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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유머)임금님의 개가 있었습니다.
이 개는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끄덕이는 것밖에 못했습니다.
임금님이 그 개에게 도리도리를 시키는 사람에게는 상금을 주겠다고 명을 내렸죠.
그러자 많은 인파가 상금을 얻기 위해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아있었습니다.
임금님이 그에게 물었죠.
“자네는 이 개를 도리도리하게 할 자신이 있는가?”
“물론이옵니다. 폐하.”
“자 어서 시작해보게.”
“예”
그러자 그 사람은 가방에서 벽돌을 꺼냈습니다.
그러더니 힘껏 개를 향해 내리쳤죠.
그러자 개는 깨갱하면서 임금님 뒤로 숨었습니다.
그런 뒤에 그 사람이 개에게 물었죠.
“너 나한테 또 맞을래?”
그때 그 개가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도리도리”
그런데 이 일이 있고 난 뒤 부작용이 일어났습니다.
그 개는 도리도리만 할 줄 알지 이제는 끄덕끄덕을 전혀 못하는 불구가 된 것입니다.
임금은 백성들을 향해 다시 명령을 내렸습니다.
개에게 끄덕끄덕 시키는 자에게는 도리도리 할때보다 더 후한 상금을 내리겠다고 말이죠.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지만 모두 헛수고였고, 드디어 도리도리시킨 그 남자가 나타났죠.
그는 그 개를 향해 한마디 내뱉고 엄청난 상금을 챙겨갔습니다.
대체 그가 그 개에게 어떤 말을 했을까요?
“너 나 알지?”
(논지)웃자고 한 이야기인데, 재밌지 않나요?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세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Money(돈), Fame(명성), 그리고 Fun(재미)죠.
이 세 가지 중에 Fun(재미)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 중요한 관심 사항입니다.
경성대학교 디지털미디어학부 김선진 교수가 쓴 <재미의 본질>이란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을 보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아마 한국 모대학교 바둑학과 학생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둑을 평생의 업으로 선택했는데, 그 분야에서 인공지능이 인간 최고수를 이기는 걸 보고 쇼크에 빠졌겠지요.
그런데 그때 학생의 말 한마디가 기억에 남아요.
‘알파고가 실력은 좋을지언정, 바둑 두는 즐거움과 행복은 모르잖아요.’
‘아무리 알파고가 바둑을 잘 둬도 나는 바둑을 계속할 것이다. 왜? 재미있으니까.’”
(깨달음)그 학생들의 말 속에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담겨 있다’는 점이죠.
그게 무엇입니까?
미래에 일하는 기준은 ‘재미’가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는 점이죠.
미래에는 인간이 재미를 못 느끼는 단순 반복적인 일은 기계가 대체를 하겠죠.
하지만 인간은 재미있다고 느끼는 일은 복잡하고 창의적인 일이라서 인공지능이 대신할 수 없다는 거죠.
(적용)그만큼 현대인들의 삶에서 재미와 기쁨은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들은 재미와 기쁨을 찾아 중년에 등산을 하거나 여행을 다니기도 하죠.
그래서 그런 인간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이 세상은 끊임없이 뭔가를 쏟아내죠.
온갖 상품과 전자 제품, 예쁜 옷들, 식당의 음식들, 방송계도, 인터넷도, 영화도, 대중매체도, 모두가 즐거움을 선사하고자 합니다.
할리우드 연예인들이 연말 시상식에서 누가 상을 받았는지, 스포츠계에서 누가 최고 스타로 뽑혔는지, 누가 주식에 대박이 났는지, 온갖 시시콜콜한 소식들을 전해주는 이유죠.
그런데 그런 재미와 기쁨을 얻는 사람들은 항상 소수에 불과합니다.
올해 누가 최고 수익을 올렸다고 하면 나머지는 사람들은 상실감을 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결혼할 거라고 소식을 전하면 결혼하지 못하는 친구들은 더욱 우울해지죠.
