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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1980년 전두환 신군부가 정권을 잡을 때 이 나라와 사회는 혼란에 빠졌죠.
그때 불교계도 사분오열된 상황이라 매우 시끄러운 상태였습니다.
1년 뒤 대한불교조계종 지도자들이 해인사에 있는 성철스님을 찾아갔습니다.
시끄러운 불교계를 하나로 연합하게 달라고, 성철 스님에게 조계종 종정이 돼 달라고, 그들은 부탁을 했죠.
그때 성철 스님은 처음엔 사양했지만 그들이 간곡하게 부탁하자 결국 승낙을 했습니다.
성철 스님이 조계종 정종으로 취임사를 발표하는 그 날 그 유명한 법어를 남겼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 법어는 성철 스님이 처음 한 말이 아니라 700년 전 중국의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라는 책에 나온 구절입니다.
중국의 아주 유명한 다섯 명의 선승이 금강경을 해석한 책이 그것이죠.
거기에 야부 스님이 한 말이 있는데 “山是山, 水是水, 佛在甚摩處”(산시산 수시수 불재심마처)입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도대체 부처님이 또 어디에 따로 계신단 말인가!”하는 뜻이죠.
(깨달음)그 말이 무엇을 깨닫게 하는 것 같습니까?
왜 부처님을 불당에서만 찾으려 하냐는 것이죠.
불당에 나와 부처님의 말을 깨달았다면 삶 속의 현장에서 부처님의 말을 실천하는 게 참된 불자의 도리요 삶이라는 것이죠.
(적용)그것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인들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하는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신앙의 모습을 보일 수 있죠.
구원은 받은 것 같지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관점으로 이 세상의 부귀영화만을 좇아 사는 삶이 그것이죠.
그러다가 성령을 체험하게 되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죠.
왠지 모를 눈물도 나고 기쁨도 넘쳐나고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이 세상을 이길 힘이 생기죠.
들판에 핀 꽃들이 나를 향해 웃는 것 같고, 산속에 물이 물속에 산이 있는 것처럼,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거죠.
물론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부럽기도 해서 누구라도 그런 성령을 체험하길 원하게 되죠.
그런데 자칫 그 상태만 머물면 신앙인이 독선적이기 쉽고 성령을 체험치 못한 이들과 자신을 비교하여 무시하기도 하죠.
나는 기도를 많이 하는데 왜 너는 기도를 하지 않느냐, 나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데 너는 왜 못 듣느냐, 하면서 말이죠.
그렇기에 참된 신앙인은 나와 다른 사람을 구분하거나 분리하지 않고 주님의 모습처럼 겸손하게 나를 내려놓고 타인을 품는 자세죠.
밥을 짓고 설거지하는 주방에도, 서류를 작성하고 현장직원을 만나는 일터에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 말이죠.
예배당에 나와 주님의 진리를 깨달았다면 삶의 현장에서 순종하여 주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신앙인이 진정 성령충만한 신앙인이요 성숙한 신앙인이죠.
그것이 ‘산시산 수시수 불재심마처’처럼 내가 거하는 삶의 현장 곳곳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성령의 사람으로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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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십자가 위에서 6시간 만에 숨을 거둔 예수님은 안식일이 지난 안식 후 첫날 곧 주일 새벽 아침에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본문 7절의 말씀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을 의미한다고 했죠.
우리말 ‘죽은 자’는 헬라어로 ‘네크로스’(νεκρός) 곧 ‘시체’를 뜻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시체’란 살아 있는 사람과 단절된 상태를 말하죠.
살아 있던 사람이 시체가 되면 썩은 냄새를 풍기고 곧장 부패하기 때문이죠.
그만큼 시체는 이 생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갔다는 의미요, 그래서 옛날에는 병풍을 친 뒤 3일 후에 시체를 관에 넣고 흙에 매장하죠.
물론 유대인들의 장례 풍습은 우리처럼 관에 넣거나 흙무덤에 안치하는 게 아니죠.
