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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화니 제인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는 미국의 위대한 여류 찬송작가입니다.
미국 사람들에게 미국 기독교사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빠지지 않은 인물이죠.
그의 영향력은 지금도 미국 교회와 세계교회 가운데 살아 있는 전설과 같은 사람이죠.
화니 크로스비는 뉴욕의 작은 마을 ‘푸트남’이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눈에 이물질이 끼고 충혈이 되어 의사에게 보였죠.
그런데 그 의사가 돌팔이였던 것입니다.
갓 태어난 화니 크로스피의 눈에 ‘겨자습포제’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녀는 맹인이 되고 말았죠.
태어난 지 6주 만에 일어난 비극적인 의료사고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 ‘존 크로스비’가 죽게 됩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21살에 과부로 생계를 위해 가정부로 취직을 하면서 화니 크로스비를 외할머니 손에 맡기죠.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마저 일을 해야 해서 어머니와 떨어져 산다는 것은 너무나도 불행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화니 크로스비는 다행히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신실한 신앙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녀의 나이 30세였습니다.
어느 날 교회의 집회에 참석해서 찬송가를 부르는데 그때 주님께서 그녀에게 찾아왔습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그 찬송가를 부르는데 그때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파고든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날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믿어지기 시작한 것이었죠.
그야말로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영의 눈이 그때 비로소 열린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어두운 과거, 괴롭고 답답했던 그 모든 과거를 씻겨주시고 주님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찬송가 가사처럼 “이 몸 밖에 바칠 것 없어 이 몸 드립니다.”하는 고백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때 그녀는 생각하게 되었죠?
“내가 주님께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걸 깨달았죠.
그리고 그때부터 95세가 되기까지 무려 8,000곡 이상의 찬송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도 그녀가 쓴 곡이 20여 편이 들어 있습니다.
“나의 생명 되신 주”,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하는 찬송들이죠.
그중에 384장은 우리가 익히 아는 찬송입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깨달음)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구약의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이렇게 직접 밝히셨죠.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는 것.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려는 것.
눈 먼 자에게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것.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은혜를 누리도록 하시는 것이라고 밝힌 것이죠.
태어난 지 6주만에 소경이 된 크로스비가 30살 때까지 얼마나 암울한 나날을 보냈겠습니까?
의사의 실수로 멀쩡한 눈이 보이지 않았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웠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날 주님께서 그녀에게 찾아와주시고 그녀에게 영안의 눈을 열어주셨을 때, 그녀는 주님 안에서 새로운 눈을 갖게 된 것이죠.
그야말로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해 주시는, 영원한 생명에 눈을 뜨게 해 주신 주님의 은혜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적용)바로 이것이 복음 아니겠습니까?
눈 먼 자가 삶의 의미를 찾고 영원한 생명에 눈을 뜨게 된 것, 바로 그것이 복된 소식이요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것 아닙니까?
이 땅의 사람들에게 생명의 눈을 뜰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함 말입니다.
맹인이 보게 되고, 앉은뱅이가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케되고, 소경이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도 복음 중의 복음이죠.
그런데 그런 육신적인 회복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 것만큼 더욱 복된 복음의 소식은 없다는 것입니다(마11:5).
눈을 뜨고 살아도 영생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한 자가 있다면 가장 불행한 자겠죠.
잘 걷고 있어도 영적인 앉은뱅이로 살아가는 자가 있다면 그보다 더 불쌍한 자는 없을 것입니다.
피부가 깨끗해도 온통 죄악을 뒤집어 쓰고 살아간다면 그 영혼보다 불행한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멀쩡하게 살아 있어도 그 영혼이 죽은 자처럼 사탄의 세력에 붙잡혀 살아가고 있다면 그보다 더 불쌍한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눈을 뜨고 사는 자가 있다면 그가 바로 행복한 자인 줄 믿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는 성탄절 날에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포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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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배)주전 800년 전,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 땅의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통해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약에 예언된 말씀이 신약에 그대로 성취된 것처럼, 신약에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도 때가 되면 성취된다는 걸 기억하며 살라는 뜻이죠.
우리가 지금 4주째 살펴본 말씀은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맨 먼저 듣게 된 이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전해주도록 한 사람들이 누굽니까?
그들은 바로 밤 중에 양들을 지키고 돌보던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양과 함께 살기 때문에 냄새나는 삶을 살았고, 안식일도 지키지 못한 자들이라 율법에 죄인취급받았죠.
