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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SundaySermon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6:9-13)

by 똑똑이채널 2022.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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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에서 구하소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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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새벽기도회 때도 말씀을 드린 바 있지만, 예전에 강냉이전도를 할 때 어느 교회 사모님의 강냉이를 보관하고 있었죠.

그 다음 주에 그 교회 사모님이 와서 트럭으로 강냉이를 싣고 갔는데, 그 때 제게 이야기해 준 게 있었습니다.

목사님과 사모님이 섬기는 교회의 예배당을 건축코자 알아봤는데 이전에 분할된 토지가 한 필지로 합칠 수 있게 된 것이었죠.

 

그런데 그 교회의 집사님이 불법이라고 민원을 제기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땅은 그렇게 애써도 토지변경이 안 됐는데, 교회 토지는 너무 쉽게 되니까 문제 제기를 한 것이었죠.

도저히 목사님이 돈을 쓰지 않고서는 그 땅이 교회 토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술술 풀리고 예배당을 건축한다고 하니까 주변 교회의 목사님들도 그 집사님 편을 들더라는 것입니다.

함께 그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에게 시비를 걸고 심지어는 그 교회를 해산하려는 음모까지 꾸미더라는 것이죠.

그때 주변 목사님 한 분은 그 교회 목사님의 목을 짚어가면서 무시하고 비난했고 사모님도 해코지 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목사님과 사모님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자신들은 법원에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서 토지변경이 됐고, 교회 예배당도 짓고자 애를 썼는데 말이죠.

그런데도 주변에서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모함을 하고 시비를 걸고 해코지 하니까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과 사모님은 그저 예배당에 올라가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몇 달 뒤 그 동네에 믿지 않는 분에게서 그 목사님과 사모님에게 전화가 왔다고 하죠.

“사모님, 그 목사님 죽어 버렸어요. 지금 그 교회 장로님들이 그 목사님을 차로 싣고 나가고 있어요.”하고 말이죠.

사모님이 그 소식을 들었어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하던 그 목사님이 갑자기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에 법원에서도 무죄가 드러났고, 지방회에서 이의제기한 것들도 다 사라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악과 죄는 추상적이거나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은 우리 곁에 가까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을 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돌덩이들을 보면서 떡을 만들어보라고 한 것처럼 말이죠.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지 않습니까?

악과 죄는 낯모르는 사람에게서 다가오는 게 아니라 평소 아는 사람에게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내가 일이 잘 풀리고 승승장구하면 그것을 아는 이들이 시기하고 질투해서 악으로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악한 일들은 대부분 사탄의 세력이 주도하게 되고,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서 그런 악한 일들을 행하게 되죠.

 

(적용)우리가 그런 악의 수렁에 빠져들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악은 악으로 맞설 수가 없는 법이죠.

똑같이 악으로 맞섰다가는 함께 악이라는 소용돌이에 빠져들기 때문에 말입니다.

 

혹시라도 내가 교만하거나 경솔하게 행동한 부분은 없는 내 삶을 먼저 살피는 게 중요하겠죠.

그래도 뭔가 풀리지 않으면 똑같이 악으로 맞서기보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를 죽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는 자가 부활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만큼 우리는 악한 세력이 악한 행동으로 몰아부칠 때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죠.

제자들이 요청을 한 까닭이고, 제자들이 그때까지 자랑하듯이 기도했고, 자기중심적으로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걸 바로잡아주고 보다 성숙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것은 기도의 대상자가 누군인지 바르게 알고 기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늘들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특정 공간 특정 시간에 국한된 분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곳에 현존하시는 분이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으시오며”, 하나님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여김받으신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을 통해, 공감과 배려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케 된다고 했죠.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저 천국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고 했죠.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권을 받들며 살 때, 하나님의 통치권과 주권을 명시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말한다고 말이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그 무엇보다도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받는 것이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면 그때부터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죠.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 때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 이것이니 곧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하고 말씀하시죠.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일용할 양식이란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삶에 내려주신 만나와 메추라기였죠.

나그네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급해주셨듯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위해 나그네로 사는 제자들에게 공급해주신다는 뜻이이죠.

물론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는 집과 전답을 주셨고 그 소출을 얻도록 하신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리도록 했고 모퉁이 소출은 이웃을 위해 베풀도록 했죠.

