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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는(마5:1-10)_20220828주일설교_팔복강해설교(2)

by 권또또 2022.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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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 나폴레옹은 ‘코르시카’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나 하사관으로 군생활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프랑스의 황제가 되어 유럽을 거의 정복할 정도로 커다란 성공을 거둔 입지전적인 인물이죠.

그런 성공을 거두면서 그 한 말은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다”였죠.

그가 말한 그대로 그의 지혜는 완전했고 그가 하는 모든 일도 실패가 없는 것 같았죠.

 

그런데 유럽의 최동부 지역인 러시아마저 정복하려는 꿈을 가지고 진격하던 중에 그는 실패하고 말았죠.

워털루라는 곳에서 그가 이끄는 부대가 영국군에게 패하고 말았던 것이죠.

그로 인해 그는 세인트 헬라나라는 섬에 유배돼 52살에 고독하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왜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패했을까요? 그의 준비나 추진력이 부족해서였을까요?

그 이유는 전적으로 하늘에 달려 있었습니다.

영국군과 싸우기 하루 전날 나폴레옹의 군대는 잘 훈련된 군대와 수많은 말들과 최신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죠.

그러니 나폴레옹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만만했고 그 어느때보다도 승리를 확신했죠.

 

하지만 그날 밤 그들이 야영하고 있던 곳에 밤하늘의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비가 얼마나 많이 쏟아졌는지 산 위의 흙들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그 토사는 그들이 야영하고 있던 진지까지 흘러넘쳤습니다.

그러니 그 진흙뻘에 대포도 총도 다 묻혀 버렸고, 잘 달리던 말조차 쓰러져버렸습니다.

군인들도 그 밤에 진흙 속에 묻힌 대포와 총과 말들을 건지다가 지쳐버렸습니다.

바로 그런 일들로 인해 다음날 전투에서 패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깨달음)나폴레옹에게 불가능은 없습니까? 우리에게 불가능은 없습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유한하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적용)이 세상 모든 것에 무한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 자기 무능함과 연약함을 고백하며 겸손하게 의지하는 인생이 복된 인생 아니겠습니까?

자기 인생이 긴 것 같아도 하나님 앞에서 손 한 뼘 길이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아는 인생이 지혜로운 인생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하고 모든 계획이 완벽하게 보여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진정으로 복된 인생이죠.

 

그런 인생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요,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인생이 복된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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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성령님께 이끌려 광야로 나가 40일간 사탄의 유혹을 받았지만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지 않았기 때문이요 진정한 영광은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셨기 때문이죠.

그와 같은 사탄의 시험을 이긴 후에 갈릴리 주변으로 나아가 제자들를 삼으셨고, 각색 병든 자와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셨죠.

 

그 후에 그 무리들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앉으셨고, 곧바로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산 위에 올라가 가르치신 교훈이라 하여, 마태복음 5-7장까지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고 부르는 말씀이죠.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내용은 예수님께서 왜 산에 올라가셨는가, 하는 점이었죠.

어떤 산을 올라갔는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왜 산에 올라가 가르치신 것을 증언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죠.

모세가 호렙산에 올라간 그곳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것처럼 말이죠.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하나님나라의 팔복에 관해 선포하신 그 장면은 마치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올라간 시내산을 연상케 한다고 했죠.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통해 자유와 해방이라는 구원을 베풀어주셨죠.

그리고 홍해를 건너고 수르 협곡과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바꿔주시고, 신광야의 만나와 메추라기 곧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시고, 르비딤 전투에서 처음 승리를 맛보게 하신 뒤에 50일째 되는 날 시내광야 당도했죠.

그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한 장로들을 불러모아 산에 올라가 짐승의 피를 통해 언약식을 체결했죠.

그리고 모세를 통해 그 산에서 애굽의 백성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율례와 법도의 말씀을 내려주셨죠.

바로 그 시내산에 올라간 그 장면을 연상케 하도록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 팔복을 전해주셨다는 거죠.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 산에 올라가 앉으실 때 어중이떠중이들이 나온 게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나왔습니다.

물론 제자들이라고 다 같은 제자들이 아니었죠.

