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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SundaySermon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6:9-13)

by 똑똑이채널 2022.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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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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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논지) 예전에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의 조상들은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정한수를 떠 놓고 천지신명께 기도를 하거나 산에 올라가 돌탑을 쌓으면서 기도를 했죠.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옥동’역을 맡은 김혜자 씨가 돌탑을 쌓으며 기도하는 모습도 그런 모습이죠.

 

그 후에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는 어떻게 기도를 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기도하는 방법을 모르니 예전처럼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면서도 무속의 기도처럼 비는 기도 말입니다.

 

사실 모든 종교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불교에도 기도가 있고 이슬람에도 기도가 있고 유대교에도 기도가 있고 심지어 무속에도 기도가 있죠.

어쩌면 그들의 기도가 기독교의 기도보다도 훨씬 더 다양하고 훨씬 더 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도와 기독교인의 기도, 그들의 기도와 우리 기도도에는 가장 큰 차이점이 하나 있죠.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모시고 기도를 드리는 차이죠.

 

불교에서는 마호메트를 신으로 떠받들고 기도하고, 이슬람은 알라를 신으로 떠받들고 기도합니다.

무속인들은 자신들이 내림굿을 받은 그 귀신을 향해 빌고 빌죠.

유대교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기도, 하나님과 아빠 아버지와의 관계가 아닌 지엄하신 신으로서 기도를 하죠.

 

그러나 기독교인의 기도, 곧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하죠.

 

그만큼 우리의 기도는 다른 종교인들처럼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는 게 아니죠.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과 영광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기도를 드리는 가장 큰 차이점이 있는 것이죠.

 

(깨달음)그렇다면 여러분은 매일같이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이 땅에 펼쳐질 수 있도록 매일 같이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신 뜻을 좇아 살아갈 수 있도록 아바 아버지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적용)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과 무관한 자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과 영광을 찬양한다면서도 자기 뜻만 관철시키는 기도를 한다면 다른 종교인과 차이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께 어떻게 기도드리길 원하시는지,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주신 메시지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우리는 지난 5주 동안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공적인 사역을 위해 갈릴릴 바다에서 제자를 부르신 장면을 살펴봤죠.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그 동생 안드레, 야고보와 그 동생 요한을 만나는데 그때가 처음만나는 게 아니라고 했죠.

 

이미 그 이전부터 안드레와 요한은 세례 요한을 스승으로 모시고 종종 따라다니기도 했죠.

그런데 그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고 했죠.

또 “나는 그 분의 신발끈을 묶고 푸는 것조차 감당치 못할 자요 나는 그 분의 터를 닦는 자에 불과하다”고 선포했죠.

바로 그 분이 예수님이셨는데, 그 예수님께서 오실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하고 선언했죠.

한 마디로 말하면 “내가 말하던 그 분이 바로 저분이다”하는 뜻이었죠.

 

그때 요한과 안드레는 그 즉시 자신들의 스승인 세례 요한을 박차고 예수님을 따라붙게 되었죠.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 좇고 40일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는 모습들을 목격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때 안드레는 “저분이야말로 참된 메시야요 구원자이시구”하고 깨닫고 자기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었죠.

그것은 요한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전에는 시몬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았지만 이제는 반석으로 살도록 해라”하면서 베드로란 이름을 지어주셨죠.

물론 그렇게 안드레와 그 형 베드로, 요한과 그 형 야고보가 주님을 따랐지만, 주님께서 이방 스불론과 납달리로 가실 때 그들 스스로 실족해서 고기잡이로 다시 회귀해버렸죠.

그러나 주님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뒤에 곧장 갈릴리로 오셔서 다시금 “나를 따르라”하시면서 제자로 삼아주셨죠.

 

물론 그 후에도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제자들이 많이 따랐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많은 제자 중에 12명을 사도로 뽑았는데 그때도 밤이 새도록 기도하신 뒤 12명을 택했죠.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6:11-16)

 

이 중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형제였죠.

하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 중에서 ‘수제자’로 불립니다.

그것은 그가 가장 연장자이기도 했고 제자 중에서 유일한 기혼자였고 성격이 급해서 누구보다도 말과 행동이 앞섰기 때문이죠.

반면에 안드레는 제자 중에서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았지만 다른 제자들 앞에 나서기보다 조용히 연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형 베드로를 예수님께 인도한 이도 안드레였고, ‘오병이어 사건’때 보리빵 5개와 물고기 두 토막을 가지오 있는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이도 안드레(요6:8)였습니다.

