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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1-10)_팔복강해(3)_2022년9월4일주일설교

by 권또또 2022.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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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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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인터넷에 떠도는 유머가 있어 소개할까 합니다.

믿음 좋은 어느 며느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집안의 시어머니에게 핍박을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했죠.

그 시어머니의 영혼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 하면서 기도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죄짓지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치라’를 부르면서 위로를 받았죠.

 

어느 날 교회 식구들이 그 시어머니를 향해 함께 전도하러 나갔습니다.

“어머니, 예수님 믿으시고 교회 나오세요. 며느님께서 시어머니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계세요.”

그때 그 시어머니는 “흥! 그것 다 왕내숭 떠는 거예요. 나도 기도하러 갈 때 몰래 따라가 봤는데요, 이 시어미를 이겨 버리자는 노래만 부릅디다.”

그 시어머니의 말에 모두들 깜짝 놀랐는데, 어느 집사님 한 분이 여쭈어 봤습니다.

“아니, 무슨 노래였는데요?”

“거, 뭐드라? 응 그거였소.”

“너 시어밀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용기를 다해 늘 물리쳐라. 너 시어밀 이겨 새 힘을 얻고.”

 

(깨달음)한 번 쯤 웃을 수 있는 유머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그 옛날 모진 시집살이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견뎌냈을까요?

시어머니 앞에서 시아버지 앞에서, 그리고 남편 앞에서도 눈물을 흘릴 수 없었던 어머니들은 부엌이나 들판에서 우셨겠죠.

 

그 시절 하나님 아버지를 구주로 모신 어머니들은 천국을 소망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위로하심을 받았겠죠.

그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위로란 “딸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내가 너의 눈물과 고통을 잘 아노라.”하는 음성이었겠죠.

 

(적용)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연약하기에 세상 속에서 상처를 받을 때도 많고, 아픔을 겪을 때도 많습니다.

그때 그 괴로움과 아픔과 상처를 누구 앞에서 하소연하며 탄식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그 아픔과 고통을 짊어지고 나와 울 때 하나님 아버지의 위로하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죠.

그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위로와 격려는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위로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예수님께서 수많은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귀신을 내 쫓으신 후에 그 무리들을 바라보시며 산에 올라가 앉으셨죠.

그때 제자들이 주님께 나아왔고, 주님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천국복음 곧 산상수훈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 모습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와 50일째 되는 날에 시내산에서 올라가 언약식을 맺은 장면을 연상케 한다고 했죠.

그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한 장로들은 짐승을 잡아 그 피의 절반을 하나님의 제단에 뿌렸고, 절반은 백성들에게 뿌렸죠.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시겠다고 했고,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 살겠다고 쌍방간에 언약식을 체결했죠.

그 언약식의 증표로 주신 게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과 레위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였죠.

그 십계명과 레위기의 율례와 법도의 말씀을 주시고 가르치신 것은 애굽의 방식을 좇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죠.

 

바로 그 장면을 연상하듯이 주님께서 산에 오르시고 제자들이 나아왔을 때 천국복음을 가르친 것도 그런 뜻이었습니다

그만큼 주님께서 산상수훈의 복음을 전하고 가르칠 때 어중이떠중이들에게 한 게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그 제자들 중에는 이름만 올린 제자도 있었고, 입만 무성한 제자, 자기 유불리를 따져 믿는 오염된 제자들도 있었죠.

하지만 그 어떤 일에도 솔선수범하며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는 주님의 기쁨이 되는 제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제자들을 향해 주님께서 첫 번째 포문을 여신 천국복음, 팔복의 첫 번째 선언이 바로 그것이었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헬라어 원문은 “복되다.”하는 선언이 나오고,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하는 말씀이라고 했죠.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기 힘과 능력을 세상의 원천으로 삼는 자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물질적으로 힘들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누군가에게 기댈 수 없는 영적인 파단을 당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 어느 것에도, 그 어떤 사람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이를 말하는 것이죠.

 

바로 그런 자들이 복이 있다라고 선언한 것, 왜 그런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까?

그들은 이 세상의 그 어느 것에도 기댈 수가 없기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며 살기 때문이죠.

바로 그런 자들에게 천국이 임해 있다, 바로 그런 자들이 하나님나라 안에 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그와 같은 사실을 통해 지난 시간 깨달은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손 한 뼘 길이 밖에 되지 않는 내 인생의 집을 오직 하나님 아버지를 머리로 삼고 사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했죠.

