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설교SundaySermon

무서워하지 말라(눅2:8-14)_2022년 대림절셋째주일 설교문

by 똑똑이채널 2022. 12. 9.
728x90
반응형
SMALL

무서워하지 말라.hwp
0.20MB

 

(설교열기)(논지)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대하는 기본자세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경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 다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합니다’하는 말을 많이 하죠.

‘경외’(敬畏)란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잠9:10, 빌2:12)이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두려워하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죠.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화)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400년간 종살이 할 때였죠.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그 백성을 해방시키겠다고, 자유케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백성을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하게 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애굽의 파라오는 처음부터 순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내지 않았죠.

적어도 6개월에 걸쳐 10가지 재앙을 겪은 후에야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들을 내보냈죠.

그 중에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애굽의 모든 장자와 모든 짐승의 초태생을 치는 것이었죠.

그때 애굽 전역에 죽음의 재앙과 통곡이 임했죠.

 

그 시각 애굽의 고센 땅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양을 잡아 그 피를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하셨죠.

그 피를 볼 때 너희들에게는 죽음의 재앙이 넘어가게 해 주시겠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데 정작 애굽 전역에 죽음과 통곡이 들끓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땠을까요?

그들도 숨죽이면서 혹혀라도 부족한 게 있어서 죽임당하는 게 아니냐, 하는 두려움이 밀려들었겠죠.

 

(깨달음)실은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죠.

죄로 얼룩진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하는 두려움과 경외심 말이죠.

 

(성화2)그런데 그들의 두려움은 거기서 끝납니까? 아니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한 후 시내광야에 있을 때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아오죠.

그때 산 위에서 산 아래에 있는 백성들을 향해 우레소리와 번개소리와 나팔소리가 우렁차게 들렸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나타난 현상들이었는데, 그것은 인간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 그들은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었죠.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임재 앞에 죄로 얼룩진 자신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죠.(출19:16).

 

그때 그들이 모세에게 말하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게 하지 말고 당신이 우리에게 말해서 죽지 않게 해 주세요”하고 말이죠.

그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하죠.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20:20)

 

(깨달음)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임재하신 것은,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토록 하기 위함이라는 거죠.

그만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래야 평상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는 거죠.

 

(적용)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그랬다면 한 개인에 임하실 때는 어떨까요?

웃시야 왕이 통치할 때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이사야 선지자도 마찬가지였죠.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찾아올 때 이사야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이사야 6장에 나와 있죠.

 

그때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 강림하신 것처럼 수 많은 천군 천사를 동원해서 임재하셨죠.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고개도 못 들고 “화로다. 나는 망했도다. 나는 부정한 자다”하고 고백하죠.

왜 이사야가 ‘망하게 되었다’고, ‘나는 부정한 자’라고 고백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자기 죄악의 실체, 자기 부정한 모습이 다 드러났기 때문 아닙니까?

그때 하나님께서는 “네 죄가 사하여 졌다”하면서 그 모든 죄와 부정을 정결케 해 주셨고, 곧이어 사명자로 삼아주셨죠.

 

(깨달음)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 이들은 그렇듯 자기 죄와 더러움을 고백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는 이들은 모두가 자기 죄를 통회자복하며 회개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주셔서 정결케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죠.

 

(적용)이것은 오늘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인 양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내 죄를 회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은 내게 두려움과 공포를 주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죠.

도적이 오는 것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이지만 주님께서 내게 오시는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케 하기 위함입니다.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인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하나님께서는 주전 800년 전 이사야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아기 예수의 탄생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통해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알리도록 한 사람들이 나오죠.

목자들이 그들입니다.

 

그 목자들은 짐승과 뒤섞여 살기 때문에 냄새나는 사람들의 대명사였습니다.

안식일에도 양 떼를 몰고 나가야 하는 입장이라 그들은 율법에 따라 취급받던 사람들이었죠.

주인과 계약서를 쓰면서 짐승에게 양떼 몇 마리를 잃을지라도 목숨만은 지키도록 계약서를 썼죠.

그만큼 그들은 고용된 목자들, 삯을 받고 일하는 삯꾼 목자들이었죠.

문제는 짐승에게 양을 약탈당하지 않았어도 몇 마리 양들은 빼돌렸던 게 그들의 관행이었죠.

양이 새끼를 출산할 때도 몇 마리 양을 빼돌리는 게 다반사였는데 대부분 주인들은 눈을 감아줬죠

 

바로 그런 이유로 자기 목숨을 담보로 양을 지키던 그 당시의 삯꾼 목자들은 세리와 창녀처럼 취급 받았죠.

