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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SundaySermon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벧전4:12-16)

by 똑똑이채널 2021.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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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발췌) 이근호 목사님의 모든 것을 가진 것보다 더 감동 있는 삶에 나온 내용입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다니던 중에 1977년 미국에 이민가서 회계학을 전공한 후에 목회자가 된 이근호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 분은 20대 후반에 척추를 다쳐서 20년간 척추 디스크로 심한 고생을 한 분입니다.

 

그때는 왜 척추를 다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더욱이 그렇게 척추를 다친 자기 자신을 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시고 택하셨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병을 고쳐주지 않는 것인지, 아무리 기도해도 왜 응답이 없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43세가 되던 해 미국의 풀러신학교에서 수업을 듣던 중에 담당 교수님의 기도를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 기도를 받는데, 놀랍게도 그 토록 오랫동안 앓고 있던 그 질병의 짓눌림, 그 척추 디스크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재발되지 않았고 건강한 허리로 힘차게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hwp
0.19MB

 

(깨달음)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20년 가까이 그 분이 척추 디스크를 안고 살도록 하나님은 방치한 듯한 삶을 살게 하셨겠습니까?

43살에 기도받을 때 고쳐주기보다 차라리 20대 후반 고쳐주셨다면, 목회자로 부를 때 당장 고쳐주셨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20년간 척추 디스크를 안고 살면서, 그의 고통 중에 깨닫게 하시는 게 있지 않았겠습니까?

병들 수 밖에 없는 자기 육신의 나약함을 깊이 깨닫도록 하시는 것 말입니다.

더욱이 자기 자신과 같이 육신의 약함을 안고 살아가는 자들을 긍휼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불어넣어주시고 하는 것이었죠.

병든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이는 그 어떤 치유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 말입니다.

지금은 자신의 연약함을 긍휼히 여겨주신 그 주님의 마음을 품고 아픈 자를 기도할 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적용)그렇기에 하나님을 믿으면 무명장수한다는 것, 만사형통한다는 것,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을 이룰 때가 있듯이, 그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만큼 그리스도인에게는 저마다 고난과 고통이 없을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그 고난과 고통이 나에게 어떤 영적인 유익이 있는지 깨닫게 하시는 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죠.

내게 척추 디스크가 있을지라도, 내가 겪고 있는 아픔과 고난이 있어도, 그 속에서 주님을 향한 소망을 잃지 않게 하시는 은혜로 감싸주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베드로전서는 2천년 전 베드로 사도가 소아시아 북부 지역에 사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본도, 갈라디, 갑바도기, 비두니아, 지금의 터키 지역의 성도들에게 보내 편지죠.

 

물론 어부 출신인 베드로는 문필 실력이 뛰어났겠습니까?

그래서 직접 편지를 쓴 게 아니라, 베드로전서 512절에서 밝혀주듯, 실라가 이 편지를 대필했던 것이죠.

 

그렇다면 베드로 사도는 언제 어디에서 이 편지를 써 보냈을까요?

베드로전서 513절에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거기에 언급하고 있는 바벨론이란 베드로가 죽기 직전에 복음을 전한 로마였을 것으로 성경학자들은 추정하죠.

그만큼 베드로는 A.D.67년 경 로마의 감옥에서 이 편지를 써서 소아시아 북부지역 그리스도인들에게 써 보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베드로는 로마 감옥에 갇혔던 것일까요?

A.D. 647월에 로마에 대화제가 발생하죠. 그것은 세계 역사에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 당시 로마 황제는 제5대 네로가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네로는 그 화제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렸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죽여 원형기장의 불을 밝히는 땔감으로 사용할 정도로 네로는 악독한 황제였죠.

 

그 당시에 베드로 사도는 바울의 선교동선과 겹칩니다.

A.D.60년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로마의 가택연금에 갇히죠.

그로부터 2년 동안 그런 상태에 처해 있다가 무죄로 풀려나게 됩니다.

그후 크라테섬교회의 담임목회자로 디도를 세우고, 이후 에베소로 가서 디모데를 담임목회자로 세우죠.

그때 바울은 마게도냐와 고린도교회에 들러 교우들을 격려한 뒤, 고린도의 위쪽 도시인 니고볼리로 선교여행을 떠나죠.

