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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1-10)(팔복강해7)_20221002주일설교

by 똑똑이채널 2022. 9.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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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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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나예)며칠 전에 목사님 두 분과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면서 666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때 어떤 낯선 여자분이 다가오더니 ‘666이 뭐예요?’하고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666’이 궁금한 게 아니라 자신이 겪은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싶어서 막무가내로 끼어들었습니다.

 

한참 동안 그분의 사연을 들은 뒤에 나이 드신 목사님들에게 누가 되지 않게 그분에게 말했죠.

“지금은 목사님 두 분과 이야기하는 중이니, 더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는 유달 경기장 옆 자유로교회로 오시면 좋겠어요”

그랬는데 그 분은 자기 말을 계속하다가 그냥 떠나가버렸습니다.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것 같습니까?

오늘날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고 많은 대화를 나누며 사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소통의 부재 속에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기보다 내 말만 쏟아붓고 끝내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상대방과 이야기를 나눌 때 각자의 견해를 갖고 이야기 하니까 타협점을 찾기가 쉽지 않죠.

소통을 하려면 상대방의 마음과 감정과 상황을 이해하는 자세 속에서 경청해야 진정한 소통이 이뤄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발췌)신은경 아나운서가 쓴 〈내 아이가 나를 안아주었습니다〉라는 책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죠.

상대방이 내 말을 잘 듣지 못한다고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는데, 오히려 소통에 효과적이 않다고 말이죠.

 

그 책에 10년간 10만 명의 고령자를 치료한 일본 안과의사 ‘히라마쓰 루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쓴 〈노년의 부모를 이해하는 16가지 방법〉이란 책에 그런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하죠.

노령자 중 70대가 되면 50%가 귀가 안 들리는 난청이 되고 80대가 되면 70%가 난청이 된다고 말이죠.

 

난청이란 아주 안 들리는 게 아니라 일정한 음역대의 음이 들리는 걸 말한다고 합니다.

연세가 많으면 높은 톤의 소리는 잘 안 들리게 되고 대신에 낮은 톤의 소리는 잘 들린다는 것이죠.

그래서 젊은 며느리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하면 ‘어어어?’하면서 못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이 저음의 톤으로 잠잠히 이야기하면 ‘어어어’하면서 잘 듣는다는 것이죠.

그러니 며느리는 괜히 서운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낮은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점잖은 목소리로 천천히 끊어서 말하면 다 듣는다고 합니다.

 

(깨달음)노년에 들어선 시어머니나 어머니와 이야기할 때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지 알수 있죠.

여러분들이 노년에 들어섰을 때도 며느리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죠.

 

(적용)하나님과 소통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내지르는 그런 며느리처럼 일방적인 내 주장만 외쳐댄다면 하나님과 소통은 쉽지 않겠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조근조근 목소리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구할 때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물론 다급할 때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어찌 조근조근 찬찬히 이야기하듯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각자 성향에 따라 다르게 기도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막힘이 없어야 소통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막힘이 없으면 무슨 말을 해도 다 알아듣게 되죠.

하지만 부모와 자식 사이에 왠지 장벽이 있으면 무슨 말을 해도 이상하게 듣고 서운하게 듣는 법이죠.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힘이 없어야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셔도 잘 듣고 순종할 수 있는 법이죠.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산상수훈의 말씀 곧 팔복의 말씀을 선포하셨는데, 그만큼 팔복은 어중이떠중이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맨 처음 선포하신 팔복의 첫 번째 말씀은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여.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자기 가진 재물이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붙들고 의지하며 사는 자들이라고 했죠.

그런 자들의 심령 속에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선포하신 팔복의 말씀은 복되도다. 애통하는 자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통하는 자’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일 앞에 징계를 받을 때 참회하는 사람이요 누군가 고통에 처했을 때 함께 아파하는 이라고 했죠.

