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고린도후서 5장 11절부터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도직의 본질적 목적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데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얼마나 헌신적인 삶을 살았는지를 밝혀줍니다. 3절입니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바울은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거나,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사람을 실족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이 조롱거리니 비방거리가 되지 않기 위함이죠. 그만큼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살아가는 자세가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 자세는 고린도전서 10장 24-25절에서 밝혀주었죠.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이죠. 바울은 모든 것에 자유한 자였지만, 누군가 행한 일이 유익하고 덕 된 게 아니라는 것이죠. 왜요?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 남에게는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아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사도 바울이 채식주의자라서 그 말을 한 게 아니라, 우상의 신전 앞에 드려진 고기를 시장에서 팔 때, 자신은 아무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지만 누군가 실족한다면, 자신은 입에 대지 않겠다고 했죠 덕을 위해서 말입니다. 4절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고린도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침투해서 추천서와 자천서를 가지고 와서, 바울에겐 그런 게 없다고 비방했죠.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한다’고 밝힙니다. 무엇을 통해서죠? 그리스도 안에서 섬긴 우리의 삶이 확실한 자천서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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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어떤 자천서를 써 왔다는 것인가? 어떤 삶으로 견디며 살아왔는가? 그 견딘 예가 무엇인가? 그 실례를 9가지 들었습니다. 4절하반절에서 5절을 보면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첫째로 ‘환란과’ 이것은 육체와 정신과 영적인 부분의 압박입니다. 진리를 좇으면 환란을 당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바울서신에만 ‘환란’이란 단어를 25번 썼습니다. 둘째로 ‘궁핍’입니다. 바울은 일평생 주님을 위해 살았는데 궁하고 핍절한 게 많았죠. 왜냐하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좇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죠. 셋째로 ‘고난과’ 이 ‘고난’이란 ‘스테노코리아’(στενοχωρία)는 아주 좁은 공간입니다. 무서운 고문 중의 하나가 서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한 상자 속에 넣는 것이라고 하죠. 그러면 사람이 고통 속에 떨어진다고 하죠. 그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넷째 ‘매맞음과.’ 바울이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에서 로마 관원들에게 매를 맞은 이후에 여러 번 매를 맞았습니다. 왜 그렇게 매를 맞았습니까? 진리만을 위해 살다가 그렇게나 많은 매를 맞은 것이었죠. 다섯 번째 ‘갇힘과’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투옥된 이래 예루살렘과 가이샤라와 로마에서도 갇혔습니다. 여섯째로 ‘난동과’ 바울은 진리만을 목적으로 삼는데, 자기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난동의 한 가운데 섰죠. 바울은 한 번도 사람을 선동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반역의 상태에 있는 인간들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케 하려는 것 밖에 없었죠. 그런데도 난동을 당했던 것이죠. 일곱째 ‘수고로움과’, 이 말은 ‘피곤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진리를 좇았는데 피곤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코포이스’(κόποις)라는 단어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모든 진액을 뽑고 난 뒤에 주체할 수 없는 피곤함입니다. 여덟 번째로 ‘자지 못했다’ 낮에는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했죠. 마지막 아홉 번째는 ‘먹지 못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경건생활을 위해 금식했다는 말이 아니죠. 태장에 맞고, 돌팔매질을 당할 때, 누가 밥을 챙겨줬겠습니까? 그래서 먹지 못하고 배도 고팠다는 거죠.
- 그렇게 속상한 예 9가지로 들고 있죠.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도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 자기 생을 던진 바울에게 이런 어려움을 겪게 하신 겁니까? 내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박해를 받으면 더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운동권 자식이 욕을 먹으면 그 부모도 그런 심정이 되는 거죠.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다가 욕을 먹을 때 더 깊어지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그 모든 시련을 당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지킨 게 있다고 말하죠. 무엇을 지켰는가? 9가지가 또 나옵니다. 6절에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첫째 ‘개끗함’이란 주님의 사도로 살아가는 사심 없는 동기입니다. 둘째 ‘지식’이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는 것이죠. 셋째 ‘오래 참음’ ‘마크로뒤미아’(μακροθυμία)는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죠. 상대가 나를 속상하게 하는 방식을 보복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넷째 ‘자비함’, 곧 덕을 지키는 것이죠. 다섯째 ‘성령의 감화’ 어려움을 당할수록 성령님의 빛을 좇아가는 것이죠. 여섯째 ‘거짓이 없는 사랑’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진리의 말씀을 지켰다’고 합니다. 여덟째 ‘하나님의 능력’.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 정결함과 자비로움과 오래참음을 지키려고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아홉째 ‘의의 무기를 가지고’. 옛날 로마 군인들은 한 손에는 방패 한 손엔 창을 들었죠. 무슨 말일까요? 에베소서 6장 17절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라.” 우리의 믿음만 확고하면 이 세상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죠. 세상을 이길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이런 9가지 덕목을 어떤 상황에서 지켰는가? 8절에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헬라어 원문엔 마침표가 찍혀 있습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내가 복음을 전할 때 어떤 곳에서는 영광으로 또 다른 곳에서는 수모로 돌아오기도 하죠. 또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때로는 좋은 평판도 듣고 또 나쁜 평판도 듣는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개의치 않고 지켜야 할 것을 지켰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자기 중심을 쏟아부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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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8절 하반절부터 자기 정체성을 밝힙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바울을 비방하는 자들이 ‘속인다’고 비난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다’고 하는 것이죠. 9절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복음 때문에 무명한 자로서 무시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유명한 자라고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이 집단 돌팔매질을 당해서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 일이 있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바울이 매 맞고 감옥에 갇힌 것은 하나님께 잘못해 징계받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죠. 하지만 바울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10절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세상적으로 보면 근심이 떠날 날이 없지만 바울은 그런 외적인 기쁨때문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바울은 세상 재산목록이 없지만 많은 자들의 심령을 부요케 해 준다는 것이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세상적으로 빈 주머니지만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모신 자라는 것이죠. 그런 마음과 자세로 자신의 직분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 11절에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여기에서 ‘고린도인들이여’란 거짓 사도들의 선동을 받아 바울을 모함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너희들을 품어왔다는 뜻입니다.