그곳 니고볼리는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지역인데, 바울은 그곳에까지 들어가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운 것이었죠.

 

바로 그 무렵인 A.D.647월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했고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했는데 바울도 집시법 위반으로 체포됐죠.

바울은 그때 로마의 마메르틴 지하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이듬해 네로 황제가 자살하기 직전인 A.D.67년 봄에 바울은 참수형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죠.

바울이 참수형 당하기 직전에 써 보낸 편지가 우리가 갖고 있는 디모데후서와 히브리서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즈음에 베드로도 순교 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의 순교와 관련해 알 수 있는 부분이 신약성경의 외경인 베드로행전 35장에 나와 있습니다.

그 공모를 알게 된 크산티페가 베드로에게 알려주고는 로마를 떠나라고 권고했다.

마르첼로를 비롯한 다른 형제들도 그에게 떠나라고 말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형제 여러분, 우리가 배신자처럼 달아나도 되는 것입니까?”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런 게 아니지요. 다만 로마를 떠나면 당신은 계속해서 주님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베드로가 형제들의 말에 복종하여 혼자 로마를 떠나면서 아무도 따라오지 마십시오. 나는 변장을 하고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로마 성문을 벗어나자, 베드로는 로마로 들어가는 주님을 보았다.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려고 로마로 가는 길이다.”라고 대답하셨다.

베드로가 주님, 십자가에 다시 못박히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라고 물었다.

주님께서는 그렇다, 베드로야.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

그제서야 베드로가 제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주님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베드로는 기쁨에 가득 차서 주님을 찬미하며 로마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힐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일이 베드로에게 일어나게 되어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죠?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 쿼바디스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베드로행전 말씀입니다.

그 당시 베드로는 바벨론이라고 말하는 그곳, 곧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대화재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는 네로의 박해에 동료들의 권유로 베드로는 로마를 빠져나가려 한 것이죠.

그러다가 로마의 성문 앞에 나타난 주님의 영체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었죠.

베드로야, 나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로마에 들어가는데, 넌 뭘 하려는 것이냐?”

그러자 베드로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어 멈춰섰고, 다시 로마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다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었죠.

다만 십자가에 처형되기 전에 자신 같은 존재가 예수그리스도와 동일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면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죽기 직전인 A.D.65년 경 이 편지를 써서 소아시아 북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써보낸 것입니다.

 

(깨달음) 그렇다면 베드로 사도는 왜 이 편지를 굳이 대필하면서까지 소아시아의 교회 성도들에게 써 보냈겠습니까?

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도 받게 될 핍박과 박해를 생각하면서, 오직 주님을 향한 소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코자 함이었죠.

그래서 베드로전서에서 고난이라는 단어를 17번씩 사용하면서, 믿음으로 굳게 서’(벧전5:12)도록 격려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써 보낸 이 편지를 소망의 편지라고, ‘격려의 서신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죠.

 

(적용) 그것은 로마서 53-4절을 통해 바울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라고 권면한 이유와 똑같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란과 고난이 닥쳐올 때, 그 환란 가운데 인내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내를 통해 연단을 받게 되고, 그 연단이 결국 소망을 이루어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수많은 환란과 고난을 받을지라도, 결국에는 저 영원한 천국에서 주님의 안식을 누릴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본문)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 12-13절 말씀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원해) 불 시험의 은 헬라어로 퓨로우시스’(πρωσις)입니다.

그 뜻은 타오는 불’, ‘쇠풀무’, ‘쇠를 녹이는 용광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이 자신이 세운 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 다니엘의 세 친구를 던져 넣은 곳이 그 풀무불이었습니다.

그때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신 일이 있었죠.

 

(원성)그런데 퓨로우시스라는 헬라어 단어는 구약의 코르’(כּוּר)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1)

신명기 420절에 그 단어가 쓰였는데 새번역성경에 이렇게 번역돼 있습니다.

당신들은, 주님께서 용광로와 같은 이집트에서 건져내셔서, 오늘 이렇게 자기의 소유로 삼으신 백성입니다.”