그러니 유대 사회에서 누가 그들과 손을 잡고자 했겠으며, 누가 그들을 환영하며 살았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죄인 취급받던 그들에게 아기 예수의 탄생소식을 맨 먼저 알려주셨다는 사실이죠.

왜요?

누가 봐도 율법을 잘 지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그 소식을 알려주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누가 봐도 안식일에 제사를 들는 대제사장에게 먼저 그 소식을 알려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율법적으로 자기 의에 사로잡힌 자들이 아니라 스스로 죄인임을 아는 자들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하나님께서 찾아와 만나주는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이 아니라 겸손한 사람들 아니겠습니까?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격려해주는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며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죠.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죠.

나 스스로의 의로움에 사로잡힌 자가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한 자에게 주님은 지금도 찾아와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속에 목자들에게 주님께서 찾아와 맨 먼저 그 소식을 알려주시도록 한 이유가 그것이죠.

 

(본문)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영광의 광채를 둘러비출 때 그들이 보인 반응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 9-1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어보시겠습니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원해)밤 중에 양을 치고 있는데, 그 현장에 하나님의 천사가 영광의 광채를 둘러비추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그 목자들이 그 밤에 얼마나 두렵고 놀랐는지 ‘무서워했다’고 증언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서워하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포베오’(φοβέω)입니다.

‘겁에 질려 도망치다’(to put to flight by terrifying), ‘두려워하다’(to fear), ‘존경하다’(venerate)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목자들이 두려움과 존경을 가지고 ‘경외했다’ 하는 뜻입니다.

 

(깨달음)이것은 애굽 전역에 장자를 칠 때 고센 땅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양의 피를 바르고 그 밤에 숨죽이며 기다리는 모습과 같은 격이죠.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줄 때 그때 우레와 번개와 나팔소리가 가득할 때 두려움에 떨던 모습과 같은 격이죠.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볼 때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내가 죄인이다’하는 모습과 같은 격이죠.

 

본문 속의 목자들도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기에,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려워서 벌벌 떤 것이었습니다.

죄로 얼룩진 자신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자 자신들의 죄가 모두 드러나서 두려워한 것이었죠.

여태껏 양의 주인을 속인 죄악들, 안식일을 지키지 못한 죄악들, 그 죄악들을 하나님께서 다 아시기에 두렵고 떨렸던 것이죠.

 

(적용)실은 이것이 우리 자신에게도 나타나야 할 모습 아니겠습니까?

예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내 죄를 토해내는 모습 말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거룩하신 그 분의 임재 앞에 내 죄의 더러움과 탐욕을 낱낱이 고백하는 것 말이죠.

 

그런 과정을 통과해야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본문의 목자들이 ‘두려워했다’는 의미가 그것이요, 우리도 주님의 임재 앞에 그런 경외심을 갖게 하시는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의 임재를 모셔들일 때 우리 죄과 더러움을 토해내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그래서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주님의 임재 앞에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 죄악을 토해내고 회개하며 주님의 임재를 모셔들이지 않았더냐?”

애굽의 고센 땅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경외하지 않았더냐?”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수여받고 내려올 때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 그 백성들이 두려움에 벌벌 떨지 않았더냐?”

이사야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모셔들일 때 자기 죄를 토해내며 부정한 자라고 고백하지 않았더냐?”

본문 속의 목자들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앞에 모두가 두려움과 존경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모셔들이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주님께서 너에게 찾아오실 때 너의 죄악과 부정함을 토해내면서 주님을 모셔들여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예배당에 나와 예배할때도 주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모셔들이기 전부터 너는 너의 죄악을 토하며 회개해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기도할 때도 세상에 때묻고 더러운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 너의 내면을 주님 앞에 낱낱이 토해내야 하지 않겠느냐?”

너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사야처럼 목자들처럼 너의 죄악과 부정함을 모두 토해낼 때 진정한 주님의 임재를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주님의 임재를 통과할 때, 너의 죄악을 다 쏟아내며 회개할 때,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로 인쳐주지 않겠느냐?”

바로 그것이 중생의 체험이요 성화의 첫단계로 나아가는 길이지 않겠느냐?”

 

(찬양)죄짐 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근심 무거운짐 우리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없는 고로 복을 받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줄을 모를까

시험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진실하신 친구 찾아 볼수 있을까 우리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근심걱정 무거운짐 아니진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아멘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19797

 

야긴과 보아스 | 권성권 - 교보문고

야긴과 보아스 | 이 책은 하루 한 장씩 역대기를 읽어나가면서 새벽기도회 때 나눈 설교 말씀을 펴낸 것입니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설교한 내용을 연구하고 묵상해서 쓴 것입니다. 이 책에는

product.kyobobook.co.kr

 

(예화)덫에 걸린 동물을 구조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 동물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반응이 있죠.

