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SundaySermon

그의 형제 요한(마4:18-22)_2022년6월12일 주일낮설교

by 똑똑이채널 2022. 6. 10.
728x90
반응형
SMALL

그의 형제 요한.hwp
0.17MB

(설교열기)(논지) 사람은 그가 성공할 때 그 곁에 사람이 함께 하고 실패할 때 다들 떠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친구 사이에도 그런 경향이 많죠.

 

그런데 그렇게 실패할 때도 그 곁에 한다면, 그가 수세에 몰릴 때도 함께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다들 어리석다고 조롱하거나 무시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실패작 인생을 살던 나오미를 따라 나선 룻은 어떨까요?

사울 왕에게 쫓기던 다윗을 격려하고 끝까지 돕겠다고 한 요나단은 어떨까요?

 

우리가 보기에 룻이나 요나단은 너무나도 어리석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인간의 관점으로 바라보시겠습니까?

 

(성화)우리가 아는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살면서 남편과 함께 기근 속에서 모압 땅으로 이주해갔습니다.

그 속에서 10년간 사는데 아들 둘 장가를 보냈죠.

하지만 그 10년 동안 남편이 죽었고, 두 아들 모두 죽고 말았죠.

 

급기야 그녀 혼자 남았을 때, 고향 베들레헴에 회복의 소식이 들려오죠.

그때 그녀가 결심한 것은 이제라도 고향 땅에 돌아가는 것이었죠.

 

그러자 첫째 며느리 룻과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처음엔 둘 다 나오미를 따라나섰죠.

하지만 중간에 시어머니는 “너희들의 고향 모압에 돌아가 재가해 잘 살도록 해라”하고 당부했죠.

 

그때 둘째 며느리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말대로 고향 모압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누가봐도 시어머니의 인생은 완전히 망가졌고, 낯선 베들레헴에 따라가봤자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고 판단한 까닭이었죠.

 

하지만 첫째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겠고 시어머니가 죽는 곳에 나도 죽을 것입니다”하며 따라나섰죠.

누가봐도 시어머니를 따라 낯선 땅에 나아가는 게 어리석은 선택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오직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며 패망한 시어머니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실패작 인생을 산 시어머니를 따라 낯선 베들레헴 땅에 왔던 룻은 시어머니의 남편 가업을 책임질 보아스를 만나 개가했죠.

그를 통해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이새는 다윗을 낳아 이스라엘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모두가 하나님을 신뢰하며 시어머니를 따른 그 길목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은혜였던 것입니다.

(깨달음)이것은 다윗의 인생을 지지하고 격려하고 도와준 요나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의 아들이었지만 골리앗과 같은 블레셋의 강적을 물리친 다윗을 격려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고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하면서 다윗을 더 높이 칭송하게 되었죠.

그때 사울은 다윗을 살려두게 되면 자기 아들 요나단이 왕위를 물려받는데 지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다윗을 죽이려했죠.

 

그래서 사울 왕은 3천명의 정예부대를 보내 다윗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가 감히 다윗을 도와주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칫 사울 왕에게 잘 못 보였다가는, 다윗을 도와줬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당할 수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누구 하나 나서서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놉 땅의 제사장들이 다윗에게 먹을 것을 주고 칼도 줬을 때, 사울 왕은 그곳의 제사장들을 모조리 죽인 일이 있었죠.

그 후로도 다윗이 8년간 도망쳐 다닐 때 그때마다 다윗을 본 사람들이 사울 왕에게 그 사실을 다 알린 사람들이 많았죠.

 

그러니 어느 누가 감히 나서서 다윗을 도와주려 했겠습니까?

그런데 유독 다윗이 도망갈 때 그를 격려해주고 그와 함께 옷을 바꿔 입으며 우정을 쌓으며 신뢰를 보낸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었습니다.

 

왜 요나단은 모두가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그 때도 다윗을 향해 그토록 신뢰하며 격려했던 것일까요?

다윗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했고, 하나님께서 다윗과 동행하고 있음을 알았기에 요나단은 끝까지 다윗을 격려했던 것이죠.

 

(적용)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내 곁에 누군가 성공할때는 그와 함께 하다가도 실패한다면 곧장 돌아서버리는 게 인간의 모습 아닙니까?

 

그러나 그런 실패작 인생과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면, 쫓기는 사람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다들 미쳤다고 할지모르지만 하나님을 향한 중심을 갖고 있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의 실패작 속에 고향으로 돌아간 나오미를 따랐던 며느리 룻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한 다윗을 낳는 통로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광야로 내몰리는 다윗을 격려하고 도와준 요나단에게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가의 자식들이 모두 죽어갈 때 요나단의 아들 므보셋만큼은 다윗의 상에서 먹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죠.

 

그렇기에 누군가 실패하거나 쫓길 때 세상의 관점보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수 있습니다.

