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설교열기)(성화)구약성경의 역대기서를 읽어보면 왕들이 떠날 때의 모습을 상반되게 평가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대하21:20)
그 여호람은 분열된 유다 왕국의 다섯 번째 왕입니다.
그 시대의 모든 유다 왕들은 절대군주였죠.
그러니 그 주위에는 그로부터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이 줄을 서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숨을 거두자 그를 아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의 시신은 왕의 묘실에도 안치하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너 잘 죽었다’하는 식이었죠.
그런데 그와는 다른 왕이 있습니다.
분열된 유다 왕국 13번째 왕인 히스기야의 죽음이 그렇습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이 그를 다윗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하여 그의 죽음에 그에게 경의를 표하였더라”(대하32:33a)
히스기야 왕이 여호람 왕처럼 숨을 거두자 백성이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온 백성이 그의 시신을 왕의 묘실 중에서 높은 곳에 안치하고 그의 죽음에 경의를 표했던 것이죠.
그런데 유다 왕국의 16번째 왕인 요시야 왕의 죽음에 대한 증언은 더더욱 애절합니다.
“예루살렘에 이른 후에 그가 죽으니 그의 조상들의 묘실에 장사되니라
온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요시야를 슬퍼하고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대하35:24b-25)
요시야 왕이 죽었을 때 온 백성이 그의 죽음을 슬퍼할 뿐만 아니라 선지자 예레미야는 그를 위해 애가까지 지을 정도였죠.
(깨달음)그렇다면 왜 그렇게 평가하는 것이겠습니까?
여호람의 죽음에 대한 백성들의 평가와 히스기야나 요시야의 죽음에 대한 평가가 왜 그토록 다른 것입니까?
여호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와 권력을 자기 욕망만을 위해 사용했기 때문이죠.
반면에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의 청지기로 살았기 때문이죠.
(적용)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살다 오도록 우리를 이 땅에 내보내셨다면 어떻게 떠나야 할지 명확해지지 않습니까?
여호람처럼 자기 자신이 주관자가 되어 자기 욕망만을 위해 살다가 떠난다면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나 요시야처럼 자기 것을 타인을 위해 섬기다가 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를 아는 모두가 슬퍼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어느 쪽의 삶을 지향하며 살아야 할지 명확해지지 않겠습니까?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17314628
(역배)유라굴로 광풍 때문에 멜리데 섬에 조난당한 바울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섬에서 새해를 맞았죠.
그곳에서 3개월을 지낸 뒤 지중해 항해 금지가 해제되는 시기에 바울은 다시 항해에 나서죠.
바울의 최종 목적지인 로마를 향해서 멜리데 섬을 떠난 것입니다.
멜리데 섬에서 겨울을 난 바울이 만약 그 섬을 떠나지 않고 편안한 여생을 위해 그 섬에 정착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다른 사람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노인으로 성경에 기록조차 되지 않았겠죠.
2천 년 전 한 노인에 불과한 바울의 말과 삶을 우리가 본받으려고 할 필요도 없었겠죠.
바울이 우리에게 믿음의 표상이 된 것은 떠나야 할 때 주저 없이 떠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멈춤 없이 계속 떠나는 삶이죠.
오늘이라는 새로운 날도 어제로부터 떠났기에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죠.
과거를 집착하고 있는 사람은 현재 새 날이 맞이할 수 없는 법이죠.
과거에 붙잡혀 산다면 미래로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새날로 맞이하는 사람만 내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죠.
그를 위해서 어제 것들을 떠나보낼 것이 있다면 기꺼이 떠나보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바울은 어렸을 때의 일로부터 떠나야 장성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거기에서 ‘버리다’는 말이 헬라어로 ‘카타르게오’인데 ‘완전히 쓸모 없게 폐기처분하다’는 뜻입니다.
장성한 사람이 되는 것은 어린 아이의 언행과 사고방식을 완전히 폐기처분하고 떠나야만 완연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거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인이 돼서도 어린 아이의 유치함을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지난 날에 화려한 날을 살았다 해도 그 화려함으로부터 떠나야 새로운 오늘과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과거의 자랑거리에 사로잡혀 있을 게 아니라 매일 새로운 날을 주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야 새로운 오늘과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죠.
그만큼 어린 아이의 언행으로부터 떠나는 것, 과거의 자랑 속에 묻혀 있는 신앙심에서 떠나는 것이 중요하죠.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떠나느냐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일이죠.
본문 10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실었더라”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멜리데 섬 주민들은 석 달 동안 바울 일행의 숙식을 책임져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이 멜리데 섬을 떠날 때 그들이 배에서 필요한 물품을 배에 실어준 것이죠.
그 정도로 멜리데 섬 원주민들은 바울이 떠나가는 것을 아쉬워했던 것이죠.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이 멜리데 섬에 조난 당했을 때 그 섬의 추장과 같은 보블리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시달리고 있었죠.
