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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논지)우리는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 죄의 유혹 앞에 걸려 넘어지기가 쉬운 존재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죄의 유혹 앞에 걸려넘어지지 않고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예화)미국의 황야지대에는 방울뱀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뱀은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어서 물리면 치명적으로 죽는다고 하죠.
그런데 이 방울뱀이 다람쥐를 잡는 방법이 특하다고 하죠.
방울뱀은 먼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서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그때 나무 위에 있던 다림쥐가 그 소리를 듣고 호기심이 발동해서 소리나는 곳을 내려다본다고 하죠.
그 순간 다람쥐와 독사의 눈과 마주치면 다람쥐가 겁을 먹고 떨 때 독사는 입을 쩍 벌리고 기다린다고 하죠.
나무 위에서 한참이나 떨던 다람쥐는 비실비실 중심을 잃고 나무 아래로 떨어지면, 독사는 다람쥐를 한입에 꿀꺽 삼킨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인간이 죄의 함정에 빠지는 것도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달콤한 소리로 유혹해 오고, 그럴듯한 소문으로, 가슴 설레게 하는 음성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것들 말이죠.
그러다가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그 욕망의 대상에 시선이 가면, 결국 그것에 끌려 죄고 마는 것이죠.
일단 죄의 덫에 걸리게 되면 빠져나오기란 너무나도 어렵게 되죠.
성경은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에 이르느니라”(약1:15)하고 말씀하는 거죠.
(예화2)예수님을 믿는데 자꾸 시험과 어려움에 빠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친구 중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잘만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 친구가 조롱하듯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아도 시험없이 잘만 사는데 왜 너는 늘 어려운 시험을 당하느냐? 그럴 바에야 믿지 않는 게 더 낫겠다.”
그때 예수 믿는 친구가 믿지 않는 친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줬다고 하죠.
“사슴 두 마리가 있어서 쐈는데 한 마리는 즉사하고 한 마리는 다리에 맞아 피를 흘리며 도망갔다면 자네는 어느쪽 사람을 좇아가겠는가?”
“그야 죽은 놈은 내 수중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 없으니 산 놈부터 쫓아가 잡겠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친구가 그렇게 대답하자, 그때 그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아주 탁월한 선택이네.”
“시험도 그와 똑같은 것이지.”
“시험이 없다는 것은 영혼이 죽은 것과 같으니 마귀는 그를 내버려두는 것이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자는 마귀가 그를 방해해서 자기 수하에 넣고자 온갖 유혹과 시험을 가져오는 거야.”
(깨달음)예수님을 믿으면 만사형통할 거라는 말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 말이죠.
예수님을 믿어도 시험과 유혹이 없을 수가 없기 때문이죠.
시험과 유혹을 겪으면서도 예수님을 믿으며 사는 것은 내 심령에 영생의 소망과 기쁨이 솟아나기 때문이죠.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데도 시험과 유혹이 없다면 어쩌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처럼 그 영혼이 죽은 자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무늬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마귀나 사탄의 세력들이 결코 시험도 유혹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이죠.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면서 시험과 유혹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을 닮고자 하는 내 영혼이 살아 있기 때문이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온갖 시험과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은 내 욕심을 버리고 주님안에 거하고자 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요청했기 때문이고, 그때까지 제자들이 세상에 자랑하듯이 기도했고 또 자기 중심적으로만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걸 바로잡아주고 보다 성숙한 기도자들이 되도록 주님께서 친히 주님의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그것은 기도의 대상자가 누군인지 바르게 알고 기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늘들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특정공간 특정시간에만 국한된 분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곳에 현존하시는 분이란 뜻이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으시오며”, 하나님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여김받으신다고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을 통해, 공감과 배려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하게 된다는 뜻이었죠.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저 천국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고 했죠.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권을 받들며 살 때, 하나님의 통치권과 주권을 명시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걸 말하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받는 것이었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살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 때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 이것이니 곧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일용할 양식이란 광야 40년 나그네 삶에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만나와 메추라기였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셨듯이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며 살라는 것이었죠.
더욱이 가나안 땅에 집과 전답을 주신 이후에는 그들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도록 십일조를 드리도록 했고, 또 이웃을 위해 모퉁이 소출을 남겨두도록 했죠.
함께 더불어사는 이웃에게도 일용할 양식을 먹고 살아가도록 은혜의 시혜자가 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살펴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무슨 뜻이었나요?
