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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성화)모세오경 중 네 번째 책인 민수기(民數記)는 한자로 ‘백성들의 수를 기록한 책’입니다.
광야 38년을 행진하는데 출발지점에서 한 번 수를 헤아리고 또 마지막에 그 백성의 수를 헤아린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민수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민수기 1장 1절에 나오는 ‘광야에서’라는 말로 ‘베미드바르’(בְּמִדְבַּר)가 제목입니다.
광야에서 38년간 헤쳐나올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록한 책이 ‘베미드바르’ 곧 민수기입니다.
민수기 1장을 보면 광야행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수를 헤아리는데 여자와 아이를 빼고 60만3천5백50명이나 됐죠.
광야 행진을 끝내고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 다시금 그 총수를 헤아리게 했죠.
그때의 총수는 60만1천7백30명이었죠(민26:51).
각 지파별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음행에 빠트린 시므온 지파만 줄어들었을 뿐 나머지 지파는 처음이나 나중에나 크게 달라진 게 없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행진이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광야란 물도 없고 풀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사막이었죠.
그러니 광야를 행진하자마자 잡족이 불평했고, 미리암과 아론도 모세를 비방했고, 가나안 정탐꾼 12명 중 10명이 불평했죠.
더욱이 레위 자손 중에 고라가 주동해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 250명을 부추겨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죠.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당신의 방법으로 그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을 잠재워주셨죠.
그러니 모세가 남자 장정만 60만 3천550명, 여자와 아이들까지 300만명에 달하는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를 헤쳐나가는 건 쉬운 게 아니죠.
그야말로 무거운 짐과 같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모세가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헤쳐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죠.
하지만 그렇게도 잘 헤쳐나온 모세가 한 번의 실수로 인해 그토록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일이 있었죠.
그때의 상황에 대해 민수기 20장 1-12절은 그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압축해서 읽어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달에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백성이 가데스에 이르더니 미리암이 거기서 죽으매 거기에 장사되니라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20:1-12)
처음 광야를 출발해 르비딤에 당도했을 때 마실 물이 없자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 원망하고 불평했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치라고 하셨고(민17:1), 그 반석을 치자 물이 콸콸 쏟아졌죠.
그런 일들이 광야 행진하는 과정 속에서 어디 한 두 번 은혜를 베푼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38년 광야행진을 마치고 가나안 땅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 백성들이 마실 물 때문에 다시금 불평하는 것이었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반석을 향해 ‘물을 내라’고 명령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반석을 향해 명령하는 게 아니라 그 반석을 두 번이나 쳤던 것이죠.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우선 그때의 상황은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죽은 상황이었습니다.
자기가 갓난이였을 때 갈대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띄워보냈는데 그런 자신을 지켜봐주던 그 누이 미리암이 죽은 것이죠.
그 누이 미리암이 한 때 아론과 함께 자신에게 반기를 들다가 문둥병에 걸리긴 했지만 광야 38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했죠.
그런 누이 미리암이 죽었으니 얼마나 비통할지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죠.
바로 그런 상황인데도 백성들은 당장 시급한 물 문제 때문에 모세를 향해 원망하고 불평을 터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세는 너무나도 괴로운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자기 화를 못 이겨 지팡이를 들고 반석을 친 것이었죠.
그런데 그 물이 아이들이나 받아 먹을 정도로 졸졸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이번에는 자기 과시용의 차원에서 ‘봐라’하면서 지팡이를 들어 한 번 더 반석을 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제가 지어낸 게 아니라 유대인들의 성경 주석서인 미드라쉬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관계로 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하고 말씀한 거죠.
바로 그 일 때문에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깨달음)그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일에는 인간의 개인적인 상황이나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리암이 죽어서 모세가 너무 괴롭고 힘든 상황이지만 반석을 향해 명령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게 하는 일에는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모세는 자기감정에 복받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 채 지팡이로 반석을 치고 만 것이었죠.
그리고서는 물이 졸졸졸 나왔다면, 그때서라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석을 향해 명령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됐겠죠.
하지만 그때는 자기 과시용으로 백성들 앞에 ‘봐라’하면서 반석을 한 번 크게 내리친 것이었죠.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셔야 할 일을 모세가 가로 막은 채 자기 감정, 자기 영광을 취하려던 꼴이었죠.
(적용)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은 과연 이런 일들이 없을까요?
하나님께서 내게 뭔가를 말씀하시고 감동을 주셨는데, 그 일로 영광을 받고자 하시는데, 내 형편과 감정 때문에 그 일을 그르친 경우 말입니다.
‘내가 처한 상황도 복잡하고 내 감정이나 기분이 좋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그걸 원하시나요?’
‘지금은 그렇게 할 상황이 안 되는데요?’
‘내가 바쁘고 기분도 좋지 않은데, 왜 그걸 하라고 하시나요?’
‘차라리 내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할께요.’
