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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오고 가실 때마다 종종 묵으신 곳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3km떨어진 감람산 동쪽의 작은 마을 베다니, 무화과나무가 많은 그곳이죠.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나사로와 동생 마르다와 막내 여동생 마리아가 살았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지나가실 때마다 그곳에 들렀던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 집의 삼남매가 예수님을 잘 묵을 수 있도록 편안하게 대접해드린 이유였을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 선지자를 공궤하듯, 수넴 여인이 엘리사 선지자를 잘 섬기듯이 말이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머리 둘 곳 없이 지내던 주님을 그렇게 삼남매가 잘 모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사랑하는 그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집안 하인을 시켜 예수님을 모시고 오도록 했죠.
자기 오라버니가 죽게 되었으니 당장 오셔서, 어떻게 해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당장 예루살렘에서 베다니로 가서 나사로를 살려냈습니까?
이번에야말로 나사로의 삼남매에게 진 빚을 갚을 때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장에라도 죽어가는 나사로에게 달려가야했지만 예수님은 곧바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나온 백부장에게 원격으로 하듯이, 나사로를 원격으로 고쳐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로부터 나흘이 지나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안치돼 있을 때, 그때 비로소 베다니에 가셨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시신이 수의에 싸여 있는 것을 보시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요11:43)
그러자 죽었던 나사로는 수족을 동인 채로 동굴 무덤 속에서 걸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깨달음) 그 모습을 바라본 베다니 동네 사람들은 그야말로 놀라 자빠지지 않았겠습니까?
어떻게 죽은지 나흘 된 나사로를 살려낼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냐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 곧 생명의 주관자로서 보여주신 기적 중의 기적 아닙니까?
바로 그것을 일깨워주고자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에 베다니에 즉시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욱이 백부장의 하인처럼 원격으로 나사로를 살려낼 수 있었지만, 정확한 하나님의 타이밍을 기다린 채 죽은 지 나흘만에 다시 살려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베다니 마을 사람들에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당신이 누구신지 알려주고자 함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현존성을 지니신 분임을 오늘 우리에게까지 알려주고자 하신 것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음 가운데 있는 자를 살려내실 수 있는 생명의 주관자임을 일깨워주시는 것 말이죠.
(적용) 그렇다면 어떻습니까?
우리도 뭔가 답답하고 길이 막혔을 때 낙심되고 답답하지만 그 속에서 절망치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 아닙니까?
내 모든 삶의 때와 상황을 가장 잘 아신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길에 실수하지 않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나사로 죽어 나흘이 되어 많은 이들이 슬퍼할 때,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산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 당신도 십자가상에서 7마디 말씀을 외치면서 숨을 거두셨을 때 다들 절망하고 낙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은지 사흘째 되던 새벽미명에 당신의 독생자를 부활케 하셔서 만 천하에 영생의 소망을 불어넣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역배) 우리가 새벽기도회 묵상을 통해 살펴봤듯이 예수님은 고난주간에 많은 일을 감내하셨습니다.
주일날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날 수많은 군중들이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열광하고 환호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열광하고 환호한 이유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생각했기 때문이죠.
월요일날 예수님께서는 열매 없는 무과화나무를 저주하셨고, 성전을 정화시켰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란 주님께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의 열매를 맺길 원하신 것이었습니다.
또한 성전을 정화시킨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 곧 우리들의 심령이 정화되길 바라신 것이었습니다.
화요일날 예수님은 당대의 지도자들이 퍼붓는 질문 앞에 하나님 나라의 관점으로 대답해 주셨죠.
누가 너에게 성전을 청결케 할 권세를 주었는지 말하라는 그들에게,
어느 율법이 큰지 묻는 그들에게,
칠형제가 죽고 막내가 큰 형수와 결혼했을 때 천국에서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지 묻는 그들에게,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게 옳은지 그른지 묻는 그들에게,
주님은 천국의 가치 곧 하나님나라의 가치와 영생의 관점으로 그들에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수요일날 예수님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머무셨습니다.
그날 예수님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으로 기록돼 있어서 ‘침묵의 날’로 여기는 날이었죠.
하지만 그날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게 아니셨죠.
가롯 유다와 대제사장측이 음모를 꾸미고 있듯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자 낙심치 않고 기도하면서 그 날을 받아들였습니다.
목요일날 예수님은 정말로 긴 긴 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날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루살렘 시내에 있는 다락방을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날 오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모아 손수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또한 당신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식을 가지면서 제자 강화의 시간을 맞이했습니다.
“이로써 너희도 서로 섬기고 사랑하여 내 제자인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게 하라”(요13:35)
그날 밤 주님은 제자강화의 시간을 끝내고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기도가 끝날 무렵 가롯 유다가 데리고 온 대제사장의 군졸들에게 예수님은 체포돼 끌려가셨죠.
