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예화)전북시각장애인 도서관장 송경태 씨가 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천석꾼의 집안에 태어나 부러울 것 없이 자란 아이였습니다.
그의 집에 일꾼들도 많았고, 부모님이 베풀기를 좋아했고, 그 때문에 이 동네 저 동네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1982년 군대에 입대한 후에 40일 만에 그만 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무기고를 정리하다 수류탄 사고로 그만 시력을 잃고 만 것입니다.
사고 후에 6개월에 걸쳐 세 번의 수술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볼 수가 없었죠.
그 때문에 인생을 포기하려고 여섯 번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집 앞 저수지에 투신을 하기도 했고, 철길에 누워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동네 사람들이 그를 목격하고 저수지에서 건져냈고 철길에서도 빼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어느 시각 장애인의 사연을 듣고 그는 점자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지팡이를 더듬으며 대학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가 대학에 다니려 할 때 그의 친구들도 말리고, 동네 사람들도 만류했습니다.
이유인 즉 혼자 다니다가 구덩이에 빠지면 황천길 간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때 그의 모습을 바라본 그의 아버지는 어땠을까요?
그의 아버지는 그의 친구들이나 동네 사람들과는 달리, 그를 적극적으로 격려해줬습니다.
이 땅에는 장애를 극복한 사람도 많다면서, 어떻게든 헤쳐나가보라고, 힘을 북돋아 줬습니다.
(깨달음)그렇다면 시각장애인인 아들이 홀로 대학을 다닌다고 할 때, 그의 아버지는 가만히 내버려뒀을까요?
“이 땅에는 장애를 극복한 사람도 많으니, 어떻게든 잘 헤쳐나가봐라.”하고 격려만 한 채 아무런 것도 해주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가 홀로 지팡이를 짚고 대학에 다닐 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도 많았고 물구덩이에 빠질 때도 많았는데, 아버지는 늘 뒤에 따라다녔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아들이 돌부리에 걸려넘어질때나 물구덩이에 빠질 때 직접 다가가서 일으켜세워주거나 물에서 건져주지 않았죠.
하지만 그 아버지는 아들이 알아차리지 못할만큼 발소리를 죽여가며 저만치 뒤에서 따라왔던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나중에 그의 아버지가 그 모든 사실을 털어놨다고 합니다.
만약 그때 “경태야, 그쪽은 위험해, 이쪽으로 가야해.”하고 손을 잡아주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굴뚝같았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도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넘어지고 물에 빠질 때도 울음을 삼키면서 묵묵히 격려해줬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그 사랑과 그 격려에 힘입어 그는 대학을 홀로 나왔고, 지금의 전북시각장애인 도서관장직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거죠.
아버지의 사랑과 격려에 힘입는 그는 지금의 자기 아들들과 함께 사하라, 고비, 아타카마 등 세계 3대 사막을 완주한다고 하죠.
어느 기자가 송관장에서 질문을 했습니다.
산소가 희박한 그곳, 평지가 거의 없는 험난한 코스를 달릴 때 포기하고픈 유혹이 없었냐고 말이죠.
그러자 시각장애인 송관장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왜 없었겠어요.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는 아들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포기하면 아들도 포기할까봐 이를 악물고 달렸어요.
어린 시절, 자신이 돌부리에 걸련 넘어지고 물속에 빠지는 일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아버지가 묵묵히 격려해준 걸 떠올린 거죠.
지금 자신이 두 눈이 멀쩡한 아들과 함께 사막을 정복하지만 그때마다 앞이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픈 마음이 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아들과 함께 달린 이유는 아들이 포기하지 않도록 끝까지 동행해줬다는 것입니다.
(적용)어떻습니까?
이것이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지 않겠습니까?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 아들이 대학을 다니고 직장에 취직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과 고통의 세월을 겪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때마다 아들의 지근거리에서 묵묵히 격려하며 힘을 북돋아줬던 것이죠.