그들은 흙 대신 석회암 동굴이 많기 때문에 그 동굴 무덤에 방부제 처리한 시신을 그냥 안치해 놓을 뿐이죠.
죽어 시체가 된 예수님의 시신 역시 그렇게 방부제 처리를 해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새 무덤에 안치한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육신은 시체 가운데 계셨다가 사흘째 되는 새벽 미명 곧 주일날 부활하셨던 것이죠.
그런데 사복음서 기자들은 그 당시 ‘부활’이라는 헬라어 단어 ‘아나스타시스’(ἀνάστασις)가 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았죠.
그 당시 사람들은 ‘부활’이란 말은 그야말로 신화나 전설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사복음서 기자들이 부활이란 단어 대신에 ‘일어났다’는 헬라어 ‘ἐγείρω’(에게이로)란 단어를 쓴 이유도 그것이었죠.
부활이란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 않고 ‘일어났다’는 단어만 써도 예수님은 시체가 가운데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모두가 알 수 있기 때문이죠.
(깨달음)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어나셨다’, 예수님께서 시체 가운데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이 왜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까?
우리도 머잖아 육체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 육체의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주님처럼 부활할 수 있는 소망이 생기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우리도 주님 안에서 죽게 된다면 예수님처럼 부활의 은혜를 덧입게 되기 때문이죠.
그만큼 이 세상에서 내 생명의 호흡이 끝나는 그 날이 곧 영생의 관문을 지나 천국에 입성하는 날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날 동안 주님의 재림을 맞이한다면 그때는 우리의 몸 자체가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돼 주님을 맞이할 수 있겠죠.
바로 그것이 이 세상에 믿지 않는 자들 곧 이 세상을 끝으로 아는 자들과 그리스도인인 우리와 가장 큰 차이이지 않겠습니까?
(근성) 그 까닭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4-20절을 통해 이렇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거짓되이 증언하는 자로 판명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지 아니하셨을 터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가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깨달음)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체 가운데서 부활하셨기에, 주님을 믿는 모든 자들도 부활의 영광을 맞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부활의 실체가 없었다면,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불쌍한 자였을 것이란 뜻이죠.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부활하셨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행복한 자라는 것입니다.
(예화)언젠가 인도의 성자 썬다씽(1893-1929?)에 관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구도심이 남달랐던 썬다씽은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여러 종교의 경전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참 신이 누군지 알 수 없어 번민하다가 결국은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04년 12월 18일, 그날 새벽 3시에 일어나 목욕재개를 하고 참 신을 만나고자 기도했죠.
하지만 정한 시간이 돼도 참 신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 시각이 새벽 4시 30분이었습니다.
그때 집 앞으로 자나 가는 5시 기차 철로에 자기 몸을 던져 자살하러 나가는 순간이었죠.
그 순간 자기 방에 큰 빛 가운데 나타나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계신 분이구나”
(깨달음)그때 주님을 만난 이후에 그는 전통 힌두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완전히 개종을 했습니다.
그 후 인도와 영국과 미국에까지 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러 다니면서 생을 마친 인물이 되었습니다.
(적용)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도 주님의 부활하신 은총이 충만하길 축복합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을 심령속에 모시고 성령님과 동행할 때 이 세상 어떤 상황속에서도 이기게 하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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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오늘 읽은 본문은 그 이후의 상황을 전해주는 말씀인데 본문 6-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원해)동굴 무덤을 찾은 세 여인들은 이미 동굴 무덤 문이 열려 있는 것과 그 옆에 로마 군사가 벌벌 떨고 있는 모습 앞에 깜짝 놀랐죠.
그러자 천사가 그녀들에게 말했죠.
지난 시간 살펴본 대로 “그가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느니라”하고 말이죠.
예수님의 부활은 우연이 된 일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요나서와 호세아서의 말씀의 예표대로 성취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신약성경에 예수님께서 살아생전 십자가와 부활을 네 차례나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하신 그대로 성취된 일이라는 것이죠.
그만큼 예수님께서 말씀대로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분이라면 그분의 재림도 약속대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믿게 되는 거죠.