‘죄’에 대해 예수님은 ‘채무’ 곧 ‘빚’으로 빗대서 말씀하셨듯이 죄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갚아야 할 빚과 같은 것이라고 했죠.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갚아야 할 죄가 실은 일만달란트 빚진 자처럼 16만년 일해도 갚지 못할 빚과 같은 죄라고 했죠.
그런 엄청난 빚과 같은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다 탕감해주셨다면, 너희들이 살면서 백데나리온의 빚을 진 이들은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지 않겠냐는 뜻이었죠.
물론 내 안에 자비심이 충만해서 타인의 죄와 허물을 용서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요 용서하지 못하는 건 하나님의 은혜가 없기 때문이죠.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있으면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끊임없이 용서하며 살 수 있는 것이죠.
내가 주님을 처음 만난날, 나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용서해주신 십자가 사랑을 깨닫는 날, 그날은 주님의 은혜가 충만해서 어떤 사람도 다 용서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격이죠.
그렇게 주님의 은혜 안에서 누군가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게 되면 땅에서 풀린 것 같이 하늘에서도 풀리는 역사를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것이죠.
더욱이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했듯이, 주님의 은혜로 남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면, 그 소문이 타인에게 흘러들어가 땅을 차지하는 복된 인생을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내용인데, 본문 13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원해)여기에 ‘시험’으로 번역된 헬라어 ‘페이라스모스’(πειρασμός)는 ‘유혹’(temptation)을 뜻하는 말이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을 반역하게 하는 사탄의 유혹 사탄의 시험을 말하는 것이죠.
사탄의 시험, 사탄의 유혹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파멸케 하고 멸망시키려는 게 목적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 곧 하나님의 ‘테스트’와 하나님의 ‘시험’도 있습니다.
그런 시험은 그것을 통과하고 난 후에 귀한 믿음으로, 더 귀한 복을 내려주시고자 하시는 시험이죠.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 앞에 아브라함이 순종할 때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온 시험은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 위한 시험이 아니라 사탄의 시험 곧 사탄의 유혹입니다.
(완성)그런데 ‘시험’으로 번역된 헬라어 ‘페이라스모’의 원형 동사가 ‘페이라조’(ειράζω)입니다.
마태복음 4장 3절에 ‘시험하는 자’가 예수님께 와서 세 가지 시험 세 가지 유혹을 할 때 쓰인 단어죠.
그때 사탄이 예수님을 향해 어떤 시험 유혹을 했습니까?
40일간 굶주린 예수님을 향해 돌을 떡 덩이로 만들어 보라고 유혹했죠.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 만물의 주관자이시기에 얼마든지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죠.
왜냐하면 신적인 능력을 개인의 사사로운 욕구를 해소하는데 사용한다면 공적인 사역의 초점을 흐릴 수 있었기 때문이죠.
사탄은 곧이어 예수님께 두 번째 유혹을 했죠.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들이 붙들어주고 그 영광을 취하라는 유혹이었죠.
그러나 예수님은 사탄의 그 유혹 앞에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예수님의 명예와 허형을 자극하여 모든 영광을 취하도록 유혹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진정한 영광은 십자가의 피흘림을 통한 대속의 죽음이요 그를 통해 부활의 영광을 누리는 게 진정한 영광임을 아신 것이었죠.
세 번째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한 게 무엇이었습니까?
지극히 높은 산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내게 절하라 그리하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너에게 줄 것이다.”하고 유혹했죠.
예수님은 그때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사탄이 보여준 만국과 그 영광이란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력을 뜻하는 것이요, 그것들은 영원한 영광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바라본 궁극적인 영광은 오직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한 영광이었습니다.
(깨달음)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한 그 시험은 에덴동산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것과 똑같은 격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사탄은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럽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선악과를 통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 넘어뜨린 것이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사탄의 유혹을 경계하도록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6)
사탄은 이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거리들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혹해 온다는 것입니다.
(적용)그렇기에 우리는 육신의 삶을 사는 동안 연약한 존재이기에 사탄의 유혹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 영혼이 죽어버린 자라면, 내가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사탄은 나를 유혹하지 않겠죠.
내 영혼이 살아 있기에, 부족하고 연약해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하기에,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유혹하는 거죠.
그때 내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것들로 나를 유혹하는 사탄의 유혹과 시험 앞에 내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는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럽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것들 앞에 넘어질 수밖에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죠.
이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자랑거리들로 나를 유혹하고 시험하는데 누가 당해낼 재간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도, 넘어지는 그때도 그 영혼이 살아 있는 자는 그 상태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죠.
