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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욥19:1~29)

by 똑똑이채널 2022.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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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욥은 세 친구가 행한 첫 번째 대화 이후 두 번째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을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15~21장까지 욥과 세 명의 친구가 나눈 두 번째 대화 내용이죠. 오늘 읽은 말씀은 첫 번째 사람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욥의 대화가 끝난 뒤, 두 번째 사람인 소아 사람 빌닷이 한 이야기에 욥이 답변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볼 때 욥이 하는 이야기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점이 있죠? 욥은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욥은 자기 가족은 물론이요, 자기 친척과 친구들까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디에서 알 수 있습니까? 본문 14절입니다. 내 친척은 나를 버렸으며 가까운 친지들은 나를 잊었구나.” 18절에 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또한 본문 19절이 이렇습니다.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

그야말로 가족은 물론 친척들까지도, 그 친척의 어린아이들까지도 자신을 조롱하고 있고 무시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죠.

 

왜 이렇게 욥이 항변하는 것일까요? 이와 같은 항변의 핵심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이 내게 이러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본문 8절은 이렇게 항변합니다. 그가 내 길을 막아 지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앞길에 어둠을 두셨으며”, 11절에서는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 구나.”

또한 21절은 이렇게 항변하죠.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치시고 괴롭히시는 것도 버거운데, 이제 너희들까지 왜 그러느냐,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렇듯 욥은 친구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자신이 억울하다는 것을 계속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러실 수 없는데, 왜 너희들까지 그런 하나님에 대해 내게 이야기하는 것이냐 하는 뜻이죠. 그래서 23~24절은 이렇게 말하죠.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한 말을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누가 옳은지 한 번 겨뤄봤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내가 억울하게 당하고 있지만, 내가 한 말과 나의 삶을 진실되게 기록해서 그것을 근거로 살펴보면 내가 얼마나 너희들 앞에서 억울한지 알게 될 것이다 하는 이야기죠. 그러니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하실 수는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 오늘 읽은 19장 전체의 요지입니다.

 

왜 그렇게까지 욥이 항변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까지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너희들이 한 말을 책에 기록해서 잘잘못을 따져보면 얼마나 내게 억울한지 너희들이 알 것이라고, 왜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지금 세 명의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의 핵심은 욥이 형벌을 당하는 게 분명코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주장 때문이죠. 그 까닭에 욥이 괴로워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이렇게 하실 수는 없다고, 너희들까지 일어나서 나를 힘들게 하도록 내 버려두실 수는 없다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마지막 29절에서 욥은 이렇게까지 항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무슨 말입니까? 너희들은 하나님이 무서운 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지금 내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고 있는데, 언젠가 너희들을 하나님께서 벌하실 때가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까지 욥이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욥을 향해서 계속 인과응보식으로 조롱하고 비난하기 때문에 욥도 참지 못하고 자기 항변을 하는 것이죠. 그만큼 세 명의 친구들이 욥을 향해 너는 죄인이고, 우리는 아무런 벌을 당하지 않았으니 의인이라는 교만 속에 있기 때문에, 욥이 자기 항변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욥의 세 친구가 말하는 대화를 통해 볼 때, 특별히 어제 말한 빌닷의 언사를 볼 때, 욥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얼마나 비참하게 욥을 깔아뭉개며 죄인 취급하는지, 어제 읽어봤었죠. 욥기서 182~3절만 봐도 빌닷이 노골적으로 욥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을 읽어볼 수 있었죠. 욥아 너 언제쯤 그 입을 다물테냐? 제발 좀 네 말을 멈추고 잠잠해라, 그래야 내가 한 수 가르쳐 줄 거 아니니. 우리가 짐승보다 못하다고. 짐승들에게나 공중의 새, 바다의 고기들에게나 물어보라고, 그렇게 우리를 업씬여기는 너는 도대체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고집불통이니?”

그런가 하면 21절은 그렇게 쏘아붙였죠. 악한 자, 불의한 자의 가정이 이런 꼴을 당하게 되는 것이란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정이 이렇게 참혹하게 되는 것이란다. 그러니깐 욥아, 네가 악하고 불의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이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이라고. 욥아, 제발 정신 좀 차리거라. 제발!”

그야말로 욥을 향해 감정의 골이 깊게 페일 정도로 인격까지 사살해버리는 빌닷의 발언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오늘 본문 2절을 통해 욥이 그렇게 항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열 번이나 너희가 나를 학대하고도 부끄러워 아니하는구나.”

 

그런데 어제도 우리가 생각해봤지만, 오늘도 이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해야 할 게 있지 않겠습니까? 악은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것 말이죠. 칼은 칼로 맞서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는 것, 오리를 가고자 한다면 십 리를 가는 것,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내어주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만큼 욥의 세 친구가 욥을 지적하고 공박하고 인격까지 사살할 정도로 몰아붙여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저 욥의 아픔에 함께 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자고 이야기하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죠. 그것은 욥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설령 세 친구가 자신을 향해 쏴붙일지라도, 욥은 그럴 수 있어. 내가 잘못해서 이런 화를 당할 수 있는 거야!’하고 한 꺼풀만 화를 꺾는다면, 모든 게 조용해지고, 오히려 하나님께 함께 엎드릴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죠.

 

그런 관점을 생각한다면, 오늘 본문에서 고백하는 25~26절 말씀을 통해 부활신앙까지 내다볼 수 있겠죠.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이것은 욥이 대답한 말입니다. 친구들이 너무나도 힘들게 공박하고 인격까지 사살하는 심정으로 몰아붙이기 때문에 욥이 항변한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항변을 넘어서는 부활신앙의 고백과 같다는 점입니다.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하는 고백이 그것이죠.

물론 부활신앙은 예수님처럼 칼을 휘두를 때 칼을 휘두르는 방법으로, 눈에는 눈으로 대적하는 방법을 통해서는 불가능하죠. 예수님께서 검을 들고 체포하러 왔을 때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처버렸죠. 그때 예수님께서는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다 칼로 망한다.”(26:52, 현대인의 성경)하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로마 군병들이 조롱해도, 십자가에 못 박아도,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들이 몰라서 그렇습니다.”하고 품으셨죠. 그렇게 품고 수용하는 마음과 자세를 갖고 계셨기에 예수님은 죽음 속에서 당당하게 부활하셨던 것이죠.

죽어야만 산다는 이치가 그것 아니겠습니까? 욥이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부활신앙을 고백한 것도 그렇죠. 그의 친구들을 받아들일 때 가능한 법이죠.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부활신앙의 고백을 갖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까지도 품을 수 있는 하루의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야긴과 보아스

북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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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시는 주님. 우리 삶에 이해할 수 없거나, 억울하다고 생각되는 고통이 다가 왔을 때, 힘을 다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믿음을 주십시오. 믿음은 시선이오니, 죽음과도 같은 혹한의 고통이 닥쳐왔을 때,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그 고통의 터널이 지나 하나님께서 인생의 답을 주시는, 소망을 붙잡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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