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감리교의 창시자이자 성결교 신학의 모판이기도 한 존 웨슬리 목사님이 회심할 때 역할을 한 분이 있습니다.
헨리 스쿠걸 목사님이 바로 그분인데 웨슬리 목사님은 그분이 쓴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읽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쿠걸 목사님은 그 책에서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정의내려주고 있었습니다.
“기독교란 인간의 영혼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온 것”이라고 말이죠.
그러면서 어떤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이렇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선하고 단정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안에 생명과 권능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깨달음) 존 웨슬리 목사님이 그 책을 읽고 그렇게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목사 아들로 목사가 되었고, 선교사로 경건하게 살려고 해썼고, 선행도 많이 행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임해 계셨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종교인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닫데 된 것이었습니다.
(적용) 우리 가운데도 이런 그리스도인, 이런 종교인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안에 주인으로 들어와 계시는데도 그걸 의식하지 못한 채 내 의로움, 내 경건, 내 열심히만 살고 있는 그런 종교인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종교인을 원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를 원하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시는 주님의 자녀로 사는 것 말입니다.
(예화2) 로버트 멍어가 쓴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지만 마음 속 주인으로까지 주님을 모시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 그것이죠.
그는 예수님을 모시고 서재에 들어갔는데, 예수님께 차마 보여드릴 수 없는 책과 잡지가 있어서 당황했습니다.
주방에 주님을 모시고 갔는데 그곳에서도 주님께 대접해 드릴 게 없어서 민망했죠.
거실에는 주님과 함께 볼 수 없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살아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오락에 빠져 살아온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친구들과 놀러갈 때도 모두지 예수님을 모시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먹는 것도 대화도 주님과 같이 할 수 없는 것들이 전부였기 때문이죠.
심지어 침실에서도 주님께 보여드릴 수 없는 문란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쁘게 출근을 하는데 문득 누군가 혼자 거실 벽난로 옆에 앉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바로 주님이셨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님께 다가가 말했죠.
“주님 아침마다 늘 여기에 오셨습니까?”
그러자 주님은 “그럼!”하고 대답하셨죠.
그때 그는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주님을 손님처럼도 대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깨달음) 어떻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남들에 비해 선하고 의롭고 도덕적이고 깨끗한 사람처럼 사는 걸 원하시는 분이겠습니까?
그런 것에 신경쓰고 산다면 우리는 종교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입니다.
도덕의 기준, 율법의 기준에 비춰 사는 종교인이 아니라 내 심령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어 자시는 그리스도인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내 주방에 내 침실에 내 차 안에 나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여태껏 내가 손님보다도 못하게 주님을 대접해드렸다면 이제부터라도 주님을 온전한 ‘내 주인’으로 모셔들이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것은 전적인 주님의 택하심이었지만 택함받은 이후의 다윗은 전적으로 주님을 주인으로 모셨으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선택하신 것은 전적인 주님의 선택이셨지만 택함받은 이후의 마리아는 온전히 주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며 살았으니 말입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 그 좋은 소식을 전하도록 택한 것은 오직 주님의 선택하심이었지만 선택받은 그들이 아기 예수께 달려가 경배한 것은 전적인 그들의 복종이었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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