찌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이끄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겠냐는 것이죠.
그런 자들을 향해 이사야 43장 1-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깨달음)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물과 불 속에서 건져주시겠다는 말씀이죠.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생을 믿는 자들을 어찌 하나님 아버지께서 책임져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라는 물을 지날 때도 하나님께서 그 물결이 침몰치 못하도록 그 백성을 보호해주셨죠.
다니엘의 새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용광로와 같은 뜨거운 풀부물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불꽃이 사르지 않도록 지켜주셨습니다.
바로 그런 은혜로 지금도 당신의 자녀들을 친히 돌보시고 먹이시고 입히시고 이끄시는 아바 아버지라는 사실이죠.
(적용)그렇기에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내 인생의 번지수를 잘 찾아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사는 자들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져주시는 줄 믿습니다.
내 인생의 물결이 넘칠지라도 내 인생에 불길이 치솟아 오를지라도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사는 자녀들을 지금도 친히 돌봐주시는 줄 믿습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은혜)저와 여러분들이 인생의 번지수를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는 은혜를 누리길 원하신다는 거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네 인생의 번지수를 잘 찾아가며 살고 있느냐?”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사람처럼 네 인생의 번지수를 세상 사람들처럼 원숭이의 후예라고 생각하며 사는 건 아니더냐?”
“너는 네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의 은혜로 다시 태어난 자인 줄 믿고 있느냐?”
“네 인생은 이 세상이나 사탄의 세력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속한 자인 줄 믿고 있느냐?”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자들의 인생은 물이 넘칠지라도 불꽃이 타오를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지켜주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인생의 번지수를 하나님 아버지께 두고 사는 자인지 다시금 점검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유한한 이 땅의 것에 번지수를 두고 사는 자가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에 번지수를 두고 사는 모습 말이다.”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네 인생을 의탁하며 사는지 말이다.”
“애굽에서 나와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물결 앞에 벌벌 떨던 모습과 달리 너는 그런 상황속에서도 영적인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굳게 나갔으면 좋겠구나”
“너는 다니엘의 새 친구처럼 불꽃이 너를 사를지라도 천군 천사로 너를 돌보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며 살았으면 좋겠구나.”
“그런 믿음으로 세상 속에서 살 때 세상 사람들이 너를 비웃고 조롱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코 너를 지키시고 돌보시는 은혜를 베풀지 않겠느냐?”
(찬양)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많이 알고 계시며
하나님은 너를 만드신 분 너를 가장 깊이 이해하신단다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분 너를 쉬지 않고 지켜보신단다
그의 생각 셀 수 없고 그의 자비 무궁하며
그의 성실 날마다 새롭고 그의 사랑 끝이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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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경상도 영주의 영주 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내고 지금은 이사장으로 섬기는 강경훈 장로님의 젊은 시절 이야기입니다.
그분은 일제 말엽에 보급대로 끌려가 채석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채석장의 하루일과는 아침 일찍 일어나 바위들마다 구멍을 뚫고 그 구멍들마다 다이너마이트를 집어넣는 작업이었죠.
그 작업을 점심시간 이전까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점심시간 바로 직전에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놓고 돌을 부숴뜨린 후에 점심을 먹고 오후에 돌을 날랐죠.
그날도 어김없이 오전일을 마치고 다같이 둘러 앉아 점심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그날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식전에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개 한 마리가 와서 기도하는 장로님의 도시락을 물고 가는 것이었죠.
그 분이 기도를 마치고 보니 개가 자신의 도시락을 물고 저만치 가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조롱을 했겠습니까?
“배고픈데 빨리 먹지 무슨 기도는 기도냐! 하나님이 계신다면 저 도시락도 안 지키시고 어디 계신단 말인가!”
다들 그렇게 그 분을 조롱했고 그 분이 믿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장로님은 도시락을 찾으러 개를 쫓아갔습니다.
그런데 개는 장난을 치듯 잡힐 만큼 가까이 가면 얼른 도망치고 또 천천히 가면 개도 천천히 가는 것이었죠.
어느새 백여 미터를 넘어 이 백여 미터 가까이 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개는 도시락을 놓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었죠.
그때 그 장로님이 도시락을 주어 돌아서는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가 그 장로님이 앉아서 밥을 먹던 그곳에서 다이너마이트가 ‘꽝’하며 터지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오전에 바위 구멍에 넣어 뒀던 다이너마이트가 다 터진 줄 알았는데 그중에 불발탄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곳에 모여 점심을 먹던 사람들은 다 죽고 개에게 도시락을 빼앗겨 멀리 온 그 장로님만 살아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섬기며 하나님의 소유된 자녀로 사는 자들의 인생을 그렇게 책임져주시는 분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에서 건져주시고, 다니엘의 세 친구를 풀무불 속에서 건져주신 것처럼, 그 장로님의 인생을 다이나마이트 속에서 건져주신 것 아닙니까?