더욱이 심은대로 거두게 하신다고 약속하듯이 우리가 이 땅에 심은 대로 주님의 재림때에 상급을 베푸시는 주님도 믿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천사가 이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갈릴리로 가시나니”
시체 가운데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보다 갈릴리로 먼저 가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10절에서는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도록 당부하죠.
과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말 ‘갈릴리’로 번역된 헬라어 ‘갈릴래이아’(Γαλιλαία)는 히브리어 ‘갈릴리’(גָּלִיל)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 뜻은 ‘원’ 또는 ‘고리’를 뜻하는 말이죠.
‘원’은 뭔가 하나를 뜻하고, ‘고리’는 뭔가를 연결하는 걸 말하죠.
갈릴리는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만난 첫사랑의 감격이 있는 곳입니다.
갈릴리는 스승과 제자들이 하나님나라를 향해 구심점을 형성하는 곳입니다.
갈릴리는 구원의 주님을 중심으로 제자들끼리 서로 믿음의 고리를 형성한 곳입니다.
그만큼 갈릴리는 고기잡는 어부의 삶에서 사람 낚는 어부의 삶으로 소명받은 곳입니다.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 때에는 예수님께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신 곳도 갈릴리입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에 가서 다시 만나자고 한 것입니까?
지금 예루살렘에 올라와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제자들에게 다시금 첫사랑의 감격을 불러일으키고자 갈릴리로 부른 것이죠.
그들의 삶의 구심점이 그들 자신에게 있거나 이 세상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있다는 것을 깨닫도록 갈릴리로 부른 것이죠.
그들은 이 세상에 부름받은 주님의 일꾼들로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고리로 엮여 있다는 것을 재확인시켜주고자 말입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고기잡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것처럼, 그 소명을 다시금 확인시켜주고자 말이죠.
예배당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진리를 깨달았다면 그것을 갈릴리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자라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도록 말이죠.
(주문)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인생의 참된 목적과 사명을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부어주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을까요?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불자들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했듯이 참된 신앙인의 가치도 삶 속에 드러나는 것 아니겠느냐?”
“그토록 살아 있는 신을 만나고자 한 썬다씽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에 인도와 영국과 미국까지 가서 전하고자 한 바도 그것이지 않겠느냐?”
“부활하신 주님을 대신해 천사들이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한 이유도 그것이지 않느냐?”
“갈릴리는 제자들이 구원의 주님을 만난 첫사랑의 감격이 있는 곳으로 삶의 현장에 그 감격을 잃지 말고 회복하도록 말이다.”
“갈릴리는 이 세상의 것들로 연결된 고리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 안에서 참된 믿음으로 연결된 고리라는 걸 깨닫도록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제자들처럼 이 세상의 것에 실패와 좌절을 맛보았다면 주님을 만난 첫사랑의 감격안에서 다시 회복하길 원치 않겠느냐?”
“제자들처럼 이 세상 것만을 연결고리를 삼아왔다면 이제는 부활하신 주님을 원점으로 참된 믿음의 고리를 엮길 원치 않겠느냐?”
“갈릴리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되고 사람낚는 어부로 인생을 바꿔주셨듯이 네 인생도 주님 안에서 새로워지길 원치 않겠느냐?”
“예배당 안에서 네게 진리를 깨닫게 해 주셨다면 예배당 밖 일터의 현장 곳곳에서 주님의 진리를 실천하는 제자로 너를 갈릴리로 부르신 것 아니겠느냐?”
(찬양)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은 시몬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시몬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주님은 여인에게 물으셨네
사랑하는 여인아 넌 날 사랑하느냐
오 주님 당신만이 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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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선다씽이 동료 수사와 함께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다른 수도원을 찾아갈 때였죠.
히말라야는 높고 험한 지역일뿐만 아니라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라 길을 가기가 무척이나 어려웠죠.
거기다가 추운 겨울철이요 날까지 빨리 저물었습니다.
“이거 큰일 났구려. 우리가 찾아가는 수도원까지는 아직도 길이 먼데 날까지 어두우니 서둘러 길을 가야겠습니다.”
