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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마5:1-10)(팔복강해5)_20220918주일낮

by 권또또 2022.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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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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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열기)(예화)그리스 신화 중에 ‘탄탈루스’ 왕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탄탈루스는 제우스의 아들이었죠.

그런 위치 때문에 다른 신들이 탄탈루스를 천상의 연회에 초대하며 극진해 대접해주었죠.

그런데 이번에는 탄탈루스가 그 신들을 자기 궁전에 초대했습니다.

문제는 탄탈루스가 자기 아들 펠롭스를 죽여 고기를 만들어 신들을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가 자기 아들까지 잡아서 대접코자 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다른 신들을 시험해보려고 했거나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려고 했는지 모르죠.

하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신들은 탄탈루스가 자기 아들을 잡아 대접하려고 했다는 소행을 알고 격분했죠.

그 신들은 펠롭스의 시신을 모아 다시 생명을 불어넣었고 한 여신이 먹은 어깨는 상아로 만들어줬죠.

그리고는 탄탈루스를 지하세계 연못에 세우고는 그 위에 먹음직한 과일들을 주렁주렁 열리게 해 두었죠.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탄탈루스가 물을 마시려고 몸을 굽히면 연못의 물은 저만치 달아나 버렸습니다.

과일을 따먹으려고 손을 뻗으면 그 과일들 역시 저만치 물러가 버리는 것이었죠.

그는 영원토록 그런 갈증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죽지 못한 채 살게 된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살다보면 너무나도 감질나는 것들, 애간장을 태우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을 뜻하는 영어 단어 ‘텐터라이징’(Tantalizing) 바로 그 이야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세상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손을 뻗어 잡은 줄 알았는데 저만치 빠져나가 버리는 것 말이죠.

조금 얻은 줄 알고 기뻐하려고 하는데 순식간에 저만치 날아가 버리는 것 말이죠.

 

(적용)어떻습니까? 우리에게 그런 일이 없습니까?

그토록 목말라하고 애간장을 태우며 붙잡고 싶었는데,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목말라해야 하는 것, 우리가 진정 갈증하며 살아야 하는 건 따로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타는 목마름으로 갈망하며 사는 것 말입니다.

그분만이 영원한 만족을 주시는 전능하신 아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죠.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셨을 때 제자들이 나왔습니다.

그 중엔 이름만 올린 제자들, 자기 유불리를 따지는 제자들도 있었지만, 주님을 기쁘게 하는 제자들이 있었죠.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기뻐하시면서 산상수훈 곧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맨 처음 복되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여.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하고 선포하셨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자기 가진 재물이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붙들고 의지하며 사는 자라고 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에게 남은 음식물을 먼저 드린 사르밧 과부 두렙돈을 하나님께 드린 과부 말이죠.

그 작은 것마저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기꺼이 내어드릴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죠.

부자였지만 하나님나라를 위해 자기 동굴 무덤을 예수님께 내어드린 아리마대 요셉도 그런 사람이었죠.

“주님께서 쓰시겠다”(마21:3, 눅19:31)고 할 때 나귀 새끼를 내드린 그 주인도 심령이 가난한 자였죠.

주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 있다고 축복을 선포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복되다도, 애통하는 자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하고 선포하셨죠.

‘애통하는 자’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일 앞에 하나님의 징계를 통해 참회하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했죠.

사람이 죽거나 잃었을 때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겪는 이 옆에서 함께 아파하는 모습이 그것이죠.

그런 자들이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그 곁에 다가와 격려하고 세워주시고 은혜를 말하는 것이죠.

 

사기꾼 야곱을 축복의 통로로 삼고자 20년간 밧단 아람에서 쓰디쓴 고생길을 허락하신 것도 그렇죠.

그가 돌아오는 길목에 얍복강에서 환도뼈를 쳐서 위골이 되게 하신 것도 그런 격이었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찾아와 ‘이스라엘’로 바꿔주셨고, 그 인생을 다시금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애통하는 자들이 받는 복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선포하신 말씀, 지난 시간에 살펴본 팔복의 세 번째 복이 무엇이었습니까?

복되도다. 온유한 자들이여. 왜냐하면 그들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란 타고난 ‘착한 성품’ 태어날 때 안고 태어는 ‘온화한 인품’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 했죠.

모세처럼 하나님에 의해 다듬어져서 하나님께 절대복종하고 백성들 앞에 온화한 모습을 드러낸 성품이죠.

바울도 멧돼지처럼 길길이 날뛰는 성품의 소유자였지만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 다듬어져서 어느 환경이든 복종하며 감사하는 성품이 되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고 할 때 그 땅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 모세가 바라본 젖과 꿀이 흐르는 땅처럼, 머잖아 도래할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깨달음)중요한 것은 그런 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은 서로 다른 세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었라고 했죠.