내 힘과 능력과 지혜가 뛰어나도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인생의 원천으로 삼는 자가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라고 말이죠.

내 재물이나 내 건강도 유한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늘 하나님 앞에 선한 청지기로 사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말이죠.

 

바로 그런 자가 복이 있고, 그런 자가 천국을 소유한 자요, 그런 자가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 안에 거하는 자라고 말이죠.

우리가 이땅에 살아도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살 때 주님께서는 그와 같은 복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믿습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그 다음 구절인데 본문 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원해) 이 말씀을 헬라어 원문대로 직역하면 이런 말입니다.

“복되도다! 애통하는 자여.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통하다’는 헬라어 단어 ‘펜데오’(πενθέω)는 ‘슬퍼하다’(to mourn)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 혼인집 신랑을 잃었을 때 겪는 슬픔(마9:15)을 지칭할 쓴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에 안치됐을 때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슬픔 가운데(막16:10) 찾아갔을 때도 그 단어를 썼습니다.

배부르며 살면서도 가난한 이들을 돌보지 않는 자들에게 머잖아 슬퍼(눅6:25)할 날이 올 것이다, 하고 말씀한 예도 그렇죠.

고린도교회에 음행이 있었는데 그 일을 함께 괴로워하지도 않고(고전5:2) 그 일을 행한 자를 쫓아내지도 않았다면서 탄식할 때 쓴 단어가 그것이죠.

 

그런데 ‘판데오’라는 그 단어는 구약성경의 ‘아벨’(אָבַל)이란 단어와 같은 말입니다.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아버지 야곱이 애통해 했는데(창37:34) 창자가 끊어질 듯 아파하는 말이 그 단어죠.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을 가지고 내려오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광란의 굿판을 벌였죠.

그때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깨트렸고 하나님은 그 백성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그때 백성들이 슬퍼한 모습(출33:4)이 그 단어죠.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꾼 12명을 보냈는데 10명은 악담을 늘어놓았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정복할 수 있다고 말했죠.

그러자 온 백성들이 10명의 정탐꾼과 함께 하나님을 향해 모세를 향해 불평과 원망의 말을 쏟아냈죠.

그러자 하나님께서 10명의 정탐꾼을 죽이셨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생존케 했는데, 그때 백성들이 통곡(민14:30)한 모습이 그것이죠.

압살롬이 여동생 일로 이복형 암논을 죽이고서 아버지를 피해 그술 왕 달매에게 도망쳤을 때 다윗이 애통했는데(삼하13:37) 그 때 그 단어를 사용했죠.

 

(깨달음) 그렇기에 ‘애통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는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애통하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을 행했을 때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가운데 통곡하며 참회하는 모습입니다.

사람이 죽었을 때나 자기 자식을 잃었을 때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겪을 때 괴로워하고 눈물 흘리는 모습입니다.

 

중요한 것은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는다’는 말씀이 실은 3절에 나온 ‘심령이 가난한 자’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야 애통해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심령이 가난하지 않는 자는 결코 애통해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때로 악어의 눈물과 같은 애통을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위선이요 거짓된 눈물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죠.

심령이 가난한 자라야 진정으로 애통하며 함께 아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야곱이 아버지 집에서 떵떵거리다가 형이 죽이려하자 빈털터리로 밧단 아람으로 도망쳐 20년간 죽을 고생하며 살았죠.

그러니 어디에 그 누군가에게 기댈 것이 있었겠습니까?

야곱도 누군가를 속이는 걸 좋아했는데 외삼촌 라반은 훨씬 더 야곱을 속이는 사기꾼이었으니 누구에게 하소연하고 기댈 수 있겠습니까?

야곱은 그때 어두 컴컴한 밤 하늘 별 빛 아래서 홀로 통곡하며 울지 않았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야곱이 애통하는 모습이자 통곡하는 모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요청할 길도 없고 그 어느 것에도 기댈 게 없는 상태가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이죠.

그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모습이라야 하나님 앞에 애통해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해2)그렇게 애통하는 자들을 향해 본문의 주님께서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위로를 받다’는 헬라어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는 ‘권고하다’(exhort), ‘용기를 주다’(to encourage)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애통해하는 자, 슬픔에 처한 자, 괴로움을 겪는 자들에게, 권면해주시고 힘을 북돋아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파라칼레오’라는 단어는 ‘옆’(besides)을 뜻하는 ‘파라’(παρά)와 ‘부르다’(to call)는 ‘칼레오’(καλέω)의 합성어입니다.

