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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이성봉 목사(1900-1965)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한국의 무디’라고 불릴 만큼 한국 교회사에 빛나는 부흥사죠.
특히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시대와 한국전쟁 시대에 민족의 희망과 비전을 제시한 분입니다.
더욱이 성결교회 목사라 더욱 자랑스러운 목사죠.
일제강점기 시절에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나라 때문에 강제 해산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나라를 믿는다는 것은 일본의 천왕제도에 반기를 든다는 명목이었죠.
그 시절에 이성봉 목사님이 목포경찰서에서 일본 경찰에게 심문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을 제가 PDF파일로 갖고 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이 구속돼 있던 그때 일본 형사가 그렇게 물어봤다고 하죠.
“무엇 때문에 목회 활동에 그토록 열심인가?”
그에 대해 이성봉 목사님은 그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도대체 천국이 어디 있는가, 천국에 가 보았는가?”
“본점은 아직 못 보았지만 지점은 보았습니다. 지점이 있으면 본점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 참 재미있네. 그래 천국 지점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제 마음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제 마음에 평화가 있고 기쁨이 있고 사랑이 넘치기 때문이죠.”
(깨달음) 어떻습니까?
이성봉 목사님도 죽어서 가는 영원한 하나님나라 그 천국을 누구보다도 사모하며 천국에 관한 찬양을 많이 부른 분입니다.
그렇지만 이성봉 목사님은 죽어서 가는 하나님나라 그 천국을 자기 마음 속에 누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본점을 모신 자가 이 땅에서 천국의 지점답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죠.
(적용)여러분은 이성봉 목사님처럼 지금의 현실 속에서 삶의 곤고와 고난의 터널을 지난 일이 있습니까?
너무나도 답답하여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해 답답할 때 말입니다.
그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던 그때도 주님 때문에 소망을 잃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심령에 이미 천국이 임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상사나 윗사람으로부터 핍박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교회에 다닌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을 나누고 전하는 삶 때문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때도 낙심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며 헤쳐나왔따면 이미 여러분의 심령 속에 하나님나라가 임해 있는 것이죠.
코로나19도 더 확산될 기미가 보이고 경제적인 여건이 예전과 다를 바 없어서 힘든 시절을 보내고 계십니까?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나보다 더 연약하고 작은 자들을 배려하며 그들과 작은 것이라도 나누며 살아왔다면 그분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며 사는 분인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12사도에게 주님의기도를 가르쳐주셨죠.
제자들의 요청이 있기 때문이었고, 그때까지 이방인들과 이방 종교인들과 다를 바 없는 기도를 그들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들이 큰 거리나 회당에 서서 큰 소리로 기도하면서 자신을 과시하는 기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더욱이 그들이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면서 하나님께 통보하는 수준으로 끝내버리는 기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만큼 그들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기 보다 오직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주님께서 주님의기도를 알려주셨는데, 주님께서 맨 처음 입을 알려줏니 것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였죠.
헬라어 원문은 ‘파테르’ 곧 ‘아버지’라는 말이 맨 먼저 나온다고 했죠.
그만큼 ‘너희들이 기도할 때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그 기도의 대상자를 명확하게 알고 기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영적으로 양자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에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양자된 자녀이기 때문에 말이죠.
물론 죄를 지은 자녀라 할지라도 집나간 탕자가 집에 돌아와 ‘아버지’하고 부르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하고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인됨을 아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다 받아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시죠.
다만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란 ‘저 하늘나라에 계신 아버지’를 뜻하는 게 아니라고 했죠.
헬라어 원문은 ‘하늘들’로 나오죠.
특정 공간 특정 시간을 가리는 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모든 곳에 함께 하시는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이죠.
그래서 들판에 자라는 들꽃 하나에도, 바닷가의 모래알 하나에도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름철 농부의 검게 그을린 얼굴 속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림을 하소연하는 이들의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기름값이 올라 화물차를 운행해도 마이너스라면서 아우성치는 화물운송자들의 절박한 외침에도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죠.
세계적인 경제 여파로 인해 회사를 운영하는 기업 대표가 직원들의 월급 때문에 한숨을 내쉬는 그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요.
그만큼 하나님은 저 하늘나라에만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현장에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현존 속에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은 매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마음과 자세가 중요한 것이죠.
성경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3:22)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현장에는 눈가림을 하며 살 수 있지만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곳에서는 그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달아보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죠.
주님께서 기도의 대상자를 명확하게 알도록 일깨워주신 후에는 알려주신 기도의 첫 번째 내용이 있습니다.
“이름이 거룩이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는 것은 두 가지 차원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거룩함 받으시는 것이요, 따른 하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을 거룩함을 받으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기 위해 애굽 땅 전역에 6개월에 걸쳐 10가지 재앙으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를 통해 애굽의 모든 신들보다 위대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만 천하에 알려 하나님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고 거룩함 받으셨죠.