그 사랑에 힘입어 지금의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에 지금의 자기 아들들, 아버지의 손자들에게 그 격려를 보내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비단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 뿐이겠습니까?
실은 이것이 이 땅에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성령님의 보이지 않는 사랑과 격려하심 아니겠습니까?
성령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친히 돕고 격려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원성)“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성령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지닌 연약함을 도우시는 분이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기도하는 자녀들을 천군 천사로 도와주지만 기도할 수 없는 형편의 자녀들까지도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친히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며 중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좋은 성령님은 우리를 보호하시고 은혜 베풀어주시고 스승처럼 진리와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성령님을 모셔들이고, 그 성령님을 받아들이도록 말씀하시는 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입니다.
(역배)예수님께서 죽은지 사흘째 되는 새벽 미명에 시체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시체란 영혼이 떠난 상태요, 호흡이 끊긴 상태요, 말 그대로 냄새나고 부패한 상태죠.
그 상태로 유대 관원이요 부자였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새 동굴무덤에 안치돼 있었습니다.
그렇게 금요일 오후 3시에 시체 가운데 주님의 시신은 안치되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날 주님의 영혼은 음부에 있는 영들, 곧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내려가서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벧전3:19)하셨죠.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하늘과 땅과 땅 아래 모든 만물과 모든 영역의 주권자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일날 새벽 미명에 천군 천사들이 동굴 무덤을 열어제쳤을 때 주님은 그 시체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이죠.
음부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신 주님의 영혼이 다시금 육신에 들어오신 것이었습니다.
호흡이 끊긴 상태 속에 계신 주님의 호흡도 다시금 돌아와 숨을 내쉬게 된 것이었죠.
그때까지 싸늘한 시신에 냄새나던 주님의 몸이 차차 기운이 돌고 따뜻해지면서 완연한 생명의 몸이 되신 것입니다.
바로 그 모습을 새벽 미명에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와 여러 여인들이 먼저 목격을 했죠.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알렸을 때 다들 미쳤다고 했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동굴 무덤을 찾았는데, 빈 무덤뿐임을 확인했죠.
그리고 그날 저녁때 두려움과 근심으로 가득찬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 문을 걸어잠그고 있을 때 주님은 그 방에 나타나셨죠.
무엇 때문에 제자들에게 친히 주님께서 찾아와 나타나신 것이었습니까?
온갖 두려움과 근심으로 벌벌 떨고 있을 제자들에게 평강을 불어넣어주고자 함이었습니다.
바로 그 모습을 지난 시간에 살펴봤습니다.
여태껏 3년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동가식서가숙하면서 주님을 따라다녔는데, 그 주님이 그만 십자가에 죽어버렸으니 얼마나 두렵고 막막했겠습니까?
그런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을 보여주심으로서, 이 세상 너머에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살도록 그들에게 다시금 찾아와 격려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것이 제약받을 수밖에 없는 몸이었죠.
더욱이 그로부터 40일이 지나면 하늘로 승천하여 만 왕의 왕으로서 성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야 했습니다.
바로 그 사실을 알기에 자신의 몸처럼 제약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동행하시고 격려하실 성령을 보내고자 하신 거죠.
(본문)그것을 먼저 일깨워주도록 오늘 본문 21-22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게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있는 제들들에게 맨 먼저 평강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듯이 예수님께서도 세상가운데 제자들을 보낸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만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제자들을 향해 당신의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해)‘성령’으로 번역된 헬라어 ‘하기오스 프뉴마’(ἅγιος πνεῦμα)입니다.
영어로는 ‘홀리 스피릿’(holy spirit)입니다.
‘거룩한 영’, ‘하나님의 영’, ‘진리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뜻하는 말이죠.
구약의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할 때의 바로 그 ‘영’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고대근동 곧 메소포타미아의 물은 급류가 급하고 강합니다.