내가 아는 사람이 큰 집을 샀다고 하면 작은 집에 사는 사람들은 그만큼 힘이 빠지게 됩니다.
그만큼 이 세상의 재미와 기쁨은 모두가 상대적이고 물질적이고 일시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이 세상의 재미와 기쁨에 취하면 그걸 좇아 다느니라 더 피곤하고 허무하게 되죠.
그래서 연예인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큰 재미와 기쁨을 얻고자 술과 담배, 마약과 음란, 도박에 빠져 파멸하게 되죠.
그렇기에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기쁜 소식만이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기쁨을 주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하나님께서는 주전 800년 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셨습니다.
구약에 선포된 말씀이 성취된 것처럼, 신약에 선포된 예수님의 재림도 분명코 성취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3주째 살펴본 본문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알려주는 사람들이 나오죠.
목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양 틈에 살기 때문에 냄새나는 사람들이요, 짐승의 가죽을 부정하게 여긴 유대인들은 상종조차 하지 않았죠.
그들은 안식일에도 양 떼를 몰고 나가야 하는 삶이라 그들은 율법에 위해 죄인취급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인과 계약서를 쓸 때 짐승에게 양 떼가 물어뜯겨도 좋으니 목숨만은 지키도록 했죠.
그만큼 그들은 고용된 목자들이요, 삯을 받고 일하는 ‘삯꾼 목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짐승에게 양을 약탈당하지 않고 돌아올 때 몇 마리 양들을 빼돌린 게 관행이었죠.
양이 새끼를 출산할 때도 양을 빼돌리는 게 다반사였는데 대부분 주인들이 눈을 감아줬죠
그런 이유로 자기 목숨을 담보로 양을 지키던 삯꾼 목자들은 세리와 창녀처럼 취급받았습니다.
그러니 유대 사회에서 누가 그들과 손을 잡고 그들과 누가 상종하려 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죄인 취급받던 그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맨 먼저 알려주셨습니다.
왜죠?
만약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의 탄생소식을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만 찾았다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알려주셨겠죠.
아기 예수의 탄생소식을 알려줄 때 안식일을 잘 지키는 사람만을 찾았다면 대제사장을 찾았겠죠.
본문 속의 목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린 이유는 그들이 죄인이요 불의한 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광의 광채를 둘러 비출 때 그들 모두가 무서워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빛되신 하나님의 영광앞에,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인 그들은 고개조차 들 수 없었던 것이죠.
그것은 마치 애굽 전역에 장자가 죽을 때 고센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양의 피를 바르고 숨죽이며 기다리는 두려움과 같은 격이죠.
마치 시내산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우레와 번개와 나팔소리로 온갖 두려움에 떨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처럼 말이죠.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면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나는 죽었구나’하는 것과 같은 격이죠.
(깨달음)그것이 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라고 지난 시간 말씀 드렸습니다.
죄로 얼룩진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첫 번째 태도가 하나님의 앞에 두려움을 갖는 것이죠.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죄인을 심판하시는 심판주이시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죄인의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에 말입니다.
목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이유, 목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한 태도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죠.
(적용)오늘도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사람들은 자신이 죄임임을 고백하는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그 밤의 목자들처럼 자신의 내면속에 죄의 부패성 속에 산다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말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와주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시면서 ‘무서워하지 말라’,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하시는 것이죠.
그것이 중생의 은혜요, 성화의 첫 단계입니다.
(본문) 오늘 본문은 그 천사가 ‘무서워하지 말라’면서 연이어 하는 말씀입니다.
본문 1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원해)‘좋은 소식’으로 번역된 헬라어 ‘유앙겔리죠’(εὐαγγελίζω)는 ‘굿 뉴스’(good news) ‘복된 소식’이죠.
여기에서 '복음'이란 말이 나온 것이죠.
그런데 그 복된 소식을 가리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하죠.