바울이 그 부친의 열병을 고쳐줬을 때 섬 주민들 중에 불치병 환자들이 바울을 찾아왔고 바울은 그때마다 주님의 이름으로 그들의 병을 고쳐줬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이 원기 왕성한 젊은이의 모습이었습니까?
50대 나이의 인생 말년에 접어든 때였습니다.
바울은 안질 혹은 간질로 불리는 지병을 안고 있었고, 등도 굽어 있었고, 안짱 다리였죠.
그런 상황에서 14일간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상황이었죠.
그러다 소낙비가 내리는 겨울철 그 날에 바다에 헤엄쳐서 그 섬에 기어올라온 것이죠.
그런 모습으로 그 섬에 상륙했을 때 추위에 벌벌 떨어야 했죠.
그런 상태로 그 섬에 상륙했다면 3개월간 자기 몸을 추스르는 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멜리데 섬은 그가 남고자 하는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로마 황제를 향해 로마로 떠나가야 할 최종 목적지가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바울은 자기 자신의 몸을 돌보기보다 연이어 찾아오는 그 섬의 불치병 환자들을 돌보고 기도하는데 여념이 없었죠.
그만큼 바울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자기 시간과 자기 몸을 그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겠습니까?
그런 바울의 모습을 3개월간 지켜 본 그 섬의 원주민들은 바울이 떠날 때 너무나도 아쉬워했고 물품을 챙겨보낸 것이었죠.
만약 바울이 자기 몸만 돌본 사람이었다면 결코 그런 아쉬움과 물품을 실어 보내지 않았겠죠.
멜리데 섬에서 노구의 지친 몸으로 그 섬의 환자들을 돌본 바울이었기에 그 섬을 떠날 때 모두가 슬퍼하고 먹을 걸 싸준 것이죠.
(깨달음)이것이 바로 서두에서 말한 여호람과는 다른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이 떠날 때의 모습과 같지 않겠습니까?
함께 살고 있던 사람이 어디론가 떠날 때, 숨이 멎어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를 위해 슬퍼하는 사람이 누군지 말이죠.
바울도 그 지친 몸을 이끌고 그 섬의 환자들을 돌봤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애통해하며 물품을 실어준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07032197
(본문)오늘 본문 11절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입니다.
“석 달 후에 우리가 그 섬에서 겨울을 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니 그 배의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
(깨달음)그 섬에서 겨울을 난 바울과 그 일행이 다시금 로마를 향해 출항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타고 간 배는 알렉산드리아 배죠.
이 배는 멜리데 섬 인근에서 좌초된 배와 동일한 배입니다.
좌초된 배는 완전히 없어졌고 새로운 배가 그곳에 도착한 것이죠.
중요한 것은 그 배에 승선한 사람들은 모두 276명이라는 점이죠.
그 사람들 중에는 좌초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잃은 선주와 선장도 있고 하물을 바다에 던졌던 하주들도 있죠.
그 배와 하물을 송두리째 잃은 사람들이 모두 멜리데 섬에서 3개월을 보낸 다음 알렉산드리아 배에 승선한 것이죠.
그때 그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처음 그 배가 무라시에서 뵈닉스 항구로 출발할 때만 해도 바다와 배에 익숙한 선주와 선장의 말만 들으면 된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바울은 미항에서 겨울을 보낸 다음에 항해하는 게 낫겠다고 말했죠.
하지만 그 배에 탄 사람들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출항했죠.
하지만 얼마 못 돼 유라굴로 광풍을 만났고 14일간 바다에 떠밀렸죠.
그로 인해 배에 실은 곡물들과 돈이 될만한 것들은 모두 다 바다에 내던져야 했죠.
그리고 그 배마저 좌초당해 완전히 박살 난 상황에 그들 모두가 나무 조각에 의지해 멜리데 섬에 상륙했죠.
이제 3개월을 지내 다음에 새로운 알렉산드리아 배가 나타나 그 배에 승선해 함께 타고 가는 것이죠.
그러니 그 배 안에서 그들이 무엇을 느끼겠습니까?
아무리 유능한 선장과 선주의 말보다도 바울이 말한 순리를 따르는 게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죠.
더욱이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길이란 점이죠.
이전에 탔던 알렉산드리 배는 모두 좌초당했으니, 이제는 과거의 자연과 하나님의 순리를 거스린 삶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느꼈겠죠.
앞으로는 저 바울이란 사람처럼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아보겠다는 다짐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야 자신들도 새로운 곳을 항해할 때 그 누군가로부터 아쉬움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말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저와 여러분들이 이 땅에서 섬김을 다하는 청지기로 살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자녀로 사는 은혜를 부어주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여호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자기 배만 채운 채 청지기로 살지 않아 누구도 그를 슬퍼한 이가 없지 않았더냐?”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청지기답게 하나님과 백성들을 잘 섬기다가 떠났고 그가 죽을 때 모두가 슬퍼하고 애통하지 않았더냐?”
