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성화) 지난 수요일 밤에 나눈 말씀이 있었습니다.
바울 일행이 빌립보 성읍에서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의 귀신을 내쫓아준 일로 졸지에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버렸죠.
사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것이 목적 아닙니까?
그를 위해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사역을 하셨죠.
바울이 귀신 들린 여종의 귀신을 내좇아준 일도 실은 귀신에게 눌린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유케 한 일이었죠.
누가 봐도 선한 일이고, 주님께서 보시기에도 기쁜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여종의 상전들은 바울 일행을 당시의 시장터요 공개법정인 ‘아고라’로 끌고 갔습니다.
왜일까요?
그 여종의 귀신이 떠나가자, 더 이상 그 여종은 점을 칠 수 없고, 그로 인해 그 상전들은 돈벌이가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상전들이 아고라의 책임자에게, 바울 일행이 로마 법을 따르지 않고 이상한 풍속을 전한다고 고발했던 것이죠.
그때 그 아고라의 최고 관리자는 아랫 사람들을 시켜 바울과 실라의 옷을 벗긴 채 심한 매질로 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집어 넣도록 했는데, 로마 감옥은 바깥에 창문이 있는 외옥과 그 안쪽으로 창문이 없는 내옥으로 구분되죠.
더욱이 그 안쪽 내옥의 벽과 바닦에 차꼬 곧 쇠고리가 걸려 있었는데, 바울과 실라는 양손과 양발이 차꼬에 채워졌죠.
(깨달음) 어떻습니까?
바울과 실라가 그 내옥 캄캄한 감옥에 갇혔을 때, 양손과 양발이 차꼬에 채워졌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 왜 이러십니까?’
‘우리가 무엇을 잘못 한 게 있나요?’
‘저희들은 주님께서 기뻐하신 일을 했을 뿐인데, 왜 이런 수모와 고난을 당해야 하는 거예요?’
바울과 실라는 주님께 그런 불평과 원망으로 호소하거나 통곡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상황속으로 이끄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탁하면서 기도와 찬송을 올려드렸죠.
더욱이 그 감옥에 함께 갇힌 죄수들이 들을 정도로, 한 밤중에 찬송과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과 실라가 자신들을 감옥 속에서 꺼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을까요?
아니죠.
주님의 복음을 전했는데도 이렇게 우리를 끌어들이셨다면, 여기에 뭔가 주님의 뜻이 있음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겠죠.
이 감옥에서 겪는 수치와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이 속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해 달라고 말이죠.
더욱이 그 감옥의 죄수들이 들을 정도로 찬양과 기도했다는 것은, 그들의 참된 소망도 주님밖에 없음을 알도록 하는 것이었죠.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일을 쉬지 않고 하시는 중이었죠.
하나님은 그곳에 지진을 일으키셨고, 바울과 실라를 통해 그 간수장과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그로 인해 그 간수장 식구들을 빌립보교회의 2번째 성도 가족이 되게 해 주셔서 영광받으신 것이었습니다.
(적용) 지금 당장은 매질을 당해 감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해도,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도, 찬양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하실 일을 바라며 온전히 내어맡긴 것 아니었습니까?
믿음의 사람에게 수치와 고난이 밀려올 때 취해야 할 자세가 바로 그런 모습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상에는 비바람과 태풍이 몰아치지만 비행기를 타고 상공에 올라가면 흰 뭉게구름과 햇빛이 여전히 찬란한 것처럼 말이죠.
내게 주어진 고난을 주님의 고난으로 받아들일 때, 주님께서는 그 상황에서도 일하시는 주님이심을 우리에게 알게 해 주실 줄 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베드로 전서는 A.D.65년 경 베드로 사도가 소아시아 북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써보낸 편지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는 제5대 네로 황제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와 복음전도를 차단하는 정책을 펼쳤죠.
혹시라도 기독교인들의 모임이 폭동이나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모임을 갖거나 복음전하는 현장이 눈에 띠면 곧바로 집시법 위반으로 체포해 처형시켰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당시 로마에서 기도 모임을 갖고 있던 동료들은 베드로 사도에게 다른 데로 갈 것을 권했죠.