고대근동 가운데 나일강은 커다란 강이라 수면이 완만하하고 평평합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메소포타미아의 수면은 급하고 강하고 빠른 것이죠.
마치 평상시에는 아무런 물이 없던 천에 폭우가 쏟아지면 금방 급류가 흐르고 사람이 떠내려갈 것 같이 무서운 상황입니다.
바로 그런 수면이 넘치고 급하게 움직이고 사람이 떠밀려 갈지라도, 하나님의 영 성령님은 그 위에 운행하신다는 거죠.
그만큼 성령님은 급류가 흐르고 사람이 떠밀려가는 상황속에서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 성령을 제자들이 ‘받으라’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이 지금 유대 당국이 언제 들이닥쳐 체포할지 모르는 급류의 상황처럼 흐르고 있을지라도 성령의 다스림 속에 거하라는 겁니다.
성령님께서는 그 모든 유대 당국의 급류나 흐름들까지도 제어하시고 통제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죠.
(원해2)그런데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라’하셨는데, 이 ‘받으라’는 동사가 헬라어로 ‘람바노’(λαμβάνω)입니다.
그 뜻은 ‘취하다’(take hold of, grasp), ‘붙잡다’(catch)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성령을 불어넣어주시고자 원하기도 하지만 제자들이 더 강렬하게 열망하고 붙잡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40일 이후에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120명의 성도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을 때의 상황이죠.
그때 120명의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고자 전심으로 오로지 기도에 힘썼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 성령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임하기 때문이죠.
주님께서 불어넣어주고자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제자들이 사모하며 더욱 간절히 붙들도록 하신 뜻입니다.
(깨달음)그렇기에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자 원해요.”
“나는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자 원해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더 알 수 있고, 예수님을 더 많이 알 수 있는 성령을 읽고, 예배를 더욱 사모하며 나아가야 하죠.
뭔가 알고자 하고 뭔가 깊이 하고자 한다면 그만큼 그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성령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길 원해요.”
“성령님께서 내 몸에 임재하시고 나를 사로잡아 주시는 것을 체험하길 원해요.”
그렇다면 성령님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하고, 두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원하기는 하는데, 뭔가 원하는 일에 시간과 정성을 쏟아붓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령님을 사모하지도 않고, 간절히 구하지도 않고, 붙잡고자 하는 어떤 모습도 없다면 말입니다.
성령님께서 그에게 임할 수가 없는 이치죠.
바로 그런 뜻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간절히 사모하며 간절히 모셔들이도록 해라.’ 말씀한 것이죠.
“나는 너희들에게 성령을 보내주길 원하고 있으니, 지금은 성령의 맛이라도 느끼고, 앞으로 더 깊이 사모하도록 하라”고 말이죠.
이때 제자들이 맛보길 원하는 성령은 왔다가 떠나가는 성령님이지만, 오순절때의 성령님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입니다.
지금 우리가 성령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릴 때, 그 성령님이 내게 오시는 것은 왔다가 떠나가는 성령님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자 다짐하는 자녀들에게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시죠.
그 성령을 취하도록, 그 성령님을 모시도록, 그 인격의 성령님을 받으라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강력하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을 몰아내고 성령님이 주시는 위로와 격려 속에서 이 세상을 이겨내도록 말입니다.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본문 속의 제자들처럼 성령을 받기를 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어린시절 천석꾼 집에서 행복하던 송경태 씨가 시각장애인이 될지 누가 알았겠느냐? 어느 누가 자기 인생을 장담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런 송경태가 홀로 점자책을 띠고 대학에 다니고자 할 때 다들 말렸지만 그의 아버지만큼은 격려해주지 않았더냐?”
“그러나 격려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때도, 물가에 빠질때도, 묵묵히 뒤에서 따라다니며 함께하지 않았더냐?”
“지금 예수님께서 너에게 말한 성령님도 바로 그런 인격의 영이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아무리 부활했어도 육신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에 이제 하늘로 승천하면 결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시겠다고 하신 것 아니더냐?”