“바울이 멜리데 섬에서 3개월간 환자들을 돌보고 치유하는 통로로 살았기에 그가 떠날 때 모두가 슬퍼하는 것 아니더냐?”
“새로운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가는 그들 중에도 과거의 것에 집착한 채 떠나보내야 할 것을 떠나보내지 못한 이들도 있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이 땅에 살 때 하나님의 청지기답게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래야 이 세상을 떠날 때 너를 위해 누군가 슬퍼하고 애통해하지 않겠느냐?”
“바울도 3개월간 멜리데 섬에서 원주민들과 환자들을 돌보며 살다가 떠날 때 그 섬의 원주민들이 슬퍼하고 애통하지 않았더냐?”
“새로운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가던 예전의 선장과 선주도 하주들도 그런 사실을 깨닫지 않았겠느냐?”
(찬양)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 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인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와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07032194
(예화)데이빗 케이프가 쓴 〈주님의 음성에 그대로 순종한 예수를 위한 바보〉입니다.
그가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백인과 흑인이 딱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죽이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현장에서 말입니다.
그것도 석탄 연기 가득한 빈민들과 깡패들이 사는 ‘소웨토’라는 곳에서 “예수님이 씻긴 발은 행복한 발입니다!”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와 반바지와 두꺼운 고무 깔창을 댄 운동화에 양말을 발목까지 접어 내리고, 등에는 큰 장비를 지고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라는 음성을 말입니다.
자신의 모습이 너무 우습기도 하고, 정말 바보 같은 모습 실현 가능성이 없는 모습임에도 그는 순종했습니다.
처음 소웨토에서 만난 4명의 건장한 폭력배들 앞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이 발을 내놓았습니다.
그중 한 명이 데이빗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일어난 변화의 기적이 그 책에 나와 있습니다.
그의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고속도로에서 또는 샛길에서 만나 그들의 발을 씻겼는지 모릅니다.”
“족히 수천 명은 될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성공이나 실패가 없고 오직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내가 하루에 이삼십 명의 발을 씻기면 그날은 성공적인 날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한 가지는 우리가 그분의 신실한 자녀로 그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주님의 청지기로 사는 길은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몇 명의 발을 씻겨느냐보다 당신의 발자취를 따라 순종하며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을 묻는 분이죠.
그 삶은 나에게 집착하던 삶에서 벗어나 내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때 가능한 일이죠.
그런 삶을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어찌 주변 사람들이 아파하고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하늘로 떠나가실 때 갈릴리 사람들이 서서 하늘을 쳐다보듯 말이죠.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주님께서는 몇 명을 섬겼느냐, 몇 명을 전도했느냐, 몇 명의 발을 닦았느냐를 묻는 분이 아니네요.”
“주님은 오직 한 사람을 섬기더라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를 원하고 계시네요?”
“제가 데이빗 케이프처럼 난민촌의 사람들 발을 닦아 주지는 못해도 제 주변의 한 사람을 위해서는 섬길 수 있을 거예요.”
“주님. 제 주변에 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을 주님처럼 발을 닦아주듯이 닦아주는 심정과 자세로 섬길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리하여 주님의 청지기로 이 땅에 살다가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누군가 나를 위해 슬퍼하고 아파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것 같아요.”
(찬양)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 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인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와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멜리데 섬에 3개월을 지낼 때 그 지친 노구의 바울은 대접만 받고도 잘 살 수 있었습니다.
보블리오 추장의 아버지를 고쳐줬으니 더 이상 환자들을 돌보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대접받고 누릴 수도 있었죠.
하지만 바울은 그 섬의 환자들을 모두 주님의 마음과 자세로 섬기며 치료해주는 통로요 도구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알렉산드리아 배가 도착했을 때 기꺼이 그 섬과 원주민들을 떠나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로마로 향했죠.
저와 여러분들도 그 바울처럼, 히스기야와 요시야처럼, 그리고 데이빗 케이프처럼, 주님께서 제자들을 섬기신 그 본을 따라 섬김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을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승천하실 때 모두가 그 하늘을 쳐다보며 주님을 안타까워하듯이 말이죠.
그런 은혜가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수요설교WednesdaySermon > 사도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와 같이 로마로(행28:11-14) (0) | 2023.06.28 |
---|---|
머리 장식은 디오스구로라(행28:11-14) (0) | 2023.06.21 |
기도하고 낫게 하매(행28:3-10) (5) | 2023.06.07 |
비가 오고 날이 차매(행28:1-2) (0) | 2023.05.31 |
구조된 후에 안즉(행28:1) (1) | 2023.05.2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