그때 베드로가 동료들의 권유를 받아 로마 성밖으로 빠져나가려고 했는데, 부활의 영체시인 주님을 만나게 되었죠.
주님께서 ‘나는 로마에 들어가 십자가에 죽으러 간다’고 하셨는데, 베드로도 그 모습을 보고 다시 들어가 복음을 전했죠.
그런 와중에 A.D.64년 7월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게 되는데, 그때 베드로도 붙잡혀 감옥에 들어갔던 것이었죠.
그리고 이듬해 네로 황제가 자살하기 직전인 A.D.67년 이전에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 직전에 써 보낸 편지가 우리가 갖고 있는 베드로 전후서죠.
(깨달음) 과연 무엇 때문에 소아시아 북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써 보냈다고 했습니까?
온 세상이 로마 황제를 신처럼 떠받들고 황제에게 굴종하고 있지만, 진정한 통치자이신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라는 거죠.
로마 황제가 기독교인들의 예배와 기도모임을 집시법 위반으로 감옥에 넣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바라보라는 거죠.
로마 황제가 온갖 고난과 고통을 가하지만, 때론 죽음에 처할 수도 있지만, 그 너머에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지금 이 상황에서도 당신의 뜻과 섭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예화) 주후 70년,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가 이 편지를 써 보낸 5년 뒤에,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
그때 많은 유대인들이 소아시아 서머나 지역에 들어가 정착해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유대인 회당을 지었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지방 총독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서머나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황제의 법을 따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모임을 갖는다면서, 당국에 고발해버렸습니다.
그 밀고로 순교를 당한 사람이 초대교부 중 한 사람이었던 ‘폴리캅’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도 요한에 이어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자 목회자로 섬겼습니다.
그 당시 포악한 군인들이 그를 잡으러 왔을 때 그는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내줬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2시간 가량 기도를 드렸죠.
무슨 기도를 드렸을지 우리는 알 수 있죠.
빌립보 감옥에 들어간 바울과 실라처럼, 로마 지하 감옥에 붙힌 베드로처럼,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좇을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했겠죠.
그 후 폴리캅은 원형경기장 안에 있는 지방 총독에게 끌려갔습니다.
지방 총독은 86세이던 폴리캅을 거칠게 다루지 않고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이보시오, 폴리캅. ‘시저가 나의 주님이시다’고 고백하시오. 로마 황제가 당신의 구세주라고 고백하시오.”
“그리고 그리스도를 욕하시오. 그러면 그대를 놓아 주겠소.”
하지만 폴리캅은 그때 꿈쩍도 하지 않고, 그런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지난 86년간 그리스도를 섬겨 왔습니다. 그분은 지금까지 한 번도 나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의 왕이신 주님을 저주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주님을 포기할 수 없다는 폴리캅의 말에 화가 난 총독은, 폴리캅을 불로 태워버릴 작정이었습니다.
그때 군인들과 사람들이 장작을 모았고 거기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동조해서 거들었습니다.
그날이 주후 156년 2월 22일,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이었는데, 그들은 안식일까지도 발로 차 버린 채 가담했던 것이었죠.
폴리캅은 그 불길 속에서 끝내 순교를 당했습니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사건 같습니까?
신앙은 나의 유불리를 따라 이쪽에 붙었다 저쪽에 붙었다 하는 게 아님을 깨닫게 해 주지 않습니까?
신앙이란 이 세상의 왕이나 경제의 논리를 좇는 게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신뢰하는 것임을 알게 하는 거죠.
지난 세월 동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 왔는데, 한순간의 고난과 죽음의 위협이 닥쳐왔다해도 결코 변질되지 않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임을 일꺠워주는 것이죠.
내게 먹구름과 같은 인생 태풍과 고난이 몰아쳐와도 그 너머에 나를 바라보고 일하실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진정한 믿음임을 알게 해 주는 사건입니다.
그때 그 폴리캅도, 베드로 사도처럼, 그 자리에 자신을 바라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앞에 뭐라고 격려했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직접적인 말은 못했을지라도, 자신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눈빛의 말을 속으로 건네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이 자리에서 불타 죽는 나를 바라보지 마세요.’
‘저는 설령 죽는다 해도, 제 영혼은 하늘나라로 갈 거에요.’