그런데 그것이 지나고 보면 하나님의 영광과 무관한 내 자랑, 내 과시로 끝난 경우가 있다는 것이죠.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광받고자 하시는 일에 때로 걸림돌 작용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사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한 번 더 깊이 생각하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십자가의 길을 좇을 수 있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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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예수님께서는 30살 전까지 가정에 충실했습니다.
이른 나이에 돌아가신 아버지 요셉을 대신해 어머니와 네 명의 남동생 그리고 두 명의 여동생을 돌보며 살았죠.
그를 위해 목수로서 일을 하며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한 가정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친히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삶 속에 오신 것이었죠.
예수님께서 30살에 가정과 집을 박차고 하나님나라의 일 곧 공적인 사역을 위해 길을 나선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때로부터’ 예수님께서 갈릴리 나사렛 동네를 박차고 더 많은 갈릴리 지역을 돌며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회복케 하신 것이었죠.
그것이 12명의 제자를 불러 천국복음을 가르친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3년간 공생애 삶, 곧 하나님나라를 전파하신 삶을 산 이후에 드디어 새로운 결단을 하셨죠.
‘그때로부터’ 갈릴리 지역의 공생애 삶을 마감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신 게 그것이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이 왕의 자리로 올라가신 줄 생각했죠.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종려가지를 꺾어 열광하던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도 다르지 않았죠.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영의정 좌의정 자리 하나쯤은 따 놓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지난 시간에 살펴 본 것처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기 위함이셨죠.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고 죽으셔야 죄값으로 물든 인류가 대속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죽음을 위해 올라가신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예수님의 그 모습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바가 무엇이었습니까?
전혀 생각지 못한 자리에 나를 올려주시는 은혜를 베풀 때 그것은 나의 성공과 출세를 위함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더욱더 십자가를 짊어지며 살라는 뜻이었죠.
말단 직원에서 중견 간부의 자리나 회사 대표의 자리를 주시는 것은 그 자리를 통해 더많은 권세와 출세의 발판으로 삼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 말이죠.
주님께서 걸어가신 발자취처럼 그 자리에 올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받들어 더 많은 이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섬김의 삶을 베풀도록 말이죠.
(본문)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밝힐 때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여주는지 알려주는 말씀이죠.
본문 2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원해)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고 삼일에 살아날 것을 천명하셨죠.
그것이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의 삶을 정리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진정한 목적이자 예수님의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3일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은 듣지 못한 채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만 크게 들은 것이었죠.
그런 고난이나 십자가에 죽으심 없이도 3년간 보여주신 기적과 능력이면 충분히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으로 권좌에 오를 수 있지 않냐는 뜻이었죠.
그 까닭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붙들다’는 헬라어 ‘프로스람바노’(προσλαμβάνω)는 두 단어가 결합된 말입니다.
‘~을 향하여’ ‘~가까이’를 뜻하는 ‘프로스’(πρός)와 ‘취하다’ ‘잡다’는 뜻의 ‘람바노’(λαμβάνω)가 결합된 것이죠.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었다는 것은 멱살을 잡은 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로 데리고 왔다’(take aside)는 말입니다.
이 단어가 사도행전 18장 26절에도 쓰인 바가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대학자인 아볼로가 에베소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만 세례 요한이 전한 복음만 전한 것이죠.
그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아볼로를 ‘자기들에게 데리로 가서’(προσλαμβάνω) 더 정확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우치게 해 줬습니다.
바로 그 모습처럼 베드로도 예수님을 자기 자신에게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그 모습을 가리켜 ‘붙들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죠.
(원해2)그리고 ‘항변하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피티마오’(ἐπιτιμάω)입니다.
이 단어는 ‘비난하다’ ‘책망하다’ ‘꾸짖다’ 등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다를 잠잠하라 하면서 ‘꾸짖을 때’(마8:26), 병든 자를 고친 후 자신을 알리지 말라 ‘경고할 때’(마12:16), 귀신을 향해 나가라고 ‘꾸짖을 때’(마17:18) 사용된 단어죠.
(깨달음)그러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고 3일만에 살아날 것을 말씀할 때 베드로가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 알 수 있죠.
베드로는 예수님께 다가가 조용히 데리고 나가서 꾸짖고 책망하듯이 몰아부친 것이었습니다.
“주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설령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저희들이 막을 것이니, 주님께는 그런 일이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이죠.
그것은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런데 왜 베드로는 그런 행동을 보였던 것일까요?
예수님의 안위를 걱정해서 그렇게 꾸짖듯이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하고 말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ㄴ다.
좀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곧 구원자로 고백했던 베드로였지만 지극히 정치적인 메시아로 믿었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그런 정치적인 메시아가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은 상상할수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절대 안된다고, 그런 일을 겪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꾸짖듯이 말한 것이었습니다.
(적용)이런 모습을 통해 깨닫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받고 십자가에 죽고 3일만에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죠.