그중에는 이름만 올린 제자, 말만 무성한 제자, 자기 유불리를 따지며 따르는 오염된 제자도 있었겠죠.

하지만 그 모든 일에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고자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주님의 기쁨이 되는 제자도 있었겠죠.

 

(깨달음)지난 시간에 우리가 깨달은 바도 그것 아니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신 것은 이중이떠중이로 살게 하려고 부르신 게 아니었다는 거죠.

적어도 이 세상과 지옥을 향해 치닫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주님의 제자로 살게 하시려고 선택하여 부르셨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주님의 제자 가운데 이름만 올린 제자, 입만 무성한 제자, 자기 유불리를 따지며 따르는 오염된 제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

오직 주님의 기쁨이 되고자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헌신하는 주님의 기쁨이 되는 제가가 되기를 주님은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이제 팔복에 관해 첫 번째 포문을 여는 말씀인데 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원해)이 말씀은 성경이 기록된 헬라어 원문으로 직역하면 이런 의미입니다.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왜냐하면 그들에게 천국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개역개정판 성경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우리말 성경은 뭔가 전제가 돼야만 복이 있고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설명해주는 것 같죠.

하지만 헬라어 원문은 ‘축복의 선언’이 나오고 ‘축복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축복의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왜냐하면 그들에게 천국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의 선포는 예수님의 팔복선언에 처음 나오는 게 아니라 구약의 시편에 나와 있는 형식입니다.

“복이 있도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들은.”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기 때문이다”

 

(원해1)그런데 ‘복되도다’할 때 ‘복’이란 단어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입니다.

‘마카리오스’는 인간이 채우거나 성취하는 게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 부어주시는 은총의 복을 말하는 것이죠.

그런데 ‘마카리오스’라는 단어가 구약의 ‘바라크’(ברך)라는 단어와 유사합니다.

‘바라크’는 ‘복’을 뜻하는 말이긴 하지만 ‘복을 빌다’, ‘무릎을 꿇다’, ‘높이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라크’라는 단어를 한 자 한 자 파자하면 더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바라크’할 때 맨 첫글자 ‘바’는 ‘베트’(ב)라는 단어로서 ‘베이트’ 곧 ‘집’을 뜻하는 말입니다.

‘바라크’할 때 두 번째 ‘라’는 ‘레쉬’(ר)라는 단어로 ‘머리’ 곧 ‘시작’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바라크’의 ‘크’라는 ‘카프’(ך)는 ‘손바닥’을 뜻하는 말입니다.

 

(깨달음)‘바라크’라는 손바닥만한 내 작은 인생의 집을 오직 하나님을 머리로 삼고 살아가는 게 복된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어느 것도 내 인생의 주관자가 되지 않는 것, 오직 하나님만을 내 인생의 주관자로 모시는 자가 복이 있다는 거죠.

우리 하나님은 온 우주의 충만하시고 무한하신 분으로 유한한 내가 그분만을 내 인생의 머리로 삼고 사는 것이 복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라크의 의미이자 마카리오스과 같은 뜻입니다.

그것이 복된 인생이자, 주님의 진정한 제자라는 것입니다.

 

(원해2)그런데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하고 말씀하는데, 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되다’고 하는 것일까요?

같은 팔복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복음에서는 그냥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눅6:20)라고만 기록할 뿐입니다.

 

‘가난하다’는 헬라어 ‘프토코스’(πτωχός)는 ‘구걸하다’, ‘가진 게 없다’, ‘극빈자’, ‘산산이 부서진 자’를 뜻하는 말이죠.

거기다가 ‘심령이 가난한 자’할 때 ‘심령’은 ‘프뉴마’(πνεῦμα)로서 영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죠. 

물질만 가난한 게 아니라 그 마음 상태 그 영적인 상태까지 가눌 길 없는 처절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원성)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상위층만 입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롭게 사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나오죠.

거지 나사로는 헌데 투성, 살갗이 헐어서 상한 자리가 많았던 그 나사로는 부자의 집 대문에 기대며 먹을 것을 구했죠.

그때 그 부자의 집 개들이 나사로의 헌데를 핥는 비참한 상황이었죠.

