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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SundaySermon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1-10)(팔복강해6)_20220925.주일낮설교

by 똑똑이채널 2022.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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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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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발췌)세계 최악의 빈민가로 꼽히는 인도 캘커다에서 반세기 동안 나환자 무의탁 노인 고아들을 돌본 마더 테레사의 말씀을 모은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어느 날 저녁, 어떤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여덟 자녀를 둔 한 힌두교 가정에서 며칠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다는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들에겐 먹을 게 없었습니다.

나는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쌀을 가지고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몹시 허기져 보였고 아이들의 눈은 툭 불거져 나와 있더군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쌀을 건네자 아이들의 어머니는 그것을 반으로 나누어 가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잠시 후에 그녀가 돌아오자 나는 어디에 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들 역시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들이란 식구 수가 같은 옆집의 이슬람 교인들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굶주림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 얼마 되지 않지만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 행복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깨달음)어떻습니까?

자신의 여덟 자녀가 며칠째 굶주렸음에도 모처럼 생긴 식량을 같은 처지에 있는 이웃집 이슬람 교인에게 나누어준 힌두교 어머니야말로 자비를 베푸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 분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긍휼의 살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맨 처음 선포하신 팔복의 첫 번째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여.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자기 가진 재물이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붙들고 의지하며 사는 자들이라고 했죠.

 

주님께서는 두 번째 팔복(八福)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복되도다. 애통하는 자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하고 말이죠.

‘애통하는 자’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일 앞에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참회하는 사람이자 누군가 고통을 겪을 때 함께 아파하는 이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런 자들에게 주님께서 다가와 곁에서 격려하고 다시금 세워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했죠.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선포하신 팔복의 말씀은 그것이었습니다.

복되도다. 온유한 자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란 타고난 성품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통제되고 다듬어지는 순종적인 성품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을 주시는 것처럼 머잖아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에 입성하는 은총을 베풀어주신다고 했죠.

 

예수님께서 네 번째로 선포하신 팔복의 말씀,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은 그것이었습니다.

복되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자기 자아와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혀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앞에 죄인임을 깨닫고 무릎을 꿇는 자가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 의인이라고 했죠.

그렇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갈망하고 앙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늘의 생명수와 하늘의 떡으로 배부르게 하시는 은총을 덧입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깨달음)중요한 것은 팔복의 말씀은 서로 다른 여덟 명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 제자들 각자 각자가 팔복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시는 심정으로 선포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야 애통할 수 있고 애통하는 자라야 온유할 수 있고 온유한 자라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살 수 있다는 것 말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는 애통할 수 없고, 애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에 의해 다듬어지는 온유한 삶을 살 수 없고, 온유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대해 목말라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이죠.

 

(적용)우리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심령이 가난한 자로, 애통하는 자로, 온유한 자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사는 복된 인생을 누리길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본문) 오늘은 그 다섯 번째 팔복 선포의 말씀인데, 본문 7절 말씀을 다함께 읽어보시겠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것을 헬라어 원문에 따라 번역하면 “복되도다. 긍휼이 여기는 자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이 긍휼을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하는 말씀이죠.

 

(원해)여기에 ‘긍휼히’로 번역된 헬라어 ‘엘레에몬’(ἐλεήμων)은 ‘자비로운’(merciful)이란 뜻입니다.

그 단어는 ‘엘레에오’(ἐλεέω) 곧 ‘긍휼히 여기다’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 ‘엘레에오’라는 단어는 31번 사용되었습니다.

소경 두 사람이 예수님께 ‘불쌍히 여겨주세요’(마9:27) 할 때 그 단어가 사용됐습니다.

두로와 시돈 지역의 가나안 여자가 귀신들린 자기 딸을 위해 ‘예수님 불쌍히 여겨주세요’(마15:11)할 때 그 단어가 쓰였죠.

디매오의 아들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향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막10:48)할 때도 그 단어가 사용됐습니다.

 

그만큼 앞을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 딸이귀신들려 어쩔 줄 몰라하는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 간청하는 모습이죠.

그러니 얼마나 절박하고 애절하고 간절한 상황에서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셨죠.

그것이 주님께서 베푸신 자비,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신 긍휼의 은혜입니다.