물론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면 과소비하지 않고 검소하게 사는 게, 그것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삶이라고 했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예수님은 그 죄를 ‘채무’ 곧 ‘빚’으로 생각했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갚아야 할 죄가 실은 일만달란트 빚진 자처럼 16만년 일해도 갚지 못할 빚과 같은 죄라고 말이죠.

그런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자녀라면 평상시 살아가면서 백데나리온 3개월치의 빚과 같은 죄는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지 않겠냐는 뜻이었죠.

물론 내 안에 자비심이 충만해서 타인의 죄와 허물을 용서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용서할 수 있다고 했죠.

그래야 일흔 번에 일곱 번씩이라도 끊임없이 용서하며 살 수 있다고 말이죠.

주님의 은혜 안에서 누군가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면 땅에서 풀린 것 같이 하늘에서도 풀리는 역사를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거구요.

더욱이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했듯이, 주님의 은혜로 용서하면 좋은 소문이 나서 땅을 누리는 복된 인생을 산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시험은 헬라어로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 곧 ‘유혹’(temptation)이었죠.

40일 동안 광야에 머무신 예수님을 사탄이 시험한 게 곧 유혹이었죠.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봐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받들어줄 것이다, 내게 절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줄 것이다, 하는 유혹 말이죠.

그때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성과 공적인 사명을 바라보며 유혹에 빠지지 않았고, 진정한 영광은 십자가와 부활의 영광임을 바라보셨죠.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처럼 얼마든지 시험과 유혹에 빠져들 수 있는 존재들이죠.

그때 너럭바위에 지나가는 벌레를 가지로 옮겨줬지만 다시 오는 것처럼, 유혹에 넘어질지라도 다시금 주님의 푯대로 바라보는 게 중요하죠.

오직 주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에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그 다음 구절인데, 1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원해)‘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여기에 ‘악’이라는 헬라어 단어가 ‘포네로스’(πονηρός)입니다.

‘육체 노동에 의해 억압받다’(pressed and harassed by labours), ‘나쁜 본성이나 마음 상태’(of a bad nature or condition)를 말하는 거죠.

 

무슨 뜻입니까?

‘악’이란 육체노동을 하며 우리가 살아야 하듯이 우리 삶에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 게 악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으로 주기도문의 주석서를 쓴 터툴리안 (Tertullian)은 ‘악’을 ‘사탄’(the evil one)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서방교회 교부인 암브로스(St. Ambrose)와 어거스틴(Augustine)는 ‘악’을 ‘죄’나 ‘행동’(evil) 그 자체로 봤죠.

칼빈(John Calvin)은 둘 다 가능하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악은 절대로 추상적인 것이나 모호한 개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우리를 악하게 만드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힘입니다.

악을 생각하면 폭력이나 전쟁이나 테러를 떠올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상징적 폭력도 악입니다.

트로트를 좋아하는 사람이 ‘당신은 어떤 음악을 좋아하세요’하고 물으면 ‘나는 클래식을 좋아해요’하고 대답을 하는데 괜히 무시하는 듯한 말을 하는 모습이 그렇죠.

블랙과 화이트는 그저 색깔을 구별하게 해 주는 것일 뿐인데도 그걸로 인종차별을 내비친다면 그것도 악에 물든 모습이죠.

내가 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들도 내 삶에 악으로 자리잡은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왜 우리가 그렇게 악에 쉽게 노출되고 물들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이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지으셨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형상이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쉽게 말하면 그것이죠.

하나님을 드러내는 거울처럼 사는 것 말이죠.

누군가 나를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모습이죠.

그런 소명을 안고 살아가는데 이 세상의 욕망이라는 악의 속성 때문에 쉽게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바울도 그래서 로마서 7장 22-24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나는 선을 행하고 싶지만 내 안에 욕망이 깃들어 있어서 죄의 법에 쉽게 넘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 나 자신을 누가 구원해 줄 수 있겠는가, 내가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며 살 수 있도록 누가 나를 이끌어줄 수 있겠는가?

바로 로마서 8장 1-2절에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일을 할 때 스트레스가 자연스럽게 밀려오듯 악도 내 안에 본성처럼 자리잡고 있는데 그걸 이겨낼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안에 거해야만 내 안의 악을 이겨내며 주님 안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죠.