 

열왕기상 851절에도 그 단어가 쓰였는데, 이렇게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철 풀무 같은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 주의 소유가 됨이니이다

 

잠언 173절에도 그 단어가 쓰여 있습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깨달음)무엇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기 위해서,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로 세우기 위해, 풀무불과 같은 연단을 거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런 이스라엘 민족을 생각하며,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이 맞이한 상황이 풀부물과 같은 고난의 과정이라고 이해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원성2)그런데 예레미야 2220-22절은 또 다른 상황의 풀부물을 인용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은이나 놋이나 쇠나 납이나 주석이나 모아서 풀무 불 속에 넣고 불을 불어 녹이는 것 같이 내가 노여움과 분으로 너희를 모아 거기에 두고 녹이리라 은이 풀무 불 가운데에서 녹는 것 같이 너희가 그 가운데에서 녹으리니 나 여호와가 분노를 너희 위에 쏟은 줄을 너희가 알리라

 

(깨달음)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풀무불에 넣고 녹이시겠다고 선포하신 이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채 욕망과 탐욕의 우상숭배자들로 전락하여 하나님을 떠나버린 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것은 당신의 자녀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바르게 세우시기 위한 목적이라는 뜻이죠.

 

베드로 사도가 그와 같은 구약의 그 일들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를 신약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 사도가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때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 가운데 예수님을 떠나 황제의 논리 우상숭배의 논리에 빠져든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이 황제의 논리에서, 탐욕이라는 우상숭배의 논리에서 빠져나와 주님 품에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를 위해 불시험과 같은 고난을 통해 당신의 자녀들을 바로 세우길 원하신다는 것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죠?

(은혜) 우리 주님은 때로 고난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세우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심령에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20대 후반의 이근호에게 왜 척추 디스크를 앓게 해서 20년간 고난의 자리에 처하게 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네로 황제의 핍박 속에서 바울이나 베드로가 왜 그런 고난을 맞이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기 직전에, 왜 소아시아 북부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썼는지 알수 있지 않겠느냐?”

왜 이스라엘 백성을 고난의 풀무불에 처하게 했는지, 다니엘의 세 친구가 왜 풀무불에 던져졌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사랑하는 내 딸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그러니 무더운 여름에 땀흘리며 고생하듯이, 네 인생에 고난이 찾아올 때 절망스럽다고 낙심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고난의 시간표가 너를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하게 해 줄 것이고, 그 연단을 통해 주님께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줄 것이니 말이다.”

“20년간 척추 디스크를 앓던 이근호 목사도 주님께서 작정하신 때에 치유받았고, 이젠 아파하는 이들을 위한 치유사역자로 영광돌리지 않더냐.”

애굽에서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건져내 해방과 자유를 주지 않았더냐?”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져도 사명을 완수하까지 그들을 지키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더냐?”

소아시아 북부 그리스도인들이 황제의 핍박속에 원형경기장 땔감이 돼도 그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불러올리지 않겠느냐?”

그러니 너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이 아무리 심해 보여도 주님은 너를 눈여겨보고 계시고 너와 함께 하시지 않겠느냐?”

그러니 하나님께서 너를 고난의 자리를 이끄실 때 회피하거나 달아나지 말고 믿음으로 굳게 이겨나갔으면 좋겠구나.”

지금은 하나님 뜻을 몰라도 하나님께선 하나님의 영역의 일을 할 것이니, 너는 네게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찬양)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발췌) 이재호 목사의 소하르의 소나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책에 2000년에 리더스가이드에 실린 짧은 토막글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특수아동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5학년 학부모들을 모셔놓고 연극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보통 아이들보다 지능이 낮은 아이들이 연극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한 명이 하나님 역할을 맡았습니다.

 

하나님의 역할을 맡은 아이가 관중을 향해 던지는 말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나에게 질문할 것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역할을 맡은 한 학생이 그곳에 참석한 부모님들에게 또 학교 선생님들에게 묻는 질문이었죠.

 

연극을 연습시킨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그때가 가장 긴장이 되는 순간이지 않겠습니까?

그 아이가 하는 질문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길 바라기 때문이죠.

설령 누군가 나서서 질문을 한다고 해도, 그 아이는 그에 대해 대답할 지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질문한 아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 아저씨가 손을 번쩍 들고 그 아이를 향해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었죠.