 

(원성)그 단어가 사용된 곳이 또 나오는데 마태복음 18장에 긍휼과 관련해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죠.

어떤 임금이 있었는데 하루는 자기 종들을 불러 결산해 보리고 했습니다.

그때 임금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이 끌려 왔습니다.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임금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하고 말했죠.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면서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겠습니다.” 하고 애걸을 했습니다.

임금이 보니 너무 가엾어서 그 빚을 모두 탕감해 줬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어쩌면 그 임금님 앞에 수없이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날아갈 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종이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탕감받은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푼돈과 같은 작은 금액이었죠.

그러나 이 종은 그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면서 멱살을 잡고 “내 빚 갚아라.”하고 호통을 치는 것입니다.

그 동료는 그에게 엎드려 “꼭 갚을 테니 조금만 참아주게.” 하고 애원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는 자기 동료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둬버리는 것이죠.

 

그때 다른 종들이 그 모든 광경을 보고서 분개합니다.

그리고는 임금에게 찾아가서 그 일들을 낱낱이 고해바치죠.

그러자 임금은 다시금 그 종을 불러들이면서 말하죠.

“이 악한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모두 탕감해 줬거늘 어찌하여 너는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느냐?”

바로 그때 ‘엘레에오’(ἐλεέω) 곧 ‘불쌍히 여기다’ ‘긍휼히 여기다’는 단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임금은 그 종이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게 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그 이야기 끝에 예수님께서는 하신 말씀이 있죠.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

 

(깨달음)그 이야기에 나오는 임금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죠.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 받은 종은 다름 아닌 저와 여러분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백 데나리온 빚진 종은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께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크나큰 죄의 빚을 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그 모든 죄의 빚을 다 탕감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 곁에 누군가 실수와 허물을 보일 때 어찌 용서하며 살 수 없겠느냐, 하는 뜻으로 말씀한 것이죠.

 

우리는 그만큼 주님 안에서 서로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고 감싸주는 삶, 그것이 긍휼을 베풀며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더욱 큰 긍휼과 자비를 베풀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원성)그런데 ‘엘레에오’(ἐλεέω)단어가 구약성경의 히브리어로 쓰인 단어가 나오는데 ‘하난’(חָנַן)이란 단어가 그것입니다.

출애굽기 22장 25-27절에 나와 있는 ‘자비’라는 말이 그것이죠.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깨달음)가난한 사람이 옷을 저당 잡히고 뭔가를 빌렸다면, 해가 지기 전에는 그 옷을 돌려주라는 말씀이죠.

왜냐하면 그 옷은 그가 몸을 가리고 덮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기 때문입니다.

그 옷이 없어 밤 사에 벌벌 떨다가 죽는다면 그가 너를 향해 원망한다면 그의 목소리를 하나님께서 듣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는 자비로운 자다’하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듯 하나님의 자비하심같이, 그 긍휼하심 같이 너희도 그렇게 자비를 베풀고 긍휼히 여기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거죠.

 

이것은 애굽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처지를 떠올리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들도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 정말 힘겹게 살았는데, 이제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자유를 얻어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에 살면 너희 형제 자매를 그렇게 옥죄는 삶을 살지 말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덧입은 자 답게 긍휼을 베풀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적용)그렇기에 ‘긍휼’이란 단어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나 인간의 자비심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을 향해 긍휼히 여겨주시는 그런 긍휼, 그런 자비심으로 품고 사랑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의’와 똑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의’란 ‘올바름’을 뜻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무흠하고 올바른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고 했죠.

성경에서 말하는 ‘의’란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알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덧입는 자라고 했죠.

‘긍휼’도 인간 스스로의 동정심이나 인간의 자비심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그 긍휼의 자비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겨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듯이, 나도 누군가를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품고 자비를 베풀며 사는 것 말이죠.

 

(예화)일제시대 때 목포에 윤치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 전도사로서 공생원을 설립해서 목포에 사는 부랑아와 거지와 고아들을 돌본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거지대장’이라고 불렀죠.

 

그런데 6.25 사변이 일어나 인민군들이 목포까지 들이닥쳐서 인민재판을 행했습니다.

