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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1~17)

by 똑똑이채널 2022.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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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42일째 마지막 욥기서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41일째죠. 중간에 짧은 25장과 26장을 한꺼번에 읽었기 때문에 말이죠. 보통 책을 다 읽으면 책거리를 하는데, 해야 되지 않나요?

우리가 욥기서를 처음부터 읽어봤는데 어떤 질문들이 떠오르십니까?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이제는 어느 정도 발견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에게도 시험당하는 걸 허락하시는 분이라는 것. 그런 하나님일지라도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것. 사탄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시험할 때 그 영향권은 하나님 아래에 있다는 것. 욥이 고난당하는 것은 죄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 욥의 세 친구들이 감성으로 욥을 대하기보다 자기 주관적인 관점으로만 대한다는 것. 인간의 고통은 교육적인 차원도 있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고통 앞에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숨어계실 때가 있다는 것. 인간은 자연만물의 이치와 흐름 앞에 무지하듯 하나님의 섭리를 다 꿰뚫수 없다는 것이었죠.

 

 

그것이 욥기서 1장부터 어제 읽은 41장까지의 주제라 할 수 있죠. 그런 점들을 볼대 욥이 가장 분통터졌던 게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소유한 재산 다 잃고, 7명의 아들과 3명의 딸들 죽고, 자기 몸에 악창 곧 피부암이 들끓고, 사랑하는 아내마저 욕하고 떠나버린 것, 심지어 그 친구들까지 와서 집요하게 자신을 책망하고 비난하는 논쟁들, 그것들 중에 힘들지 않은 게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욥도 초창기에는 그런 고통의 쓰나미 앞에 믿음의 고백을 했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1:21)라고 말이죠. 더욱이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한 맺힌 절규 앞에서도 담담히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는 것 당연한 것 아니냐.”(2:10)하고 말이죠. 그의 믿음은 머리와 입으로만 믿는 믿음과는 다른 믿음이었죠.

 

 

그런데 그 고통과 괴로움이 오래갈수록 어떻게 되었습니까? 심지어 그의 세 친구들,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이 차례로 욥의 심사를 건드리면서 비난할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욥도 지칠대로 지쳐버렸죠. 그 속에서 자기 의로움을 계속 항변하다보니까,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마저 무시하는 모습으로 비쳤죠.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시선에서 점차 자기에게로 향하는 시선으로 내려앉는 모습이었죠. 그 속에서 더욱더 괴로웠던 것은 하나님께서 짠 하고 나타나서, 자기 의로움을 입증해주시면 좋으련만, 하나님께 침묵하시고, 숨어계신다는 것이죠.그런 상황이 계속되는데, 어떤 사람이 지치지 않겠습니까? 결국 욥에게 가장 큰 고통은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 제게 이런 고통이 뒤따르는 것입니까? 왜 저야만 하는 것입니까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길래, 왜 응답치 않으시는 것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때까지도, 그 친구들과 세 차례의 긴 논쟁을 벌일 때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과의 길고 긴 논쟁이 끝이 나고, 질칠 때로 지쳐 있는데, 또 다른 한 사람 젊은 엘리후가 중재하고 나서야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죠. 그런면에서 엘리후는 세례 요한과 같은 인물로, 하나님의 길을 예비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는데, 과연 욥의 세 친구들이 한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수 있느냐, 하는 걸 한 번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신학교 시절에 외우고 또 외웠던 구절, 욥기서 87절 말씀이 그것이라고 했죠.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실은 그게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라 욥의 두 번째 친구인 수아 사람 빌닷의 말, 곧 인간의 말이었다고 했죠. 그런데도 크리스천 사업가들은 새로 상점을 열면서 대부분 그 말씀을 액자로 해서 사업장에 붙여 놓고 기도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죠. 결코 올바른 모습은 아니라고 했었죠.

그에 반해 참된 신앙인은 그런 말씀보다는 욥기서 2310절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게 낫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니사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최근 CCM의 노랫말이기도 하죠.. 뭔가 심금을 울리는 고백이 담긴 말씀처럼 들리기 때문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 또한 인간의 말, 곧 욥이 엘리바스에게 대답한 말 중의 하나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뭔가 깨닫는 게 있지 않습니까?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한 수아 사람 빌닷의 고백이나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니사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한 욥의 고백이나, 둘 다 인간의 고백이기는 마찬가지라는 점 말이죠. 그런데 따지고 보면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말이 인간의 고백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특별한 하나님께서 계시나 예수님의 말씀을 제외하면 대부분 인간의 말로 엮여 있는 게 성경입니다.

제가 무얼 말씀드리고 싶은지 이해가 되시나요? 욥기서를 읽은 중간에는 인간적인 말을 가려서 새겼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욥기서를 끝내는 지점에서는 한 번 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비록 욥기서에 등장하는 세 친구들의 말, 그리고 다른 성경에 무수히 등장하는 인간의 말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역사하실 수 있다는 점 말이죠.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업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그 시작점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세워가겠다는 마음과 자세로 그 말씀을 붙잡는다면, 그 말씀이 그의 심령 속에 새롭게 역사할 수도 있다는 점이고,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한 욥의 고백도 믿음의 사람들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실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기에 민수기 1428절에 이른 것처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네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시행하리라하는 그 말씀처럼, 우리들이 나눈 모든 대화를 통해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누군가에게 희망과 용기가 된다면, 그때의 인간적인 말조차도 하나님의 음성으로 충분히 역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더욱더 굳게 말씀드리는 것은 욥의 세 친구들이 하는 말이 결코 틀린 것도 아니요, 욥이 주장한 이야기도 결코 틀린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인과응보론으로 욥을 지적했었죠.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게 죄 때문이라고 말이죠. 그러나 그게 성경적인 관점에서 틀린 게 결코 아니죠. 선을 행하면 상급을 받고, 악을 행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 말이죠. 그만큼 인간의 말을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은 욥기서 마지막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폭풍가운데 욥에게 나타나셔서, 땅과 하늘과 바다의 자연계와 짐승들, 그리고 그 속에서 베히못 곧 하마와 리워야단 곧 바다용과 같은, 그 짐승들까지도 욥이 이해하지 못할 진데, 어찌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 있겠느냐면서, 욥의 무지함를 깨닫게 하셨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욥이 대답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6절 말씀이 그것이죠. 내용인 즉,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던 부분들을 회개하는 모습이죠. 내가 의로움에 갇혀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놓쳐버렸는데,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침묵하신다고, 숨어계신다고 탄식하고 울부짖었는데, 하나님의 깊으신 섭리를 미쳐 몰랐음을 티끌과 재 가운데 회개하나이다.”하고 고백하는 장면이죠.

그러면서 5절에서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는데 그쳤지만, 이제는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눈을 뜬 자로서 보고 있노라고 말입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욥의 모든 상황을 정리해주셨고, 소유물들도 이전상태로, 자식들도 이전상태로 다 회복시켜 주셨죠. 그리고 욥도 140년을 살았다고 밝혀줍니다. 물론 70인역성경에서는 욥이 240살을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차이가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응답하실 때가 있다는 것이죠. 다만 그때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정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 여정이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보이는 만큼 우리가 믿고 나아가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야긴과 보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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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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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도대체 왜 저입니까?’라고 탄식하고 신음할 수밖에 없는 고된 인생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저희를 너무 믿으셔서 그런 길을 통과하게 하실 때가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 그때마다 내가 여기 있다하고 한 말씀만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저희는 충분히 힘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만큼 믿고 따를 수 있는 믿음으로 살게 해 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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