더욱이 주인의 양도 몇 마리 빼돌리고 있었고, 양이 새끼를 날 때도 몇 마리 쯤은 빼돌렸던 고용된 목자, 삯꾼 목자들이었죠.
그런 삶을 산 그 당시의 고용된 목자들, 그 삯을 받고 양을 치던 삯꾼 목자들은 그 당시 세리와 창녀쳐렴 부정한 자로 외면받았죠.
왜 하나님께서는 냄새나고, 더럽고, 부정당하고, 죄인 취급받던 그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소식을 맨 먼저 알려주신 겁니까?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기 위함이시죠.
율법을 잘 지키는 자들로 치자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맨 먼저 그 소식을 알려줘야 했겠죠.
안식일을 잘 지키는 자들로 치자면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에게 그 소식을 맨 먼저 알리도록 해야 했겠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의로움, 자기 율법의 행위를 내세우고 자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임을 아는 자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소식을 맨 먼저 알려주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죠.
우리 주님께서는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들, 스스로 연약한 자임을 고백하며 사는 자들을 찾아와주시고 만나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높은 데 있는 게 아니라 지극히 낮은 자의 마음에 함께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시선은 왕궁이나 고관대적에게 쏠리는 게 아니라 그 밤의 목자들처럼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며 사는 자들에에게 가 있는 줄 믿습니다.
그 목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비췄을 때, 그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습니다.
그들이 벌벌 떤 것은 스스로의 죄를 인식하는 모습입니다.
마치 유월절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와 좌우 인방에 바를 때 혹시라도 우리도 애굽 사람들처럼 죽임당하는 것 아니냐, 하며 두려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처럼 말이죠.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하늘의 나팔소리와 우레소리와 천둥소리가 날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 벌벌 떨면서 땅바닥에 엎드렸던 것처럼 말이죠.
이사야가 성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천군 천사로 임재하실 때 자신의 죄를 보면서 “화로다. 나는 죽게 되었구나.”하고 벌벌 떨었던 것처럼 말이죠.
거룩하신 하나님, 빛되신 하나님 앞에, 그 어떤 인간도 자기 의로움을 내세울 수 없기에, 목자들도 두려움에 벌벌 떤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첫 관문이죠.
그것이 자신이 죄임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중생의 과정이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의롭다하심을 얻는 성화의 첫 관문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두려움에 벌벌 떨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말했죠.
“무서워하지 말라. 보래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하고 말이죠.
아기 예수의 탄생이 그들에게 왜 큰 기쁨의 소식이라는 것입니까?
너희들의 세상에 냄새나고 죄인취급받지만, 가장 낮고 천한 삶을 살지만, 너희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 소식이기에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이라는 것이죠.
이 세상에 들려오는 소식들은 다 상대적인 소식이죠.
누군가 시험에 합격했다면 다른 누군가는 그 시험에 떨어졌다는 소식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취업에 합격했다면 또 다른 누군가는 그 취헙에 떨어졌다는 소식이죠.
누군가 결혼했다면 누군가는 아직 결혼하지 못해 초초해지는 상황입니다.
그 당시 목자들 사이에 좋은 소식이라면 양떼를 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리나 하이에나에게 양이 물어뜯기지 않았다는 소식이겠죠.
그러나 그 밤에 또 다른 목자들은 이리나 하이에나에게 물어 뜯겼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더욱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 몇 마리 양을 빼돌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누군가는 기뻐하겠지만 양심상 그렇지 못한 목자들은 씁쓸해할 수도 있는 소식이죠.
그렇듯 그 목자들 사이에서도 기쁜 소식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쁘지 못한 소식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은 결코 상대적인 기쁨의 소식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쁨의 소식이라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 모든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오늘 본문은 그 이후에 천사가 전해주는 말씀인데, 본문 1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여기에 ‘오늘’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세메론’(σήμερον)으로 ‘그 일이 일어난 그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왜 굳이 오늘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이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할 때,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다스릴 때라는 거죠.
그만큼 예수님의 탄생은 신화 속에 나오는 전설적인 사건이 아니라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복음의 주인공이신 아기 예수님에 대해 세 가지 명칭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구주’, ‘그리스도’, 그리고 ‘주’라는 단어가 그것이죠.
‘구주’란 헬라어로 ‘소테르’(σωτήρ)로 ‘구원자’(saviour)를 뜻하는 말입니다.
구원자란 모든 문제, 모든 질병, 모든 고통, 모든 근심, 모든 위험에서 구원할 수 있는 분을 말하는 것이죠.