 

두 사람은 죽었고 부자는 지옥에 갔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단지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지옥에 간 것이 아니고, 단지 거지라는 이유만으로 천국에 간 게 아니었죠.

물질로 인해 그 심령까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가난한 자까지 무시하며 돌아보지 않는 것 때문에 지옥에 간 거죠.

거지 나사로는 물질적으로 가난할 뿐만 아니라 그 심령도 가난하여 하나님만 자기 인생의 머리로 삼았기 때문이죠.

 

(원성2)그런가 하면 또 한 사람의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나옵니다.

가난한 과부가 자기 전 재산이 두렙돈, 우리돈으로 천원에 해당하는 마지막 재산을 하나님께 바친 빈털터리 과부(막12:42)죠. 

자기 자신도 먹을 게 없는 가난한 삶을 사는데 왜 그녀가 하나님께 자신의 전 재산과도 같은 두렙돈을 바친 것입니까?

 

그것은 마치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에게 가서 떡 한 조각을 가져와 나로 먹게 하라고 하던 상황과 같은 격이죠.

그때 사르밧 과부는 너무 가난하여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움큼과 마지막 남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먹으려고 했던 터죠.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그 음식을 나로 먹게 하라고 했고, 그렇게 하면 비가 올때까지 떡반죽 그릇과 기름통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했죠.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과 함께 마지막 음식을 해 먹고 죽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엘리야 선지자 곧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대접했을 때 떡반죽 그릇과 기름통이 마르지 않는 복을 누렸죠.

 

사르밧 과부의 상태가 ‘심령이 가난한 자’의 상태 아니겠습니까?

기근으로 인해 마지막 밀가루 한 움큼과 기름 한 방울 남은 그것 밖에 없어서 아들과 함께 죽고자 하는 그 상태 말이죠.

물질적으로 너무나 가난하여 마음 조차 둘 곳 없는 그녀였기에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마음으로 남은 것까지 하나님께 바친 것이었습니다.

 

(적용)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자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유한한 이 세상에 소망을 둘 수 없기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갈망하며 사는 자를 말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 힘과 능력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을 머리로 삼고 지혜를 구하며 사는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전에 승승장구해서 내일도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한 나폴레옹과 달리 매 순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사는 자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거지 나사로처럼 이 세상에 물질이 없어서 내일을 염려하며 살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집으로 삼고 사는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두 렙돈을 드린 과부처럼 마지막 남은 재물까지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사르밧 과부처럼 자신과 아들이 먹고 싶은 음식마저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기꺼이 드릴 수 있는 자이죠.

 

바로 그런 자들이 천국 하나님 나라 안에 거하는 복된 자라는 것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천국을 소유한 자 하나님나라 안에 거하는 자로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렇기에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이 세상을 살면서 누가 복된 자인지 너는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누가 심령이 가난한 자인지, 누가 천국을 소유한 자인지, 누가 하나님 나라 안에 거하며 사는 자인지 말이다.”

“나폴레옹이 자기 계획과 능력으로 승승장구했지만 그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머리로 삼았다면 그도 심령이 가난한 자였지 않겠느냐?”

“부자가 거지 나사로와 달리 재물이 많아도 그 재물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베풀었다면 그도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였지 않겠느냐?”

“마지막 두렙돈을 바친 과부도, 마지막 음식을 드린 사르밧 과부도, 남은 재물과 남은 음식조차 자기 소유로 삼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기꺼이 드릴 수 있었던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였지 않았더냐?”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이 심령이 가난한 자들을 더욱더 복되게 하시고 천국을 소유케 하시고 하나님나라 안에 거하는 은총을 베풀어주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유한한 이 세상에 소망을 두기보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소망을 두며 사는 자가 돼야 하지 않겠느냐?”

“너도 심령이 가난한 자답게 너의 지혜를 의지하지기보다 하나님을 머리로 삼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도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이전에 승승장구했어도 매순간순간 하나님의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너도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이 세상에 물질이 없어도 내일을 염려하기보다 하루하루 너의 인생의 집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혹여라도 물질이 없어 두 렙돈 밖에 남지 않았어도, 마지막 음식밖에 없어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그것조차 드릴 수 있는 자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주님께서는 네가 그런 자로, 그런 제자로, 천국을 소유하며 하나님 나라 안에 거하는 자로 살기를 바라지 않겠느냐?”