바로 그런 자들에게 주님께서 다가와 곁에서 격려해 주시고 다시금 세워주시고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선포하신 팔복의 말씀 복되도다. 온유한 자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란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통제되고 다듬어지는 순종적인 성품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것처럼 머잖아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에 입성하는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번째로 선포하신 팔복의 말씀은 복되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자기 자아나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힌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고 무릎을 꿇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갈망하고 앙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생명수와 하늘의 산 떡으로 배부르게 해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했죠.

 

예수님께서 다섯 번째로 선포하신 팔복의 말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복되도다. 긍휼이 여기는 자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이 긍휼을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긍휼’이란 인간 스스로의 동정심이나 인간의 자비심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 했죠.

하나님께서 죄인인 나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그 긍휼과 자비심으로 내 곁의 누군가를 품고 자비를 베풀며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더 큰 긍휼하심으로 그가 어려움이나 위기를 만났을 때 감싸주고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죠.

 

(예화)일제시대 목포에 윤치호라는 전도사가 있었는데, 목포의 부랑아와 거지와 고아들을 돌보면서 공생원을 세웠죠.

그런 그를 향해 사람들은 ‘거지대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6.25 사변이 터지고 인민군들이 목포까지 들이닥쳐 인민 재판을 행했죠.

윤치호 전도사도 반동분자로 찍혀 인민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정말로 주님의 은혜로 풀려나게 되었죠.

그가 수십년 간 목포에서 부랑아와 거지와 고아들을 돌본 선행을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이 그를 변호해줬던 까닭이었죠.

 

윤치호 전도사는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은 자로서 더 힘들고 어려운 이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베푼 것이었죠.

바로 그런 긍휼과 자비의 삶을 살 때 그가 위급하고 다급할 때 하나님께서 마을 주민들을 통해 그를 구해내신 것이었습니다.

 

(적용)우리가 평소 삶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이죠.

 

(본문)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여섯 번째 팔복의 말씀인데, 본문 8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원해)이 말씀은 헬라어 원문으로 직역하면 그런 말씀이 되는 것이죠.

“μακάριοι οἱ καθαροὶ τῇ καρδίᾳ ὅτι αὐτοὶ τὸν θεὸν ὄψονται”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복되도다.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말 ‘마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르디아’(καρδία)는 ‘심장’(the heart)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심장’이란 ‘육체와 영의 중심지’(the centre of all physical and spiritual life)죠.

인간의 의지도 인간의 성격도 심장에 들어 있죠.

두뇌로 생각하는 것, 선악을 분별하는 의지, 무언가를 느끼는 감정까지도 실은 심장에 담겨 있습니다.

그걸 일컬어 마음이라도 하죠.

 

그런데 이 심장 곧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청결한’으로 번역된 헬라어 ‘카다로스’(καθαρός)는 ‘깨끗한’(clean) ‘순수한’(pure)이란 뜻입니다.

육체적으로나 율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도 정결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죠.

더러운 옷을 깨끗하게 빤 상태, 키질을 해서 겨를 제거하고 알곡만 모아놓은 상태가 그것이죠.

 

(깨달음)하지만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순수한 마음의 동기보다 마음 한 구석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말이죠.

내가 선행을 해도 구제를 해도 착한 일을 해도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고 나를 드러내고 싶은 게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런 우리의 마음을 알고 계시기에 구제할 때 나팔을 불지 말라 하고 당부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라고 말씀하셨지만 결코 인간 스스로는 청결하거나 깨끗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오직 자기 스스로는 불결하고 더러운 자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앞에 무릎을 꿇는 자가 예수님에 의해 청결케 되는 것이죠.

 

(적용)그걸 깨닫지 못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향해 어떤 꼬투리를 잡았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손을 씻지 않고 빵을 먹는 걸 보고 그들이 예수님께 말했죠.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입니까?”(막7:5)하고 말이죠.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7:15-23)

 

그 누가 겉모습을 깨끗하게 한다 한들, 손과 발을 잘 닦고 음식을 먹는다 한들, 음식 자체가 더러운 게 아님을 알고 있죠.

우리의 속 생각과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 실은 더러운 것들임을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 스스로의 마음으로는 결코 청결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의 죄와 허물을 토해낼 때, 내 마음 속의 정욕과 악독과 질부와 비방을 주님 앞에 토해낼 때 주님께서 용서해주실 때 청결케 되는 것입니다.

