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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갈라디아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2:11-21)

by 똑똑이채널 2025.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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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인사말과 함께 갈라디아서를 써서 보낸 이유를 밝혀주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들 안에 유대 율법주의 교사들이 침투하여 복음의 진리를 흔들어놓고 있는 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바울의 사도성을 폄하하던 자들이었죠.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외에 할례와 같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했고,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다른 사도들과는 어울리지도 못했고 인정을 받지 못한 자였다고 주장했죠. 그런 그들의 가르침 앞에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이 현혹되어 넘어가고 있었고, 바울의 사도성이 거짓이라고 부추기는 그들의 거짓 사설에 빠져드는 교인들이 있어서, 그것을 바로잡고자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것이었죠.

어제 읽은 2장 1-10절까지는 자신이 사도직은 주님께로부터 직접 위임받은 것이요, 자신의 사도직은 예루살렘교회의 많은 지도자들로부터 인정받은 것임을 밝혀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자신은 교회의 핍박자요 주님의 대적자였는데 그런 자신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셨던 것이고, 34살에 주님을 만나 3년간 아라비아 광야의 경건훈련, 7년간 고향 다소의 낙향, 수리아안디옥교회의 3년간 공동담임목회자, 그리고 47살에 3년간에 걸친 1차선교여행을 통해 세운 갈라디아교회들, 그리고 50살에 제1차 예루살렘 공의회에 참석했던 그때 의장 야고보는 물론이고 베드로와 사도 요한까지도 이방인을 위한 자신의 사도직이 주님께 위임받은 것임을 당당하게 밝혔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 당당함을 밝힌 것입니까?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곧 ‘빈부귀천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루살렘 내에 당대 최고의 지도자 그룹인 ‘유력한 자들’ 앞에서도 복음에 관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는 사실’ 앞에서 확고했던 것이죠. 그런 이야기들을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는 것은 결국 복음의 순결성 다시 말해 복음의 진실성을 밝히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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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장선상에서 오늘 11절입니다.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게바 곧 베드로가 안디옥교회에 온 일이 있었는데, 그때 책망받을 일이 있어서 책망을 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실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명망높은 사도였지 않습니까? 그에 비해 바울은 이제 갓 부름받은 주님의 사도라 할 수 있죠. 그런데 바울이 그 명망높은 베드로 사도를 향해 꾸짖었다는 뜻입니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책망했던 것일까요? 12절입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이른바 베드로가 안디옥교회에 와서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중이었는데, 그때 야보고가 보낸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들을 봤을 때 베드로가 황급히 자리를 떠난 게 그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이방인 이요 로마 장교였던 고넬료 집안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함께 음식을 먹은 일도 있었습니다. 자신은 속되고 부정한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 법인데, 주님께서 그것을 잡아 먹으라는 환상도 보여주셔서, 그런 모든 일을 행한 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야고보 사도가 보낸 사람들이 왔다는 이유만으로 그 자리를 떠나버렸다는 것은 이중성을 그대로 보여준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사도직에 손상이 갈 것 같기 때문에 말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래서 꾸짖고 책망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베드로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13절에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바나바도 그런 베드로의 외식적인 행동에 유혹을 받아 넘어갔다는 것이죠. 그래서 14절에 호되게 베드로를 책망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새번역 성경은 보다 분명하게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바울이 사도 베드로의 이중적인 외식을 지금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명망높은 베드로를 깎아 내려야 자신의 사도직이 더 높아지기 때문에 그렇겠습니까? 아니죠. 오직 바울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요, 그 안에서 서로 포용하는 관계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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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바울은 진정한 구원의 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나갑니다. 15절에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바울도 본래 유대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방 죄인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이 말은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하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그 당시 유대인들은 같은 유대인이 아닌 모든 이방인들을 개나 짐승처럼 죄인 취급했었죠.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으로 타고날 때부터 구원받은 민족이라 생각을 했지만, 이방인들은 타고날 때부터 죄인으로 취급했던 그들입니다. 바로 그런 어리석은 옛 관점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6절 맨 앞에 ‘그러나’ 접속사가 헬라어 원문에는 들어 있습니다. 15절과 연이어 설명하는 내용이죠. “(그러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예전 관점에 비춰볼 때 유대인들은 다 구원받은 사람들이고, 이방인은 율법의 관점에서 다 죄인이었지만, “그러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구원은 유대인들처럼 난지 8일만에 받는 할례의 행위 자체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을 통해 받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17-19절을 통해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이제는 율법에 대해, 율법의 행위에 대해 죽은 자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해 다시 살아난 자라고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해 의롭게 된 자들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20절에 아주 중요한 핵심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구원받게 된 것, 지금 사도직을 감당하게 된 것, 전적인 십자가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은혜의 믿음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사는 자의 심령의 왕좌의 자리에 주님께서 사신다는 것입니다.

21절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이 말을 새번역에서는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의롭다고 하여 주시는 것이 율법으로 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만약 옛날 방식처럼 율법의 행위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원받는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이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결코 그런 구원은 있을 수가 없다는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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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와 같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율법의 행위로 갔다가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갔다가 하는 오락가락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은 날마다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사는 자, 곧 자기 심령의 왕좌의 자리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자들이 돼야 한다는 것이죠. 오늘도 주님의 은혜 속에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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