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예화)결혼을 못한 노총각이 인터넷 중매 사이트에 다음과 같이 배우자 조건을 입력시켰습니다.
첫째 키가 커야 하고, 둘째 몸이 날씬해야 하며, 셋째 미인이어야 합니다.
넷째 가문이 좋아야 하고, 다섯째 학벌도 좋아야 하며, 여섯째 나이가 젊어야 하고, 끝으로 재산은 많아야 합니다.
그렇게 배우자 조건을 써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인터넷 중매 사이트에 자기 자신의 사항에 대해 솔직하게 예 아니오라고 체크라하는 문장이 떴죠.
첫째 당신은 키가 큽니까?, 둘째 체격이 우람합니까?, 셋째 미남입니까?, 넷째 가문이 훌륭합니까?
다섯째 학벌이 좋습니까?, 여섯째 나이가 젊습니까?, 끝으로 재산이 많습니까?
그 항목을 읽은 노총각은 한 참을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진실은 통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모든 난에 ‘아니오’ 체크를 하게 되었죠.
그랬더니 잠시 기다리라는 메시지가 뜨더니 드디어 결과가 나왔습니다.
“당신은 지금 꼴값 떨고 계십니다.”
(깨달음)자기 자신의 수준은 한 참 못 미치는데 너무 허왕된 헛꿈을 꾸고 있다는 뜻이죠.
그런데 이게 어디 그 노총각뿐이겠습니까?
이 땅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허왕된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자기 자신의 실체를 아는 것, 자신이 목적하는 바가 진리를 쫓는 것인지 아는 게 중요한 거죠.
(예화2) 요즘 한국의 케이팝 가수들의 인기가 세계적이지 않습니까?
‘방탄소년단’이라는 남성 아이돌 그룹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미국 빌보드차트 상위권을 휩쓸었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식에도 BTS를 초청할까 말까 하고 난리죠.
그 정도로 아이돌 가수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는데, 그런 가수들이 나타나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떤가요?
공항이든 거리든 공연장이든 그 어디든 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열광하고 환호하죠.
그 가수가 가는 데로 앞뒤로 따르고, 악수라도 하면 까무러칠 정도죠.
저 같이 K-Pop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죠.
하지만 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열광합니다.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들이 뭔가 답답한 현재의 내 상황을 활짝 열어주고 시원케 줄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죠.
(깨달음)그것은 대통령 후보를 뽑는 대선 때도 마찬가지였죠.
자신이 소원하는 기대감을 대통령 후보가 풀어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대통령 선거에 임하죠.
하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은 그 누구라 해도 백성들을 향해 내건 공약을 모두 이행할 수가 없죠.
그것이 인간이 지닌 한계 때문입니다.
(적용)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은 자기 본분을 알아야 한다는 것, 허왕된 꿈을 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 누군가 대리만족을 사람을 찾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 어떤 미녀라 해도, 그 어떤 BTS라 해도, 그 어떤 정치 후보라해도, 진정한 내 바람을 해결해 줄 이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고 바라시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주님께서 내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고 사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오늘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의미깊은 종려주일이자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첫날입니다.
종려주일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여태껏 사역해 오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때 유대인들도 유월절을 지키고자 애굽 메소포타미아 소아시아 유럽 등지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때 세계 각처에서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의 숫자가 270만 명 정도였을 걸로 봅니다.
바로 그 유월절에 맞춰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입성코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해방된 날을 기념코자 몰여들었다면,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 죽음을 위해 나아가신 것이었죠.
이때 예수님께서는 여리고를 지나 베다니라는 마을에 다다랐습니다.
베다니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베푼 곳이라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나타나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몰려들었죠.
그때 예수님은 제자 둘을 보내면서 인근 벳바게 마을의 나귀 주인에게 말해서 나귀 새끼를 끌어오도로 했죠.
벳바게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2-3km 정도의 거리인데, 예루살렘까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기 위함이셨던 것이죠.
주님의 명령을 받은 두 제자가 나귀 주인에게 다가가 나귀를 달라고 했을 때 뭐라고 했을까요?