 

(적용)〈침묵〉이라는 책을 쓴 일본의 크리스천 작가 엔도 슈사쿠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오는 것은 먼지가 쌓이는 것과 같다.”

사탄이 우리에게 먼지처럼 다가와 쌓이게 만들 듯이 악도 먼지처럼 쌓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먼지가 쌓이고 쌓이면 때처럼 껴서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악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마치 솥 안에 들어 있는 개구리가 밑에서 불을 땔 때 처음에는 따뜻하다 하다가 점점 뜨거워지는 그 열기 속에 죽는 것과 같죠.

 

그래서 마르틴 루터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새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머리 위에 집을 짓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내 머리 속에 나쁜 생각이 떠오를 수 있죠.

그것이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본성과 같은 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악이 집을 짓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하고, 늘 주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그 악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우리에게 악이라는 본성이 내재돼 있지만 내 안에 똬리를 틀지 못하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악은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게 아니라 너의 삶에 주변에 도사리고 있고 늘 네 심령 안에 본성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라.”

그 교회 집사님이 시기와 질투심에 의해 교회 땅을 고발하고, 주변 목사님들까지 가세한 것도 사탄의 세력들이 그들 안에 잇는 욕망을 부추긴 까닭이지 않더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게 인간의 본성이듯이 너에게도 악한 본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머리 위에 새가 날아다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어도 집을 짓지는 못하도록 해야 하지 않겠느냐?”

네 안에 악이라는 본성이 자리잡고 있지만 그것이 집을 짓지 못하도록 늘 주님의 은혜 안에 깨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악이라는 것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게아니라 먼지처럼 자꾸자꾸 쌓이듯이 한 번 두 번 악에 넘어가면 걷잡을 수 없는 게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 스스로의 의지나 결단만으로는 악을 이겨낼 수 없기에 주님께서 너에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하고 기도를 가르쳐준 것 아니더냐?”

사도 바울도 그 혼자만의 결단의 의지로는 악을 이길 수 없었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았더냐?”

오직 주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에만 내 안에 욕망을 따르는 악에 넘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며 살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너는 너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오직 주님의 은혜 안에서 악을 이길 수 있도록 더욱더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찬양)주여 우린 연약합니다 우린 오늘을 힘겨워합니다

주 뜻 이루며 살기엔 부족합니다 우린 우린 연약합니다

한없는 주님의 은혜 온 세상 위에 넘칩니다

가릴 수 없는 주 영광 온 땅위에 충만합니다

주님만이 길이오니 우린 그길 따라갑니다

그날에 우릴 이루실 주는 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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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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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악에서 구하소서” 할 때 ‘구하소서’ 하는 말은 헬라어로는 ‘뤼오마이’(ῥύομαι)는 ‘구출하다’(to rescue)는 뜻입니다.

어디엔가 갇혀 있는 것을 빼내는 것, 물 폭탄으로 고립돼 있는 사람을 구출해 내는 걸 말하는 단어죠.

 

(깨달음)그렇기에 주님게서 ‘악에서 구하시옵소서’하는 기도를 제자들에게 하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나 스스로는 내 안에 도사리는 악조차 이겨낼 수 없으니, 기도하지 않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만 악에서 건짐받을 수 있으니, 늘 기도하며 살라는 것이죠.

 

(예화)〈웰컴투 동막골〉이라는 영화가 있죠.

한국전쟁이 한창 치열하던 그때 전쟁하는 줄도 모른 채 평화롭게 살아가는 강원도 태백산 함백산의 동막골 마을 사람들이 있었죠.

그곳에 북쪽 군인들과 남쪽 군인이 들어와서 서로 대치하는데, 동막골 마음 사람들의 순진함 속에 군인들의 마음이 녹아내리고 서로를 돕는 가슴 따듯한 영화입니다.

 

(깨달음)그런데 그 영화를 찍을 때가 겨울철이었다고 합니다.

그 영화를 찍기 위해서 스텝들 모두가 눈을 녹이고 얼음을 깨고 녹였다고 하죠.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눈이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니죠.

봄이 와야 진정으로 눈이 녹고 얼음도 녹아내릴 수 있는 것이죠.

