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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마6:9-13)_주기도문강해_20220731주일설교문

by 똑똑이채널 2022.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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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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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인종 차별이 심한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한 미국 신사가 자기 집 정원 앞에서 맥주를 마시며 서 있었습니다.

이때 남루하고 몹시 피곤해 보이는 한 인디언이 지나가다가 그 신사에게 빵을 좀 달라고 애걸했죠.

그러자 신사는 “너에게 줄 빵이 없다”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마시는 맥주라도 한 잔 주십시오”하고 인디언이 부탁했지만 거절당했죠.

몹시도 배가 고프고 갈증이 난 인디언은 물 한 모금이라도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신사는 “너처럼 개 같은 인디안에게 줄 물은 없다”하고 거부했습니다.

 

인디안은 슬픈 얼굴로 돌아갔는데, 얼마 후에 그 신사는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깊은 산 중에 사냥개를 놓치고 그만 길을 잃고 말았죠.

방향감각도 없이 산속에서 헤매는데 어느새 날은 어둡고 배는 고프고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었죠.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인디언이 그를 보고 당장 구출해서 자기 집으로 데려가 후한 대접을 했죠.

그때서야 정신이 든 신사는 자신을 구출한 인디언이 얼마 전에 봤던 그 인디언임을 알게 되었죠.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미국 신사는 너무나도 어이가 없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했습니다.

그때 인디언은 미국 신사에게 이렇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얼마 전 나에게 한 것처럼 내가 당신을 대했다면 지금 당신은 산중에서 죽었을지 모릅니다.”

 

(깨달음)원수와 같은 사람이라도 사랑을 베풀면 그도 감동을 받고 감복하게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25:21-22)

 

(적용)내게 악과 거짓과 미움으로 대하는 사람조차도 선으로 대하면 도리어 부끄러워하지 않겠냐는 것이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대하면 하나님께서 상급을 베풀지 않겠냐는 말씀입니다.

 

(성화)그런데 매번 나를 힘들게 하고 피해주고 상처주는 사람에게 얼마나 용서하며 살아야 할까요?

베드로는 자신에게 죄를 짓는 사람을 몇 번 용서해야 할지, 일곱 번 정도면 되는지, 예수님께 물었죠(마18:21).

그때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18:22)하고 대답했죠.

하루에 일곱 번을 일흔번까지도 용서하라는 말씀, 무한대로 끊임없이 용서하며 살라는 뜻이죠.

 

(깨달음)어떻게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에게 그렇게 자비로운 마음이 충만해서 무한대로 용서할 수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죠.

남을 용서하려는 나의 자아나 나의 의나 나의 결단으로는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 사람을 용서한다고 해도 상대성 때문에, 내가 더 약자라서, 용서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만큼 내 의로움이나 내 의지나 내 결단력으로 용서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도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충만하게 임해 있을 때죠.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면 내가 죄인이라는 한계상황을 실감하게 되고, 그런 나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이죠.

 

(적용)어두운 곳에 있으면 내가 더러운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햇볕이나 전등의 빛에 비춰보면 내가 깨끗한지 더러운지 금방 알 수 있는 법이죠.

하나님의 은혜라는 그 빛 안에 거할 때 내가 형편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빛에 가까이 있으면 그 빛만 드러날 뿐 나는 드러나지 않는 법입니다.

하지만 그 빛에서 멀어지며 멀이질수록 나의 그림자가 더 길게 드러나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내 의 내 자아 내 결단력 이런 것을 더 돋보이려고 한다는 거죠.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도 내 의나 자아나 결단력으로는 그만큼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빛 안에 거할때에만 그 은혜에 힘입어 누군가를 용서하며 살 수 있는 것이죠.

 

(성화2)예수님께서도 일곱번을 일흔 번씩 용서할 수 있다고 한 것도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라는 뜻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용서할 수 있는지, 실제적인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셨죠.

누군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는데 그 빚을 갚으려면 처자식들과 소유를 다 팔아야 할 입장이었죠.

그래서 다 갚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애원했는데, 그런 그의 빚을 채주가 다 탕감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고 홀가분했겠습니까?