“내가 당신들을 언제봤다고 그러는 거요. 낯모르는 나에게 왜 나귀를 달라는 것이오?”하고 말했겠죠.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십니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나귀의 주인장은 그 어떤 말도 묻지 않고 곧장 나귀와 나귀 새끼를 내주었죠.
그만큼 그 주인은 예수님 앞에서 소유권자 행세를 한 게 아니라 나귀를 관리하는 청지기임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일을 위해 사용하신다면, 언제든지 자기 것을 내어드릴 수 있다는, 그런 태도로 살았던 사람이었죠.
그렇게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온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곧장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새끼의 안장에 얹었죠.
그것은 왕으로 즉위해 말을 타고 갈 때 백성들이 표현한 최고 존경 방식이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예후가 왕이 될 때 백성들이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죠(왕하9:13).
그만큼 제자들도 예루살렘에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최고의 존경을 표시한 것이었죠.
그때 예수님을 따랐던 군중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니까 대다수의 군중들도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 폈고, 다른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바닥에 깔았죠.
바로 그 길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해 가시라는 뜻이었죠.
그 당시 종려나무는 ‘승리’와 ‘기쁨’을 상징하는 나무였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왕이나 군대장관을 환영할 때 다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대던 거죠.
그러면서 그 많은 군중들은 온 성이 소동하는 것처럼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면서 열광하고 환호했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9절)
(원해)‘호산나’란 히브리어로 ‘구원하다’(save)는 뜻의 ‘야솨’(יָשַׁע)와 ‘원하다’(pray, please)는 ‘나’(נָא)가 결합된 단어죠.
‘호산나’란 한 마디로 말해 ‘부디 간구하오니 구원해주소서’하는 뜻입니다.
칠십인역(LXX)에서는 ‘지금 구원하소서’라고 번역하고 있죠.
수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열광하고 환호하며 따른 것은 자신들을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그 열망이란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주는 게 아니라 지금 먹고 살기 힘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정치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이었죠.
(원해2)여기에서 ‘소동하다’로 번역된 ‘에세이스데’(ἐσείσθη)의 원형 ‘세이오’(σείω)는 지축이 흔들리다는 뜻입니다.
그 정도로 예수님을 따르며 열광하고 환호했던 그 군중이었던 것입니다.
(깨달음)그런데 왜 그토록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향해 열광하고 환호하는 것입니까?
이유는 오직 하나, 자신들의 바람을 풀어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압제와 고통 속에서 이제는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해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일로 말입니다.
그만큼 그들은 영적인 문제보다 육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달랐을까요?
여태껏 3년간 따르면서 예수님의 행적과 천국 복음을 듣고 깨달았던 그들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역시도 그 군중들과 전혀 다르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면 영의정 좌의정 자리 하나쯤 내 줄 것으로 내다봤었죠.
그런 기대감 때문에 예수님을 더더욱 왕으로 모시고자 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돌변합니까?
이때로부터 불과 닷새 뒤에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 질질 끌려갈 때 다들 돌변하고 말았습니다.그 전날에 예수님과 성만찬을 나눈 제자들은 다들 줄행랑치기에 바빴고, 오늘 본문의 군중들은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기에 바빴죠(마27:22).
그들은 자기들이 목표하는 일에 예수님께서 해 주지 못할 것을 바라보고서 그렇게 돌변한 군중들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자기 잇속을 챙기려다가 실패하자 불과 닷새만에 돌아서고 만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군중심리에 이끌린 사람들과는 다른 한 부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누굽니까?
나귀와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 내어 준 그 주인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그 주인의 이름이 누군지, 어떤 지위를 갖고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그는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에 토를 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것을 내어드린 사람이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오셨을 때 300데나리온의 나드 향유를 주님 발에 붓고 닦아드린 마리아와 같은 사람임을 알 수 있죠.
그렇다면 그 나귀의 주인장은 예수님께서 쓰시겠다고 할 때 왜 자기 소유물을 내어드렸을까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고 가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이 아닌 나귀를, 그것도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까?
(본문)본문 5절에 그 이유가 나오는데 같이 읽어보실까요?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원성)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약의 스가랴 9장 9절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깨달음)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왜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가셨습니까?
여태까지는 당신이 메시아임을 숨기셨지만, 이제는 진정한 메시아로서 승리자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셨습니다.