심령이 가난한 자라야 애통하며 살 수 있고, 애통하는 자라야 온유한 자로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심령이 가난치 않는 자는 애통할 수 없고, 애통하지 않는 자는 결코 온유한 자가 될 수 없는 것이죠.

팔복의 말씀은 서로 다른 8명의 제자에게 하신 게 아니라 한 명 한 명 그런 복을 누리길 바라신 말씀입니다.

 

(본문)오늘은 네 번째로 선포하신 말씀인데, 본문 6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원해)여기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할 때 ‘의’(義)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의’란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로 ‘법적인 무죄’ 또는 ‘의로움’을 뜻하는 ‘디카이오스’(δίκαιος)에서 파생된 단어죠.

한자로는 ‘내’(一)가 ‘양’(羊)과 같은 ‘자아’(我)로 하나님을 갈망하며 사는 걸 말합니다.

 

의로움이란 법적인 문제 없이 자유로운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세상적으로 완벽하게 보이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래전 옥한흠 목사님이 크리스마스 축하예배 때 설교를 하러 갔는데 옆에 정주영 회장이 앉기로 돼 있었죠.

한참을 기다려도 정주영 회장이 앉지 않자 옥한음 목사님이 와서 앉으라고 했는데 정주영 회장이 그렇게 대답을 했다고 하죠.

“저 같은 죄인이 어떻게 목사님 옆에 가서 앉습니까?”

 

그 말을 듣자 옥한음 목사님은 ‘저분이 신앙에 대해 아는 것이 조금은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죠.

‘저분의 내면에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는 구석이 조금은 있는 것 같다’하고 말이죠.

하지만 그뒤로 20년을 지켜봤지만 그분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있어도, 정작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하나님 앞에서의 의인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기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으로 의롭게 보이는 것을 말한 게 아니죠.

본문에서 말하는 의로움이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 무릎꿇는 사람 말입니다.

 

(깨달음)에서와 야곱이 바로 그런 경우죠.

에서는 들사람으로 ‘익숙한 사냥꾼’(창25:27)이었습니다.

들판을 누비며 사냥도 잘하고 먹을 것을 가져다주니 누가 좋아라하지 않겠습니까?

그에 비해 야곱은 조용한 사람으로서 장막에 거주하는 자였죠.

 

그런데도 왜 야곱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까?

에서가 ‘익숙한 사냥꾼’이란 것은 미드라쉬에 보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세상 문화와 이방 종교에 깊이 빠져들었다는 뜻입니다.

그에 비해 야곱은 실력이 없어서 남을 속이며 살았지만 아버지 품에 거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자는 바로 야곱과 같은 자를 말하는 것이죠.

 

(적용)그렇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할 때 ‘주리고 목마르다’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주리다’는 헬라어 ‘페이나오’(πεινάω)나 ‘목마르다’는 헬라어 ‘딥싸오’(διψάω)입니다.

이 단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고 먹을 고기가 없다고 아우성치는 모습과 같은 격입니다.

북녘에 먹을 게 없어 목숨 걸고 두만강을 넘어 남한으로 내려온 탈북자들의 모습이 그렇죠.

 

그토록 갈망하고 앙망하는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오직 주님에 대해 목마른 자로 사는 자를 말하는 거죠.

하나님께 목마른 자로서 이 세상 장애물을 뛰어넘어 주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자를 어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여겨지 않겠습니까?

 

(원성)다윗은 시편 63편 1절을 통해 이렇게 고백을 하죠.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깨달음)다윗이 이 고백을 할 때가 평안하고 안전할 때, 대적을 무찌르고 승승장구할 때였습니까?

아니죠.

그 고백은 사울 왕의 칼날에 쫓겨 도망자의 삶을 살 때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더욱 하나님을 찾고 갈망했던 것입니다.

 

(적용)하나님께서는 이런 마음과 이런 자세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을 지금도 찾고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런 마음과 자세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들을 의롭다 인정해주지 않겠습니까?

 

(발췌)그렇다면 하나님을 앙망하고 갈망하는 마음이 언제 시들어지고 사라지게 되는 걸까요?

존 파이퍼 목사님의 〈하나님께 굶주린 삶 〉이란 책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향한 굶주림의 가장 큰 적은 독이 아니라 애플파이다.”

천국을 향한 우리의 욕구를 무디어지게 하는 것은 악인들의 잔치가 아니라 세상의 식탁에서 끝없이 주워 먹는 부스러기다.”

성인용 비디오가 아니라 밤마다 황금시간대에 애청하는 시시한 볼거리들이다.”

사탄이 저지를 수 있는 악이 많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사랑의 잔칫상에 오지 못하게 우리를 막는 것이 밭과 소와 아내라고 말씀하셨다(14:18-20)”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가장 큰 적은 그분의 원수가 아니라 그분의 선물이다.”