 

그런데 그 모든 채무에서 탕감받고 자유케 된 그가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자신에게 빚진 자를 만나죠.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자를 만난 것입니다.

그도 자신이 했던 것처럼 기다려주면 갚을 것이니 기다려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가차 없이 그를 옥에 가둬버리는 것이죠.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다고 주님께서 말씀합니까?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해 준 채주가 당장 그 자를 감옥에 처넣었다고 말씀해주셨죠.

 

(깨달음)일만 달란트는 1달란트가 6,000데나리온으로 6000일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입니다.

1달란트는 16년간 일하며 모아야 하는 돈이고, 일만 달란트는 16만년 모아야 하는 돈이죠.

그에 비해 1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100데나리온은 100일간의 품삯에 해당하는 돈이죠.

그러니 그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자라면 아주 작아보이는 빚도 충분히 탕감해줄 수 있지 않겠냐는 뜻입니다.

 

(적용)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는 것, 죄의 채무가 일만 달란트처럼 엄청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죄의 채무를 용서받은 인간이라면 누군가 그에게 잘못한 죄에 대해서는 충분히 용서할 수 있지 않겠냐는 뜻이죠.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앞에 너의 죄인됨을 비춰보면,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안다면, 타인의 죄도 충ㅂ누히 용서할 수 있지 않겠냐는 뜻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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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기도를 알려주셨죠.

먼저 제자들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고, 제자들도 세상종교인들처럼 엉뚱한 기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때까지 제자들의 기도가 자기 과시, 자기중심적인 기도였기 때문에 바로잡아주고픈 주님의 뜻이었죠.

 

맨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도의 대상자가 하나님 아버지임을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헬라어 원문은 “하늘들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모든 삶에 현존하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뜻이었죠.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죠.

하나는 하나님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는 것이었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는 것이라고 했죠.

 

“나라가 임하시오며”, 그 나라는 죽어가는 천국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주권’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이라고 했죠.

하나님의 통치권, 하나님의 주권이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 받들며 사는 것이었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무엇보다도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주님 앞에 돌아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죠.

그렇게 주님 앞에 돌아온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죠.

그때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 이것이니 곧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5:14)하셨죠.

 

그리고 지난 시간에 살펴본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애굽 땅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광야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주셨죠.

그들이 가나안 땅에 살때는 집과 전답을 주시면서 풍족한 삶을 살도록 해주셨죠.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잊지 않도록 두 가지 것을 준행하며 살라고 하셨죠.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모퉁이 소산을 이웃에게 나누며 살도로 말이죠.

제자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한 것도 복음전도를 위한 나그네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죠.

오늘날 집과 전답이 있는 이들, 일하며 사는 자들은 가나안 땅에 정착한 백성들과 동일한 삶을 원하시는 것이죠.

그만큼 하나님의 소유권을 올려드리는 십일조를 드리고 모퉁이 소산을 나누며 사는 것 말이죠.

더욱이 넉넉한 삶을 살고 있다면 과소비하지 않고 검소하게 사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했죠.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의 내용인데 본문 1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원해)여기에서 ‘죄’는 ‘과녁을 빗나가다’하는 뜻의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 눅11:4)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사용된 ‘죄’는 헬라어로 ‘아페이레마’(ὀφείλημα)입니다.

그 뜻은 ‘채무’ 곧 채권자에게 진 ‘빚’을 가리키는 단어죠.

그래서 오늘 본문을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어떻게 번역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우리에게 빚을 진 자의 빚을 탕감해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탕감하여 주시옵고”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죄’를 사해 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면서 ‘빚’을 탕감한다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은 ‘채무’ 곧 ‘빚’을 탕감받는 게 훨씬 실체적이기때문이죠.

죄라면 추상적이기 쉽지만 ‘빚’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기 때문에 말이죠.

하나님께 지은 죄도 하나님께 갚아야 할 빚이고 사람에게 지은 죄도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이라는 뜻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본래 짊어진 죄의 부채가 바로 그와 같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무거운 죄의 부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모두 용서해주신 것, 탕감해주신 것, 그것이 죄에 대한 용서죠.