유다 백성들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들어 치신 것도, 또 바벨론을 치고 유다 백성들을 포로에서 귀환케 하신 일도 마찬가지였죠.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스스로 영광을 취하신다고 이렇게 선포한 바 있습니다.
“내가 내 거룩한 이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에 알게 하여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인 줄을 민족들이 알리라 하라”(겔39:7)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하나님 스스로의 심판과 구원을 통해 영광받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방법이 있으니,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받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한 것처럼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조롱받고 폭행받아 쓰러졌는데 그들을 향해 히브리말로 복음을 전한 것 말이죠.
그만큼 삶 속에서 타인을 배려하고 공감하는 그 삶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드리는 삶이라고 했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함께 사는 분들,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살아가면서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그 공감의 삶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죠.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
내가 모든 것을 먹고 마시고 쓸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누군가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내 자유를 제한하며 남을 배려하는 그 삶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 믿지 않는 자들과 구별된 삶이요, 그 구별된 삶이 거룩한 삶이요, 그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 때문이죠.
(본문)오늘은 그 네 번째 시간으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째 기도의 내용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원해) 여기에 ‘나라’란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것이고 흔히 천국이라고 말하는 단어죠.
그런데 헬라어 원문은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로 ‘왕이 통치하는 왕국’(a kingdom)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우선하는 게 있죠.
바로 ‘왕의 통치권’(kingship), ‘왕의 통치 주권’이 그것입니다.
(깨달음)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천국을 뜻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죽어서 가는 그 하나님나라 곧 천국을 사모하며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나라’는 이미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우리 곁에 있고, 심지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심령이 하나님의 통치권을 받아들이고 그 분의 통치 주권의 말씀을 삶 속에 새기며 살고 있다면 말입니다.
(원성)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면서 ‘천국’ 곧 ‘하나님나라’가 예수님과 더불어 이미 왔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통치권을 예수님께 다 위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17:2)
그래서 예수님을 심령에 모신 자들은 이미 그 마음 속에 하나님나라가 임했다고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죠.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죽어서가 가는 천국 그 하나님나라를 우리의 심령과 우리의 삶에도 모시고 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이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이성봉 목사님이 그토록 천국을 사모하며 살면서도 자기 심령에 하나님나라를 모시고 산 이유를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천국의 본점만 가기를 바란 채 이 땅에서 아무렇게 산다면 어찌 천국의 지점을 온전하게 이룰 수 있겠냐는 뜻 아니었겠느냐?”
“그 분이 일제강점기시절에 심문을 받으면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던 이유는 그 속에 하나님나라에 이미 임해 있기 때문이지 않았겠느냐?”
“오늘 주님께서는 너에게도 그런 소망을 불어넣어주시고자 하지 않겠느냐?”
“이 땅에서의 삶이 코로나19로 경제적인 여건으로 힘들고 고달플지라도 예수님 때문에 소망과 기쁨을 잃지 않는다면 그 심령에 이미 천국이 임해 있는 것 아니겠느냐?”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이해 전반기의 삶을 감사로 고백하며 주님께 영광돌리고 있다면 너의 심령에 하나님나라가 이미 임해 있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영적으로 양자된 하나님의 자녀답게 네 심령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통치권을 모셔들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의 주권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삶이지 않겠느냐?”
“네가 죄로 가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우로 가라고 하시면 그 길에도 순종하는 삶 말이다.”
“너는 네가 원하는 육신의 소육을 좇아 살고 싶어도 주님께서 성령의 소욕을 좇아 살라고 이끄실 때 순종하는 삶 말이다.”
“날이 저물어가는 빈들의 상황에서 아무 것도 먹고 마실 게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주님께 전적으로 내어 맡기며 감사하는 그 삶 말이다.”
“너에게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지혜도 없어서 나는 정말로 연약한 자입니다, 하면서 그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이미 천국에 임하게 하시는 주님이시니 말이다.”
(찬양)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성화)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목적이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고자 오셨고, 그 하나님나라를 가르치고자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여러 가지 비유로 하나님나라에 대해 일깨워주셨죠.
이를테면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마13:24)과 같다고, “자기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마13:31)과 같다고 하셨죠.
또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다”(마13:44)다고,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다”(마13:45)고 말이죠.
그리고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다”(마13:47)고 비유로 말씀해주셨습니다.
(깨달음)그와 같은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공통적으로 강조하고자 하신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공통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밭, 장사, 물고기, 그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라는 뜻입니다.
천국 곧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과 동떨어진 별나라 세계가 아니라 내 삶에 현존하는 나라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내 심령의 밭에 말씀의 씨를 뿌려 주실 때 기꺼이 순종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임한다는 것이죠.
내 삶에 작아 보이고 미약해 보이는 겨자씨 같은 한 알과 같은 말씀이 내 속에 역사하면 하나님나라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죠.
내 삶이 분주해서 이것 저것에 치이면서 살아가지만 그 속에서도 가장 귀한 진주와 같은 말씀을 좇아 순종하면 그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그와 같은 천국의 비유, 곧 일상의 삶의 비유를 제자들에게 곧 우리들에게 말씀해주신 것일까요?