윤치호 선생도 그때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인민재판을 받게 되었죠.

그때 윤치호 선생은 수십 년간 선행을 베푼 걸 알고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변호해 줬습니다.

그 덕에 윤치호 선생은 바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긍휼을 베풀었더니 위급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그도 긍휼을 덧입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장 13절에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때 우리도 하나님의 긍휼을 통해 다른 사람의 긍휼을 덧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잖습니까?

(은혜)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덧입어 그 긍휼하심으로 사는 은혜를 베푸시길 원하신다는 것이죠.

 

(주음성)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오늘을 사는 너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긍휼을 베풀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자기 집에도 먹을 게 없는 힌두교 가정의 그 어머니가 먹을 게 생겼을 때 이슬람 가정의 집에 반반씩 쌀을 나눠준 것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 아니겠느냐?”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그 모든 죄의 빚을 탕감받은 걸 감사하게 여긴다면 백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빚도 얼마든지 용서해 줄 수 있는 것 아니겠느냐?”

애굽에 종살이하며 굶주림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긍휼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면 그들 곁에 굶주린 이들의 옷을 저당잡고 이자놀음해서야 되겠느냐?”

너희가 하나님 아버지께 평생 갚아도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탕감받았다면 너희 동료의 허물도 충분히 용서하며 자비를 베풀 수 있지 않겠느냐?”

목포의 전도사 윤치호가 거지대장으로 부랑아와 거지와 고아들을 돌보며 공생원을 설립했는데, 그 긍휼과 자비를 베푼 삶 때문에 6.25사변 때 인민재판에서 풀려난 것 아니더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하신 그 말씀 그대로 지금도 하나님의 긍휼을 베푸는 자들에게 역사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버지의 긍휼하심을 덧입어 먹보다도 더 검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걸 확신하고 감사한다면 너도 네 곁의 동료를 용서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네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지금껏 살아온 것 같지만 누군가 너를 격려하고 지지하고 기도해 준 이가 있는 걸 안다면 너도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며 살아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지금 너에게 하나님께서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야 할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신다면 예배가 끝난 후에라도 당장 그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 곧 하나님께 심는 것이요, 머잖아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고 선한 것으로 되갚아 주실 것이니 말이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하신 말씀도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푼 너에게 그 긍휼하심의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 아니더냐?”

 

(찬양)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있네 위로를 받을 것이요

온유한 자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겠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저희 배부를 것이요

긍휼이 여기는 자는 긍휼이 여김 받겠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네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 천국이 저희 것이라

내게도 주소서 내가 복을 받기 원하네 오 내 주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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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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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만나교회를 섬기는 김병삼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김병삼 목사님이 2020년 8월에 하박국 말씀을 가지고 특별새벽기도회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그때 찬양단이 나와서 찬양을 하는데 그 교회 우미셀 전도사님도 함께 나와 찬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이 반팔을 입고 찬양하는데 손에 밴드를 붙이고 찬양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김병삼 목사님 생각에 ‘어린 시절에 문신한 걸 감추려고 저러는가 보다’ 싶었죠.

그때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김병삼 목사님이 새벽기도회가 끝나고 그렇게 말해줬다고 합니다.

“전도사님. 이제 문신에 대해서 자유했으면 좋겠어요.”

 

다음날 그 전도사님은 정말로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손을 들고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김병삼 목사님도 너무너무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목사님에게 와서 그렇게 말하는 성도님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 저 전도사님이 문신을 가렸으면 좋겠어요. 저 문신을 볼 때마다 우리 아이들이 예배를 못 들릴 수 있고, 덕스럽지 않을 것 같아서요.”

 

(깨달음)그때 김병삼 목사님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제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그러는 거예요.”

“성도님의 자녀도 문신할 수 있는 것 아네요.”

“예수님 안에 있으면 뭐든지 자유할 수 있는 것 아녜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분의 말을 듣는 동안 성령님께서 그런 마음을 품게 하셨다고 하죠.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네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게 있지.”

“하지만 예배드릴 때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해할 한 영혼에 대한 마음이 없는 것이냐?”

 

(적용)어떻습니까? 왜 성령님께서 그 목사님에게 그런 마음을 주셨던 것일까요?

