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SMALL
오늘 읽은 시126편도 표제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나와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고 있는 시입니다. 그 구원의 사건이 출애굽을 생각하는 내용이든지, 혹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을 생각하는 내용이든지, 또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생각하든지,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기쁨과 감사를 갖게 하는 성도의 유일한 원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예배하러 가면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시고,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셨는가를, 상기하면서 찬양과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언제나 이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노래하는 게 신앙의 출발점이 돼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아닌 어떤 사명감이나 교회의 프로그램이나,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성취욕이나, 열심히 먼저면 결코 안 되는 것이죠. 우리의 인생에 이 구원의 은혜보다 더 큰 사건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과 희생보다 더 큰 기적은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른 것으로 나의 신앙을 삼는다면 그것은 헛된 일이라는 것을, 갈라디아서1장9-10절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오직 죄인을 구하기 위해 죽으신 예수의 은혜만이 아닌, 다른 인간적인 방법을 의지하게 하는 것, 그것이 다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죠. 그 당시에 거짓 교사들이 다 그렇게 엉뚱한 교리를 퍼트리며, 자기 자신의 가르침을 따라야 구원받는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열을 내면서,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 외의 것을 덧붙이면 저주가 따라붙을 것이라고 맹공을 퍼부은 것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때로 감동을 주는 것들, 영화나 음악도 있고, 심지어 타종교의 선행이나 도덕이나 휴먼 스토리 같은 것에도 얼마든지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복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주지시키고, 우리를 패역한 길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붙잡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는 것, 그것 외에 다른 복음을 말하는 것은 저주와 지옥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자꾸 해 대면,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그런 핍박을 받으셨고, 그렇게 우리에게까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8-20절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주님을 믿는 자들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주님께 속한 자다,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오직 구원은 주님밖에 없다고 이야기할 때,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이란 한 번에 받고 완성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구원이란 신분의 구원 곧 칭의적인 차원의 구원이 있고 그 다음에 누리는 실존의 변화 곧 수준의 구원 다시 말해 성화적인 차원의 구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 신분의 구원은 내가 감지하지도 못할 때 순식간에 일어나는 과거형이고,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나에게는 성화의 구원, 곧 수준의 구원만 남게 되는 것이죠. 그것은 한 번에 끝이 아니라 주님 나라에 갈때까지 평생을 걸쳐 완성시켜 나가야 할 구원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핍박속에서도 이겨내야 할 수준의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버전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여호와여, 마른 땅에 시냇물이 흐르듯이 우리를 다시 회복시켜 주소서.” 왜 ‘남방 시내와 같이’라고 해석된 부분을 현대인의 성경은 ‘마른 땅에 시냇물이 흐르듯이’라고 해석을 한 걸까요? 네게브, 그러니까 이스라엘 남방 지역의 시내들은 보통 때는 강이 아니라 길이며 그냥 평지입니다. 평소에는 전혀 시내인지 강인지를 알 수 없게 길로 쓰이는 지형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비가 오고 홍수가 나면 이 시내들이 갑자기 물길이 되어 말라버린 강바닥을 바꿔버린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상상치도 못할 모습으로 완전 바뀌는 것, 그것이 비가 내린 후의 남방시내의 모습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남방 시내와 같이, 완전히 죽어버린 말라빠진 땅에 하늘로부터 비가 오면 생명의 강이 되고, 푸른 정원이 이뤄지듯이, 죄에 노예가 된 채 아무런 생명력을 발휘하지 못한 나의 영혼이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단비가 부어지면 그야말로 온통 생명력 넘치는 강물처럼, 푸른 초장처럼 되살아 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 심령을 회복시켜 달라고, 시인이 기도하고 있는 것이죠. 그 기도는 곧 우리 영혼의 기도여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단지 내가 예수를 영접하고 눈물을 흘리던 그 때, 그 순간에만 필요한 것입니까? 아니죠. 예수의 은혜가 남방 시내와 같이 날마다 부어지도록, 그래서 죽어 버린 내 심령에 계속해서 부어주시도록, 날마다 주님께 나아가며 간구해야 하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날마다 예수라는 성전에 나아가 불러야 할 노래가 바로 이 구원의 노래인 것이죠.
본문 마지막 5-6절이 이렇게 읊조리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네게브 사막과 같이 메마르고 죽어버린 우리의 심령에서 무슨 열매가 날 수 있겠습니까? 아무런 열매도 기대할 수 없이 절망적이고 죽은 땅이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소망도 없고 온통 메마른 땅만 보이는데, 거기에 누가 씨를 뿌리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절망의 땅에 씨를 뿌리시는 분이 있는데 바로 그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이 남방 사막에 불과한 메마르고 생명이 없는 절망의 땅인 우리의 영혼에, 눈물을 흘리며 생명의 씨, 거룩한 씨를 뿌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씨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저주받은 영혼은 절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지만, 예수님께서 뿌리신 생명의 씨,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씨는,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면 메마르고 돌처럼 굳어있는 시내가 물로 가득한 강이 되고, 정원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심령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으사, 새롭게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그때 기쁨의 곡식단을 들고 추수의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죠. 그 열매는 내가 만들 수 있는 열매가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지만, 우리를 바라보시고, 우리의 영혼에 씨를 뿌리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그 열매를 거두신다는 것입니다.
https://www.bookpod.co.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1131
그렇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황폐화된 네게브 사막과 같은 심령으로서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지만, 십자가 고통의 눈물을 흘리며 거룩한 씨를 뿌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총 안에서 기쁨의 단을 거두시도록, 칭의의 구원을 넘어 성화의 구원 곧 수준의 구원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성도가 바라는 구원의 은혜이며 회복의 노래인 줄 믿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