그러니 얼마나 홀가분하겠습니까?

전 인생을 짓누르고 있던 죄의 빛을 다 탕감받았으니 그 기쁨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깨달음)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모두 탕감해줬는데 우리와 관계맺은 사람에게 죄를 탕감해주는 게 쉬울까요?

나를 이간질시킨 사람, 유언비어로 힘들게 하는 사람, 살인마로 몰아넣는 사람, 용서하기 쉽나요?

그렇지 않죠.

 

나를 서운하게하고 왕따시키고 그림자취급하기만 해도 상처받기 쉬운 우리 자신이죠.

그런데 내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죠.

심지어 자기 가족을 향해서도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발췌)몇 년 전 〈가이드 포스트〉라는 잡지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에밀리 브란트’라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불행하게도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와의 관계가 좋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어머니도 너무 젊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도에 지나쳤는지 증오감이 너무 강해서 어머니가 집에 들어오는 문소리만 들어도 위가 뒤틀리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 후 결혼을 했지만 어머니에 대한 증오심은 시들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나가고 신앙생활을 하기도 하고 치유 클래스에 들어가고 개인적인 상담도 받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게 된 것은 그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어머니를 여전히 용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죠.

자기 나름대로 마음을 다스리고 최선을 다해 보려고 했지만 마음 속에 있는 어머니를 향한 증오의 불씨는 남아 있는 것이었죠.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용서에 대한 ‘어떤 댓가’를 기대하고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자신은 마음속에서 어머니를 용서했는데 어머니는 전혀 변화가 없다는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라면 최소한은 바뀌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그대로였기 때문에 어머니를 용서한 자기 자신이 더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그런 어머니를 매일 용서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때 그녀는 하나님께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하나님, 이젠 됐어요, 충분하잖아요. 나는 할 것을 다 했다구요. 더 이상은 못 합니다”하고 말이죠.

그때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얘야. 너는 아직도 네가 용서받았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모르고 있구나.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내가 너를 얼마나 용서했는데”

 

그 후 그녀는 자신이 하나님께 날마다 자신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면서도, 어머니를 용서하는 것에 대해 너무도 인색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되죠.

그 후에 그녀는 전화는 물론이고 선물과 카드도 보냅니다.

물론 이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전히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녀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어머니를 용서해 나갔습니다.

그러는 순간 깨닫게 된 것은 어머니를 용서하면서 변화된 것은 정작 자기 자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을 하죠.

“매일 눈을 뜰 때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기억하며, 그 사람을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내 영혼은 평안을 잃고 내 몸은 병들어 갔죠.”

“그러나 결국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없음을, 아니 그런 그가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기에,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저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그를 용서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말할 수 없는 영혼의 평안을 느끼고, 나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기서 나는 나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임재로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천국에는 두 죄인만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용서받은 죄인’, 또 하나는 용서받은 죄인을 날마다 용서한 ‘용서한 죄인’입니다.”

 

(깨달음) 사람에 대한 용서가 결코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죠.

누군가를 용서하면 그도 변화돼야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 보상심리가 작용해 용서하는 게 어렵죠.

 

그만큼 내 자아나 의나 결단력으로는 용서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만,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야만 용서하며 살 수 있는 것이죠.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우리의 죄의 부채를 탕감해주시고 은혜안에 머물게 하셔서 타인을 용서하며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네가 관계 맺는 사람들을 얼마나 용서하고 품고 사느냐?”

너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너는 그를 용서하며 살고 있느냐?”

너의 자아나 너의 의나 너의 결단으로 그를 용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주님께서 어찌 모르겠느냐?”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일만달란트와 같은 너의 죄의 빚을 다 탕감해준 것을 네가 기억한다면 어떻겠느냐?”

네가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그 죄를 다 탕감해주신 주님의 은혜안에 네가 거하면 너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이들도 용서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다.”

네 오른뺨을 치는 이에게 왼뺨을 돌려대는 것, 너무나 어려운 일 아니겠느냐?”

너를 모함하고 너를 비난하고 너를 괴롭히는 이를 어떻게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겠느냐?”