‘기쁨’이란 ‘카라’(χαρά)이고, ‘크다’는 말은 ‘메가스’(μέγας)로 ‘거대한’, ‘어마어마한’ 뜻이죠.
‘메가톤급’이라는 말이 바로 이 ‘메가스’에서 온 단어입니다.
국제단위계로 보통 100만을 나타내는 접두어로 사용되기도 하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란 밤중에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메가톤급 소식이란 뜻이죠.
보통 그들에게 좋은 소식이란 양을 칠 때 이리 떼에게 양이 물어뜯기지 않았다면 좋은 소식이겠죠.
무사히 돌아왔을 때 한 두 마리 양을 자기 양으로 삼았다는 소식 정도가 기쁜 소식 아니겠습니까?
우리 식으로 빗대면 월세나 전세 살던 분이 자기 집을 샀다면 가장 좋은 소식일 수 있겠죠.
주식을 샀는데 그 종목이 상한가를 치고 200% 올랐다면 그보다 더 좋은 소식도 없겠죠.
자식이 남들보다 빨리 취직하고 결혼도 서둘러 했다면 그것도 좋은 소식이겠죠.
그것이 본문의 목자들에게 미친 일반적인 좋은 소식과 같다는 격이죠.
그런데 그보다 메가톤급의 100만배나 ‘더 좋은 기쁨의 소식’을 천사들이 전해주고 있다는 것이죠.
그 소식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구원자가 태어난다는 소식이 바로 그것이죠.
왜 그것이 이 땅에서는 상상조차 못하는 메가톤급의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까?
이 땅에 좋은 소식들은 모두 상대적인 소식임에 비해 구원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은 절대적인 소식이기 때문이죠.
이 세상의 기쁜 소식들은 또 누군가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는 소식들은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소식’이죠.
그만큼 죄로 물든 인간에게 구원의 절대자이신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보다 더 큰 기쁨의 소식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님으로 오셨다는 그 소식은 이 세상 모두에게 영원토록 기쁘고 즐거운 소식이기 때문이죠.
(원성)이 ‘유앙겔리죠’라는 단어가 마태복음 11장 5절에도 쓰인 바 있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깨달음)무슨 뜻입니까?
맹인이 보게 되는 것보다 더 복되고 좋은 ‘큰 기쁨의 소식’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냐는 것이죠.
못 걷는 사람이 걷게 된 것, 나병환자가 깨끗케 된 것, 못 듣는 사람이 듣게 된 것, 그보다 더 ‘큰 기쁨의 소식’이 없다는 거죠.
더욱이 죽은 자가 살아났다면 어찌 그보다 더 좋은 ‘큰 기쁨의 소식’이 있겠냐는 것이죠.
바로 그것처럼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도 가장 큰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뜻이죠.
사실 눈을 뜨고 있어도 복음의 눈을 뜨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불행한 자도 없는 것이죠.
걷고 있어도, 살이 깨끗해도, 잘 들어도,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접하지 못했다면 가장 불행한 자죠.
육신이 살아 있어도 영적인 생명을 바라보지 못한 자들은 가장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죠.
그만큼 맹인이 보는 것만큼, 못 걷는 사람이 걷는 것만큼, 나병환자가 깨끗케 돈 것만큼, 못 듣는 사람이 듣는 것만큼,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만큼, 모두에게 복된 소식을 듣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죠.
그 밤에 목자들이 맞이한 소식이 바로 그와 같다는 뜻입니다.
(적용)평생 소경으로 산 바디매오는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고 살리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여리고로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만사를 제쳐놓고 예수님을 만나러 나갔고, 그때 예수님을 향해 간절히 소리쳤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고쳐주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평생 소경으로 살아 온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평생 소경으로 살아온 그가 두 눈을 뜨게 된 것, 그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문둥병에 걸린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갔을 때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면 낫는다고 했죠.
만약 그 좋은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듣고 잠잠히 있었다면 그는 결코 낫지 못했겠죠.
그는 그 기쁨의 소식이 자신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임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러자 천지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문둥병을 깨끗케 해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죠.