그런데 베드로는 그 일을 못하도록, 아니 그 일을 겪지 않도록 자신들이 막아서겠다고 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마치 모세에게 반석을 향해 명령해서 생수를 공급하도록 해라, 하고 했지만 모세가 자기 감정에 치우쳐 반석을 친 것과 같은 격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려는 예수님의 길을 방해하며 자기 감정만 내세우고 있는 꼴이니 말이죠.
베드로가 이렇게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길을 막아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만 왕의 왕의 자리에 오를 것을 내다보고, 자신들도 한 자리쯤 차지할 수 있는데, 지금 그 길을 걷어차버리겠다는 것이니, 막아서는 것이죠.
그 일이 어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일 수 있겠습니까?
오직 자기 영광, 인간의 영광만 취하려고 하는 모습일 뿐이죠.
(주문)그렇기에 사순절 셋째 주일인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이라면 막아서지 말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영광을 돌리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모세에게 반석을 향해 명령하라고 한 것 아니었더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 아니었더냐?”
“그런데도 모세는 미리암이 죽은 상황에서 백성들이 물이 없다고 원망할 때 자기 감정에 복받쳐 반석을 친 것 아니더냐?”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 죽음의 길을 걷겠다는 예수님의 뜻을 꺾고자 옆으로 데리고 가서 책망하고 비난한 것 아니더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인데도 인간은 그처럼 자기 상황과 자기 감정과 자기 욕심 때문에 십자가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 아니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을 위해 너에게 십자가의 길을 원할 때 네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너의 상황이나 너의 감정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에 먼저 순종하여 십자가를 짊어지는 걸 하나님께서 원치 않겠느냐?”
“그 일에 네 이름값이 드러나지 않고 네 영광이 나타나지 않아도,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면 더욱 순종하는 걸 기뻐하지 않겠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이라면 모세나 베드로처럼 자기감정이나 기분대로 가로막지 말고 주님의 기쁨을 바라보고 순종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의 감정보다도 세상 영광보다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순종하고 헌신하는 너를 주님의 기쁨으로 삼지 않겠느냐?”
(찬양)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하소서
새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되는 것
내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것
겸손히 내 마음을 드립니다 나의 모든것 받으소서
나의 맘 깨끗게 싰어 주사 주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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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옛날 임금이 타는 당나귀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임금이 당나귀를 타고 나라를 한 바퀴 순찰하면 온 국민이 나와서 왕에게 환호하고 박수갈채를 보내는 것이었죠.
임금을 등에 태운 나귀는 왕을 태운 역할에 걸맞게 온갖 아름다운 장식을 해서 멋지게 보였습니다.
그러니 온 국민은 왕과 함께 그 나귀를 향해서도 찬사와 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갈채와 환호에 고무된 그 나귀는 어느 날 왕을 땅에다 내동댕이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유인즉 온 국민의 갈채와 환호를 혼자 독차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귀는 왕이 없으면 그 모든 환호와 갈채를 자신이 모두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귀가 왕을 땅에다 내동댕이치는 순간 그 나귀에게는 참수형이 내려졌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존귀 아래 거할때에만 영광을 누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영광을 누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의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해 하나님을 떠나면 하늘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죠.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내 삶의 자리에 그 어떤 하나님의 존귀나 영광이 깃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화2)창세기와 존 밀턴의 〈실락원〉에 근거해 작곡한 ‘천지창조’가 비엔나에서 공연되던 날이었습니다.
‘천지창조’가 공연될 때 그 곡을 쓴 하이든은 몸이 아파 휠체어에 앉아 있었죠.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이 일어서서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지휘자는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하이든을 가리켰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저기 저 위에 있는 저분입니다.”
“저 분이 이토록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다시 고개를 돌려 휠체어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바라보며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자 하이든은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이렇게 말을 했죠.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이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깨달음)하이든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천지창조라는 그 큰 곡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말이죠.
그 까닭에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할 영광을 자신이 독차지 하지 않고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래요, 주님. 저도 그런 당나귀로 살지 않게 해 주세요.”
“임금님이 영광을 받기 때문에 그 당나귀도 환호와 갈채를 받는 것인데도 그걸 독차지하고자 임금님을 땅바닦에 내동댕이 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해주세요.”
“자기 실력으로는 그 위해한 천지창조라는 곡을 쓸 수 없었던 하이든이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듯이 저도 그런 자세로 살게 해주세요.”
“어떤 경우에도 모세처럼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이라면 제 상황이나 감정이 어떻든지 간에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며 살게 해 주세요.”
“그리하여 매순간 순간 주님의 기쁨이 되어 살게 해주세요.”
(찬양)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내 마음을 새롭게하소서
새부대가 되게 하여 주사 주님의 빛 비추게 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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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없는 성도의 영광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땅의 영광을 취하면 취할수록 하나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 수 밖에 없는 존재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이라면 모세나 베드로처럼 내 감정이나 내 상황보다도 오직 십자가의 길을 좇아 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에 십자가를 지고 사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늘의 영광으로 가득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나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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