주님께서 위로하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누군가의 옆에 다가와 그를 불러주시고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적용) 야곱이 아버지 품을 떠나 밧단 아람에서 일하며 사는데 외삼촌 라반은 제대로 된 품삯조차 주지 않고 야곱을 속였죠.

야곱은 그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겠습니까?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자신이 아버지와 형을 속인 것을 자신이 되갚는다고 생각도 했겠죠.

 

그때 야곱이 그 힘든 20년 인생을 어떻게 이겨내며 살 수 있었을까요?

어쩌면 그때 야곱은 20년 전 자신이 밧단 아람으로 도망칠 때 그 광야의 꿈에 찾아오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지 않았겠습니까?

 

때 야곱은 자신이 밧단 아람으로 떠날 때 하늘의 사닥다리를 통해 찾아오셨던 그 하나님을 떠올리며 애통해하지 않았겠습니까?

야곱아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28:15)

야곱은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힘들고 품삯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해 괴로울 때 그가 의지할 것이라곤 하나님 아버지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그 하나님 앞에서 울고 통곡할 때 그때마다 “내가 너에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으로 위로를 삼았겠죠.

 

그만큼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야곱이 애통해 할 때마다 야곱 곁에 다가와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해주시면서 그 과정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파라칼레오’, 야곱 옆에 다가와 야곱을 위로하고 격려해주신 주님의 위로였던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위로하심도 바로 그와 같지 않겠습니까?

 

(주문)그러니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어떤 일을 통해 애통해 할 때 하나님 아버지의 격려와 소망으로 우리를 위로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도 하나님나라와 교회를 위해 애통할 때, 누군가 죽거나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겪을 때 주님께서 위로해주지 않겠느냐?”

야곱이 형의 얼굴을 피해 밧단 아람으로 도망쳐 20년간 고된 일에 시달릴 때 누구에게 기대할 수 있었겠느냐?”

외삼촌 라반이 야곱에게 힘든 일을 시켜도 품삯도 다 떼어먹으며 야곱보다 더 사기를 칠 때 야곱이 의지할 곳이 무엇이었겠느냐?”

야곱은 그때 자기 힘이나 잔꾀조차 의지할 것 없는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께서 빚어주신 것 아니었더냐?”

그런 야곱이 그 가난한 심령으로 밤 하늘의 이슬을 맞으며 울고 통곡하며 애통해 할 때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지 않았더냐?”

야곱아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주님께서 야곱을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해하는 심령으로 빚으셔서 천국을 소유케 하시고 위로케 하시는 것처럼 너에게도 그런 은혜를 베푸시지 않겠느냐?”

풍부한 가운데 살았던 나오미가 아버지 집을 떠나 이방 땅으로 도망쳤을 때 오히려 더 큰 풍파를 겪어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하는 심령으로 빚으신 것처럼 말이다.”

갈릴리의 잔뼈가 굵은 베드로가 밤새도록 자기 힘과 지혜를 좇아 그물질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가난한 심령 애통해하는 심령으로 주님께서 빚으신 것처럼 말이다.”

지금 주님께서 너의 심령을 그토록 가난한 심령으로, 애통해하는 심령으로 빚으시고 계신다고 생각하느냐?”

바로 그때가 주님께서 너를 위로하시고 소망으로 격려하실 때이지 않겠느냐?”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말씀처럼, 너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면서 네 곁에 다가와 너를 위로하고 소망으로 격려하시는 주님 말이다.”

 

(찬양)주께 가오니 날 새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를 부어 주소서

내 안에 발견한 나의 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 사랑으로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

 

나의 눈 열어 주를 보게 하시고 주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매일 나의 삶에 주의 뜻 이루도록 새롭게 되리라 주의 사랑으로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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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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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인도에 의료 선교사로 나병 환자들을 돌보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폴 브랜드’ 박사가 있었죠.

그는 자신도 나병에 걸려 죽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불안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발뒤꿈치가 무감각해진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즉시 주사 바늘로 자신의 발을 찔러 보았습니다.

그때 커다란 아픔을 느끼자 그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는 ‘축복된 아픔’이라고 명명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렸죠.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이야기 같습니까?