그리고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알고자 왔을 때 그들을 예수님께 소개시켜주려 했던 이가 안드레(요12:22)였죠.

 

야고보와 요한도 우리가 살펴본 대로 형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들 두 형제는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 둘은 성격이 모두 급해서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지녔고 불타는 야망도 갖고 있던 이들이었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후에 야고보를 사도들 중에서 첫 순교자로 받으셨고, 요한은 자연사할때까지 산 순교자로 받으셨죠.

 

빌립과 바돌로매(나다나엘)는 친구 사이였습니다.

다만 빌립은 신중하고 이성적인 성격을 지녔습니다.

예수님께 5,000명의 사람을 조금씩이라도 먹이려면 200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고 말한 인물이 바로 빌립이었던 것이죠.

그런가 하면 바돌로매 곧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는 선한 것이 날 수 없다는 편견이 있었지만 사도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마태는 어떻습니까?

그의 본명은 ‘레위’인데 그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로 일하던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던 사람이었죠.

그러나 주님은 그런 죄인 곧 무자격자를 제자 이상의 사도로 선택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도마는 어떻습니까?

도마는 흔히 ‘의심 많은 도마’라는 수식어가 붙은 사람이죠.

그러나 그는 의심이 많았다기보다는 주님을 더 제대로 알고 싶어서 질문을 많이 한 사도였죠.

그 도마를 ‘디두모라 하는 도마’라고 부르는데 ‘디두모’란 ‘쌍둥이’를 뜻하는 말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형제로 부름을 받았고, 빌립과 바돌로매(나다나엘)는 친구로 부름받았는데, 같은 쌍둥이임에도 도마는 혼자 부름을 받은 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성경에 이름만 나올 뿐 그들의 삶은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도 모두 주님께 사도로 선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 인물이 있습니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다대오)와 예수를 팔 자가 된 가룟 유다는 실은 이름이 같죠.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은 삶을 산 건 아닙니다.

한 사람은 주님의 제자로 끝까지 남았지만 한 사람은 주님을 배신한 죄악 속에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깨달음) 이를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부르심은 너무나도 신비롭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자격이 있어서, 믿음이 좋아서, 능력이 있어서 부르신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고집스럽고 이기적이고 무한 욕망을 지니고 있어도 주님은 제자로 부르셨고 또 사도로 선택해 주셨습니다.

형제를 제자로 사도로 부르셨는가 하면 친구를 부르기도 했고, 같은 쌍둥이임에도 한 명만 부르시기도 했죠.

다혈질적인 이를 제자로 부르셨는가 하면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도 제자로 부르시고 사도로 선택해주셨죠.

그런가 하면 세리와 창녀를 같은 죄인으로 동급으로 여기던 시대에 세리 레위도 제자로 그리고 사도로 선택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과 주님께서 직분을 맡기신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이 좋거나 능력이 있어서 주님의 자녀로 직분자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다혈질적이고 누군가는 냉철하지만, 또 같은 쌍둥이지만 주님의 선택을 받은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사실이죠.

 

(적용)그렇기에 주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자답게,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직분자로, 주님께 빚진 자로 사는 게 도리이지 않겠습니까?

같은 유다였지만 같은 시기에 부름받았지만 한 사람은 마지막까지 주님의 직분자로 생을 마쳤지만,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하며 창자가 터져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이도 있었으니 말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무자격자인 우리를 주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귀한 직분자로 삼아주신 그 은혜에 응답하며 사는 자녀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그 12명의 제자, 그 12명의 사도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시는 말씀의 서론격입니다.

본문 9절 상반절 말씀만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실까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원해) 이 말씀의 헬라어 원문은 ‘오우토스 오운 프로스에우코마이’(Οὕτως οὖν προσεύχεσθε)입니다.

원문에 따라 번역하면 ‘앞으로 이 방법으로 그러므로 기도해라 너희는’(After this manner therefore pray ye)죠.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이 방식대로 기도해라”하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이전의 내용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기도하라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나온 내용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6장 1-8절에 나오는 기도의 내용과 모습들이죠.

구제할 때 사람에게 자랑하는 이들이 있는데, 너희들도 기도할 때 그렇게 떠벌리며 자랑하듯이 기도하지 않았느냐 하는 거죠.