물론 사람마다 문제나 질병이나 고통이나 근심이나 위험이 다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통된 분모 곧 죄에 대한 문제는 모두가 빗겨갈 수가 없죠.
바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류가 안고 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헬라어로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 곧 ‘기름부은 받은 자’(anointed)라는 뜻입니다.
헬라어 ‘그리스도’를 히브리어로는 ‘메시야’라고 하죠.
구약시대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장차 메시아가 와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것이라고 예언했죠.
신약성경은 예수님이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분을 동시에 지닌 그리스도로 오신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됫히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대제사장이 되시고, 머잖아 다시 오셔서 구원할 선지자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퀴리오스’(κύριος)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호칭은 ‘하나님’(Lord)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성경에 이 단어는 대문자 ‘Lord’로 표기를 하죠.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은 분명히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죠.
(깨달음)그렇다면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 기름부음받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이 왜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까?
그들 모두가 유대인들로부터 냄새나는 사람들, 부정한 사람들,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었던 사람들이죠.
그런 그들에게 구원자가 오셨다니, 메시아가 오셨다니, 그 하나님께서 오셨다니, 그들에게 큰 구원의 기쁜소식일 수밖에 없죠.
물론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그들에게만 구원의 큰 기쁜 소식이겠습니까?
그때까지 죄인취급받고 있던 세리나 창녀들에게도 마찬가지죠.
그때까지 문제를 안고 있는 이들, 질병속에 있는 자들, 고통과 근심과 위험 속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구요.
내 스스로 힘이나 능력이나 세상 권세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분은 오직 구원자요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30살때까지 소경으로 살던 크로스비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와 품어주셨을 때, 그녀의 질병과 고통과 근심과 모든 위험들도 다 사라졌으니 말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성탄절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구원자요 메시야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죄와 질병과 고통과 근심과 위험의 모든 문제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에게 친히 주님께서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예수님의 탄생이 왜 그 밤의 목자들에게 가장 큰 기쁨의 구원의 소식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세상에서 냄새나고 부정당하고 죄인취급받는 그들의 죄와 질병과 고통과 근심과 위험의 문제를 그 분이 해결해주시기 때문이지 않느냐?”
“태어난지 6주만에 눈을 잃게 된 크로스비도 30살이 되었을 때 구원자요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을 만나 영생에 눈을 떴으니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에 있겠느냐?”
“예수님의 탄생이 왜 인류에게 기쁨이 되는지 이제는 알 수 있지 않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너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너의 질병과 고통과 근심과 위험의 문제들을 구원자요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께 내어놓지 않겠느냐?”
“세상에서 냄내나고 더럽다고 부정당하고 외면받던 그 목자들도 세상에서는 버림받았지만 예수님안에서 새 생명과 자유함을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크로스비도 30살이 되기까지 눈이 않보이는 것 때문에 조롱당하고 무시당하며 고통속에 허우적거렸지만 예수님 안에서 영생과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았더냐?”
“오늘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통해 너에게도 진정으로 영생의 은혜의 참된 자유의 기쁨이 충만하길 원하지 않겠느냐?”
(찬양)1.거룩한 밤 하늘의 큰 별이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큰 기쁨의 소식을 전했네 온세상 알도록
2.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 탄생했으니 가장 큰 왕이 나셨다네 예수는 만왕의 왕
3.그의 강한 능력의 손길이 병든자 가난한 자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시네 그분은 평강의 왕
4.온세상 통치할 메시아 주께서 오늘 주 다스리니 그나라 영원하리라 왕께 경배하세
후렴) 왕이 나셨다 이 땅을 구원하실 왕 만백성들아 기뻐하라 우리의 왕이 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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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에 파파파노라는 착하고 성실한 구두 수선공 할아버지가 살았습니다.
이 할아버지에게 어느 성탄 전날 밤 꿈에 예수님께서 찾아와 말했습니다.
“내일 성탄절 날 너를 방문하고자 한다”하고 말이죠.
할아버지가 잠에서 깼을 때는 눈 속에서 솟아오르는 찬란한 태양이 밝게 비쳤습니다.
할아버지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성탄절에 특별히 쓰는 커피 주전자를 난로 위에 올려놓고 청소도 깨끗이 했죠.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거리의 청소부만 보이는 것이었죠.
할아버지는 그 청소부를 향해 말했습니다.
“이리 들어와요. 추운데 몸이나 녹이고 커피라도 드세요.”하고 말이죠.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예수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신 한 누더기 옷을 입은 여인이 홑이불에 어린 아이를 싸 들고 걸어오고 있었죠.