자신을 구해주려고 하는 사람을 오히려 두려워하는 모습이 그것이죠.

 

왜 그렇습니까?

이미 겪은 상처로 인해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구해주려는 사람의 손까지 물려고 하죠.

 

(깨달음)구원을 방해하는 가장 큰 적이 무엇인지 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죄로 인한 두려움이 구원을 가장 방해하는 요인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구원자되시는 주님 앞에 내 죄도, 내 추함도, 내 연약함도 모두 내어 맡기는 게 중요하는 것이죠.

그때 비로소 주님의 평강이 우리 안에 가득차기 때문입니다.

 

(예화2)백송성결교회를 섬기는 원미현 목사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때 친구를 사귈 줄 모르는 소심한 아이로 왕따를 당했습니다.

2002년 5월에는 그분의 어머니가 대장암 말기로 소천을 했죠.

인생에 의지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날 어머니의 믿음을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살아계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살았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성령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날부터 학교와 교회와 집만 알고 살았는데, 그만큼 기도에 힘을 썼습니다.

그런데도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의 어둠이 밀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영적인 우울증에 빠졌고,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하고 해했습니다.

그러다가 재수를 해서 서울신대학교 교회음악과에 입학을 했죠.

 

그 후 학교에서 장학금도 받고 인간관계도 회복되고, 그래서 미친 듯이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누가 봐도 교회음악과 학생이 아니라 신학과 학생처럼 기도하는 것이었죠.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기도해도 머리끝이 아파오고 잠을 자도 피곤이 풀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그것이 영적인 싸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잘 몰라서 무조건 작정기도하고 또 철야하면서 이겨내고자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섬기는 교회에서 집회하는데 그날 밤에 영적인 원리를 깨닫고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이제 잠을 자는데, 그 집회 때 강사 목사님이 하는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영의 눈이 열리면 악한 영도 보일 수 있고, 그러면 영적으로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말이죠.

 

그래서 은혜가 충만해서 그날 교회 다락방에서 잠을 자는데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야”하고 뭔가 시커먼 물체가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귀신이 눈에 보이는 줄 알고 선포하는 것이죠.

“더러운 귀신아.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노니 떠나가라”하고 말이죠.

그리고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하고 찬양을 부르는 것이었죠.

 

그렇게 한 참을 부르고 영적으로 싸우는데, 그때 자기 앞에 반짝이는 칼이 보이더라는 것이죠.

그때서야, 이건 영적인 귀신이 아니라 실제 강도구나, 하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지역에 연쇄살인범이 돌아다니는데 그런 강도였던 것이죠.

 

그런데도 그녀는 더욱더 성령에 충만해서 그 강도의 팔을 잡고 비틀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강도가 말하기를 “너 왜 이러냐?”하면서 뒤집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엉켜 싸우고 방을 빙빙 도는데, 그녀는 “저기요, 예수님 믿으세요.”하고 전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서로가 지쳤는데, 그때 그녀가 물어봤습니다.

“지금 몇시예요?”

그때 강도가 대답하기를 “몰라, 한 시간쯤 지났나!”하고 말하는 것이었죠.

이제 그 강도는 그녀의 목을 눌러 죽이고 떠나려고, 그녀의 배 위에 올라가 목을 조르는 것이었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네가 사랑하는 예수, 지금 만나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이제는 죽어라’하는 식이었죠.

 

그때 그 강도에게 식은땀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졌고, 또 피 냄사가 나면서, 서서히 죽어가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날 자신이 살아온 삶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는데 회개가 나오더라는 것이죠.

“하나님, 나 아무 것도 아닌데 너무 교만했어요. 저를 살려주시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살게요.”

그러자 그 강도가 손을 내려놓더니만 “야, 앉아봐”하는 것이었습니다.

“너 나 무섭지 않아?”하고 말하는 것이었죠.

그때 그녀는 “아니요. 나는 한 번 우울증 걸려 죽어다가 살아난 사람이예요.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셨어요.”

“당신도 천국가게 하려고 저를 만나게 해 주신 것 같아요.”하고 대답한 그녀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강도가 그렇게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것도 사랑하겠냐?”

그때 그녀는 “예수님 믿고 천국 가세요. 제가 앞으로도 기도해 드릴께요.”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 강도를 안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강도는 “내가 너는 못 죽이겠다”하면서 살인도구가 든 가방을 가지고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문 잘 잠그고 자라”하고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떠난 후에 정신이 들어서 거울을 봤습니다.