그때 예수님을 따라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왔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다들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주님은 아침이 밝을 무렵까지 무려 다섯 번에 걸친 법정에 끌려다녔습니다.
안나스 법정, 가야바의 법정, 빌라도의 법정, 헤롯 대왕의 법정, 그리고 빌라도의 법정으로 말이죠.
그리고 낡아 밝아 골고다 언덕길로 그 육중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올라가셨습니다.
가다가 쓰러지셨을 때 구레네 시몬이란 자에게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도록 로마 군병들이 시켰죠.
그래서 오전 9시에 골고다 언덕에 그 육중한 십자가에 두 손과 두 발에 대못이 박혔습니다.
정오 12에 어둠이 내리깔렸고, 오후 3시에 휘장이 찢어졌고, 주님은 “다 이루었다”하면서 숨지셨죠.
(깨달음) 어떻습니까?
이로써 그 모든 일들이 완전히 끝나버리는 것 같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은 마지막 피한방울조차 남기지 않고 다 쏟으셔서 완전히 시체가 되셨으니 말입니다.
시체가 되신 예수님의 시신을 유대 관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자신의 새 동굴 무덤에 안치했죠.
그러니 유대 당국자들에게는 그 골치 아픈 예수님의 활약이 이제야 끝났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지난 3년 동안 눈엣가시 같은 그 존재가 말끔히 치워진 느낌이라고 말이죠.
더 이상 참된 진리와 생명에 대해 자신들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주님을 3년간 따라다닌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무덤에 안치돼 자신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온갖 두려움이 밀려들었겠죠.
이제는 예수님을 따라다녔다면서 유대 당국자들이 자신들을 체포하러 올지 모른다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마가의 다락방을 꽁꽁 걸어 잠글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적용)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 주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3일만에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시체 가운데서 온전한 생명을 지닌 분으로 다시금 죽음에서 완전히 일어나신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이른 새벽에 찾아 온 마리아와 몇 몇 여성들에게 먼저 보여주셨습니다.
그 여성들이 그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렸을 때, 베드로와 요한이 맨 먼저 무덤을 찾아왔죠.
하지만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보지 못한 채, 그 분의 시신이 없어진 것만 확인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여전히 두려움이 사라질 수가 없었던 그들이죠.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직접 찾아오셔서 나타나신 사건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 오늘 본문 19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실까요?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원해) 여기에서 “예수께서 ‘오사’”하신 단어는 헬라어로 ‘에르코마이’(ἔρχομαι)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600회 정도 쓰여 있습니다.
‘어떤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오다’(to come from one place to another)는 뜻입니다.
또한 ‘여러 사람에게 나타나다’(make one's appearance)는 뜻이죠.
‘일어나다’(arise), ‘세우다’(be established), ‘알려지다’(become known)는 뜻도 있습니다.
(깨달음) 그런 뜻에서 볼 때 본문에 사용된 ‘에르코마이’는 단순히 ‘오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신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제자들에게 알리고자 직접 ‘나타나셨다’(appear)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은 마리아나 다른 여성들에게 부활하셨다고 제자들에게 전해달라고만 하셨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당신 자신의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제자들에게 나타나 알려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자들에게 들어 차 있는 두려움과 걱정과 근심을 몰아내주기 위함 아니겠습니까?
그들의 심령 속에 참된 평강을 불어넣어주고자 말입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 주님은 우리에게 부활의 모습을 직접 나타내주셔서 두려움과 근심을 몰아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이죠.
(주음성) 그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오늘 그렇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도 나사로의 여동생들처럼 나사로가 죽어갈 때 당장 예수님이 모시고 와서 문제를 해결받고자 하지 않았겠느냐?”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군사들에게 질질 끌려갈 때 너도 제자들처럼 줄행랑치지 않았겠느냐?”
“예수님께서 십자가 무기력하게 죽기 전에 십자가에서 내려와 살아계신 보여달라고 하지 않았겠느냐?”
“예수님께서 사흘 동안 무덤에서 지내기보다 그저 하루면 족하지 않았겠냐고 너는 생각하지 않겠느냐?”
“지금 길이 꽉 막혀 답답한 상황이니 당장에라도 짠하고 나타나 내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는 하나님이지 않더냐?”
“예수님도 당장에 나사로를 살려내고 싶었고, 당신의 무덤도 하루만에 헤치고 나오고 싶지 않았겠느냐?”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당신의 때를 주관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분이지 않더냐?”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놀라운 역사로 부활의 주님을 만 천하에 보여주셨듯이 말이다.”
“제자들이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을 그때에 주님께서 나타나 평강을 불어넣어주셨듯이 말이다.
