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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논지)언젠가도 말씀을 드렸지만 아무리 내림굿을 받은 무당이라 할지라도 그 신기는 3년이면 끝난다고 했죠.
귀신이 그 무당을 실컷 부려놓고 패가망신 시킨 다음에 다른 하수인을 찾아 나서는 것이죠.
그러니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무당이 작두를 탄다 할지라도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심지어 귀신을 섬기는 신주단지나 부적을 떼기가 무섭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아무런 쓸모도 없는 종이짝에 불과할 뿐이죠.
왜냐하면 인간의 눈으로 보이는 신주단지나 부적은 인간이 만들어낸 형상에 불과할 뿐 그것 자체가 신이 아니기 때문이죠.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 아버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죠.
만약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신주단지나 부적처럼 생겼다면, 어찌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 여호와, 야훼 하나님이시죠.
그분이야말로 자존자요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절대자로 모시고 섬기는 것이죠.
(예화)지금은 목사님이 되었지만 1970년대 말에 직장에 근무하던 20대 청년의 집에 외국인 선교사가 방문했습니다.
그 청년은 어머님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아주 멋진 예술품 바둑판이 있었습니다.
바둑판을 한가운데 두고 두 마리의 용이 각각 다른 방향으로 바둑판을 휘감고 있는 조각품이었습니다.
두 용의 등에는 각각 흰 돌 과 검은 돌을 넣는 그릇이 파여 있었습니다.
여러 나무들을 덧대서 만든 게 아니라 거대한 통나무 하나를 정교하게 조각한 바둑판이었습니다.
그 바둑판은 가족 중 한 분이 선물받은 것인데 당시 바둑을 즐겨 하던 그 청년에게 준 것이었죠.
그런데 그 어머니를 만나러 들린 선교사님들은 그 바둑판을 보고서는 기겁을 하더니 당장 치우라고 소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이 보기에 용은 사탄의 상징이요, 그 바둑판에 이미 귀신이 집을 짓고 있으니, 그대로 두면 집에 화가 닥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머님은 그 바둑판이 아들의 것임으로 당신이 함부로 처분할 수 없다면서 퇴근하는 즉시 집으로 오라고 아들에게 전화를 넣었죠.
지금으로부터 50년 전만 해도 외국인 선교사님들의 말은 절대적이지 않았겠습니까?
퇴근해서 집에 돌아온 그 아들을 본 외국인 선교사님들은 또 다시 그 아들에게 똑같이 닦달하면서 당장 내다버리라고 했죠.
마치 조선 시대양반이 머슴에게 명령하듯이, 자신의 뜻이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모태신앙이었던 그 청년은 성경을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서 성경에서 뭐라고 말씀하는지 생각할 겨를 조차 없었죠.
그래서 외국인 선교사님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고 아파트 단지내 중고가게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가져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때 중고가게 주인이 보기에도 훌륭한 고가의 예술품 같은 그것을 거져주는 것이냐고 하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가져갔죠.
그때 그 선교사님의 표정은 어땠을까요?
그 선교사님은 마치 큰 일을 치렀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 집을 나갔습니다.
(깨달음)그런데 그 이후에 목사가 된 그 분은 그때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집에 용 그림이나 조각이 있으면 안 되는가?
귀신이 용 그림이나 조각에 집을 짓고 산다는 게 사실인가?
목사가 된 그 분은 그 바둑판의 용 그림이 귀신이 아니라 그저 단순한 조각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귀신이 그림이나 조각이나 부적에 달라 붙어 산다는 것도 그저 인간이 꾸며낸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던들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을 향해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들은 신이 아니라’(행19:26)고 말하지 않았겠죠.
그렇지 않았던들 사도 바울은 제우스 신의 쌍둥이 아들의 이름을 붙인 오늘 본문의 ‘디오스구로’라는 배도 타지 않았겠죠.
(적용)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절간의 불상이나 무당의 신주단지나 부적을 신처럼 떠받들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인간의 손으로 빚은 조각상이나 종이쪽지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진정으로 섬기고 모셔야 할 분은 하나님 아버지 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불상이나 신주단지나 부적처럼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신이 아니라 스스로 계신 자존자이시기 때문이죠.
그것이 무당과 미신을 믿는 자들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근본적인 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아무리 작두를 타는 무당이라할지라도 신기가 쎄다는 무당이라 할지라도 성경의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죠.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우리는 이 땅에 조각품에 지나지 않는 형상들과 종이쪽지를 신처럼 떠받들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신으로 떠받들게 하는 무당들은 귀신의 하수인으로 죽이고 멸망하는 것 뿐이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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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권성권 - 교보문고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 욥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죽고 심지어 그의 몸에 악창이 들끓을 때 그의 세 친구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욥이 고난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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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멜리데 섬에서 3개월을 보낸 바울 일행은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로마로 향했습니다.
바울은 그 섬에서 따뜻한 환대를 받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병든 자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품고 섬겼죠.
그 모습 까닭에 그 섬의 원주민들은 바울이 떠나갈 때 배에 필요한 물품들을 잔뜩 실어 보내줬죠.
도움을 베풀어 준 대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자, 이별에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었죠.