평생 문둥병자로 살아온 그가 깨끗케 되었을 때, 그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 이들이 누리는 절대적인 큰 구원의 기쁜 소식이죠.
그와 같은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이 땅에 아기 예수의 몸으로 오신 것 아닙니까?
그 소식을 전해들었으니 그 밤의 목자들이 기뻐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의 상대적인 기쁨을 넘어 영원토록 큰 기쁨의 소식을 덧입는 은혜안에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주님께서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주님은 너에게도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메가톤급의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안겨주길 원하지 않겠느냐?”
“그 밤의 목자들에게 좋은 소식이라야 무사히 돌아오는 것, 몇 마리 양을 빼돌렸다는 소식이지 않겠느느냐?”
“평생 소경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통해 두 눈을 뜨는 것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겠느냐?”
“평생 문둥병으로 살아온 나아만이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케 된 것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겠느냐?”
“이 세상 사람이 월세와 전세에서 자기 집을 소유하게 된 기쁨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겠느냐?”
“네 자녀가 대학에 가고 일찍 취업하고 더 빨리 결혼한다면 그것도 큰 경사로 여기지 않겠느냐?”
“그러나 주님께서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신 소식은 이 세상의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메가톤급의 소식이지 않더냐?”
“주님께서 이 세상에 구원자로 오신 그 소식은 이 세상의 상대적인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큰 기쁨의 소식이지 않더냐?”
“우리 주님은 네 죄를 용서해주시고 너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절대적인 기쁨을 주시는 분이니 말이다.”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지금 그 기쁨의 가장 귀한 소식을 안겨주신 주님을 너의 구주로 모시면서 살고 있느냐?”
“이 세상의 상대적인 기쁜 소식이 다 떠나갈지라도 오직 그 분 한 분이면 너는 족하고 있느냐?”
“네 집값이 떨어지고 은행잔고가 부족해도 자녀의 결혼시기가 늦어져도 주님이 네 안에 있는 것으로 감사하고 있느냐?
“그 밤에 목자들이 듣게 된 소식이 바로 그와 같은 절대적인 기쁨의 소식이지 않았더냐?”
“너는 주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큰 기쁜 소식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노라 고백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찬양)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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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우리나라가 해방되기 전에 함경북도 나남에 한 여자 거지가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젊은 여자인데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고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구걸행각을 한 것이었죠.
그녀를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혀를 차며 비아냥거렸습니다.
“젊은 것이 무엇을 못해 저렇게 거지가 됐누?”
“멀쩡한 여자가 일하기 싫어서 저 모양이나 하고 다니네.”
그런데도 그녀는 그들에게 한 번도 화를 내는 일 없이 싱글벙글 웃어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그를 미친 여자로 취급하며 상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8.15해방이 되고 나남에 소련군이 진입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거지가 갑자기 소련군의 장교 옷을 입고 중위 견장을 달고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평소 그녀를 알고 있던 사람들, 평소 그녀를 비아냥거리고 무시했던 사람들,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봤더니 그녀는 거지가 아니라 소련군으로부터 밀파된 여자 간첩이었던 것이죠.
그 거지가 자신을 조롱하고 업신여긴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고 여유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까닭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녀는 자기 사명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깨달음)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비록 세상에서 기쁨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 비해 누릴 게 없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 주님께서는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아바 아버지이십니다.
주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한, 이 세상에 부족함 속에 살지라도 주님으로 인해 가장 부요한 자들인 줄 믿습니다.
그런 기쁨 속에서 주님을 모시고 사는 자들을 바라보시는 주님은 이 세상 무엇보다도 더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너에게 더 많은 것을 채워주지 못하고, 오히려 힘들게 사는 데도 네가 나를 바라보고 기뻐하며 살고 있구나.’
‘그런 자긍심을 갖고 사는 너를 볼 때 어찌 천군 천사들에게 자랑하고 싶지 않겠느냐?’