하나님!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죠.”

그런데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면서 왜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십니까?”

왜 슬픔을 주셔서 울게 하고, 괴로움을 주셔서 고통을 겪게 하고, 아픔을 주셔서 마음에 상처를 갖고 살게 하는 것입니까?”

 

그 학부모의 질문으로 그 연극장은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그 연극장에 참석한 모든 학부모들이 실은 그런 아픔과 고난을 짊어지고 살고 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 학부모의 질문에 그 아이가 대답해 주지 못할 것을 알기에, 모두가 더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그 아이가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늘을 파랗게 만들었지. 나는 이 세상을 푸르게 만들었지.”

그리고 나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었어. 온 우주를...”

그러니까 너희는 너희들의 몫만 하면 돼. 너는 너의 일만 하면 돼(You do your part.)”

“(내가 하는 일에 너희들은 신경을 쓰지 말고) 너희들은 너희들의 일만 하면 돼.”

 

(깨달음) 과연 그 아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대답을 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아이가 지적장애을 앓고 있는 아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하지만 동일한 아픔을 안고 살아가던 그 학부모들은 모두가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자신들 앞에 천둥처럼 던지는 그런 음성으로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왜 이런 아이를 주셔서, 나를 고통스럽게 하시는 겁니까?”

하나님, 왜 이런 가정을 주셔서 나를 힘들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 왜 이런 상황으로 나를 몰고 가셔서, 내 삶이 엉망진창이 되게 하신 것입니까?”

 

그때까지도 그렇게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살아왔던 그들을지 모릅니다.

끊임없이 좌절하고 낙심하며 사는 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아이를 통해 말씀하신 것이었죠.

너희들은 너희들에게 주어진 일을 하면 된단다. 나는 나의 몫을 책임질테니까 말이야.”

 

(내음성) 그러니 오늘 우리가 내 심령 속에서 울러퍼지는 기도를 주님께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만족스럽지 못한 가정이나 자녀들이나 일터의 상황속에 때로 주님을 원망하고 불평한 게 사실이예요.”

왜 이렇게 밖에 도와주지 않으신가요? 왜 이런 좌절과 고난으로 내 모시는 거예요?”

왜 나에게 이런 아픔과 질병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 이 모든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네요.”

이런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해 주시네요.”

제가 어찌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알 수 있겠어요.”

오직 저에게 주신 사명의 일에 최선을 다하겠어요.”

저에게 주신 가정을 잘 지키고, 자녀들을 돌보고, 일터에서도 주님께 영광돌리며 살겠어요.”

앞으로 어떤 고난이 찾아와도 황제의 논리에 기죽지 않고, 탐욕의 논리에 제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붙잡아 주세요.”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풀무불로 연단할 금과 같은 믿음으로, 주님만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옵소서.”

 

 

 

(찬양)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 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 자

너의 모든 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 볼지라 주만 바라 볼지라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뜨거운 날씨인데,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경들이 그런 고통과 고난으로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활약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황제의 핍박 속에 원형경기장 땔감으로 타 죽어가는 고통을 겪어야 했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된 노역의 고통으로, 다니엘의 세 친구는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지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20년 넘게 척추 디크스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지적장애아들의 연극을 관람하고 응원하기 위해 찾은 그 학부모들도 저마다 고난의 아픔을 삭히며 살아야 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에게도 시대와 환경은 달라도, 저마다 각자가 맞이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고난의 상황속에 원망하거나 불평하기보다 오히려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맞이하라고 격려하십니다.

우리가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그 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당신의 자녀를 죽이고 멸망시키는 게 아니라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한 것을 누리게 하시는 게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천하게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말씀해 주셨듯이, 그 모든 고난의 상황은 주님의 정한 때까지 연단을 위한 과정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종국의 때가 되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은혜로 우리를 이끄셨다는 것을 비로보 알게 해 주실 주님이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https://www.studylight.org/lexicons/eng/greek/4451.html

 

Strong's #4451 - πύρωσις - Old & New Testament Greek Lexical Dictionary - StudyLight.org

Strong's #4451 - πύρωσις in the Old & New Testament Greek Lexical Dictionary on StudyLight.org

www.studyligh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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