심지어 자신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했던 자기 어먼니조차 용서가 안되는데, 누가 쉽게 용서할 수 있겠느냐?”

그 얼굴만 보면 헛구역질이 나오고 위가 쓰라리기도 할텐데, 어찌 너 스스로의 힘으로 용서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주님께서는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끊임없이 용서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네 자아나 내 의나 내 결단으로 용서하라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너의 그 엄청난 죄의 채무를 다 탕감해주신 걸 기억하고 감사할 때 용서할 수 있지 않겠느냐?”

그러니 매일매일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해야,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야, 타인에 대한 진정한 용서가 매일매일 가능하지 않겠느냐?”

오늘도 주님은 네가 주님께 빚진 자의 심정으로 누군가를 용서할 때 하늘의 문이 더욱 활짝 열리지 않겠느냐?”

누구든지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말이다.”

네가 누군가를 용서해도 그가 달리지지 않는다고 괜히 용서했다고 생각지 말고, 묵묵히 용서하다보면 그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겠느냐?”

 

(찬양)주여 우린 연약합니다 우린 오늘을 힘겨워합니다

주 뜻 이루며 살기엔 부족합니다 우린 우린 연약합니다

주여 우린 넘어집니다 오늘 하루 또 실수합니다

주의 긍휼을 구하는 죄인입니다 우린 주만 바라봅니다

한없는 주님의 은혜 온 세상 위에 넘칩니다

가릴 수 없는 주 영광 온 땅위에 충만합니다

주님만이 길이오니 우린 그길 따라갑니다

그날에 우릴 이루실 주는 완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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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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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주님께서 죄를 사해주시다고 할 때, ‘죄’라는 말을 ‘빚’ 곧 ‘채무’로 빚대 말씀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1장 4절에서는 죄를 본래의 단어인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마르티아’란 ‘과녁에서 빗나간 상태’, 하나님께 정조준하고 있어야 할 시선이 어긋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늘 정상화돼야 하는데 그 상태가 빗나간 것, 사람과의 관계도 어긋나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죄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저지른 죄’가 있겠죠.

또 하나의 죄가 있다면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방관하는 죄’ 곧 ‘태만죄’도 있습니다.

부자의 집에 거지 나사로가 와서 떡 한 조각만 달라고 밥 한 공기 달라고 애원해도 모른 채 한 것, 그것이 죄를 것이죠.

주님께서는 그런 자는 지옥에 떨어져 고통 중에 처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셨죠(눅16:20-26).

하나님 앞에 마땅히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 사람에게 마땅히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 그게 태만죄입니다.

 

우리가 그런 죄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시는 분이시죠.

집나간 탕자가 그 죄를 뉘우치고 돌아올 때 아버지가 다 품어주듯이 말입니다.

그렇기에 죄를 용서해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아들여주시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죄인인 나를 받아들여주셨다면 나에게 잘못한 사람도 내가 받아들여주는 것, 그것이 사람에 대한 용서겠죠.

내가 그를 용서했다면 그와 눈을 마주치고 얼굴을 대하고 내 품으로 그를 받아들여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용서라는 의미죠.

‘에밀리 브란트’가 평생 미워했던 어머니를 용서한다는 것도 안부를 묻고 전화를 하고 또 편지를 쓰고 선물까지 보내는 것이니 말이죠.

 

(깨달음)그런데 누군가의 죄를 용서해주고 그를 받아들여주는 것, 내 의나 자아나 결단으로 되지 않죠.

칼 야스퍼스란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도 ‘한계상황’에 처할 때 비로소 변한다고 말했습니다.

절망의 상황, 죽음의 상황, 자신의 연약한 상황에 처하면 그때 변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든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가 추악한 죄인인지 알면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죄인임을 고백한다는 것이죠.

그때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과 사랑에 의해 다시 태어나고, 그 은혜로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거죠.

 

(발췌) 안산제일교회를 섬겼던 고훈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분이 아는 개척교회의 어떤 목사님이 교를 개척하고 중고 소형차를 타고 거리를 운전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붉은 신호가 들어온 것을 보고도 직진하다가 벤츠 승용차를 받아버렸습니다.