그 전까지는 전도사님의 문신을 생각하면서 자유하면 좋겠고 모두가 함께 용납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문신은 그 전도사님뿐만 아니라 그 교회 성도님들의 자녀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었죠.

 

그런데 성령님께서는 그런 마음이 그 목사님의 마음 속에 있는 정의요 자아의 의로움이라고 깨닫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그렇게 말씀한 것이었습니다.

“아들아. 네가 자유해도 누군가 너로 인해 힘든 이가 있다면 절제하는 것도 좋지 않겠냐?”

 

그때 그 전도사님에게 다시금 권면했다고 하죠.

“전도사님. 나는 전도사님이 자유했으면 좋겠는데. 그 문신으로 인해 예배가 힘든 분이 있다면 반창고보다 화장을 해서 가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어요.”

 

(적용)어떻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이야기한다고 하면서 내 속에 있는 정의와 옳음으로 인해 누군가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 게 있지 않습니까?

긍휼이란 내 정의 내 뜻을 꺾는 용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화2)그 목사님이 군대에서 군목장교였는데 마지막을 대전통합병원에서 했다고 합니다.

그 병원은 간염전문병원이었는데, 간염환자들과 일반환자들이 옷을 다르게 입고 생활을 했다고 하죠.

주일날 예배를 드리면 그 병원 예배실에 꽉 차서 예배를 드렸다고 하죠.

그때 예배가 끝나면, 그 목사님의 아이들이 4살과 2살이었는데, 모두가 예쁘다고 쓰다듬어주더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간염병환자들도 그 목사님에게 다가와 굳이 손을 잡고 ‘은혜받았습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쓰다듬어주는 모습도 손을 잡아주는 모습도 힘들더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목사님이 그 무렵 읽고 있는 책이 데미안 신부의 책이었습니다.

하와이 몰라카이 섬에서 나병환자들을 선교하러 간 데미안 신부님의 삶에 관한 책이었죠.

처음에는 몰라카이 섬 원주민들은 데미안 신부님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죠.

그때 데미안 신부님은 “하나님 나에게 나병을 주세요”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급기야 그 신부가 나병에 걸렸고, 그때부터 복음을 전하는데 모두가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하죠.

 

그래서 김병삼 목사님에게도 성령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다고 합니다.

“아들아.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길 수 없다면 너도 간염에 걸리면 좋겠구나.”

바로 그때부터 김병삼 목사님이 간염환자들과 함게 자유롭게 밥을 먹었다고 하죠.

 

(깨달음)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셨을 때 그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는 게 얼마나 큰 복인지 알게 된 것이죠.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한 것 아닙니까?

“너희가 긍휼을 베풀 때 너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될거야. 그것이 너희에게 축복이지 않겠느냐”

 

(내기도)그렇기에 저와 여러분이 기도를 드릴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긍휼히 여기며 살게 해 주세요

긍휼은 내 주관적인 것을 꺾는 용기가 진정한 긍휼임을 알게 해 주시네요.”

내 나름의 정의가 있지만 누군가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한다면 기꺼이 아버지의 긍휼로 받아들이게 해 주세요.”

내 주관적인 정의는 누구나가 은혜 안에서 자유하는 것이지만 그 자유로 누군가 실족한다면 그 자유를 절제하며 살게 해 주세요.”

데미안 신부가 몰라카이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자신이 나병이 걸렸습니다.”

주님, 저도 아버지의 긍휼을 받아 누군가에게 긍휼을 베풀며 살 때 제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있는 걸 알게 해 주세요.”

그런 긍휼의 은혜를 저에게도 부어 주시옵소서.”

 

(찬양)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주 자비 강같이 흐르고 주 손길 치료하네

고통받는 자녀 품으시니 주밖에 없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겐 주밖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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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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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그 큰 사랑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양자로 삼아주신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받은 우리 자신이라면 그분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우리 곁에 사람들을 품고 사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정의 나의 의로움마저도 주님의 긍휼 앞에 내려놓는 게 진정한 주님의 긍휼하심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긍휼로 우리 곁의 사람을 품고 이해하고 수용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더 큰 긍휼로 감싸주시는 삶의 현장을 체험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런 은혜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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