왜요?
온갖 비굴한 상황 속에서도, 세상 사람들이 조롱하고 멸시하는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귀하게 섬기는 자들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친히 책임져주시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예화)이번에 이태원 할로윈 압사 희생자가 156명이나 되는데, 대부분이 10-20대였습니다.
1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면, 다들 생각하는 게, 경찰만 잘 배치해서 질서만 지켰더라도 그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을 하죠.
그 속에서 크리스천인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할로윈 축제의 기원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죠.
할로윈 축제는 영국과 아일랜드와 프랑스에 살던 켈트족이 만들어낸 것으로 죽은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음식을 준비해 죽음의 신에게 바친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죠.
그것이 점차 발전해 귀신이 자신을 헤치지 못하게 하도록 귀신과 같은 복장으로 꾸며서 축제를 벌이는 행사가 되었다는 것이죠.
그만큼 할로윈 축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임을 행사임을 알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3년 만에 풀린 그 행사를 단순한 축제라고 생각한 채 참여했다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아이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겠습니까?
그 아이들 중에는 하나님을 믿지만 할로윈 축제의 배경을 전혀 모르고 참여한 아이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마치 세월호 안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만 믿은 채 아무런 상황도 모른채 물 속에서 죽어가던 아이들처럼 말입니다.
156명이나 되는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도하는데 그런 내용이 인터넷 상에 올라왔었습니다.
조로증에 걸려서 일찍 늙는 아이가 있었는데, 자기 동료들과 같이 학교에 다닐 수가 없는 처지였죠.
그래서 혼자 집에서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그 아이가 선생님께 묻는 것입니다.
“선생님! 나는 왜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늙어야 하나요?”
그러자 가정교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밤하늘에 별들이 있지? 그 중에 너는 일찍 떨어지는 별똥별이야”
그러자 그 아이가 다시금 물었습니다.
“선생님! 왜 나만 별똥별이 되어야 하나요?”
그때 선생님이 이렇게 말해줬습니다.
“그것은 너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지.”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무엇이라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베드로도 감옥에 갇혔고 야고보도 갇혔지만 하나님께서는 야고보를 순교로 부르셨고 베드로는 살려내셨죠.
왜죠? 그들의 인생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유황불로 멸하셨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성 사람들은 안가려고 하는 요나를 억지라도 보내서 구원케 하셨습니다.
왜죠? 우리는 모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기 때문이죠.
(적용)할로윈 축제 때 왜 어린 생명들이 참사를 당해야 했습니까?
누구든 그 현장에서 죽고 누구는 그 현장에서 살아남게 되었습니까?
영적 세계로 보자면 그 일은 분명코 사탄의 세력들이 조장한 일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도 없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어린 생명을 데려가셔야 했을까요?
그 자녀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자녀의 부모가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모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주권속에 있는 일입니다.’, 그것이 정답이죠.
아무리 사탄이 주도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욥의 모습처럼 사탄의 세력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내 주변에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것이 복된 일이든 그것이 참사를 당한 일이든, 그 번지수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올곧게 섬기는 신앙인의 모습이요, 그런 자가 영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향해 참된 번지수를 갖고 사는 자인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이 시간에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 인생의 번지수가 틀리지 않도록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그 장로님이 다이나마이트를 설지하고 밥을 먹을 때 다들 지켜주지 않는 하나님께 기도한다면서 조롱했지만 하나님은 개를 통해서도 건져주셨어요.”
“그러나 때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도, 심지어 어린 생명들도, 일찍 데려가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됩니다.”
“왜 나만 일찍 늙고 죽는 조로증에 걸렸는지, 156명 중에 꽃도 피지 못한 어린 생명들이 죽어야 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설령 그 모든 일을 사탄의 세력이 주도했다 해도, 그 위에 계신 하나님의 주권 속에 달려 있는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주님의 양으로 사는 제게 복된 일이 다가올 때 겸손케 하시고, 화가 된 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복으로 해석하여 사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
(찬양)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 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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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보혈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요 그 분의 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를 물가운데서 불가운데서도 다이나마이트 폭발 속에서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섬기는 자녀들에게도 화가 일어날 수 있고 심지어 어린 생명도 데려가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세력이 주도하는 일을 분별할 수 있지만 그 위에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복된 일을 베푸실 때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화가 된 일을 맞이할 때 영원한 관점에서 해석하는 믿음의 자녀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언제 어떤 상황속에서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그분이 지으신 그 분의 백성이요 그분이 돌보시고 이끄시는 양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한 번지수, 영원한 생명의 번지수를 하나님께 두고 사는 복된 인생인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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