동료 수사가 선다씽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가는 길 앞에 무언가 보였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먼저 길을 가다가 쓰러진 사람이었습니다.
“여기 사람 하나가 쓰러져 있구려. 우리가 일으켜 함께 갑시다.”
“몸이 따스한 것을 보니 아직 숨이 넘어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선다 싱이 동료 수사에게 그렇게 말하자 동료 수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우리도 가기 힘든 길인데 어떻게 이 사람까지 데리고 가겠단 말이오?”
그러면서 동료 수사는 불평을 했고, 선다씽보다 먼저 길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선다 씽은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그를 부축하며 길을 걸었습니다.
온몸에 땀이 흐르고 힘이 들었지만 계속해서 그렇게 갔습니다.
이윽고 쓰러졌던 사람도 기운을 차리고 함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외롭지 않게 그 길을 갈 수 있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던 그들의 눈 앞에 하얀 불빛이 보였습니다.
“저기 좀 보시오. 우리가 찾아가는 수도원의 불빛이 보입니다. 이제 우리는 살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갔는데, 그들이 가는 발 앞에 무언가 놓여 있는 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길을 가다가 스러진 사람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 그 사람을 살펴봤습니다.
“아니, 이 사람은 우리보다 먼저 떠난 그 수사님이 아니오!”
선다 씽의 입에서 한숨 섞인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혼자서 살겠다고 먼저 그 길을 떠났던 그 수사는 저체온증에 걸려 그만 길에 쓰러져 죽고 만 것이었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하신 것은 뭔가 거창한 선교사가 되라거나 전도자가 되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함께 숨 쉬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따뜻한 동행자가 되어 살라는 것이죠.
혼밥족도 늘고 혼술족도 늘고 있는 시대지만 그 속에서도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나누고 위로하는 삶의 고리를 엮어나간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우리 시대에 또다른 갈릴리로 부르신 주님의 뜻이지 않겠습니까?
(내음성)그렇기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선다씽처럼 주님의 사랑과 주님의 생명을 나누는 자로 살게 해 주세요.”
“예루살렘이라는 성공을 꿈꾼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갈릴리로 부르셔서 어떤 고리를 엮어가야 할지 일깨워주신 주님.”
“선다씽은 길을 잃고 눈 밭에 쓰러진 그 사람을 생명의 고리로 엮어 함께 나아갔습니다.”
“주님. 저도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저를 이 시대의 갈릴리로 부르신 삶의 현장을 늘 생각하며 살게 해 주세요.”
“제 삶의 현장을 우리 시대의 갈릴리로 부르신 주님의 뜻을 받들며 그곳에서 주님의 생명과 사랑의 고리를 엮어나가는 성령충만한 자로 살게 해주세요.”
“갈릴리의 현장에서 고난도 쓴맛도 보겠지만 언제나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승리할 수 있도록 역사해주세요.”
(찬양)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믿음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쇠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믿음으로 믿음으로 내가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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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세상의 연결고리로 성공을 꿈꿨지만 그것이 참된 인생의 목적이 아님을 바르게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실패와 좌절을 겪었어도 그곳 갈릴리에서 주님의 첫사랑을 회복하고 주님께서 부여받은 사명도 다시금 회복토록 위함이셨습니다.
참된 믿음의 삶은, 성령충만한 제자는 예배당 안에서 깨달은 진리와 생명을 갈릴리의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는 신앙인임을 일깨워주고자 함이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 우리 심령가운데 친히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너는 네 삶의 현장인 갈릴리에서 나의 참된 제자로, 나의 참된 자녀로 주님의 부활하심을 드러내며 섬김의 삶을 살고 있느냐?
너의 현장 속에 부르신 그곳 갈릴리에서 참된 믿음의 고리를 엮어나가며 그곳을 삶의 선교지로 살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 있느냐?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시대의 갈릴리 곳곳으로 부르신 주님의 제자답게 참된 믿음의 고리를 엮어나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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