그랬더니 온 몸에 피가 묻어 있고 머리는 미친년처럼 헝클어져 있고 옷도 다 찢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때 우울증이 밀려드는데, 밥도 못 먹고 잠도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때 그녀가 어떻게 했을까요?

주님의 임재도 경험하고, 악한 영인 줄 알았는데 살인강간범도 대적해서 물리쳤는데, 그 이후 우울증이 왔을 때 말입니다.

그녀는 더욱더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자기 두려움도 다 내어맡기며 더욱더 주님 안에 거하고자 애를 썼죠.

그러자 주님께서 그녀를 치료해주시고 평강에 평강을 회복케 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소심증을 앓던 그녀가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종이 된 것이었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까?

주님의 임재가 임할 때, 성령님께서 임할 때, 내 속에 있는 죄와 싸울 수 있다는 걸 우리에게 알게 해 주는 것이죠.

본문 속의 목자들에게 성령님의 광채가 둘러 비출 때 그들도 속에 있는 죄와 싸울 수 있었겠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죠.

그래서 ‘두렵다’고 ‘벌벌 떨 수도 있었겠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죠.

 

그러나 그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도 그렇게 고백한 바가 있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것인가?”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속에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7:22-24)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속에 있는 죄의 속성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고백을 하죠.

그만큼 영적으로 싸울 때, 그 분의 은혜 앞에 더 나아가 예배하고 기도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죄를 이겨낼 수 있게 해 주시고, 근심과 걱정과 우울증과 불면증도 회복케 주시기 때문이죠.

 

(적용)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임재가 임할 때, 성령님께서 내게 다가올 때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죄로 인해 두려움이 밀려들고, 내 속에 있는 죄의 세력들과 영적으로 싸울 수 있겠죠.

사탄의 세력은 나를 죽이고 멸망시키는 게 목적이라 더 큰 흑암의 세력들을 몰고 올 수도 있겠죠.

 

그때 우리는 더욱더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죠.

주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고, 주님 앞에 자기 연약함을 고백하는 모습으로 말이죠.

그렇게 주님께 나아가는 예배자요 기도자로 살아갈 때 주님께서 평강과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내기도)그래서 우리가 본문 말씀에 비춰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주님께서 찾아와주시고 만나주시고 성령님의 임재가 임하길 원합니다.”

본문 속의 목자들에게 천사를 통해 둘러비추시는 모습으로 임재하실 때 그들이 두려움에 벌벌 떨었습니다.”

그들 속에 있는 죄성 때문입니다.”

주님, 저에게 주님께서 영광의 광채로 비춰주시고 성령님께서 임재하실 때 저도 죄인임을 고백하며 주님께 무릎을 꿇게 해주세요.”

때로는 제 심령이 연약하고 제 속에 있는 죄성 때문에 주님을 체험했어도 영적으로 싸울 수가 있어요.”

그때마다 주님의 은혜안에 거할 수 있도록 저를 영적인 띠로 동여매주세요.”

원수 마귀 사탄의 세력이 저를 흔들어댈지라도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악한 세력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

그리하여 제 안에 있는 죄와 근심과 두려움과 우울증과 불면증이 모두 치유되고 회복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찬양)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

하늘 영광 보여주며 날 오라 하네 할렐루야 찬송하며 주께 갑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이제 내가 떠나도 저 천국 가고 이제 내가 있어도 주 위해 있네

우리 예수 찬송하며 나는 가겠네 천군 천사 나팔 불며 마중 나오네

그러므로 나는 사나 죽으나 주님 것이요 사나 죽으나 사나 죽으나

날 위해 피 흘리신 내 주님의 것이요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60620580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권성권 - 교보문고

세상이 흔들릴수록 우직해야 |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뜻이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직하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엔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다

product.kyobobook.co.kr

 

(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누리게 하기 위함이십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 뿐입니다.

영적인 흑암의 세력은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고 죽이고 멸망시키길 원하시만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들이 영생을 얻고 더 풍성케 하길 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이유도,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이유도, 그것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고 임재하실 때 우리는 죄로 토해낼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할 때, 하나님께서는 죄 사함의 은혜와 평강을 불어넣어주시는 아버지이신 줄 믿습니다.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도, 시내산 아래의 그 백성들도, 이사야 선지자도, 본문 속의 목자들도, 백송교회 원미현 목사님도 모두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오늘 우리 자신이 주님의 임재, 성령님의 임재를 맞이할 때, 우리도 내 속의 죄의 세력과 싸울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께 내어맡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령 내 믿음이나 내 영적인 실력이 없을지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내어맡길 수 있기를 ㅂ랍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약한 나를 더욱더 강하게 하시고, 성령님을 의지하는 우리에게 평강을 더해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총이 풍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