벤츠는 조수석 문짝이 부서졌고 그 목사님의 차는 폐차할 정도였죠.

상대 차에서 신사가 나오고 부서진 소형차에서 목사가 나와 서로 몸은 안 다쳤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그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목사인데 붉은 신호가 들어온 것을 보고도 기도하며 운전하다 사고 냈습니다.”

“모든 잘못은 제게 있으니 어떤 요구도 수용하겠습니다.”

그러자 그 벤츠 운전자는 그렇게 말했다고 하죠.

“목사님이 잘못 인정하시니 고맙습니다. 목사님이 제 차 문 부서진 것만 보험으로 고쳐주십시오.”

 

그러자 그 목사님은 너무나도 고마워서 자기 명함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보험 청구서가 날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신 중형 새 자동차 한 대가 교회로 배달이 됐는데, 이런 편지와 함께 말이죠.

“저는 지난번 사고 때 만난 집사입니다. 저는 큰 회사를 경영하고 있어요.”

“가난한 목사님을 보고 더 마음이 아팠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자동차를 드립니다. 제 차는 제가 고쳤습니다.”

 

(깨달음)우리가 그런 은덕을 입는다면 누군가 자신을 잘못한 사람을 어찌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탕감해주신 은혜가 그와 같다는 것이죠.

그러니 누군가 내게 죄를 범했을 때 얼마든지 용서해줄 수 있지 않겠냐는 뜻입니다.

 

(발췌)한 장로님이 평소에 자신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성도와 함께 이웃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배시간에 성만찬 순서가 있었습는데, 장로님이 성도님과 떨어져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이 두 분 사이에 좋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예배 후에 장로님께 물었죠.

“장로님께서는 왜 같이 오신 성도님과 함께 성만찬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저분과 돈거래를 한 적이 있는데 정직하지 않고 약속도 지키지 않아서 상대하기도 싫어서 그랬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이 그때 이렇게 말씀했다고 하죠.

“그럼, 장로님은 장로님 자신이 우리 주님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님께서는 유다가 자신을 팔아 넘길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와 함께 앉아 만찬을 나누지 않았습니까?”

 

그 말을 들은 장로님은 그때서야 주님의 마음을 품고 그 성도님을 용서하기로 했다고 하죠.

그 후에 장로님은 그 성도님과 좋은 관계를 회복해서 함께 앉아 성찬식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내음성)그래서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는 죄인이예요.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바다를 먹물삼아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예요.”

주님의 피값으로 대속해주셔서 용서해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주시니 너무너무 감사해요.”

아버지께서 제 죄를 용서해주시고 탕감해주셨듯이, 저도 그 은혜에 힘입어 타인을 용서하며 받아들이며 살게 해 주세요.”

주님의 살과 피를 대하며 사는 목회자와 성도 사이에도, 성도와 성도 사이에도, 뭐든지 받아들이는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찬양)주 사랑이 나를 숨쉬게 해 세상 그 어떤 어려움 속에도

주 은혜로 나를 돌보시며 세상 끝날까지 지켜주시네

주 사랑이 나를 이끄시네 내가 갈 수 없는 그 곳으로

주의 사랑 나를 붙드시며 세상 끝날까지 인도하시네

 

주님만이 내 아픔 아시며 주님만이 내 맘 어루만지네

어느 누구도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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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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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억만금을 줘도 갚을 수 없는 내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용서해주셨고 양자로 받아들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한계상황을 깨달을 때 주님의 은혜가 더욱 값지고 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은혜를 깨달을 때에만 내게 죄 지은 사람도 능히 용서하고 받아들여줄 수 있는 것이죠.

 

누군가 내게 상처주고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힘들게 하고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이 있을 때 그때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의 연약한 한계상황을 직시하고 하나님의 은혜안에 거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자아나 내 의나 내 결단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내가 너의 그 큰 죄를 용서해주지 않았더냐”, “너도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여줘야 하지 않겠느냐”하는 주님의 은혜 때문에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임하는 축복의 주인공들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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