또 이방인들 곧 다른 종교인들은 기도할 때 계속 한 말을 하고 또 하는데 너희들도 그렇게 중언부언하지 않았냐 하는 거죠.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기도요, 하나님 아버지는 너희들의 필요를 알지 못한 분이냐? 하는 것이죠.

 

바로 그 말씀을 하신 후에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이 방식대로 기도해라”하고 기도를 가르쳐주신 거죠..

왜요?

오늘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부탁한 장면이 나옵니다.

 

무슨 부탁이겠습니까?

이전에 세례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공식 기도를 가려주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일러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도 저희들에게 세례 요한처럼 공식적인 기도를 알려달라고 청을 넣은 것이죠.

바로 그때 오늘의 본문의 기도와 유사한 내용이 나오는데, 오늘 본문은 그 내용보다 조금 더 완성된 기도를 제시해 주신 거라 할 수 있죠.

 

(깨달음)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앞으로는 너희들이 이렇게 기도해라’하고 그 기도를 가르쳐주셨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서도 여전히 세상 사람들처럼, 다른 종교인들처럼, 그들이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기도할 때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나가 큰 소리로 떠벌리듯이 자랑하며 기도하는 모습이 익숙해 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귀가 먼 것처럼 기도한 내용을 또 하고 또 하고 중언부하는 모습에 젖어 있기 때문에 말이죠.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조용히 기도하라는 것이죠.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소부재하신 분으로 모든 곳에 함께 하신 분이기에 어느 곳에서건 기도를 드리도록 하라는 뜻이죠.

설령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할지라도 너를 드러내고 과시하듯이 기도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기도하라는 뜻 말이죠.

기도할 때 너를 중심에 놓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을 높이는 기도를 하라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는 그런 차원으로 기도하라고 주님께서 새로운 방식의 기도문을 알려주신다는 것이죠.

 

그리고 기도할 때 이방인들처럼, 이방 종교인들처럼, ‘비나이다 비나이다’하고 계속 중언부언하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거죠.

하나님은 귀가 먹은 분이 아니기 때문에 말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한 내용을 계속 하고 또 하고 해야만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고 계신 분이죠.

그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지 않겠습니까?

계속해서 기도한 말을 또 하고 또 한다면, 그래야만 그 기도를 듣는 분이라면 그런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겠냐는 거죠.

 

그렇다고 간절한 기도 내용을 한 번 끝내고 말라는 뜻이겠습니까?

기도할 때 그 중심의 태도가 너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이지, 한 번 기도하고 끝내라는 뜻이 아니죠.

기도할 때 ‘하나님 이게 필요해요 이게 필요해요, 이걸 응답해주세요’하는 기도는 너의 뜻을 관철시키는 중언부언의 기도이지 않겠냐는 거죠.

그러니 기도할 때 앞으로는 ‘네 중심으로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는 기도를 해라’하고 일러주신 것이죠.

바로 그를 위해 새로운 기도문을 주님께서 말씀하면서 ‘그러므로 앞으로 너희들은 이런 방식으로 기도해라’하고 일깨워준 것이죠.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수 있죠?

(은혜)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무속이나 다른 종교인과 같은 기도의 수준에서 벗어나 보다 성숙한 기도를 하는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성령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가 처음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된 것은 누구의 주권이더냐?”

네가 처음으로 죄인임을 고백하게 된 것, 네가 주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 것, 그것이 누구의 주권이더냐?”

네가 특별하고 네가 능력이 출중하고 믿음이 대단해서 주님께서 너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이더냐?”

너도 12명의 제자들 12명의 사도들처럼 세상의 무자격자와 같은 너를 주님의 주권으로 선택해서 자녀삼으신 것 아니더냐?”

그런데도 네가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너의 기도의 수준은 어떻더냐?”

세상의 무속인들 불교도들 이슬람교도들처럼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는 그 수준처럼 너 중심의 기도만 드리고 있지 않느냐?”

네가 기도할 때 너를 자랑하고 너의 의를 사람들 앞에 내세우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더냐?”

네가 기도할 때 다른 종교인들처럼 너 자신을 중심에 놓고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않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이 세상 가운데서 특별하게 너를 선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려무나

너는 이 세상 천지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아들 딸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자녀이지 않더냐?”

너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것 아니더냐?”

네가 매일 같이 아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할 때 너를 드러내기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드높이는 기도를 원하지 않겠느냐

네가 매일 같이 기도할 때 너를 중심에 놓고 중언부언하기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중심에 놓고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과 영광을 찬양하는 기도를 원하지 않겠느냐?”