그 당시 로마 제국이 통치하던 때요, 모든 힘과 권력과 통치가 로마 황제로부터 나오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런 권세와 그런 세상의 힘과 능력 있는 자들에게 쏠리지 말고 너희들의 일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고 살면 그곳이 하나님나라임을 천명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왕실이나 고관대작의 지위와 능력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너희들의 삶 속에 가까이 있다고 말입니다.
(발췌)러셀 콘웰이 쓴 〈내 인생의 다이아몬드〉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고대 페르시아 인더스 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알리 하페드’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상당한 규모의 농장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사람에게 한 동방의 현자가 찾아와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다이아몬드’라는 가르침을 주고 떠났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알리 하페드는 그때부터 다이아몬드를 발견하고 싶어 했습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부자가 되고 싶은 소원 때문이었죠.
그때부터 그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찾아 유럽까지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서도 다이아몬드를 찾지 못하고 타지에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알리 하페드가 죽은 후에 그의 농장을 다른 사람이 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주인이 개울가에 갔다가 자신의 하얀 모래 땅에 신비하게 반짝이는 검은 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이아몬드였던 것입니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이야기입니까?
알리 하페드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다이아몬드는 실상 자기 농장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다면 그는 원하던 부자가 되었을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적용)어떻습니까?
보화는 비범한 곳에 있는 게 아니라 평범한 곳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가족과 함께 누리는 행복, 건강한 몸, 아침에 출근할 수 있는 직장, 한 끼 밥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이 실은 보화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 평범한 것들을 잃고나서야 그것들이 보화였음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됩니다.
이별의 고통을 맛본 후에야 가족이 함께 모여서 밥 먹던 때가 행복이었음을 아는 것이죠.
병상에 입원하고서야 자기 발로 마음대로 걷고 다니던 때가 행복이었음다는 걸 말입니다.
건강을 잃고나서야 내 손으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임이라는 걸 말이죠.
불평하고 짜증 나던 직장이었지만 그 삶을 잃고 나서야 그때가 좋았다는 후회를 하죠.
어떻습니까?
천국도, 그 하나님나라도 저 영원한 안식의 세계에 들어가야만 누릴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지금 내 심령에 하나님의 주권을 모시고, 내 삶의 곳곳에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에 순종하며 살 때, 바로 내가 살고 있는 곳곳이 천국이요 하나님나라라는 사실입니다.
(내음성)그러니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평범한 삶에,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들 속에 비범한 다이아몬드가 숨어 있었어요.”
“감사란 특별한 것과 특별한 일에만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일상의 삶에 가득찬 것이었어요.”
“물한 모금 내 손으로 마실 수 있고, 내 발로 걸어다닐 수 있는 것만 해도 주님 앞에 감사할 일이었어요.”
“많은 재물과 부요를 누리진 못해도 하루 세 끼 밥을 먹을 수 있고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이 있는 것만도 감사할 일이었어요.”
“천국, 그 하나님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내 심령 속에, 내가 살아가는 곳곳이 하나님나라임을 믿어요.”
“주님, 2022년 전반기의 삶에 힘들고 어려웠지만 돌아보면 내 삶에 작은 것 하나하나에 하나님나라를 이루어주심 감새해요.”
“2022년 하반기의 삶이 어떻게 펼쳐질지라도 내 삶에 이루어가시는 하나님나라를 받들며 순종하며 살게 해 주세요.”
(찬양)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나의 곁에 항상 계셔
나의 맘과 모든 생각 지키시고 인도하네
나의 슬픔 위로하고 나의 멍에 함께 매어 주시는
사랑의 주 예수님은 영원하신 나의 목자
그의 품에 안기어서 영원토록 나 살으리
나를 축복하시는 주님 주의 성령 부으시사
나의 말과 모든 행실 주를 위해 이끄시네
세상이길 힘주시고 천성 향해 날 인도해주시는
능력의 주 예수님은 영원하신 나의 소망
그의 나라 가기까지 주를 위해 나 살으리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 주의 말씀 내게 주사
나의 발과 모든 길을 비추시고 인도하네
푸른 초장 물가으로 나를 항상 인도하여 주시는
사랑의 주 예수님은 영원하신 나의 목자
그의 사랑 영원토록 감사하며 날 살으리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나라는 궁극적으로 죽어서 가는 저 영원한 천국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선포하고 가르치신 하나님나라는 내 심령 속에 내 삶의 현장에 임해 있는 하나님나라입니다.
2022년 전반기 맥추감사주일을 지키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하나님나라는 임해 있는 나라입니다.
2022년 전반기의 삶이 비록 고달팠어도 예수님 때문에 이겨내며 감사하며 살아왔다면 이미 하나님나라가 임해 있는 것입니다.
아빠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주권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자들에게 2022년 후반기의 삶에도 감사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충만한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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