그래서 지난 시간에 우리 자신의 모습도 헤아리며 살자고 했습니다.
내가 떠날 때 누군가 나를 위해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고 말이죠.
그것은 지금 함께 하는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섬길 때에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할 때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며 아쉬워한 것처럼, 바울이 멜리데 섬을 떠날 때 원주민들이 아쉬워한 것도 섬기고 나누고 베푼 삶 때문이었죠.
(본문)오늘 본문은 바울과 그 일행이 멜리데 섬에서 로마로 향할 때 타고 간 배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원해)바울 일행이 겨울을 난 이후에 로마로 향하는 배를 타고 갔는데 그 배의 이름은 알렉산드리아 배입니다.
그 배는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 좌초된 배가 아니라 새롭게 준비된 배입니다.
같은 선단에 소속된 같은 이름의 배지만 처음 타고 갔던 알렉산드리아 배와 구분하기 위해 배의 머리 장식이 ‘디오스구로’라고 밝혀주죠.
우리말 ‘디오스구로’는 헬라어 명사 ‘디오스쿠로이’(Διόσκουροι)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디오스쿠로이’는 로마신화 속에 제우스의 쌍둥이 아들 ‘카스토르’(Castor)와 ‘폴리데우케스’(Pollux)를 일컫는 명칭입니다.
‘디오스쿠로이’는 주전 5세기경부터 로마인들 사이에서 신으로 숭배되었고 로마에는 ‘디오스쿠로이’를 위한 신전도 있었죠.
그러니 그 당시의 뱃사람들은 디오스쿠로이 신이 자신들이 항해할 때 지켜준다고 빌고 또 빌었던 것이죠.
요즘 식으로 말하면 바다에 배를 띄우기 전에 풍어제를 지내면서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죠.
자신들이 항해할 때 지켜달라고, 고기를 잡을 때 많이 잡을 수 있도록 보호해달라고 말이죠.
(깨달음)그렇다면 바울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까?
만약 바울이 알렉산드리아 배 머리 장식을 한 디오스쿠로이를 신처럼 여겼다면 어땠을까요?
왜 이런 배를 타고 가냐고 화를 냈거나, 아니면 아예 탈 생각을 하지 않았겠죠.
그만큼 바울은 제우스의 쌍둥이 신을 본떠 만들었다는 ‘디오스쿠로이’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아무런 감정도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바울은 디오스쿨이를 신주단지나 부적처럼 여긴 게 아니라 그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긴 거죠.
그걸 숭배의 대상으로 삼거나, 그 안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 게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그렇고 그 배에 탄 275명의 사람들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힘이나 능력으로 통제할 수 없던 유라굴로 광풍을 잠잠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말이죠.
그런 풍랑 속에서도 자신들을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는 분은 하늘과 땅과 바다를 주관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사실이죠.
(적용)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절에 있는 불상이나 산에 있는 나무조각상이나 부적들은 모두 인간의 손으로 만든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신이 깃들어 있거나 그것이 신처럼 역사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죠.
그만큼 우상을 믿는 사람만 우상의 지배를 받는 것이죠.
매사에 귀신을 의식하고 귀신에게 매여 사는 사람만 귀신의 속박 속에 살게 돼 있습니다.
몸에 이상만 있어도, 약간 다치기만 해도, 무슨 일만 생기면, 귀신이 그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도 귀신의 노이로제 속에 사는 사람일 뿐입니다.
디오스쿠로이 형상을 조각한 그 배를 구입한 선주와 선장과 선원들은 그것을 수호신으로 여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에게는 그 형상이 무엇이든지간에, 혹시라도 거대한 용의 머리로 만들어졌어도 그것은 단순한 조각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죠.
바울을 사로 잡고 있는 것은 귀신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바다를 주관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죠.
재밌는 것은 우리말 ‘배의 머리 장식’으로 번역된 헬라어 ‘파라세모스’(παράσημος)가 ‘형상’(sign)이란 뜻과 함께 ‘허수아비’또는 ‘가짜’(counterfeit)를 뜻하는 말입니다.
뱃사람들에게 ‘디오스쿠로이’의 형상은 신처럼 떠받드는 것이지만 바울에게는 허수아비나 가짜 위조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죠.
그래서 바울은 자기 일행과 함께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배를 타고 로마로 향했던 것이죠.
만약 1970년대 말 그 선교사가 이 배를 봤다면 어땠을까요?
절대로 타지 않으려고 했겠죠.
디오스쿠로이 장식 속에 신이 깃들어 있다면서 말이죠.
만약 그 배에 탄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당장에 내리도록 하거나 그 형상물을 깨 부수도록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선교사님이 성경의 이 부분을 읽었다면, 바울이 믿는 그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했다면,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겠죠.
그 선교사님이 신주단지나 부적이나 귀신에게 사로잡힌 선교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붙잡힌 선교사였다면 그 바둑판을 내다버리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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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이 책에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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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저와 여러분들이 신주단지나 부적이나 귀신에게 사로잡혀 살 게 아니라 하늘과 땅과 바다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사로잡혀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도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신주단지나 불상이나 부적과 같은 것들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아니더냐?”