바로 그것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기도하던 모습과는 달리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가르쳐준 참된 기도의 자세이지 않겠느냐?”

 

(찬양) 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 거룩하사 주님 나라 임하시고 뜻이 이루어지이다

일용할 양식 주시고 우리들의 큰 죄 다 용서하옵시고

또 시험에 들게 마시고 악에서 구원하소서

대게 주의 나라 주의 권세 주의 영광 영원히 아멘(새찬송가 635장)

 

 

[전자책] 야긴과 보아스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BR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BR 이 책에는 사무엘서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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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옥동’으로 나온 김혜자가 제주도 길가에 있는 돌탑을 확 무너뜨린 모습이 나옵니다.

그만큼 돌탑을 쌓아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는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 하는 뜻이었죠.

 

이유인 즉, 제주도에서 동생으로 여기는 ‘춘희’ 역을 맡은 고두심의 사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 셋을 모두 먼저 잃고, 하나 남은 피붙이 막내아들 만수마저 교통사고로 잃게 될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래서 며느리에게 아들 목숨 살릴려고 애를 쓰지 말고 의사가 하라는 대로 하라면서, 그냥 포기하는 모습이었죠.

 

바로 그 소식을 들은 ‘옥동’이 ‘춘희’를 위해 기도하던 그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자 그 돌탑을 허물어버린 것이었죠.

그렇게 천지신명께 빌어봤자 아무런 효험이 없다는 뜻으로 분을 내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아들 만수가 다시금 살아날 기미를 보이자, 옥동은 그 허물어트린 돌탑을 다시금 쌓아 올리는 모습을 보여줬죠.

 

(깨달음)실은 이것이 세상의 종교인들의 기도 모습, 무속을 믿는 이들의 기도 모습이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기도가 그와 같다면 우리의 기도 중심에도 우리를 놓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중심에 놓는 게 아니지 않겠습니까?

 

만유의 창조주이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과 영광을 찬양하는 우리의 기도는 우리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는 기도여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의 기도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시고 더 풍성하게 하시는 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임을 믿는 기도여야 하죠.

그런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시는 자의 기도는 기도가 내 바람대로 응답되도 감사하고 내 바람과 어긋나도 감사하며 나아가는 자의 기도여야 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의 참된 중심의 기도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내음성)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받으시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제가 주님의 선택을 받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대속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요.”

제가 잘나고 능력이 있고 믿음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값없이 사랑으로 선택해주신 은혜임을 믿어요.”
저를 주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는데 제가 기도를 드릴 때 옥동처럼 제 중심으로만 기도하지 않았나 싶어요.”
하나님 아버지를 중심에 모시고 기도하기보다 나 중심으로만 기도했고, 큰 소리친며 사람들이 알아봐주길 기도했던 것 같아요.”

주님.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그렇게 자기들을 중심에 놓고 기도해왔는데, 오늘 저도 다르지 않았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앞으로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앞으로는 이렇게 기도해라하신 기도를 따라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하나님께서 제 기도에 응답해주셔도 감사, 다르게 응답해주셔도 감사하며, 모든 주권과 능력과 영광을 하나님께 맞추며 기도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세요.”

 

(찬양)하늘에 계신 아버지 이름 거룩하사 주님 나라 임하시고 뜻이 이루어지이다

일용할 양식 주시고 우리들의 큰 죄 다 용서하옵시고

또 시험에 들게 마시고 악에서 구원하소서

대게 주의 나라 주의 권세 주의 영광 영원히 아멘(새찬송가 635장)

 

 

[전자책]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BR 그 속에서 페르시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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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12제자 12사도를 선택하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셨습니다.

그들이 잘나서 그들이 능력있고 믿음이 출중해서가 아니라 연약한 죄인이었음에도 주님의 은혜로 선택하신 것이었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하신 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만나기 전, 예수님께 선택을 받기 전 세례 요한의 제자들처럼 온통 과시하고 떠벌리고 자기 중심적인 중언부언의 기도를 드리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들의 블루스 옥독처럼 기도에 응답해주시면 돌탑을 잘 모시고 그렇지 않으면 돌탑을 허물어트리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지는 않았습니까?

그런 기도야말로 온통 자기 중심적인 종교인의 기도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앞으로 이렇게 기도하라’하고 일깨워주시는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따라 앞으로 기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될 수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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