내가 죄에 대해 문둥병과 같이 무감각질 때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경고의 아픔을 주실 때가 있지 않겠냐는 것이죠.

그때 주님께서는 내 삶과 내 심령에 아픔을 겪도록 하시겠죠.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내 영혼을 흔들어 깨워주시는 주님의 은혜 앞에 애통하며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화2)어느 대학 식당에서 일하는 맘씨 좋은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성격도 좋고 친절해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죠.

그런데 어느 날 점심 식사시간에 쟁반에 음식을 담아가지고 나르다가 그만 손에서 쟁반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식당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소란해졌습니다.

학생들은 아주머니의 실수를 보며 깔깔대고 웃기 시작했죠.

어떤 학생은 ‘나이스! 굿’하면서 영화감독마냥 ‘오케이’하는 사인 흉내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식당 관리인이 달려왔습니다.

 

그때 잠자코 서 있던 그 아주머니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내 손이 아마 눈물을 흘려서 미끄러웠나 봅니다.”

“오늘 아침에 군대에 간 아들이 전투중에 전사했다는 소식을 받았거든요.”

“내 아들이 잡기 좋아했던 이 손도 슬퍼서 아마 눈물을 흘렸나 봅니다.”

“내 아들도 여러분과 똑같은 대학 3학년 때 군대에 갔답니다.”

 

식당 안은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습니다.

그러면서 여학생들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남학생들은 아주머니에게 다가가며 이렇게 위로해 드렸습니다.

“어머니. 저희는 그런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조롱했어요. 너무 죄송해요.”

“이제부터 어머니라고 저희들이 부르겠습니다.”

 

(깨달음)무엇을 일깨워주는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기도하는 마음처럼 나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서도 애통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섭리 앞에서도 애통해하듯이 내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아파할 줄 아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함께 아파하고 함께 애통해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그 애통을 통해 누군가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도록 하시기 때문입니다.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고 하듯이 말이죠.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12:15)는 말씀도 바로 그런 이치 아니겠습니까?

 

(내기도) 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가난한 심령이 되지 않고서는 결코 애통해할 수가 없다는 영적인 원리를 깨닫게 됩니다.”

혹여라도 제 심령이 하나님 앞에 교만한 모습이라면 제 삶의 환경을 깨트리사 가난한 심령으로 빚어주시옵소서.”

하나님나라와 교회를 위해, 죄에 대해 문둥병처럼 아파하지 않는다면, 제 삶을 애통의 살갗으로 빚어주시옵소서.”

“‘예루살렘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3:28)하신 주님처럼, 지옥으로 향하는 영혼을 위해 울 수 있도록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대학 3학년 아들이 군대에서 전사했을 때 접시마저 눈물로 놓쳐버린 그 어머니의 아픔에 함께 위로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누군가 죽음 앞에,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 앞에, 삶이 힘들고 어려워서 아파할 때,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저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애통하는 마음을 부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주님 앞에 애통하며 기도하는 현장이 주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오셨던 위로의 사닥다리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함께 애통해하던 그 현장이 주님이 찾아와 부활케 하신 참된 소생의 현장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찬양)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 있네 위로를 받을 것이요

온유한 자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겠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저희 배부를 것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 받겠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 천국이 저희 것이라

내게도 주소서 내가 복을 받기 원하네

오 내 주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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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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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주님의 가치와 주님의 길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천국복음 산상수훈의 복된 말씀을 전파해주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와 같은 우리의 심령을 가난한 심령으로 빚으시는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가난한 심령의 소유자들에게 애통해하는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 곁에 다가와 위로하시며 소망을 불어넣으시는 긍휼의 아버지이십니다.

 

욕심 많은 야곱, 자기만 아는 야곱, 사기꾼 야곱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으시고자 밧단 아람에서 고생의 과정을 거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야곱의 심령을 가난한 심령으로 빚으시기 위함이요, 하나님 앞에 애통하는 심령으로 삼기 위함이셨습니다.

야곱이 어느 것 하나 의지할 것 없는 그 가난한 심령으로 밤 하늘의 이슬을 맞으며 애통해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가와 위로해주셨습니다.

“야곱아 내가 너를 통해 내 일을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다”, 20년 전 그 말씀을 상기시켜주시면서 야곱에게 소망으로 격려해주셨습니다.

그 야곱이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갈때 형과 화해하며 형의 분노와 아픔을 품는 애통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복,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주님의 그 복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풍성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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