‘그러니 혹여라도 나처럼 주님을 믿다가 붙잡혀 죽는다해도, 여러분은 절대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세요.’
‘우리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바라보고 일하고 계실 테니 말에요.’
(적용)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써 보낸 본문의 편지도 그와 똑같지 않겠습니까?
어떤 고난이 환란이 닥쳐와도, 이 세상 너머의 영원한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라고 말이죠.
그러니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의식하지 말고, 그 너머에 나를 바라보고 일하실 주님을 소망하라고 말입니다.
내가 겪는 고난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요, 주님과 함께 하는 고난이라면, 저 영원한 천국의 상급이 클 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우리 주님은 나에게 닥쳐오는 고난을 주님의 고난으로 여기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영생의 상급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오늘 본문 12-1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원해) 여기에 ‘불 시험’에서 ‘시험’이라는 단어가 없고 그냥 ‘불’이라는 ‘퓨로우시스’(πύρωσις)가 쓰였다고 했습니다.
‘타오는 불’, ‘쇠를 녹이는 풀무’, ‘쇠 용광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했죠.
그런 용광로 속에 던져지는 것 같은 고난이 찾아올 때 이상히 여기지 말라, 낯설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런 쇠풀무에 던져지는 고난이 실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다’는 단어가 ‘코이노네오’(κοινωνέω)인데, 본래 ‘코이노노스’(κοινωνός)에서 파생된 단어죠.
그 뜻은 ‘파트너’(a partner) 혹은 ‘공유자’(sharer)란 의미죠.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여 그 고난을 함께 공유하고, 함께 짊어지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깨달음) 베드로 사도가 왜 그런 단어를 사용했겠습니까?
그 당시 소아시아 북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고난이 무의미한 고난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들이 겪는 고난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요, 주님과 함께 겪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죠?
머잖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당신의 영원한 나라로 우리를 이끄실 때, 하늘의 상급을 베풀어주실 것이기 때문이죠.
그것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 빌립보 지하 감옥에 갇혔을 때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찬양과 기도를 올리지 않았더냐?”
“베드로도 로마 성읍을 빠져나가려다 주님을 만나 다시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붙잡혔지 않았더냐?”
“그때 베드로는 원망과 불평보다, 오히려 소아시아 북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의 편지를 써 보내지 않았더냐?”
“내가 비록 감옥에 갇혀 있고, 여러분들이 로마 황제의 핍박 때문에 힘들고 고달프지만 이 상황가운데서도 일하실 주님을 바라보라고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너에게 고난이 찾아올 때 그 고난을 주님께서 주신 고난으로 받아들이고, 오직 이겨낼 힘을 주시도록 구해야 하지 않겠느냐?”
“고난을 겪지 않게 해 달라고, 고난을 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기보다 고난을 맞서 이길 수 있도록 말이다.”
“바울과 실라도, 베드로도, 폴리캅도, 모두 그렇게 고난 너머의 소망을 바라보고 기도하지 않았더냐?”
“이 고난 속에서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실 것이고, 너로 인하여 주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찬양)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 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
(예화) 1618년부터 48년까지 유럽에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간에 30년 전쟁이 일어났죠.
그 전쟁을 ‘최대의 종교전쟁’, ‘최후의 종교전쟁’, 그리고 ‘최초의 국제전쟁’이라 불렀죠.
그런데 그 전쟁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식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은 모두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죠.
하지만 그 전쟁의 주 무대였던 독일 지역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던 실레지아(Silesia) 지역은 전쟁이 끝난 후 종교개혁 이전인 천주교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루터교 출신인 벤자민 슈몰크(Benjamin Schmolk, 1672-1737) 목사가 부임을 했습니다.
예배당의 종탑은 없어졌고 통나무와 흙벽으로 초라하게 세워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담당해야 할 교구는 주변의 36개나 되는 마을이었습니다.
개신교 목사로서 그곳에서 예배를 집례하고 장례식을 집례하는 것도 모두 천주교의 허락을 맡아야만 했죠.
그런데도 슈몰크 목사님은 온 힘을 다해 교구를 심방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아침 일찍 심방을 나갔다가 한 밤 중에 돌아오는 일도 많았습니다.