 

(찬양)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 있네 위로를 받을 것이요

온유한 자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겠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저희 배부를 것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 받겠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천국이 저희 것이라

내게도 주소서 내가 복을 받기 원하네

오 내 주여 주소서 아멘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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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 그런데 자발적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천국을 소유하며 하나님나라 안에 거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도 있겠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는 일부러 그 심령을 가난하게 빚으셔서 하나님나라의 제자로 본을 삼게 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야곱도 룻도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성화)야곱은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날 정도로 욕심이 많았고, 자기 꾀가 밝은 자였죠.

다만 한 가지 형 에서가 장성하여 유능한 들사람으로 살아갈 때, 야곱은 오직 집안에 거하는 삶을 택했습니다.

유능한 들 사람이란 이방 지역의 문화와 종교에 심취하며 하나님 밖에 거했다는 뜻이요, 집안에 거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머리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으로 사들이는 욕심이 많았고, 아버지의 축복권까지 속여서 쟁취한 자였죠.

 

하나님께서는 그런 야곱을 그냥 놔뒀다가는 자기 지혜와 자기 교만 속에 살 수밖에 없기에 그의 심령을 가난한 자로 빚으셨죠.

야곱이 전혀 알지 못하는 낯선 땅 밧단 아람으로 보내신 것도, 그곳에서 20년 넘게 죽을 고생을 하며 살도록 한 것도 그것이었죠.

그리고 20년이 넘어 형을 만나러 돌아오는 길목에 얍복강에서 밤새도록 기도하며 천사와 씨름할 때 그의 환도뼈를 치신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태껏 자기 꾀와 자기 지혜만을 맹신하며 살아온 욕심많은 야곱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기에 그를 빈털터리로 만드셨고, 그의 대퇴부 뼈까지 치신 것이었죠.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을 그 인생의 머리로 삼고, 하루하루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자로 살도록 말이죠.

바로 그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로 빚으신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성화2)룻기서의 나오미는 어떻습니까?

그녀 역시 이스라엘 땅 베들레헴에 살 때 남편 엘리멜렉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같았지만 그 땅에 흉년이 들 때 하나님의 집을 박차고 이방신을 섬기는 모압 땅으로 떠나버렸죠.

그때 자기 힘과 능력껏 열심히 살고자 했고, 그래서 두 아들까지 결혼을 시켰는데, 모압에서의 10년은 처절한 실패뿐이었죠.

그 10년만에 남편이 죽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도 죽어버렸으니 말이죠.

 

그때 그녀는 하나님께서 베들레헴 땅에 다시금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먹을 게 풍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죠.

그때 두 자부 중 오르바는 모압으로 돌아가고 룻만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향하는데, 나오미가 고향땅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에게 고백한 말이 있죠.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룻1:21)

 

(깨달음)무슨 뜻입니까?

나는 내 능력을 믿고 풍족한 상태에서 더 많은 부를 거머쥐고자 하나님이 없는 곳을 향해 나갔는데,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텅텅 비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능력과 지혜를 좇아 더 많은 것을 채우고자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괴롭게 하셔서 비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 능력과 자기 지혜만을 좇을 때 그렇게 텅텅 비게 만드신다는 사실이죠.

왜죠? 파멸시키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함입니까?

룻을 고통과 괴로움의 코너로 몰아넣으셔서 그 심령을 가난한 심령으로 만들기 위함이었죠.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이 세상에 족한 분이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성화3)이것은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 출신으로 바다와 배는 물론이고 어디에 고기가 많을지 잔뼈가 굵은 뱃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그 동생 안드레가 세례 요한을 스승으로 좇다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으로 좇게 되었고, 자기 형 베드로까지 데리고 갔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네가 ‘시몬’이지만 이제부터는 ‘게바’곧 ‘반석’이라고 하여라, 하고 말씀해주셨죠.