“그 성령님은 시공간의 제약이 없이 네 안에 내주하시고 너를 붙드시고 언제나 너와 동행하는 분 아니더냐?”
“그 성령님을 ‘너도 받으라’고, ‘너도 취하고 붙들고 간절히 원하라고’ 주님께서 지금 너에게 말씀하지 않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예수님께서는 지금 너에게 성령을 보내주길 원하지 않겠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너의 주인으로 삼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원하는 자녀들은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는 분이시다.”
“문제는 네가 찾고 두드리고 구하고 간절히 소원하며 성령님을 원하고 갈망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느냐?”
“지금도 주님은 너의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네가 마음문을 열기만 하면 곧장 성령님을 너의 마음 속에 주인으로 모셔들이도록 하지 않겠느냐?”
“오직 주님은 네가 성령님의 보호하시고 은혜푸시고 진리로 인도하시는 그 성령님을 받아들이고 취하길 원하시는 분임을 잊지 말도록 해라”
“그 성령을 모셔들어 이 세상의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을 모두 몰아내고 평강으로 이 세상을 이겨내길 원하지 원하시는 주님이지 않겠느냐?”
(찬양) 성령 하나님 나를 만지소서 상하고 깨어져 지친 나를
새롭게 하소서 성령의 바람 시들은 내 영 살리소서
성령 하나님 이 땅 고치소서 죄악의 어둠속 헤매는 우리
태워주소서 성령의 불로 세상 헛된 맘 태우소서
임하소서 성령하나님이시여 지금 이곳에 임하소서
바람처럼 불처럼 성령이여 임하소서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8679122
(발췌)이동원 목사님의 〈성령에 속한 사람〉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동원 목사님이 현역 목회시절에 어떤 집사님의 초청으로 가족이 모두 사이판으로 휴가를 가게 되었습니다.
첫째날과 둘째날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해변에서 아주 재미있게 놀고 쉬었습니다.
그런데 3일째 되는 날에는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더니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호텔 안에서 꼼짝 못하고 있는데, 그 집사님이 오셔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우리 바닷가 가실래요?”
그래서 이동원 목사님이 “비가 오는데 바닷가에 나가요?”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잠수함 타러 가시게요.’’
“비가 이렇게나 몰아치는데 잠수함을 탈 수 있나요?”
그러자 그 집사님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깊은 곳에 들어가면 바다는 아주 잔잔해요. 그리고 별별 세계가 다 보여요.”
그래서 이동원 집사님의 가족 식구들이 그 집사님의 말대로 잠수함을 타고 바다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바다 속은 너무나도 평온하고 잔잔하더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바다 속에는 아름다운 산호와 신기한 물고기들이 넘쳐나더라는 것입니다.
그 후로도 이동원 목사님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집사님의 말이 성령님의 음성처럼 들려온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깊은 곳에 들어가면 바다는 아주 잔잔해요.”
(깨달음)어떻습니까?
내게 닥쳐오는 상황이 거센 파도와 급류에 휘말리는 것 같아도, 성령님의 깊은 품에 안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성령님께서 내 안에 내주하시는 것을 느끼고, 성령님의 깊은 품 안에 거하면, 그 모든 파도와 급류도 급격하게 잠잠해질테니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령님을 모신 사람, 성령을 적극적으로 붙드는 사람의 심령 아니겠습니까?
(예화) 어떤 선교사님이 누군가의 초청으로 엄청나게 큰 선박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배의 여러 곳을 구경한 후에 지하로 내려가서 선장실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배의 방향을 조정하는 키 외에 커다란 원형 장치가 하나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은 그것이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안내하는 사람이 이렇게 설명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저것은 자이로스코프(gyroscope)라고 합니다.
아무리 파도가 높고 물살이 험해도 배의 수평과 안전을 유지하게 해주는 장치에요.”