 

(전개)그렇다면 마음이 청결한 자가 받는 복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하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헬라어 동사 ‘압타노마이’(ὀπτάνομαι)는 ‘바라보다’(to look at) ‘나타나다’(to appear)는 뜻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 나누는 모습이 제자들이 ‘보였던 것’(마17:3)이 바로 그 단어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각종 징조들이 ‘보이게 될 것’(마24:30)을 말할 때 바로 그 단어를 썼죠.

요한계시록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서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일 때’(계11:19)도 그 단어가 쓰였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본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여주시는 것을 알게 되는 걸 말하는 단어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 소통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알 수 있도록 깨닫게 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다 토해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어찌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를 보여주지 않겠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잠잠히 앉아 하나님을 바라보며 내 죄를 다 토해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어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카랑카랑한 목소리 돈으로 소리치지 않고 아들처럼 잠잠히 어머니를 바라보듯 간구하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과 소통하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이죠.

 

(깨달음)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게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며 내 죄를 토해낼 때 하나님을 볼 것이다, 하나님과 소통케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하나님과의 소통으로 나는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죠.

 

(예화)스탠리 존스의 〈인도에 길을 걷고 있는 예수〉라는 책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스탠리 존스가 만난 인도 식민지인들은 당시 인도에 살고 있는 영국인들 대부분을 기독교인과 동일시했죠.

왜냐하면 영국에서 온 사람들 모두가 교회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도인들이 볼 때 영국인들이 교회를 다니고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에 대한 존중과 가치는 없었죠.

왜냐하면 영국 사람들은 그 영국 기독교인들은 술에 쩔어서 살 뿐만 아니라 현지 부인을 하나씩 두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니 인도인들에게 영국 기독교인들은 결코 좋은 이미지가 아니었던 것이죠.

 

당시에 비폭력무저항주의자로 산 간디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죠.

그는 연설을 할 때마다 신약성서를 들고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여려분. 여기에 나오는 말씀대로만 살면 됩니다.”하고 말이죠.

 

그래서 그가 기독교인인가 아니면 힌두교인인가, 늘 헷갈려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죠.

하지만 그는 끝까지 기독도교인이 되는 걸 싫어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시의 영국 그리스도인들이 인도 식민지 사람들에게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소통할지는 몰라도, 인도 사람들에게는 그런 모습이 전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죠.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청결한 마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시는 그 소통의 모습을 세상 속에도 보여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영국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하나님께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나님과 소통한다 해도 인도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한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제자들이 될 수 있겠냐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덧입어 청결한 자로 소통할 때, 그 모습을 보면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역본)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오늘 본문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면세계 곧 마음과 생각이 올바른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바깥 세상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깨달음)우리의 내면 세계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하는 그 은혜를 덧입고 산다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과 소통하길 원하시고 그 소통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길 원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그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소통하며 살아야 하듯이 너도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고 있느냐?”

진정 하나님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어떤 소리보다도 죄악으로 가로막힘이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게 아니라 너의 마음 속에 정욕과 악독과 질투와 비방이 더러운 게 아니더냐?”

그런 마음의 죄악을 하나님께 토해내고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께서 너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소통해주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너와 소통하는 그 진실된 모습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너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더욱더 기뻐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한 말씀의 의미를 이제는 깨달을 수 있지 않느냐?”

인도 식민지 시절의 영국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과 소통한다고는 하지만 인도인들과 소통하지 못한 그 삶을 돌이켜봐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지금 하나님과 소통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산다면 그 모습 그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창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네가 하나님과 소통하고 살고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줄 때 하나님께서 너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겠느냐?”