(예화)어떤 목사님이 등산을 가다가 산 위의 바위에 잠시 쉬었다 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바위에 작은 벌레 하나가 기어가는데 자신이 앉은 지점으로 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뭇 가지로 그 벌레를 멀찍이 옮겨줬습니다.
그런데 그 벌레가 멀뚱멀뚱하더니만 다시금 자기에게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또다시 나뭇가지로 벌레를 다른 데 옮기면서 “네가 가고자 하는 길로 가라”했습니다.
그때 그 벌레는 한 참을 멀뚱멀뚱하더니만 다시금 그 목사님이 있는 곳으로 오더라는 것이죠.
(깨달음)그때 그 목사님이 그 벌레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다고 하죠.
그 벌레가 자기 있는 곳으로 오는 것은 그 벌레의 몸 속에 있는 이치, 그 벌레의 생리가, 그렇게 오게 하는 것이란 점이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자도 가끔 벌레처럼 길을 잃을 수도 있지만 가야 할 곳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란 사실이죠.
우리가 죄의 유혹을 받아 넘어질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너는 또 넘어졌구나. 그래 그게 너지.”
그렇게만 말씀하시고 끝내버리시는 분입니까?
“하지만 나는 너를 믿어. 네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바로 이게 죄의 유혹 앞에 넘어질 수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 아닙니까?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살아있는 영혼의 소유자인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의 유혹과 시험 앞에 넘어질지라도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거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방울뱀이 다람쥐를 향해 꼬리로 살랑살랑 흔들어대며 유혹하는 그 소리에 다람쥐가 넘어가지 않았더냐?”
“사탄은 지금도 이 세상의 것들을 통해 육신의 정욕과 욕망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로 너를 유혹한다는 걸 기억하도록 해라.”
“물론 네 영혼이 살아있기에 유혹하는 것들이요, 네가 죽은 영혼이라면,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어찌 사탄이 시험해오겠느냐?”
“네가 예수님이 아니기에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지만 그때마다 그 벌레처럼 주님을 향한 시선과 주님의 길을 다시금 바라보고 살았으면 좋겠구나.”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사탄이 예수님을 넘어뜨리고자 세 가지 것으로 시험했듯이 너도 그 세 가지 차원의 시험 앞에 노출될 수 있음을 늘 기억하려무나.”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을 이겼듯이, 네 안에 말씀의 선악과를 심어야 아담과 하와처럼 넘어지지 않고 이길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이 세상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자랑거리들 앞에 넘어졌을 때 하나님은 ‘너 그럴 줄 알았다. 너 그것밖에 되지 않지.’하며 너를 정죄하겠느냐?”
“오히려 너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또 넘어졌구나. 그게 너지. 하지만 나는 너를 믿는다’하며 다시금 일어설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주지 않겠느냐?”
“그 은혜의 주님 안에 네가 거해야 네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금 일어설 수 있지 않겠느냐?”
(찬양)주여 우린 연약합니다 우린 오늘을 힘겨워합니다
주 뜻 이루며 살기엔 부족합니다 우린 우린 연약합니다
주여여 우린 넘어집니다 오늘 하루 또 실수합니다
주의 긍휼을 구하는 죄인입니다 우린 주만 바라봅니다
한없는 주님의 은혜 온 세상 위에 넘칩니다
가릴 수 없는 주 영광 온 땅 위에 충만합니다
주님만이 길이오니 우린 그 길 따라갑니다
그날에 우릴 이루실 주는 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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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중세시대 수도사들은 죄의 유혹을 극복하며 살고자 세 가지 삶을 실천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자발적인 가난을 실천하며 사는 것, 몸과 마음을 정결하며 사는 것, 하나님의 뜻 곧 순명을 받들며 사는 게 그것이었습니다.
(깨달음)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내가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사탄이 주는 세상의 ‘달콤함’과 ‘두려움’ 때문에 넘어지는 것이죠.
‘달콤함’이란 남들보다 더 잘먹고 더 잘 입고 더 살 수 있다는 것들로 유혹하는 것들입니다.
‘두려움’이란 남들과 똑같지 않으면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드는 것, ‘너 그것 없으면 큰 일 나!’하는 것들이죠.
그런 달콤함과 두려움을 이기는 길은 검소하게 살 때, ‘주어진 삶에 자족하며 감사할 때’ 사탄의 유혹을 이긴다는 것이죠.
더욱이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순명을 받들 때’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말씀을 가까이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이죠.