설령 그가 지금은 실패한 것 같고 내 쫓기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고 있다면 그를 지지하고 그 곁에 있어주는 이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우리는 지금 4주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장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0살 이전까지 가정 경제를 위해 목수로 일하면서 사셨지만 30살 무렵엔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려 세상을 향해 나가셨죠.

 

그때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1:11)하는 하늘의 음성이 들려왔죠.

그 이튿날에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하고 선포했죠.

 

그러자 세례 요한을 스승으로 모시던 안드레와 요한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따라나섰죠.

그때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치는 모습을 지켜봤고 40일간 마귀의 시험받는 모습도 지켜봤죠.

 

그 모습을 바라본 안드레는 자기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죠
“너는 시몬인데 앞으로는 게바 곧 베드로라 해라”하고 말이죠.

여태껏 너는 귀가 얇은 자처럼 세상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반석과 같은 믿음으로 살라는 뜻이었죠.

 

하지만 그 후에 예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고자 갈릴리를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땅으로 갈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안드레는 고기잡이에 다시 나서고 말았죠.

그때 주님께서는 이방 땅에 주님의 빛을 비춘 이후 곧장 갈릴리로 와서 고기잡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에게 다가왔죠.

그날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그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는데 엄청난 고기를 잡게 되었죠.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을 신뢰하지 못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는데,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내치지 않고 다시금 말씀하셨죠.

“나를 따르라 내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할 것이다”하고 말이죠.

그러자 베드로와 그 형제 안드레 그리고 옆동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도 따라나섰음을 우리가 살펴봤죠.

 

그중 지난 시간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에 대해 살펴봤고 오늘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을 눈여겨보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로서 야고보의 친 동생이었죠.

당시 세베대는 갈릴리에서 배를 소유하고 종들을 거느린 부자였고 대제사장과 연을 닿고 있는 능력자였죠.

요즘 식으로 말하면 갈릴리 수산시장의 대표 이사격이 세베대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어린 시절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은 매사에 자기 중심적이고 안하무인격으로 대하는 성품이었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에 가실 때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해버리라고 할 정도였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에게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라고 별명을 붙여줬죠.

 

그만큼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따라나선 야고보와 요한이었지만 예수님의 성품을 닮기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힌다고 할 때 예수님을 비난한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죠.

 

어쩌면 그 까닭에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을 더욱 가까이 예수님께서 끼고 도셨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성품이 다혈질적이고 자기 밖에 모르는 그런 자기 중심적인 제자들이라 12제자 중에 그들 세 사람을 더욱 가까이 하신 것 말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요한은 예수님께 더욱더 사랑받는 제자였음을 그 스스로 밝힌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을 나눌 때 주님 품에 안긴 제자가 그였는데 그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요13:23)라고 익명으로 처리했습니다.

다른 제자들 앞에 자랑을 자랑하고자 했다면 자기 이름을 밝혔겠지만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그저 익명으로 처리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요한을 유독 사랑하셨을까요?

베드로의 장모를 고칠 때도, 야이로의 집에 갈 때도, 변화산이나 감람산에 갈 때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지만, 왜 유독 성찬식 때 주님의 품에 안기는 요한을 더욱더 받아주신 걸까요?

 

실은 12명의 제자 중에 요한이 제일 나이가 어렸고, 그 누구보다도 성품이 가장 모난 자였기에 그렇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른 제자들보다 더욱더 예수님께 잘보이고 싶었던 그런 시기심과 질투심이 강한 요한이었기에 그를 더 챙기신 것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께 그런 사랑을 받은 요한은 다른 제자들과는 다른 독특한 점을 보여주는 점이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할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셋 다 줄행랑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는 다른 모든 제자들은 멀찍이 숨어서 지켜봤는데 그때 요한만큼은 달랐죠.

그 순간 십자가 아래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와 함께 그 현장을 지킨 이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을 바라보면서 “어머니, 이제 요한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19:26)하고 말했죠.

그때부터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자기 어머니처럼 자기 집에 모시며 봉양하며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기도할 때도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뜨겁게 기도를 했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죠.

그때 예루살렘에서 마리아를 섬긴 요한이었지만 틈나는대로 베드로와 함께 성전에 나가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 동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산헤드린 의원들 앞에서도 베드로와 함께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 인물이 요한이었습니다.

그리고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그들에게 찾아가 성령의 충만함을 베푸는 도구 역할을 한 이가 요한이었죠.

 

요한은 그 정도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잘 봉양하면서도 틈나는 대로 초대교회에서 복음전하는 소명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보통 유대 여자들이 20세에 결혼한 걸 감안하면 33살의 예수님의 부활승천때 마리아는 50세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죠.

전승에 따르면 마리아가 90세에 죽었다고 하는데, 그때가 A.D.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무렵이었죠.