- 12절의 공동번역이 의미가 깊습니다.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마음을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 대인관계에서 쉽게 토라지고 삐치는 사람은 외부 조건보다 자기 마음이 옹색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 스스로의 옹색한 자물쇠를 깨트리는 자라는 것이죠. 그래서 13절의 공동번역에서 “나는 여러분을 내 자녀처럼 생각하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같이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그토록 모함했지만 바울이 품은 것은 자식으로 여길 정도로 넓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죠.
- 오늘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를 배척하고 싫어한다면 그가 정말 불의한 사람이라 그런가, 아니면 내 마음이 옹색함인가, 분별해야겠죠. 혹여 내 옹색함 때문이라면 바울처럼 더 넓은 마음의 그릇을 지녀야 하죠. 누가복음 17장 20-2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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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장 11절부터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도직의 본질적 목적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데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 얼마나 헌신적인 삶을 살았는지를 밝혀줍니다. 3절입니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바울은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거나,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사람을 실족하게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이 조롱거리니 비방거리가 되지 않기 위함이죠. 그만큼 그리스도의 대사로서 살아가는 자세가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 자세는 고린도전서 10장 24-25절에서 밝혀주었죠.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이죠. 바울은 모든 것에 자유한 자였지만, 누군가 행한 일이 유익하고 덕 된 게 아니라는 것이죠. 왜요? 자기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 남에게는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아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사도 바울이 채식주의자라서 그 말을 한 게 아니라, 우상의 신전 앞에 드려진 고기를 시장에서 팔 때, 자신은 아무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지만 누군가 실족한다면, 자신은 입에 대지 않겠다고 했죠 덕을 위해서 말입니다. 4절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고린도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침투해서 추천서와 자천서를 가지고 와서, 바울에겐 그런 게 없다고 비방했죠.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한다’고 밝힙니다. 무엇을 통해서죠? 그리스도 안에서 섬긴 우리의 삶이 확실한 자천서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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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일생과 편지 | 권 성 권 - 교보문고
바울의 일생과 편지 | 바울은 누가 뭐래도 복음 전도자였다. 그가 복음 전도자로 활동한 것은 그의 곁에 위대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나바, 디도, 실라, 디모데, 누가, 루디아, 야손, 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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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떤 자천서를 써 왔다는 것인가? 어떤 삶으로 견디며 살아왔는가? 그 견딘 예가 무엇인가? 그 실례를 9가지 들었습니다. 4절하반절에서 5절을 보면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첫째로 ‘환란과’ 이것은 육체와 정신과 영적인 부분의 압박입니다. 진리를 좇으면 환란을 당하기 마련이죠. 그래서 바울서신에만 ‘환란’이란 단어를 25번 썼습니다. 둘째로 ‘궁핍’입니다. 바울은 일평생 주님을 위해 살았는데 궁하고 핍절한 게 많았죠. 왜냐하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좇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죠. 셋째로 ‘고난과’ 이 ‘고난’이란 ‘스테노코리아’(στενοχωρία)는 아주 좁은 공간입니다. 무서운 고문 중의 하나가 서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한 상자 속에 넣는 것이라고 하죠. 그러면 사람이 고통 속에 떨어진다고 하죠. 그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넷째 ‘매맞음과.’ 바울이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빌립보에서 로마 관원들에게 매를 맞은 이후에 여러 번 매를 맞았습니다. 왜 그렇게 매를 맞았습니까? 진리만을 위해 살다가 그렇게나 많은 매를 맞은 것이었죠. 다섯 번째 ‘갇힘과’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 투옥된 이래 예루살렘과 가이샤라와 로마에서도 갇혔습니다. 여섯째로 ‘난동과’ 바울은 진리만을 목적으로 삼는데, 자기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난동의 한 가운데 섰죠. 바울은 한 번도 사람을 선동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반역의 상태에 있는 인간들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케 하려는 것 밖에 없었죠. 그런데도 난동을 당했던 것이죠. 일곱째 ‘수고로움과’, 이 말은 ‘피곤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진리를 좇았는데 피곤을 겪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코포이스’(κόποις)라는 단어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 모든 진액을 뽑고 난 뒤에 주체할 수 없는 피곤함입니다. 여덟 번째로 ‘자지 못했다’ 낮에는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했죠. 마지막 아홉 번째는 ‘먹지 못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경건생활을 위해 금식했다는 말이 아니죠. 태장에 맞고, 돌팔매질을 당할 때, 누가 밥을 챙겨줬겠습니까? 그래서 먹지 못하고 배도 고팠다는 거죠.