이제까지는 귀가 얇은 자처럼 이러 저리 휩쓸리며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반석처럼 결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고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베드로와 안드레도 주님의 제자처럼 주님을 따르며 살았는데, 그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떠나 이방 땅 납달리와 스물론으로 가셨죠.

주님께서는 그 땅에 생명의 빛을 비추러 가셨는데도 베드로와 안드레는 실망감에 휩쌓여 다시금 고기잡이로 전락했죠.

그런데 그날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이제 그 물을 씻고 있는데, 그 배에 타신 주님께서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파하셨죠.

그리고는 곧장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는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하신 말씀이었죠.

그때 베드로는 밤새 내 실력과 능력으로 해봐도 안됐는데 혹시라도 모르니 주님의 말씀을 의지해 한 번 던져보겠다고 하죠.

그런데 주님의 말씀에 의지해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는데,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죠.

그때 베드로가 주님께 무릎을 꿇고서 고백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사건입니까?

갈릴리 바다에 잔뼈가 굵은 베드로였지만, 주님을 따르다가도 주님을 떠나 자기 능력껏 뭔가를 잡아 올리고자 했지만 처절한 실패를 경험케 하셨다는 것이죠.

어쩌면 그날 밤에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잡고자 한 고기를 다 멀리 몰아내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실력과 자기 방법대로 모든 게 되었다면 여전히 자기 교만 속에서 주님을 따르지 않았을지 모르기 때문이죠.

 

(적용)주님은 지금도 그런 방법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심령이 가난한 자로 빚으시는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머리로 삼아야 하건만 자기 꾀만 믿고 살던 야곱을 고생길로 접어들게 하신 것 말이죠.

하나님의 집 안에서 살아야 하건만 자기 능력과 자기 출세만을 좇아 살던 룻에게 인생의 쓴 맛을 보게 하신 것 말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하건만 자기 실력만을 좇아 살던 베드로에게 텅빈 그물을 체험케 하신 이유 말이죠.

 

그 모두가 그들의 심령을 가난한 자로 빚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입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삼기 위해서, 하나님나라의 선한 제자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를 향해서도 주님은 때로 그렇게 빚으실 때가 있다는 사실이죠.

 

(내기도)그러니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매 순간순간 내 머리나 내 지혜를 맹신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저의 머리로 삼고 따르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집 안에서 살아야 하건만 세상에 빠져들 때 저를 쳐서 심령이 가난한 자로 주님 품안에 거하게 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야 하건만 내 방식만을 좇아 살 때 텅빈 그물을 체험케 하셔서 더욱더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게 하시옵소서.”

“야곱에게, 나오미에게, 베드로에게, 그런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하게 하신 것은 오직 그 심령을 가난한 자로 주님만 의지하며 살도록 하신 섭리였습니다.”

“오늘 저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로 일부러 빚으실 때 그 섭리에 순종하여 하나님께 돌이키는 참된 제자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찬양)날이 저물어 갈 때 빈들에서 걸을 때 그 때가 하나님의 때 

내 힘으로 안될때 빈손으로 걸을 때 내가 고백해 여화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우리 모인 이곳에 주님함께 계시네 누리네 아버지 은혜

적은 떡과 물고기 내 모든 걸 드릴 때 모두 고백해 여호와 이레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주께 아끼지 않는 자에게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신뢰하며 걷는 자에게

 

 

야긴과 보아스

북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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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사는 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자들이 천국을 소유한 자들이요, 그런 자들이 하나님나라 안에 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발적으로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산다면 얼마나 복된 인생이겠습니까?

두렙돈마저 내 것으로 여기지 않는 가난한 심령의 과부처럼, 자기 음식마저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 드린 사르밧 과부처럼 산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머리로 삼지 않고 내 지혜와 힘을 의지하며 내 물질만을 의지하며 살 때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쳐서 빚으시는 분이시죠.

야곱처럼 나오미처럼 베드로처럼, 우리 심령을 가난한 자로 빚으셔서 하나님나라의 일꾼으로 주님의 복된 제자로 삼기 위해서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사는 은혜, 그리하여 천국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나라 안에 거하는 은혜가 충만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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