 

(찬양)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있네 위로를 받을 것이요

온유한 자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겠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저희 배부를 것이요

긍휼이 여기는 자는 긍휼이 여김 받겠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네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 천국이 저희 것이라

내게도 주소서 내가 복을 받기 원하네 오 내 주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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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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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만나교회 김병삼 목사님이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미국에 크레이그 그로쉘 목사님이 젊은 시절 시골에 있는 작은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거기에 정말 남루한 옷을 입고 다 망가진 자동차를 운전하고 들어오는 흑인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때 말쑥하게 차려입은 안내를 맡은 한 남성이 그녀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올 때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옵니다.”

“당신이 입고 온 옷이 최선입니까?”

그러자 그 흑인 여성이 부끄러워서 차를 몰고 나가더라는 것이죠.

 

그때 그 목사님이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자동차에서 흐느껴 울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우리교회가 하나님이 계신 교회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우리의 기준, 우리의 잣대, 우리의 자아에 정결함에 있는 게 아니죠.

하나님의 마음속에 청결함이 있는 것이죠.

그걸 우리는 때때로 잊어버린 채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적용)우리의 삶의 청결함과 우리 마음의 청결함이 같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청결함과 마음의 청결함을 동일시하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이 누굽니까?

세리와 창녀였습니까? 아니죠.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에 청결함을 주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그들이었죠.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청결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1장 31절에 이렇게 말씀한 것이죠.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깨달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간다면서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뒤에서 다른 짓을 하는 그리스도인보다 지금 창기이고 세리일지 모르지만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온 자들이 귀하다는 것이죠.

 

(원성)그래서 이사야 1장 18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깨달음) 마음이 깨끗한 자, 하나님과 소통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어떤 소망을 줍니까?

너희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더러워서, 두 마음을 품고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화)중세 시대에 성당에 들어가는 입구에 성수통이 있습니다.

몸을 거룩하기 위해 성수를 뿌리는 것이죠.

 

그런데 성수통에 파리가 빠지면 파리가 깨끗해질까요 성수가 더러워질까요?

성수가 능력이 있으면 파리가 빠져도 깨끗하게 될 것이고, 성수가 능력을 잃어버리면 파리 한 마리에도 더러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 앞에 나아가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아가는 마음과 자세는 그만큼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창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더욱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우리들에게 보이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알게 될 때, 세상 사람들도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시는 거죠.

 

(내기도)그러니 우리가 주님께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나 입고 있는 옷이 더러운 게 아니라 마음이 더럽고 추한 것임을 알아요.

그런데도 제 육신의 청결함을 마음의 청결로 착각하며 살아 온 저였음을 고백해요.”

남루한 옷을 입은 흑인 여성에게 당신이 입고 온 옷이 최선이냐묻던 그 남성이 저의 모습이에요.”

내 자아와 내 생각과 내 판단이 남들보다 청결하다고 생각하는 오만한 자가 저임을 고백해요.”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의 죄악이 주홍같고 진홍같아도 눈과 같이 양털과 같이 깨끗케 해 주시는 분이예요..”

그 은혜로 죄많은 저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그 은혜로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게 하시니 감사를 드려요.”
저를 깨끗케 하셔서 하나님과 소통하게 해 주시는 그 은혜의 창문을 저를 아는 세상 사람들에게도 보여주며 살게 해 주세요.”

 

(찬양)정결한 맘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정결한 맘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님 앞에서 멀리하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옵소서

그 구원의 기쁨 다시 회복시키시며 변치 않는 맘 내 안에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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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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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나 기호식품이나 입고 있는 옷이 더러운 게 아니죠.

내 속에서 나오는 음란과 도둑질과 간음과 탐욕과 속임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이 더럽고 추한 것이죠.

그런데도 내 육신의 청결함을 내 마음의 청결함으로 동일시하며 남을 정죄하며 살지는 않았습니까?

과연 내 마음의 청결함에서 누가 과연 자유로울 수 있고 스스로 깨끗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우리 주님밖에, 주님의 보혈밖에 우리를 깨끗케 하실 분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앞에 예배드릴 수 있는 것도, 주님께 청결케 해 주심으로 주님을 보며 주님과 소통할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덧입고 있다면 나를 아는 세상 사람에게도 하나님과 소통하는 창문을 보여주며 은혜로운 주님의 제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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