“그 선교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힌 선교사였다면 어찌 예술품인 바둑판을 함부로 버리라고 강요했겠느냐?”
“바울도 로마로 향하는 알렉산드리아 뱃머리 장식이 디오스쿠로이 곧 제우스의 쌍둥이 신의 형상이라 해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지 않았더냐?”
“진정한 신은 눈에 보이는 형상이나 조각이나 부적이나 신주단지에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하늘과 땅과 바다의 주관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무슨 일만 생기면 귀신의 짓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뜻이지 않겠느냐?”
“무릎이 다치거나, 손이 베었거나 코에 피가 나거나 심지어 교통사고가 날지라도, 그 속에서 여호와 삼마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도적이 오는 것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지만 주님이 오시는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케 하시는 것이니 말이다.”
“네가 산에 올라가 돌부처를 만나든, 사찰의 불상을 보든, 부적을 보든 그것들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조각이나 종이쪽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 않겠느냐?”
“거기에 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벌벌 떨지 말고 바울처럼 하늘과 땅과 바다의 주관자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욱더 신뢰하며 살았으면 좋겠구나.”
“삼위일체 하나님은 네가 바다 끝에 있든, 네가 하늘 끝에 있든, 네가 땅 속에 있든, 심지어 네가 다치거나 사고가 나는 그 현장에도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기억했으면 좋겠구나.”
(찬양)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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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 교보문고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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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1970년대 말 청년이었던 그분이 40이 가까운 나이에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의 집은 서울의 양화진 옆이었고 바로 그 옆에는 서양귀신을 모신 영험한 무당집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서울 시내에서 굿을 많이 하던 때였습니다.
토요일이면 무당집에서는 하루종일 꽹과리를 치면서 굿판이 벌어졌고, 그때마다 3층 서재에서 설교를 준비하던 목사님은 외부 철제 계단을 오르내리며 굿춤을 추는 무당을 보곤 했죠.
그 무당은 자기 집에서 열심히 굿을 했고, 그 목사님은 그 무당의 꽹과리 소리를 들으면서 주일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어땠을까요?
그 무당의 굿과 꽹과리 소리는 그 목사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을 믿는 그 목사님에게 그 무당이 믿는다는 귀신은 허수아비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죠.
세월이 흐르면서 그 무당이 굿을 하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귀신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무당이 아무리 신기가 쎄다 해도 3년을 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죠.
그 후에 그 목사님은 스위스 한인교회를 섬기고 10년만에 그 집으로 돌아왔죠.
그런데 그 무당의 집에서는 더 이상 굿을 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씃ㅂ니다.
소문에 따르면 무당의 신빨이 딸려 더 이상 찾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그 무당이 세상을 떠나면서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예수님을 믿고 살아라”하고 말했다고 하죠.
(깨달음)인간이 금속이나 돌덩이로 만든 신상이 위대한 예술작품일지언정, 그 신상이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살아 있는 신이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한 허수아비일 뿐입니다.
그 형상 앞에 빌고 비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전혀 다른 분이시죠.
그 하나님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거나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형상의 작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자존자요, 하늘과 땅고 바다를 주관하시는 절대자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설령 우리가 다쳤거나 아프거나 심지어 죽는다할지라도 거기에 함께 하시는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군중 속에 돌팔매질을 당할때도, 감옥속에 들어가 있을때도, 심지어 유라굴로 광풍속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살았던 것이죠.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언제나 함께 하시는 아바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산에 놀러갈 때나 바다에 놀러갈 때 그 신들에게 고수레 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습니다.
그저 그 산을 주신 하나님께, 그 바다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드리는 게 그리스도인의 태도 아니겠습니까?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 앞에 신주단지나 돌부처나 부적이 있을지라도 전혀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그것이 신은 신이 아니요 그 속에 신이 깃들어 있을리 만무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조각상이나 종이쪽지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것을 신처럼 여기며 두려워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니라 실은 귀신에게 사로잡힌 자이오니 저희들은 오직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앞길에 무당의 요란한 굿판이 벌어지고 있어도 개의치 않게 하시고 신처럼 떠받드는 형상이나 부적을 허수아비처럼 여기게 하시옵소서.”
“코가 깨지거나 무릎이 다치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바다 끝에 있을지라도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찬양)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우편에 그늘되시니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너의 환난을 면케하시니
그가 너를 지키시리라 너의 출입을 지키시리라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여호와께로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존자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신이거나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신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신의 형상을 한 형상물들 신주단지 부적들은 모두 인간의 손으로 만든 조각품이나 종이짝이 불과할 뿐입니다.
바울과 그 일행이 타고간 알렉산드리아 배의 머리 장식품 디오스쿠로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배의 선장과 선주와 선원들은 설령 그 머리 장식품을 신처럼 떠받들지 몰라도 바울에게는 한낱 조형물에 지나지 않게 여긴 것이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하늘과 땅과 바다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다 끝에 있을지라도, 감옥속에 있을지라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여호와 삼마로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언제나 함께 하시는 전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맞이할지라도 귀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사로잡혀 사는 참된 그리스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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