그렇게 속상한 예 9가지로 들고 있죠.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도 아니고 하나님을 위해 자기 생을 던진 바울에게 이런 어려움을 겪게 하신 겁니까? 내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박해를 받으면 더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운동권 자식이 욕을 먹으면 그 부모도 그런 심정이 되는 거죠.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다가 욕을 먹을 때 더 깊어지는 것과 같은 격입니다. 그 모든 시련을 당했는데, 그 ‘가운데서도’ 지킨 게 있다고 말하죠. 무엇을 지켰는가? 9가지가 또 나옵니다. 6절에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첫째 ‘개끗함’이란 주님의 사도로 살아가는 사심 없는 동기입니다. 둘째 ‘지식’이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는 것이죠. 셋째 ‘오래 참음’ ‘마크로뒤미아’(μακροθυμία)는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죠. 상대가 나를 속상하게 하는 방식을 보복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넷째 ‘자비함’, 곧 덕을 지키는 것이죠. 다섯째 ‘성령의 감화’ 어려움을 당할수록 성령님의 빛을 좇아가는 것이죠. 여섯째 ‘거짓이 없는 사랑’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진리의 말씀을 지켰다’고 합니다. 여덟째 ‘하나님의 능력’.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 정결함과 자비로움과 오래참음을 지키려고 하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죠. 아홉째 ‘의의 무기를 가지고’. 옛날 로마 군인들은 한 손에는 방패 한 손엔 창을 들었죠. 무슨 말일까요? 에베소서 6장 17절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라.” 우리의 믿음만 확고하면 이 세상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죠. 세상을 이길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9가지 덕목을 어떤 상황에서 지켰는가? 8절에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헬라어 원문엔 마침표가 찍혀 있습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내가 복음을 전할 때 어떤 곳에서는 영광으로 또 다른 곳에서는 수모로 돌아오기도 하죠. 또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때로는 좋은 평판도 듣고 또 나쁜 평판도 듣는다는 것이죠. 그런데도 개의치 않고 지켜야 할 것을 지켰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자기 중심을 쏟아부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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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 교보문고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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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8절 하반절부터 자기 정체성을 밝힙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바울을 비방하는 자들이 ‘속인다’고 비난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다’고 하는 것이죠. 9절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복음 때문에 무명한 자로서 무시당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유명한 자라고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유대인들이 집단 돌팔매질을 당해서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 일이 있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바울이 매 맞고 감옥에 갇힌 것은 하나님께 잘못해 징계받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죠. 하지만 바울은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10절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세상적으로 보면 근심이 떠날 날이 없지만 바울은 그런 외적인 기쁨때문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바울은 세상 재산목록이 없지만 많은 자들의 심령을 부요케 해 준다는 것이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세상적으로 빈 주머니지만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모신 자라는 것이죠. 그런 마음과 자세로 자신의 직분을 감당했다는 것입니다.
11절에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여기에서 ‘고린도인들이여’란 거짓 사도들의 선동을 받아 바울을 모함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어졌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너희들을 품어왔다는 뜻입니다.
12절의 공동번역이 의미가 깊습니다. “여러분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옹색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자기 마음을 스스로 옹색하게 만들었습니다.” 대인관계에서 쉽게 토라지고 삐치는 사람은 외부 조건보다 자기 마음이 옹색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 스스로의 옹색한 자물쇠를 깨트리는 자라는 것이죠. 그래서 13절의 공동번역에서 “나는 여러분을 내 자녀처럼 생각하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같이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그토록 모함했지만 바울이 품은 것은 자식으로 여길 정도로 넓은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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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일생과 편지 | 권 성 권 - 교보문고
바울의 일생과 편지 | 바울은 누가 뭐래도 복음 전도자였다. 그가 복음 전도자로 활동한 것은 그의 곁에 위대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나바, 디도, 실라, 디모데, 누가, 루디아, 야손, 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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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를 배척하고 싫어한다면 그가 정말 불의한 사람이라 그런가, 아니면 내 마음이 옹색함인가, 분별해야겠죠. 혹여 내 옹색함 때문이라면 바울처럼 더 넓은 마음의 그릇을 지녀야 하죠. 누가복음 17장 20-2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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