그 무렵 예루살렘의 많은 사도와 제자들이 빠져나갔는데 사도 요한도 예루살렘을 빠져나가 에베소로 간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 당시 에베소교회는 사도 바울의 위임을 받은 디모데가 목회했는데 바울이 순교한 직후 디모데도 곧장 순교를 했고, 이어서 목회한 이가 요한이었던 것이죠.

바로 그 무렵에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틈틈이 들은 내용을 토대로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를 쓰게 된 것이죠.

그때가 A.D.90년 경이었습니다.

 

그 후 A.D.95년에 로마의 티투스 황제에 이어 도미티아누스(Titus Flavius Domitianus)가 11대 황제가 됐는데 그때 요한은 밧모섬으로 유배를 가죠.

밧모섬은 에베소에서 서남쪽으로 70km떨어진 섬인데, 그곳에서 18개월가량 유배의 삶을 삽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성령의 환상 가운데 그림 언어로 된 새 하늘과 새 땅의 비밀을 보죠.

이듬해인 A.D.96년 경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당하고, 12대 네르바(Marcus Cocceius Nerva)가 황제로 즉위하자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오죠.

그때 요한은 밧모섬에서 본 그림 언어의 환상을 글로 옮겨 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이죠.

그 이후 사도 요한은 A.D.100년 경 자연사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깨달음) 이와 같은 요한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다른 제자들은 실패자처럼 보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다들 도망치고 멀찍이서 지켜봤지만 요한만큼은 달랐다는 점입니다.

요한은 그 십자가에 아래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들과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함께 아파하고 오히려 격려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마치 실패작 인생을 산 나오미가 고향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때 며느리 룻만큼은 함께 따라나서서 격려한 것처럼 말입니다.

사울 왕에게 내쫓기며 도망자로 살아야 하는 다윗을 요나단만큼은 함께 아파하고 지지하고 격려한 것처럼 말이죠.

누군가 성공세를 타면 다들 그 등에 올라타려고 함께 하지만 그가 실패하면 다들 등을 돌리고 외면하는 게 인간의 본성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 속의 요한은 예수님께서 실패작 인생으로 십자가에 죽을 때 유독 그 현장에서 함께 아파하고 함께 격려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평상시에 다른 제자들보다 더 많은 사랑 더 깊은 사랑을 받은 요한이 보여준 응답의 모습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제자가 등을 돌리고 멀찍이 바라볼 때도 요한은 십자가 아래 함께 했고,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라는 당부까지 받은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누구보다도 빨리 뛰어갔고, 갈릴리에 오셨을 때도 맨 먼저 주님을 맞이한 것 아니었겠습니까?

그 후로도 요한은 40년간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했고, 90세에 밧모섬에 끌려갈 때도, 100세에 자연사할 때까지도 한결같이 주님만 바라보며 산 것 아니겠습니까?

 

(주문)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은혜)저와 여러분도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로서 십자가를 가까이 하며 주님 소명을 완수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점이죠.

 

(주음성)그래서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성령님의 음성으로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요한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느냐?”

그도 주님을 만나기 전이나 주님을 만난 이후 주님을 따르면서도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성품의 소유자였지 않더냐?”

그런 연약한 성격의 소유자요 더욱이 가장 어린 제자였기에 특별한 사랑으로 주님께서 그를 품어주신 게 아니더냐?”

그래서 성찬식을 나눌 때 그가 주님 품에 그의 얼굴을 파묻을 때 더욱 품어주신 주님이지 않았더냐?”

그렇게 남다른 주님의 사랑을 받은 그였기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을 때 다들 멀찍이 바라봤지만 그는 십자가 아래에 있지 않았더냐?”

그런 그에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40년간 맡겼고, 에베소교회를 목회할 때 요한복음과 요한1,2,3서를 쓸 수 있게 했고, 밧모섬에 유배가서도 요한계시록의 환상을 보여준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잘 나고 믿음이 좋고 네 능력이 특출나서 오늘까지 너를 주님의 자녀로 주님의 제자로 품으신 게 아니지 않느냐?”

어쩌면 너는 요한보다도 더 연약하고 흠이 많기에 주님께서 너를 더 아끼고 사랑으로 품는 게 아니겠느냐?”

그렇게 특별한 사랑을 받은 요한은 다른 제자들과 달리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들과 함께 아파하고 격려하지 않았더냐?”

그런 요한에게 주님께서는 마리아를 당부했고, 에베소를 목회하는 동안 요한복음과 요한1,2,3서를 쓰게 했고, 밧모섬에 유배갔을 때는 요한계시록을 보여주는 환상도 열어주지 않았더냐?”

주님께서는 그렇게 실패처럼 보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요한에게, 실패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나오미와 함께 하는 룻에게, 도망치는 다윗과 함께 한 요나단에게, 크신 은혜를 베푸신 것 아니더냐?”