가장 위험한 욕구 대상은 끔찍한 악이 아니라 이 땅의 평범한 낙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들어서면 우상숭배가 잘 눈에 띄지도 않거니와 거의 구제불능이 된다.”(23)

 

(깨달음)어렵고 힘들 때는 눈물 흘리고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서 해결해달라고 갈망하고 앙모하죠.

하지만 일이 잘 풀리고 뭔가 승승장구하면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적은 독배가 아니라 애플파이이다, 나를 배부르게 한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죠.

 

(주문)그렇기에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세상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해 목말라하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주음성)오늘 이 시간에 성령님의 음성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목말라하고 애타게 갈망하는 것들을 너도 목말라하고 있는 것은 아니더냐?”

그러나 그것들은 붙잡으려고 하면 더 멀리 달아나고, 입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빠나가는 것들 아니더냐?”

그런 것들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고 만족함이 없는 것들 아니더냐?”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갈망하면 부족함 없는 은혜로 채워주지 않더냐?”

다윗이 광야에서 도망자로 쫓기면서도 오직 하나님을 갈망하며 앙모한 이유도 그것이지 않더냐?”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들이 독이 아니라 오히려 애플파이이지 않더냐?”

심령이 가난한 자로 애통하는 자로 온유한 자로 널 빚으실 때가 오히려 은혜로 충만한 때이지 않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지금 네가 바라보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갈망하고 앙망하며 살고 있는지 바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

이 세상 모두가 갈망하고 앙망하는 부귀영화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만족함 없는 것들이지 않더냐?”

진정한 만족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부어주시는 것들이지 않더냐?”

너에게 애플파이를 주셨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보다 더욱 무릎을 꿇어야 하지 않겠느냐?”

돈과 명예와 권력의 우상숭배들이 채워질 때 오히려 네 영혼을 구제불능으로 만들 수 있으니 말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도록 하나님을 더욱 갈망하고 앙망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때 주님으로 인해 목말라 하는 너의 영혼을 주님께서 만져주시고 채워주실 것이니 말이다.”

 

(찬양)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간절히 주님만을 원합니다

채워 주소서 주의 사랑을 진정한 찬양 드릴 수 있도록

주께 가까이 날 이끄소서 간절히 주님만을 원합니다

채워 주소서 주의 사랑을 진정한 찬양 드릴 수 있도록

 

목마른 나의 영혼 주를 부르니 나의 맘 만져 주소서

주님만을 원합니다 더 원합니다 나의 맘 만져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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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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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개)“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열망하고 앙망하는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앙망하면 앙망할수록 그 사람에게서 어떤 성품이 베어나오겠습니까?

그가 하나님을 앙망하고 갈망하는데, 매일 거짓말을 한다면, 결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이 아니겠죠?

매일 하나님을 갈망하며 사는데, 원수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저 입바른 소리로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선하신 하나님을 앙망하면 앙망할수록 그분의 선하신 성품이 그의 삶 속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갈망한다면 이 땅의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탐심같은 우상숭배(골3:5)를 십자가에 못박으며 살 것이니 말입니다.

 

(원해2)“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다”, ‘배부르다’는 ‘카르타조’(χορτάζω)는 ‘풀이나 음식을 충분히 먹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토막으로 오천명을 먹일 때 “다 배불리 먹고”(마14:20 할 때 그 단어가 쓰였죠.

바울이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알아”(빌4:12)할 때도 그 단어를 썼죠.

 

그만큼 주님의 선한 성품을 갈망하고 앙망하면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채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원성)남편 다섯을 둔 우물가의 여인, 지금도 다른 남자와 사는, 이 세상 정욕에 목말라 하는 그녀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있었죠.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4)

(깨달음)주님께서 부으시는 하늘 생명수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정욕에 목말라하는 인생은 그걸 채우면 채울수록 허기 지지만 주님의 생명수는 온전한 만족을 주시기 때문이죠.

 

(원성2)주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후에 제자들이 그런 떡을 항상 먹게 해 달라고 간구했죠.

그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6:46-51).

 

(깨달음)‘너희들은 아직도 육신의 떡에 목말라하며 살고 있느냐?’

‘오직 너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으로 여기고 만족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하는 뜻이죠.

 

이 세상에서 70-80년, 100년 안팎의 부귀영화를 누린다 한들, 영생을 놓친 채 지옥에 들어간다면 어찌 복된 인생이겠느냐는 뜻입니다.

비록 이 땅의 것들로 만족하지 못해도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면 그것이야말로 천국에서 영생할 수 있는 비결이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죠.

 

(예화)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 했던 인도의 시성(詩聖) 타고르(Tagore)가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자기 집에서 일하는 늙은 하인이 아무 말도 없이 일하러 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모두 어긋나고 말았죠.