“그러니 네가 걷는 길이 굽어 돌고 심장이 답답해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는 분임을 너는 온전히 신뢰하길 바란다.”
(찬양) 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어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 희망 덧없이 쓰러질수 있지만
나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할 길을 잘 아심일세
어두운밤 어둠이 깊어 날이 다시는 밝지 않을 것 같아 보여도
내 신앙 부여잡고 주님께 모든 것 맡기리니 하나님을 내가 믿음일세
지금은 내가 볼 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가물 어른거려도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 아니하리 만사를 주님께 내어 맡기리
차츰 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차츰 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0
(예화1)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은 39세라는 짤막한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는 천재 수학자요 과학자요 철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이성적이고 철학적이고 계산적인 파스칼이었는데,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하나님께서 불 가운데 찾아오신 ‘불 체험’이 그것이었습니다.
“1654년 11월 23일 밤 10시 30분부터 12시 30분까지 불 불 불이 내렸다.
하나님은 철학자의 하나님, 수학자의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었다.
이 확신 이 감격 이 기쁨 이 평화 이 환희의 눈물, 아멘!”
이것은 그가 겪은 체험을 자신의 쪽지에 써 놓은 글입니다.
파스칼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그 밤에 성령의 불, 부활하신 주님께서 불로 찾아와 주신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때 파스칼은 지난날 자기 머리와 지식과 능력만 믿고 살아온 삶을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그렇게 체험한 사건을 종이에 적어서 위쪽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훗날 그 유명한 파스칼의 ‘팡세’ 곧 명상록이 된 것이죠.
(깨달음) 그에게 찾아오신 성령, 부활의 주님은 오늘 이 시대에 얼마든지 찾아와 나타내 주시는 분입니다.
왜요?
우리의 삶에 걱정과 근심을 몰아내고 참된 하나님의 평강으로 채워주시기 위해서 말이죠.
(예화2) 존 쉐릴은 미국 뉴욕의 〈가이드포스트〉잡지 등 예리한 글을 쓰는 작가였습니다.
그 역시 파스칼처럼 이성적이고 논리적이고 똑똑한 두뇌의 소유자였죠.
그런 그에게 1595년 어느 봄날에 성령님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임재하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2년 전 목에서 발견된 암을 수술한 후에 정기 검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에게 의사가 암이 재발했다는 소식을 전해줬죠.
그래서 다시금 고통 가운데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수술을 마친 뒤 병실로 옮겨 온 그는 통증 완화제에 취해 누가 누군지 알아보지를 못했습니다.
밤이 되었을 때, 비로소 같은 병실에 누워 있는 환자들을 알아보게 됐습니다.
한 사람은 연세가 많은 할아버지였는데 천식으로 고생하는 분이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이제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 있다가 그 병실로 옮겨 온 젊은이였습니다.
그날 쉐릴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놓고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병실에 있는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힘든 처지라 그들을 위한 기도가 쉽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깊은 한 밤 중이었습니다.
그는 말똥말똥 눈을 뜨고 있었습니다.
그때 병원 복도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간호사는 그 빛 사이로 바닥이 고무로 된 실내화를 끌면서 병실 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방에 누워 있는 두 명의 환자도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고 있는 듯 했습니다.
노인은 천식 때문에, 청년은 마취에서 깨어난 후라, 서로들 고통 가운데 잠을 자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 희미한 빛 하나가 자신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 빛이 인격체와 같은 중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때 쉐릴은 그 빛에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게 그런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이세요? 예수님?”
그러자 그 빛이신 주님께서 쉐릴을 감싸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에게 감싸셨던 그 빛처럼 말입니다.
그 순간 그는 통증이 거의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통증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기분만은 완전히 나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쉐릴은 예수님을 향해 간신히 입을 뗐습니다.
“예수님, 저 청년도 도와주실 거죠?”
“예수님, 저 노인도 도와주실 거죠?”
그러자 그 빛이신 주님께서 그를 떠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청년의 침상을 빛으로 채워주셨습니다.
그때 끙끙 앓던 청년의 신음소리는 사라졌고 이내 곤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이번에는 그 빛이신 주님께서 노인의 침상 한 가운데에 머물렀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의 기침도 사라지게 되었고 깊은 단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빛이신 주님께서 사라지셨죠.
(깨달음) 어떻습니까?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존 쉐릴에게 임한 그 빛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빛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때부터 냉철한 이성주의자요 회의주의자였던 그는 자신의 삶을 청산하고 믿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년간 부활하신 주님의 역사와 능력을 체험한 이들을 취재하러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그 부활하신 주님과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죠.
그래서 나온 책이 존 쉐릴의 〈성령님을 찾아서〉입니다.
(예화2)얼마전에 이어령 교수가 89세의 일기로 천국으로 소천했습니다.