우리 주님께서 그런 마음으로 그런 기쁨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바라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화)언제나 기쁨으로 얼굴이 빛나는 꽃장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꽃을 팔 때마다 얼굴에 기쁨이 넘쳐나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을 궁금해하던 한 단골 손님이 어느 날 그 할머니에게 물어봤습니다.
“할머니는 걱정 근심이 전혀 없으신가 봐요?”
“천만에요. 사람에게 걱정 근심이 없을 수가 있나요. 내게도 역경과 고통이 있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도 매일 기쁘게 사실 수가 있어요? 제가 볼때마다 얼굴에 기쁨이 넘쳐나 있는 것 같은데요?”
“저는 ‘3일의 비밀’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3일의 비밀’이 뭔데요?”
“‘3일의 비밀’ 이란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기회를 드리고 3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사는 것이죠.”
“때론 숫자대로 3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주님의 부활 원리는 늘 동일하답니다.”
“그래서 나에게는 어떤 암흑과 같은 고난이 다가와도 광명의 열매로 끝난답니다.”
(깨달음)꽃장수 할머니에게 어찌 이 세상에 기쁨과 즐거움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가게를 운영하는 어려움도 있을 것이요, 자식과 손주들 걱정은 왜 없겠습니까?
때로는 가게를 운영하고자 대출받은 문제로 골머리를 앓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할머니는 자기 중심에 ‘3일의 비밀’, 무덤에서 3일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풀 수 없는 인생의 문제를 주님께 내어 맡기고 살기에 삶 속에 기쁨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죠.
(내기도)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이 세상 그 어떤 소식보다도 주님의 구원자란 소식보다, 3일만에 부활하신 소식보다도 더 기쁜 소식은 없어요.”
“이 세상에서 제가 기뻐하는 소식들은 집사고 자식들 취업하고 결혼하는 소식들이 사실이예요.”
“남들보다 더 큰 행운과 같은 소식이 밀려오면 그것으로 기뻐하고 있는 연약한 자예요.”
“내 삶에 가난과 힘든 일이 찾아오면 내 자식이 뒤쳐지면 괴로워하는 게 저의 연약함이에요.”
“그러나 주님 이 세상에 어떤 좋은 소식보다도, 어떤 힘든 소식보다도 구원의 주님을 포기하지 않도록 은혜 베풀어주세요.”
“이 세상 그 어떤 소식보다도 3일 만에 사망의 문을 여시고 부활하신 생명의 주님을 최고로 기쁜 소식으로 여기며 살 수 있도록 역사해 주세요.”
“이 세상의 삶이 힘들고 때론 치일지라도, 답답하게 우겨쌈을 당할지라도 3일의 비밀을 간직하면서 주님안에서 기쁨을 잃지 않게 해주세요.”
“그와 같은 주님의 자긍심 속에 사는 저를 바라보실 때 주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을 떠올리며 하루하루 승리하게 해 주세요.”
“이 세상에 온통 암흑과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해도 빛되신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은혜 안에 거하게 해 주세요.”
(찬양)빛이 없어도 환하게 다가오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려주시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당신이 있음으로 나도 있고 당신의 노래가 머묾으로 나는 부를 수 있어요
주여 꽃처럼 향기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당신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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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누리는 기쁨의 소식들은 다 상대적인 기쁨의 소식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기쁨의 소식들은 일시적이고 유한한 소식들입니다.
누군가 얻고 누린다면 그 누군가는 잃고 아파하는 소식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주님께서 아기 예수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소식은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기쁨의 소식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죄로 물든 우리들을 생명으로 건져주시는 영생의 큰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그와 같은 절대적인 기쁨의 소식이 충만하길 축복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떠나가는 소식이 들릴지라도, 3일의 비밀을 간직한 할머니처럼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길 축복합니다.
그 밤에 목자들에게 미칠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이 바로 그와 같은 절대적인 기쁨의 소식인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가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충만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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