기분이 많이 언짢았는데 종으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마음을 추스리며 분노를 다잡고 있는데 저녁 무렵 즈음에야 그 종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주인인 타고르에게 와서 아무 변명이나 말도 하지 않은 체 곧장 창고로 가서 빗자루를 꺼내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당을 쓸기 시작했습니다.

타고르는 화가 치밀어서 그 늙은 하인의 빗자루를 빼앗아 마당에 내동댕이치며 소리를 쳤죠.

“당장 그만 두시오! 여기가 당신이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오지 않는 그런 곳인 줄 알아요?”

“그런 생각으로 사니 평생 남의 집 종으로 살지. 당신 같은 사람은 일할 자격도 없으니 내일부터 오지 마시오. 당신은 오늘로 해고예요!”

 

그런데 그 노인은 아무런 대구도 없이 다시금 빗자루를 들고 묵묵히 마당을 쓸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타고르는 한층 더 핏대를 세우면서 큰소리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당신,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요? 그만두라는 말 못 들었어요?”

“늙었다고 봐 주었더니 내가 바보지.”

“당장 끌어내기 전에 내 집에서 나가요!”

 

그러자 노인은 숨을 고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주인님,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 동안 제가 이런 일이 없었잖아요?”

“아무 말씀도 못 드리고 이렇게 뒤늦게 나타난 것은 모두 저의 잘못입니다.”

“그런데 주인님, 어젯밤에 제 딸아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때서야 그 노인은 여태 참아온 눈물을 터뜨리며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깡마른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는 노인을 보는데, 타고르는 마치 몽둥이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죠.

 

(깨달음)무엇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까?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자초지종을 알지 못한 채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누군가를 정죄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죠.

그만큼 타고르는 자기 의에 사로잡혀 남을 판단하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면 주님의 의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이죠.

그날 이후 타고르는 어떤 사람에 대한 일을 들었을 때 “그럴 수 있겠구나!”라는 말을 새기며 살았다고 하죠.

 

그래서 그런 말도 있지 않겠습니까?

“남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보기 전까지는 그 사람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

 

(적용)한 번 따라 해 보실까요?

‘그럴 수 있겠구나’, ‘그럴 수 있겠구나’

 

이것은 저에게도 필요한 마음입니다.

목회자로서 내 의의 기준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 처음부터 끝까지 금해야 할 마음이죠.

성도를 향해 ‘그럴 수 있겠구나’ 하면서 목회를 해야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으며 살 수 있는 것이죠.

여러분들도 저나 누군가 실수할 때 ‘그럴 수 있겠구나’하며 살아야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움을 덧입으며 살 수 있겠죠.

 

그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하나님의 선한 성품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의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닮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은혜 속에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기도)그렇기에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그래요, 주님. 이 세상 무엇보다도 주님을 목말라 하며 살게 하시고 주님의 선한 성품에 목말라 하며 살게 해 주세요.”

우물가의 여인처럼 이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에 목말라 하지 않게 해 주세요.”

이 세상의 것들은 목말라하면 할수록 채워지지 않는 영적인 허기짐 속에 더 목말라 하는 게 많습니다.”

오직 주님에 대해 목말하 하며, 주님의 선한 성품에 대해 목말라 하며 살게 해 주세요.”

주님을 갈망한다고 하면서 거짓말을 입에 담고 살 수 없고, 불평과 원망 속에 살 수도 없잖아요.”

주님을 앙망하고 갈망하는데도 제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더 감사하고 자족하며 살게 해 주세요.”

주님을 앙망하고 갈망하면서 내 의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악에 빠지지 않게 해 주세요.”

성도가 실수해도, 목회자가 실수해도, 내 곁의 누군가 허물을 보여도 그럴 수 있지하면서 하나님의 의로 품게 해 주세요.”

그렇게 주님을 갈망하고 앙망하며 주님의 선한 성품을 좇아 살 때 하늘의 양식으로 채우시는 은혜를 누리게 해 주세요.”

 

(찬양)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때 주님 하신 말씀 내 샘에 와 생수를 마셔라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 양식 내게 채워주소서 넘치도록 채워주소서

 

많고 많은 사람들이 찾았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주 안에 감추인 보배 세상 것과 난 비길 수 없네

오 주님 채우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 양식 내게 채워주소서 넘치도록 채워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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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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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닫기)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원하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삶’의 은혜 속에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채우면 채울수록 만족함이 없이 더 갈증만 느끼지만 주님은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만족케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죠.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갈망하고 앙망하며 살도록, 주님의 선한 성품을 좇아 살도록, 주님의 은혜를 구하길 바랍니다.

내 의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기보다 ‘그럴 수 있겠구나’하면서 하나님의 의와 긍휼 속에 살 수 있기 바랍니다.

 

그때 내가 생각지도 못한 하늘의 생수와 하늘 양식으로 채우시는 주님의 신비를 경험하는 은혜의 주인공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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