2017년 간암판정을 받았는데 실은 복박염에서부터 암미 시작해 맹장대장 등 모든 장기를 습격했다고 하죠.
당시 83세였는데 그는 암을 투병으로 생각하기보다 친병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되었을까요?
83세의 나이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수술을 하겠냐, 하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실은 그의 딸 이민아가 2006년 망막박리로 실명위기를 겪을 때, 그가 주님께 무릎을 꿇었죠.
“하나님.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하고 말이죠.
그때 이어령 교수는 주님께 회개하며 돌아왔고 하용조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았죠.
그것이 지성의 세계 곧 이 땅의 지식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 곧 하나님 세계로 들어선 계기였죠.
그만큼 돌고도는 그의 인생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방법으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가 인생말년에 찾아온 암을 투병으로 생각지 않고 친병으로 맞이한 것도 그의 딸 때문이었죠.
그의 딸 이민아가 변호사를 내려놓고 목사 안수를 받은 다음 미국 아프리카 남미 중국 등지를 돌며 청소년 구제활동에 전념을 했죠.
그러다가 2011년 위암말기 선고를 받고 투병생활을 했는데, 그때도 딸은 두려움에 빠지기보다 마지막까지 소명을 다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바로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던 아버지였기에 그도 담담하게 마지막 하나님 나라를 준비했던 것입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망막박리에서 치유받은 딸이 집을 나서면서 ‘아빠 나 잘 갔다 올게’하던 그 날이 이어령 교수는 너무나도 기쁨의 날이었다고 합니다.
그 기쁨을 놓칠 수가 없어서, “아빠, 예수님 믿을께. 아빠 세례받을께”했다고 하죠.
어쩌면 바로 그 날이야말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어령교수에게 찾아오신 날이지 않았겠습니까?
그 날이야말로 지성의 세계, 이 땅의 것만 좇던 그에게 영성의 세계 곧 하나님 나라를 열어주신 세계였지 않겠습니까?
(적용)그렇다면 오늘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수많은 방법으로 직접 찾아오시는 분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꿈으로도, 환상으로도, 보통 날의 아침이지만 특별한 날의 아침으로, 그 부활의 아침으로 주님은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내음성) 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에게도 존 쉐릴에게 나타나셨던 모습처럼 부활의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 주세요.”
“파스칼에게 나타나셨던 그 불, 부활의 빛으로 저를 친밀하게 감싸주세요.”
“이어령 교수에게 그날 평범하지만 너무나도 기쁜 날의 그날처럼 저에게도 부활의 주님께서 찾아와주세요.”
“이 세상은 답답한 지경이고 굽이굽이 도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지금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구원의 역사를 저의 삶 속에도 역사해주세요.”
“그리하여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어떤 근심과 걱정도 몰려와도 부활의 평강으로 제 심령을 채워주세요.”
(찬양) 내가 걷는 이 길이 혹 굽어도는 수가 있어도 내 심장이 울렁이고 가슴아파도
내 마음속으로 여전히 기뻐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심일세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지 모르며 나의 희망 덧없이 쓰러질수 있지만
나 여전히 인도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는 까닭은 주께서 내가 가야할 길을 잘 아심일세
어두운밤 어둠이 깊어 날이 다시는 밝지 않을 것 같아 보여도
내 신앙 부여잡고 주님께 모든 것 맡기리니 하나님을 내가 믿음일세
지금은 내가 볼 수 없는 것 너무 많아서 너무 멀리 가물가물 어른거려도
운명이여 오라 나 두려워 아니하리 만사를 주님께 내어 맡기리
차츰 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차츰 차츰 안개는 걷히고 하나님 지으신 빛이 뚜렷이 보이리라
가는 길이 온통 어둡게만 보여도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신다네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1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하던 그 지점에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 부활의 소식을 누군가에게 전해 듣게 하시는 게 아니라 직접 찾아아 나타나 주신 주님이십니다.
무덤을 찾은 마리아에게, 두려움에 젖은 제자들에게 주님은 직접 나타나 찾아오셨습니다.
자기 이성과 철학 좇던 파스칼에게도, 냉철한 회의주의자 존 쉐릴에게도, 이 땅의 지성의 세계만 좇던 이어령 교수에게도 주님은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이신 주님께서는 오늘 저희의 인생에도 친히 찾아와 역사해주시는 분입니다.
이미 각자의 삶에 부활의 주님께서 찾아오셨다면 흔들림 없이 부활의 세계 영성에 들어서도록 격려하시는 분이시죠.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한 분이 있다면 그 인생에도 친히 찾아와 나타나 주길 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 불안과 근심과 걱정이 사라지고 하늘의 평강과 소망으로 불어넣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와 같은 부활의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하게 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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