다만 메시아이긴 하지만 다른 정복자들과는 달리 겸손의 왕, 곧 십자가의 멍애를 매는 왕이심을 보여주고자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신 것이죠.
그만큼 예수님은 수많은 군중들의 바람처럼 이스라엘 민족을 정치적으로 해방시켜주는 메시아가 아님을 알게 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오직 자기 몸을 십자가에 산 제물로 바쳐 하나님과 사람들을 화목하게 하고자 하신 평화의 왕임을 선언하신 것이었죠.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나귀 주인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귀를 쓰시고자 할 때 두말 하지 않고 기꺼이 내어드린 그였습니다.
(적용)그렇기에 그 나귀의 주인장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땅에 우리가 꿈꾸고 소원하고 목적하는 바가 다 다르지만, 주님께서 나를 통해 원하시고 이루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깨닫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들과 수많은 군중들은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들의 목적달성을 이루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물욕을 채워주고 해결해 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예수님을 환호하고 열광한 것 말입니다.
하지만 나귀 주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겸손의 왕으로, 십자가 멍애를 매는 왕으로 가시는 것을 내다본 것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나귀를 주님께 내어드렸던 것이죠.
(주문)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바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에 우리의 초점을 맞추며 사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친히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그 나귀 주인처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진정한 목적을 알고 있었더냐?”
“너는 그 나귀 주인처럼 예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바를 위해 나귀를 원할 때 기꺼이 내어드렸겠느냐?”
“제자들과 그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자신들의 꿈을 이뤄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바라보지 않았더냐?”
“로마로의 압제와 핍박으로부 해방시켜 주고 자신들의 먹을 것 입을 것 쓸 것을 능히 채워줄 그런 메시아 말이다.”
“그를 위해 지금은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예수님 앞과 뒤에서 따르며 열광하지만 불과 닷새 뒤에 다들 돌변하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주님이 너를 통해 목적하시고 이루시길 원하시는 바에 네 삶의 목적과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이 땅에 이루고 싶고 목적하고 달성하기 원하는 일에 주님을 이용하려는 것은 제자들과 그 군중들도 똑같지 않았더냐?”
“너는 오직 나귀와 나귀 새끼의 주인처럼 주님이 너를 통해 이루시길 원하는 바에 온전히 순종하는 충성된 증인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피흘리심을 통해 너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해라.”
(찬양)내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에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향한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의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1
(예화)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월터리드 육군 병원에서 이 세상을 떠날 때의 일입니다.
그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그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면회 시간을 30분 정도 줬는데,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이런저런 말로 위로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이 되어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나가려고 할 때였습니다.
그때 아이젠하위 대통령이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손을 잡고 ‘좀 더 있다 가시지요?’하고 말했죠.
그러면서 그는 신중하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제 마지막 부탁입니다.”
그러자 빌리그래함 목사님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그에게 간략하게 설명해 줬습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자기 의로 서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일평생 잘한 일도 있고 못한 일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 우리가 무슨 일을 잘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십자가의 은혜, 그 은혜를 감사한 마음을 갖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확증해 줄 것이고, 당신을 영접해 줄 겁니다.”
그 이야기 끝에 한 참 동안 기도하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때서야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합니다.
“빌리, 감사해요. 나는 이제 준비가 되었어요.”
그러면서 그는 눈을 감았다고 하죠.
주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인지, 비로소 눈을 떴다는 것입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것 같습니까?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이전에 누가 봐도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고 함께 예배를 드렸며 성장했습니다.
해군장교로 복무할 때 진급이 늦어졌지만 실망치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욱 충성한 그였죠.
연합군 총사령으로 독일의 히틀러와 대전을 치르기 위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벌일 때는 그 누구보다도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한 그였습니다.
미국의 34대 대통령이 되어 소련의 흐루시초프를 만나던 주일날에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1시간 후로 면담을 미룬 그였습니다.
그 정도로 그는 하나님을 잘 섬겼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쓴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니 미국의 군중들 역시 누구라도 그를 열망하고 또 환호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도 주님의 나라에 가는 그 날은 너무나도 두려웠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자신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태껏 자신이 이룬 업적과 능력과 찬사는 본문에 등장하는 제자들과 군중의 바람과 같은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 능력과 열망과 찬사로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없이는 자신의 성과와 찬사가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본 인생이었는지 회개한 것이었죠.