너도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답게 그 누구보다도 십자가를 가까이 하며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완수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누리며 살았으면 좋겠구나.”

 

(찬양)주님 예수 나의 동산 내 맘속에 동녘 하늘 아침햇살 가득 안고 활짝 피는 백합 같아

그 안에서 이 생명도 피어나는 꽃 되리라 오 하나님 이 꽃 바쳐 주의 재단 밝히리니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늘 평안 내리소서

 

주님 예수 나의 동산 내 맘속에 동녘 하늘 아침햇살 가득 안고 자라나는 나무 같아

그 안에서 이 생명도 귀한 재목 되겠어요 오 하나님 이 재목 바쳐 주의 재단 쌓으리니

은혜로운 사랑으로 하늘 평안 내리소서

 

 

[전자책] 야긴과 보아스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BR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BR 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

www.aladin.co.kr

(예화)토마스 도르세이(T. A. Dorsey)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2세 때부터 파티에서 피아노를 치며 돈을 벌만큼 음악적 재능이 탁월했습니다.

그는 결혼 후에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시카고 필그림침례교회의 지휘자로 40년간 섬기며 복음가수로 활동을 하게 되었죠.

 

그가 세인트 루이스 집회에 참석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만삭인 아내가 출산 중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죠.

다행이 아이는 살아 있었지만 그 역시 그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이와 아내를 같은 관에 넣어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리고는 깊은 좌절과 절망에 빠졌죠.

정말로 그때의 풍랑은 감당할 수가 없는 슬픔이었습니다.

절망 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의 터널이었죠.

 

그때 그를 아는 한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작업실 피아노 앞에 그를 앉혀 놓았습니다.

아무 것이든 떠오르는 노래를 부르며 위안을 삼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는 석양의 햇살을 받으며 반짝이는 피아노 건반을 천천히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죠.

 

그러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평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성령님께서 슬픔 가운데 있는 그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그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데 도리어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때 그가 부른 찬양이 바로 ‘주님여 이 손을 꼭잡고 가고서’입니다.

좌절과 절망 속에서 주님의 붙잡아주심을 간절히 바라는 그의 간구였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의 손을 붙잡아 주셨고, 그의 심령은 다시금 회복되었고, 그가 부른 노래는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의 심령에 평강을 불어넣는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찬양)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내음성)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주님, 12살부터 천부적인 피아노 재능으로 엄청난 명성을 떨치던 도르세이가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다들 등을 돌렸어요.”

하지만 그 곁에 있던 한 친구는 그때 그를 위로하고 지지하며 그를 격려했어요.”

이름 없는 그 친구의 격려와 지지를 통해 그가 다시금 일어섰고 모든 이들의 마음에 평강을 불어넣는 노래까지 작곡하게 되었어요.”

주님, 지금도 우리 곁엔 나오미처럼, 다윗처럼, 심지어 예수님처럼 실패와 좌절의 터널을 지나는 이들이 있어요.”

주님, 저를 나오미를 위로한 룻처럼, 다윗을 격려한 요나단처럼, 예수님을 위로하고 아파한 요한처럼 삼아주셔서 주님의 도구가 되게 해 주세요.”

그리하여 제가 내민 손을 통해 누군가 주님의 손을 붙잡는 계기가 되게 해주세요.”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진 도르세이가 그 친구의 내민 손을 통해 주님을 만났듯이 저도 그런 은혜의 도구가 되게 해주세요.”

그런 사랑으로 요한이 주님께서 부여한 소명을 완수했듯이, 저도 그런 사랑 속에서 주님께서 부여한 소명을 완수하게 해 주세요.”

 

 

[전자책]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BR 그 속에서 페르시아의

www.aladin.co.kr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곁에 여러 사람들과 12명의 제자들이 있었지만 요한만큼 사랑을 받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가 똑똑하고 믿음이 좋고 특출나서가 아니라 가장 성격이 연약했고 가장 어린 제자였기 때문에 더 특별한 사랑을 베푸신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그와 같은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임을 깨닫고서 주님을 더욱 사랑하며 주님께서 맡기신 일에 소명을 다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다른 제자들과 달리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과 아파하며 지지했고, 주님께서 당부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했고, 에베소교회를 섬겼고, 밧모섬에 유배를 가면서도 변함없이 헌신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100세 자연사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때까지 요한복음과 요한1,2,3서를 썼고, 요한계시록까지 남기는 은혜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답게, 주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완수하는 이 시대의 요한과 같은 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누군가 실패하고 좌절을 겪을 때 등을 돌릴 게 아니라 그 곁에서 주님의 위로자요 격려자가 되어 그가 소생하는 통로가 되는 것, 그보다 더 귀한 주님의 도구가 되는 길은 없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