(깨달음)그 이야기를 듣게 된 선교사님은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에 기도는 바로 저 자이로스코프와 같은 것이구나.”
“내 인생의 물살과 파도가 아무리 거세도 내 인생의 수평과 안전을 유지하도록 해주는 장치가 기도의 자리요 성령님의 품안이구나.”하고 말이죠.
(적용)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게 급류가 밀려들고 거센 폭풍우 같은 환경이 불어쳐와도 주님은 내 인생의 자이로스코프인 기도의 자리로, 성령님의 품으로 나오길 원하지 않겠습니까?
내 인생의 사자처럼 나를 위협하는 수많은 난제들이 밀려와도, 성령님의 자이로스코프 안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시기 때문에 말입ㄹ니다.
(예화2)20세기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은 다니엘서를 묵상하다가 이런 말을 한 바 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 굴 속에서 평안히 잠자는 동안 하늘 궁전에서는 하나님이 다니엘을 지키기 위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셨다.”
(원성)시편 121편 4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인생의 급류를 만나고 폭풍우를 만났을 때 기도의 자이로스코프, 성령님의 자이로스코프 안에 거하고자 간절히 붙잡을 때 우리 주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평안을 위해서 지금도 중보의 대가를 지불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께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빌바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 처할때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한다고 말씀하죠.
(내음성)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말씀하시는 주님.”
“거센 급류 속에서 거친 폭풍우 속에서도 위험한 사자굴 속에서도, 저희 인생에 평강을 불어넣어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
“제 힘과 능력으로는 그 모든 급류도, 폭풍우도, 사자굴도 이겨낼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저의 힘이요 능력이시오 산성이시오 피난처이시오 환란날에 도움이시는 주님.”
“제 인생의 항해 속에서 기도의 자이로스코프, 성령님의 자이로스코프를 의지하며 붙잡고 살게 해 주세요.”
“그리하여 어떤 환경과 상황의 급류와 폭풍우와 사자굴에서도 성령님께서 안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참된 평강으로 이 세상을 이겨낼 수 있도록 역사해주시옵소서.”
(찬양)나 비로소 이제 깊고 넓은 바다간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 손을 주는 결코 놓치지 않으셨다
나 비로소 이제 폭풍우를 뚫고 간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나약한 나를 잡아 주시는 그분은 나의 주님
주 나를 놓지 마소서 이 깊고 넓은 바다에 홀로
내 삶의 항해의 끝이 되시는 주님이시여
난 의지 합니다 날 포기 하지 마소서 나 잠시 나를 의지 하여도
내 삶에 항해의 방향을 잡아 주시옵소서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88679116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과 답답한 지경에 처한 제자들에게 평강을 불어넣어주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호하시고 은혜 베푸시고 진리와 생명으로 스승처럼 인도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지금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고백하며,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만 붙들고 사는 자들을 친히 도우시고 품으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거친 급류와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고 사자굴과 같은 다급한 상황에서도, 예배와 기도의 자이로스코프에 거하는 자들을 깊은 평강으로 붙드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내 허물과 죄와 연약함을 위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자들,
내 힘과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내 인생의 주인되시는 주님을 붙들고 사는 자들에게,
주님은 지금도 성령님을 보내서 인생의 항해자가 되어 주시고, 우리의 나약한 손을 친히 붙잡아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가 충만하게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일설교SundaySerm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1-4)_2022년 어린이주일설교 (0) | 2022.04.30 |
---|---|
[동영상설교] 성령을 받으라(요20:19-22)_부활후첫번째주일설교(22..4.24) (0) | 2022.04.24 |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요20:19-22)_2022년부활주일 동영상설교 (0) | 2022.04.17 |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요20:19-22)_2022년부활주일낮설교 (0) | 2022.04.15 |
[동영상설교]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마21:1-9)2022종려주일고난주간설교 (0) | 2022.04.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