그때 내 귀에 속삭이고 나를 넘어뜨리고자 유혹하는 것들을 이겨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이 금은보화를 주겠다며 그를 유혹할 때 자족하지 못한 채 그 유혹 앞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가롯 유다도 주님과 더욱 가까이하지 못했기에 은전 30이라는 돈의 유혹 앞에 걸러 넘어지고 말았죠.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데마도, 주님을 가까이하기보다 이 세상의 것을 더 가까이하다가 그렇게 넘어지고 만 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아브라함도 세상의 유혹 앞에 자기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이는 죄에 걸려넘어졌지만 하나님의 순명을 받들고 있었기에 다시금 일어서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죠.
다윗도 육신의 정욕에 빠져 자기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탐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며 살았기에 다시금 일어서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죠.
베드로도 안목의 정욕에 빠져 주님을 배반하는 죄에 걸려넘어졌지만 하나님의 순명을 받들고 있었기에 다시 일어서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었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 기도하실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잠든 것을 보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26:40-41) 말씀하신 것도 그렇죠.
너희들이 주님의 뜻을 구하지 않으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쉽게 빠져들 수 있으니 기도하라는 거죠.
그때 그렇게 곯아떨어진 제자들에게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어쩔 수 없구나.”(마26:41)하고 위로하기도 하셨죠.
그만큼 주님 나라의 순명을 받드는 제자들도 연약하다는 것을 아시기에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던 것이죠.
(예화)한 처녀가 시집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세 명의 구혼자가 나타나서 앞을 다투어 청혼을 해왔습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한 그녀는 그들에게 달리기 경주를 하여서 자기를 붙잡는 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처녀는 경주를 하기 전에 자신의 돈주머니에 돈을 가득히 넣었습니다.
이제 그들 모두가 뛰기를 시작했습니다.
한 청년이 처녀를 거의 따라잡을 만큼 가까이 왔습니다.
그때 처녀는 돈을 한 움큼 그 달려오는 청년 앞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은 돈을 줍느라고 그 처녀를 잡는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두 번째 젊은이가 그 처녀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그때도 그 처녀는 돈다발을 떨어뜨렸습니다.
그 젊은이도 돈을 줍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세 번째 청년이 그 처녀에게 점점 가까이 갔습니다.
이때 그 처녀는 주머니에 남아 있던 돈을 몽땅 길에 뿌렸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그 구혼자는 그 많은 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처녀를 향해 계속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바로 이것이 우리를 넘어뜨리는 죄의 유혹과 같다는 이야기이죠.
그런 유혹을 통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할 때 우리는 영원한 푯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죠.
설령 세상의 유혹 앞에 넘어질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푯대를 바라보는 한 다시금 일어설 수 있게 하시는 게 우리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너는 또 넘어졌구나. 내 그럴 줄 알았다. 그게 너지.”
그러나 주님은 이내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나는 너를 믿는다. 네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기도)그러니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는 연약한 자예요.”
“마귀 사탄의 유혹 앞에, 이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와 같은 유혹과 시험 앞에 넘어지는 자예요.”
“그러니 주님 주어진 삶에 제가 자족하고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주세요.”
“주님, 몸과 마음을 늘 정결하게 하며 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신 순명을 받들며 살게 해주세요.”
“때로 세상의 것들과 유혹 앞에 넘어질지라도 다시금 주님의 은혜 안에서 일어서게 하시고 주님나라의 푯대를 바라보며 살게 해 주세요.”
“제가 넘어지고 쓰러질 때,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만 말씀하시는 주님 아니라 ‘나는 너를 믿는다.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거야.’하고 격려하시는 주님의 은혜안에 살게 해 주세요.”
(찬양)은혜 아니면 살아갈수가 없네 호흡마져도 다 주의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 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 아니면 실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 오직 예수 뿐이네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며 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제자들도 시험에 빠져 넘어졌다면 우리야 두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유혹과 시험에 넘어지고 빠질 수 있는 우리 자신이지만 주님은 그런 우리를 책망하거 탓하시는 분이 아니라 다시금 일어서게 하시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분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의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길 수 있도록 현재의 삶에 자족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서 정결하고 정직하며, 하나님나라의 순명을 받들며 살게 하시는 은혜 안에 거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육신을 안고 사는 우리가 때로 죄의 유혹앞에 넘어질지라도 주님은 “나는 너를 믿는다, 다시 일어설 수 있을거야”하고 위로하고 격려하시는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그 바위의 벌레처럼 사탄은 우리를 다른 곳으로 돌려놓고자 해도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께 향하게 하시는 그런 은혜를 우리 주님께서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은혜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와 같은 유혹과 시험을 이기며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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