할아버지는 그 여인을 측은하게 여겨 가게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빨갛고 시퍼렇게 얼어 있는 아기의 발을 할아버지는 보게 됐죠.
할아버지는 그 아기에게 신발을 신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밤에 봤던 조그만한 신발을 신겨 보았죠.
신기하게도 꼭 맞았습니다.
아기와 그 엄마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고 그 할아버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떠났죠.
어느덧 저녁 기운이 그 마을에 몰려왔습니다.
그때까지도 예수님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저녁 준비를 위해 수프와 빵을 데웠습니다.
그때 한 할머니와 그 할머니의 과일을 훔쳐 달아나는 어린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죠.
할머니는 훔치고 달아나던 아이를 붙잡아 때리며 경찰서로 데리고 끌고 갔습니다.
그때 파파파노는 그 할머니에게 간청을 했습니다.
“그 아이가 배고 고파서 그런 짓을 했으니 용서해주세요. 내가 대신 과일 값을 지불하면 어떻겠소?”
파파파노 할아버지가 그렇게 나오자 그 할머니는 그 아이를 용서해줬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도 그 할머니에게 용서를 빌었죠.
어느새 그 할머니와 그 아이는 정답게 길 저쪽으로 함께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기다리던 예수님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결국 꿈이었단 말인가?”하고 홀로 말하던 그 할아버지는 실의에 빠졌습니다.
그때 “할아버지 나를 보셨지요”라고 하는 어젯밤 그 꿈속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어디에 계셨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나는 오늘 할아버지를 세 번이나 찾아갔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언제 오셨다는 것입니까? 저는 본 적이 없는데요.”
“한 번은 청소부로, 한 번은 아기를 안은 여인으로, 마지막에는 거지로 말예요.”
“아, 그랬군요.”
“할아버지가 나에게 베푼 따스한 사랑 정말로 고마웠어요.”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이야기 같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구원자로, 메시야로, 주인으로 오셨기에 오늘 우리들에까지도 구원의 은혜가 주어진 것이죠.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 살아가는 자, 바로 그것이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의 통로로 사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나를 구원하신 목적이요, 이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작은 예수로 살아가게 하신 예수님의 뜻이죠.
(내기도)그렇다면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사랑하시는 주님. 저도 죄의 문제, 질병의 문제, 고통의 문제, 고통과 근심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연약한 자예요.”
“그런 저에게 새생명의 은혜와 영생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고자 이 땅에 구원자로 메시야로 주인으로 태어나셨네요.”
“그 은혜를 누린 파파파노 할아버지가 청소부에게 아기를 안은 여인에게 거지에게 주님의 사랑을 나누었어요.”
“부족하고 연약한 저도 주님이 주신 생명을 누린 자답게 이 땅에 연약한 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자로 살게 해 주세요.”
“이 땅에 구원자요 메시아야 주인으로 오신 예수님을 일평생 제 심령에 모시고 살아가게 해 주세요”
(찬양)1.거룩한 밤 하늘의 큰 별이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큰 기쁨의 소식을 전했네 온세상 알도록
2.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님 탄생했으니 가장 큰 왕이 나셨다네 예수는 만왕의 왕
3.그의 강한 능력의 손길이 병든자 가난한 자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시네 그분은 평강의 왕
4.온세상 통치할 메시아 주께서 오늘 주 다스리니 그나라 영원하리라 왕께 경배하세
후렴) 왕이 나셨다 이 땅을 구원하실 왕 만백성들아 기뻐하라 우리의 왕이 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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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경배하는 성탄절입니다.
왜 우리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경배하는 것입니까?
그 분이 이 땅에 구원자로 메시야로 그리고 참된 주인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와 질병과 고통과 근심과 걱정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자유케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 은혜를 받은 자답게 이 시대에 작은 예수로서 나보다 더 연약한 자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생명을 전하는 주님의 통로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크로스비가 주님을 만나기까지 소경인 그녀를 돌봐주고 주님께 인도했던 그 할머니처럼 말입니다.
러시아에 살던 그 청소부에게 아기를 안은 그 어머니에게 남의 것을 훔쳐 달아나던 그 거지에게 사랑을 베푼 파파파노 할아버지처럼 말입니다.
바로 그 사랑과 긍휼을 베풀며 사는 자들에게 주님은 지금도 구원자로 메시야로 그리고 주인으로 친히 함께 해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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