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site-verification=bWsZs7W0_gSPuMoDXujZISVmSBQHlpw3IxoqFPAwWOg 끝으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빌3:1-21) google-site-verification=bWsZs7W0_gSPuMoDXujZISVmSBQHlpw3IxoqFPAwWOg
 

끝으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빌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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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자신이 어떤 형편 속에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알리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그곳에 처음 교회를 세울 때부터 데살로니가교회를 세울 때에도, 고린도교회를 세울 때에도, 예루살렘교회의 기근으로 구제연보를 보낼 때도, 그리고 로마의 가택연금상태에 갇혀 있는 현 상태에 이르기까지도 빌립보교회가 물심양면으로 선교비를 보내줄 정도로 함께 해 온 교회였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알리고자 했죠. 비록 갇혀 있지만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젊은 제자 디모데를 보내고자 했죠. 왜냐하면 디모데도 2차 전도여행 때 빌립보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동역자였죠. 그 누구보다도 빌립보교회의 형편을 알고 있는 사람이 디모데였고,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주님의 일을 한다면서 자기 일에 더 열심을 내는데 디모데는 그들과 달리 전심으로 빌립보교회를 염려하고 관심을 가질만한 신실한 동역자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그 디모데를 보내고 곧이어 나도 풀려나면 너희들에게 가겠다고 했죠.

그리고 바울은 또 한 사람을 보내겠다고 편지로 알렸죠. 누구였나요?

바로 자신의 옥바라지를 위해서 빌립보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던 성도를 한 명 보냈는데 그가 바로 ‘에바브로디도’(Ἐπαφρόδιτος)였죠. 그 이름의 뜻은 ‘사랑스럽게’(lovely)라는 의미인데 그런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보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왜죠? 그가 바울 곁에서 옥바라지를 하면서 함께 형제로서, 함께 영적인 군사로서 영적 전투를 벌였는데 갑자기 병들어 죽을 위기에 처했죠. 어제 읽은 2장 30절에 보면 에바브라디도는 주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헌신적인 사람이었는데, 그 탓에 몸져 누워버렸고, 그 소식을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듣고서 많은 염려를 할 것인데,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의 은혜로 그가 나음을 얻었으니, 그를 위한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염려도 덜어주고, 또 그를 통해 빌립보교회에 기쁨을 선사해 주기 위해 그를 보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도 우리 시대의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처럼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들로 살도록 은혜를 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것 역시 나를 비울 때, 내 틀을 깨트릴 때 놀랍게 역사하는 성령님의 역사라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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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은 할례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와 함께, 진정한 의로움은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 얻는 것이요, 그런 의로움을 받은 자녀들은 주님의 푯대와 상급을 바라보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써내려간 편지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3장 1절이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끝으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는 3장이 마지막장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죠. 그런데 4장이 이어지고 있고, 4장 8절에서도 한 번 더 “끝으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끝으로’하는 이 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끝으로’라는 이 단어는 헬라어 ‘토 로이폰’(Τὸ λοιπόν)입니다. ‘마지막으로’(finally)으로 또는 ‘나머지는’(for the rest)하는 뜻이죠. ‘이제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해야겠다’ 또는 ‘나머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하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지막에 포인트를 두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말한 것보다 앞으로 하는 이야기를 더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하는 뜻도 있다는 것이죠. 이른바 글을 ‘마무리’와 동시에 글의 ‘강조점’을 두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서를 3장에서 끝맺으면서 ‘마지막으로’ 하고 강조를 하다가, 내용이 이어지면서 4장 8절에서 한 번 더 ‘토 로이폰’을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그 부분에서도 ‘지금까지 말 한 것보다 더 주의깊게 들어야 합니다’하고 썼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끝으로’ 말하고 싶은 부분, 혹은 ‘주의 깊게’ 새겼으면 하는 내용이 무엇일까요? 1절에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바울이 마지막으로, 또 주의 깊게 강조하는 말은 ‘기뻐하라’ 입니다. 빌립보서를 ‘기쁨의 편지’라고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죠. 계속 1장 4절에서도, 1장 18절에서도, 2장 4절에서도, 2장 18절에서도, 2장 28절과 29절에서도 기뻐하라, 기뻐하십시다, 하고 권면하고, 오늘 3장에서 ‘끝으로’ 말하면서 ‘주의 깊게’ 새기라고 하면서 하는 이야기가 ‘기뻐하라’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왜 기뻐하라는 걸까요? 2-3절이 이렇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개들, 행악자들은 바로 육체의 할례를 강조하는 율법주의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삼가라’는 말은 ‘블레포’(βλέπω)로서 ‘마음의 눈을 갖고 보라’ 한 마디로 주의 깊게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왜요? 육체의 할례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의 행위는 구원이나 믿음 혹은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신앙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들이 구원받았다고, 그들이 할례파라고 말하지만, 바울은 자기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하며 성령으로 봉사하는 자들이 진정한 영적 할례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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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바울도 육체적인 관점에 비춰 자랑할 것이 있다고 4-6절에 이야기를 하죠.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이 주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 곧 육체적인 열심히 살아왔던 그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8일만에 할례를 행한 이스라엘 족속이고, 또 사울 왕의 왕족의 후예인 베냐민 지파이고, 율법으로는 바리새파이고, 더욱이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던 그야말로 흠이 없는 자라고 말입니다. 오히려 율법을 어기는 자들은 단호하게 처단하는 자였다고 말입니다. 그런 자신의 옛 삶이 율법주의자의 관점에 비추면 정말로 자랑할만하지 않았더냐, 하는 뜻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7-11절에 이렇게 고백하죠.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 이전에 육체적인 할례와 의로움과 바리새의 열심과 율법의 자기 의에 사로잡혀 교회를 박해하던 그 모든 삶들이 다 배설물 곧 똥으로 여기게 됐다는 것입니다. 왜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영적인 핀셋으로 콕 찍어주신 그 은혜 앞에서 비춰봤을 때, 예전 것은 아무 것도 쓸모없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죠. 자기 의로움으로는 거룩하신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라는 것 말이죠. 그래서 그분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이제는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2-16절을 통해 그 분의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부르신 상급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고백하는 것이죠. 무슨 말입니까?

내가 주님의 그런 은혜를 받았어도 완성된 자가 아니기에, 하늘나라로 부름받기까지 그 삶을 경주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자기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17-21절을 통해 무엇을 말합니까?

이전에 여러 사람들이 나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원수처럼 살았는데, 이제는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자로서, 내가 그 분의 푯대를 바라고, 그분의 상 주심을 바라며 경주하는 것처럼, 여러분들도 나를 본받아 함께 경주자로, 푯대를 바라보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권면하는 것이죠. 그 삶은 자기 육체의 의로움이 아닌 주님만 바라보는 삶이요, 그때 비로소 영적인 기쁨 속에 사는 삶이 될 것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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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와 같은 권면을 통해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음성이 무엇입니까?

할례와 같은 율법주의 자기 의로움이 아닌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택함 받은 자로서, 그 은혜 안에서 구원과 상급을 바라보는 자, 천국 가는 그 날까지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해 헌신하며 살아가라는 주님의 음성인 줄 믿습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누리는 진정한 영적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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