내 안에 악이 기를 못 펴게 하려면, 악이 사라지게 하려면,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죠.

 

(예화2)러시아의 작가 도스도예프스키가 쓴 〈죄와 벌〉이란 책이 있죠.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비범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세상의 불의한 전당포 노인을 도끼로 살해해 버리죠.

부도덕한 그 노인, 자기 배만 불리는 그 전당포 노인을 죽이면 마음이 평안할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는 불안과 괴로움에 시달리게 되죠.

나중에 자수를 하고 시베리아 감옥으로 끌려가는데, 그때까지도 그는 결코 반성을 하지 않죠.

 

그런데 그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를 따라 와서 뒷바라지를 하는 ‘소냐’라는 아가씨가 있었죠.

그녀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지극 정성으로 뒷바라지를 하며 헌신을 하죠.

그녀가 그런 정성과 사랑을 보여준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소냐의 헌신적인 사랑과 섬김에 의해 라스콜리니코프는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녀의 사랑과 헌신에 의해 그는 자기 안에 있는 악의 감옥에서 깨어나 다시금 살아나게 된 것이죠.

 

그래서 그 책 마지막 부분에 도스도예프스키는 그런 말을 남기죠.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다

 

(깨달음)무슨 뜻입니까?

자기 안의 이론만 가지고 살던 사람이 소냐의 따뜻한 삶을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는 뜻이죠.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정죄하고 누군가의 인격을 살해한 사람조차도 또 다른 누군가의 사랑과 섬김 속에서 그 인생이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과 헌신이라는 따뜻한 섬김을 통해 그 속에 있는 악이 사라지고 떠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다가오면 우리 속에 있는 악도 물러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죠.

그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나의 악이 될 수 있기에 끊임없이 주님께 기도하며 깨어 사는 것입니다.

악은 먼지처럼 쌓이고 내 심령에 집을 짓는 것이기에 늘 말씀 앞에 성찰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채워가야만 악을 몰아내며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죠.

 

(내기도)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는 너무나도 연약한 자예요.”

내 안에 악이 도사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내 의와 내 자아에 사로잡혀 남을 판단하고 정죄할 때도 많아요.”

나의 자아 때문에 흑과 백을 나누고 차별하고 무시하는 악에 사로잡힐 때가 많아요.”

그 모두가 차가운 얼음 같은 악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에요.”

내 심령 안에 진정한 봄날에 오면 모든 눈과 얼음이 녹듯이 주님 은혜로 내 심령의 동막골을 채워주시옵소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심령에 부어주셔서 라스콜리니코프와 같은 내 안에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악들이 사라지게 하시옵소서.”

이 모든 것들은 내 의지나 결단만으로는 불가능한 악의 실체이오니 오직 주님의 은혜안에 깨어 있도록 기도하며 살게 하시옵소서.”

 

(찬양)주 사랑이 나를 숨쉬게 해 세상 그 어떤 어려움 속에도

주 은혜로 나를 돌보시며 세상 끝날까지 지켜주시네

주 사랑이 나를 이끄시네 내가 갈 수 없는 그 곳으로

주의 사랑 나를 붙드시며 세상 끝날까지 인도하시네

주님만이 내 아픔 아시며 주님만이 내 맘 어루만지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주님만이 내 능력이시며 주님만이 나의 구원이시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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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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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탄의 세력은 악을 조장하고 우리로 하여금 악에 걸려넘어지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그 악은 추상적이거나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곁에 가까이 있습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그들에게 시기와 질투와 욕망을 불어넣어 나로 하여금 악에 넘어지게 만드는 세력이죠.

 

우리가 어떻게 악에 빠지지 않고 그 악에서 건짐받을 수 있겠습니까?

내 자아나 내 의지나 결단만으로는 불가능하기에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로 채우는 길 밖에 없습니다.

동막골의 얼음을 녹이는 것도 봄날이 오면 가능하듯이, 냉혈한 라스콜리니코프가 깨어난 것도 소냐의 헌신적인 섬김에 있듯이 말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주님의 그 크신 사랑과 한 없는 은혜가 내 안에 넘쳐날 때 내 안의 악들도 이겨내고 사라지게 하시는 은총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총이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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