그래서 죽기 직전에 다시금 십자가 앞에 선 죄인으로서,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기도를 드린 그였죠.
(내음성)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대단한 아이젠하워도 주님 앞에 설 날을 코 앞에 두고 주님을 뵈올 것을 자신하지 못했네요.”
“아이젠하워가 그 정도였다면 제가 어떻게 주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주님, 그러나 천국은 내 공로나 내 능력이나 업적과 찬사 때문에 갈 수 있는 게 아님을 깨닫게 해 주시니 감사해요.”
“주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겸손의 왕으로 십자가 죽음의 멍애를 매고 가신 것을 잊지 않게 해 주세요.”
“제가 인생의 목적을 바라고 소망할 때 제 욕심을 이루고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게 해 주세요.”
“주님께서 저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에 순종하고자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해 주세요.”
“제자들과 군중들이 주님을 이용해 육신의 욕망을 성취하고자 했던 그 길을 제가 따르지 않게 해 주세요.”
“오직 나귀 주인장처럼, 제가 원하는 것이 영광과 찬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주님이 기뻐하시는 십자를 위해 기꺼이 내귀를 내어드릴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런 십자가 은혜속에 살 때에만 훗날 천국에 갔을 때 주님의 얼굴을 기쁨으로 뵈오게 될 줄 믿습니다.”
(찬양)내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나의 말에 주가 주신 진리로
나의 눈에 주의 눈물 채워주소서
내 입술에 찬양의 향기가
두 손에는 주를 향한 섬김이
나의 삶에 주의 흔적 남게 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히 함께하리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순교자의 삶의 사는 이에게
조롱하는 소리와 세상 유혹 속에도
주의 순결한 신부가 되리라
내 생명 주님께 드리리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0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에 같이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만 왕의 왕으로 예루사렘에 입성하셨지만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빌2:6-7)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고자 하신 것입니다(빌2:6-7).
그토록 겸손의 왕으로,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대속의 재물로 내어놓고자 십자가의 멍애를 매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나 수많은 군중들은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주님을 열광하고 환호했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오직 가난과 기근과 굶주림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주님을 바라고 원한 그들이었죠.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나의 주인으로 따라는 이유가 명확하십니까?
내 목적하고 소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주님을 나의 왕으로 삼고 계신 것은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시간에 아이젠하워처럼 주님 앞에 참회의 기도를 드리며, 남은 일생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에 내 삶의 초점을 맞추며 살 수 있도록 기도를 드리도록 하십시다.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영광을 얻고자 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며 살게 해 주세요(롬8:17), 하고 말이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어 누구나 들어가지만, 저와 여러분은 찾는 이가 적은 십자가 길로 나아가게 해 달라(마7:13-14)고 말입니다.
그것만이 주님 앞에 섰을 때 기쁨으로 주님의 얼굴을 보는 길임을 잊지 말도록 말입니다.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내 본분을 잘 알게 하시고, 헛된 꿈이나 대리만족을 꿈꾸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 어떤 미녀라 해도, 그 어떤 BTS라 해도, 그 어떤 대통령이라 해도 진리와 생명을 채워줄 이는 없다는 것을 잊지 말도록 말입니다.
오직 나의 구원자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러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 뿐임을 기억하며 살도록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와 같은 목적을 위해 사셨듯이, 저도 나귀 주인처럼 주님의 목적에 합당한 삶을 내어드리며 살 수 있게 달라고, 이 시간에 같이 다짐의 기도를 드리시겠습니다.
'주일설교SundaySerm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요20:19-22)_2022년부활주일낮설교 (0) | 2022.04.15 |
---|---|
[동영상설교]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마21:1-9)2022종려주일고난주간설교 (0) | 2022.04.10 |
[동영상설교]내게 경배하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8-10)_20220403사순절다섯번째주일 (0) | 2022.04.03 |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8-10) 사순절다섯째주설교 (0) | 2022.04.01 |
[동영상설교]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마4:5-7)_20220327주일설교 (0) | 2022.03.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