어떤 날은 2-3일씩 걸리기도 했죠.
그 목사님이 32살이던 1704년 어느 날이었습니다.
먼 지역 심방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집에 화재가 발생하여 연기만 내 품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두 아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잿더미를 헤집고 보니, 두 아들은 불에 탄 채로 꼭 껴안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부부는 충격을 받아 한 참을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모르시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일 또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는 일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두 아들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고, 그때 부른 찬송이 549장입니다.
(찬양)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인도 하시고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예화) ‘새빛 이야기’라는 책에 손원석 성도님의 간증이 나옵니다.
그분은 25세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27살 때 갑자기 눈이 안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망막 박리였습니다.
망막과 시신경이 분리가 되면서 점점 실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수술을 하기 위해 2년간 전국의 유명 병원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는 기도원도 다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병은 더 악화되었고 결국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이제 친구 몇 사람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에 있는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고 원통했습니다.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고, 친구들은 별 짓을 다 했지만, 자신은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별짓 다 친구들과 선후배들은 멀쩡한데 왜 자기는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너무나 분통이 터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몸부림치면서 제발 고쳐달라고 떼를 쓰면서 매달렸죠.
그런데 그토록 몸부림쳐도 대답이 없자, 어느날 부터는 그렇게 기도를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안 고쳐주셔도 되니까, 제발 그 이유만이라도 가르쳐주세요.’
그러던 어느 날 기도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기도 중에 환상을 본 것이었죠
그리고는 그 기도원의 산 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 찔리는 장면을 보게 됐습니다.
그때 그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습니다.
물론 그때도 통곡을 하며 울었지만, 그 전과는 다른 눈물이었습니다.
그전에는 자신의 병을 고쳐주지 않는데 대한 원망과 불평의 눈물이었다면, 그때는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었죠.
그때 그는 주님 앞에 그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의 고통을 본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제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깨달음) 그 전까지만 해도 남들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사로잡혀 원망과 불평만 쏟아부은 그였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너머에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을 보는 순간 그의 영적인 눈을 열렸던 것이죠.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고난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는 주님, 자기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여전히 자신을 위해 일하시는 주님을 보고 영원한 소망을 품게 됐던 것입니다.
그 영원한 소망이란 이 세상의 육신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도 없고,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참된 안식의 나라였기 때문이죠.
바로 그 나라를 자신에게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죠.
그러니 더 이상 자신에게 닥쳐 온 고난은 주님의 십자가와 영원한 천국에 비하면 아무런 고통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음성)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의 믿음 없음을 긍휼히 여겨주세요.”
“제 눈으로 보이는 게 전부라고 생각해 온 어리석은 믿음을 깨트려주시고 더 큰 믿음의 세계를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손원석 성도도 망막박리로 인해 앞을 보지 못해 원망했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보고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렸잖아요.”
“벤쟈민 슈몰크 목사님도 두 아들이 불탄 채로 죽어 있는 걸 봤을 때 충격에 빠졌지만, 그 속에서 일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런 찬송을 불렀잖아요.”
“주님, 저도 제게 닥쳐오는 고난과 환란과 인생 태풍 앞에,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옵소서.”
“지금 이 상황에서도 나를 바라보고 일하시 주님, 나를 통해 일하실 주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열어주세요.”
(찬양)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아멘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고난과 역경을 허락해주시는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바울과 실라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 빌립보 감옥에 갇히지 않았습니까?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며 기도모임을 이끌던 베드로도 로마 지하 감옥에 갇히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복음을 위해 심방을 갔다 온 슈몰크 목사님도 두 아들을 화재더미에서 잃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손원석 성도님도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신앙생활했는데, 두 눈을 상실한 아픔과 고통을 겪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들이 겪는 고난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동역자로 삼아주셨습니다.
그 고난이 주님을 위한 고난이요, 주님과 함께 하는 고난이 되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그때 그들 모두는 그 고난 너머에게 일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었고, 궁극적으로 영생의 천국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그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그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 앞에 어떤 고난이 밀려와도, 그 고난이 주님을 위한 고난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고난으로, 주님의 일하심을 보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 영생의 천국과 상급을 베풀어주실 주님을 사모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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