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믿음은 말과 행실이 함께 가는 것이죠. 언행일치의 삶이 이루는 것이 바른 믿음이죠. 그래서 믿음을 가리키는 헬라어 ‘피스티스’가 곧 신실입니다. 단순한 공기의 진동으로, 입바른 소리로 끝나버리는 게 믿음이 아니라 삶과 연결된 믿음이라야 진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어제 읽은 욥의 세 번째 친구 곧 나아마 사람 ‘소발’이 한 이야기 중에는 정말로 의미심장한 고백이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오묘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 말이죠. 그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능히 측량할 자는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정말로 백미와 같은 고백입니다. 그런데 소발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믿음의 고백은 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믿음의 삶을 살지는 못했죠. 왜냐하면 그런 오묘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지금 고난당하고 있는 욥의 상황을 그런 각도에서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텐데,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죠. 욥이 고통당하는 그 모습 가운데에는 오묘하신 하나님의 신비로운 영역이 있음을 내다봐야 했는데, 그는 결코 욥을 그런 마음과 자세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도 하나님을 오묘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섬긴다면, 우리의 상황 가운데 고통과 괴로움이 찾아올 때 그 하나님의 신비로운 영역을 온전히 믿고 수용할 수 있는 자가 돼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누군가 그 고통의 현장 속에 있을 때 오묘하신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하나님의 신비로운 역사가 임하도록,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한 법이죠. 그것이 참된 믿음의 자세이기 때문이죠.
만약 길을 가다가 튀어나온 벽에다 그만 머리를 쿵하고 부딪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아픈지 조금 전에 화가 난 사실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아픕니다. 그러다 문득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별 것 아닌 것에 화를 낸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싶어 뜨끔하게 되죠.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까? ‘잘못하면 벌을 받는다’는 데이터가 우리 두뇌에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잘못을 저질러서 벽에 쿵 하고 부딪힌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불가에서 쓰는 말 중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죠. 사전에서 뜻풀이를 해놓았습니다.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있고, 현세에서의 선악의 결과에 따라 내세에서 행과 불행이 있는 일”이라고 말이죠. 종교적 색채를 지우고 나면 한 마디로 무슨 뜻입니까? ‘행한 대로 돌려받는다’는 말이죠.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말씀, 욥을 향한 세 친구의 평가가 그와 같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인과응보’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나겠느냐, 이유 없이 재산 잃고 자식들 다 잃겠느냐. 네가 선하게 산다면 어찌 공의의 하나님께 그렇게 하실 수 있겠느냐, 하는 식입니다.
다들 근거가 그럴 듯 했습니다. 그러면서 첫 번째 친구인 데만 사람 엘리바스는 하나님의 계시를 말했고, 두 번째 사람 수아 사람 빌닷은 조상의 지혜를 이야기했고, 나아마 사람 소발은 하나님의 오묘함을 이야기했죠. 세 친구의 논리는 다들 탄탄했고 그들의 총명함은 빛났습니다.
욥의 세 친구는 다들 지혜자가 맞습니다. 보통의 경우 세 친구의 말은 무지를 일깨우고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그래서 바른길을 비추어 주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겪는 고난은 대개가 “행한 대로 되돌려 받는 꼴”이기 때문이죠. 콩을 심은 데 콩 나고, 팥을 심은 데 팥이 나기 때문이죠.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받기 때문이죠. 그러니 욥이 고난을 받는 것에 대해 그 친구들은 억울해 할 게 없다는 식이죠. 적어도 뿌린 대로 거두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과응보’의 깊은 차원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자들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만에 하나, 콩을 심지도 않았는데 콩이 났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팥을 심지도 않았는데 팥을 받았다면 분명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런 경우는 거의 없어 보이죠. 이 세상을 살다보면 대부분의 경우가 따지고 보면 인과응보인 경우이기 때문이죠. 더욱이 야고보서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14)하고 말이죠. 참 뛰어난 통찰력이 아닐 수가 없죠.
그래도 만에 하나가 있다면 이는 달리 다루는 것이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욥은 오늘 본문을 통해, 세 번째 친구인 나아마 사람 소발이 했던 말에 변론을 합니다. 바로 자신이 그 ‘만에 하나’라고 강변하면서 말입니다. 친구들에게 자신을 죄인으로 몰지 말라는 뜻입니다. 의인을 악인으로 취급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과응보의 예로 자신을 다루지 말라는 뜻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 세상에서조차 인과응보가 완벽하게 실현되지 않을 때가 있다는 뜻이죠. 악인은 더욱 형통하고, 의인은 더욱 고통을 받는 경우가 그렇기 때문이죠. 이것은 하박국 선지자가 질문한 것도 마찬가지죠. 하박국 선지자가 보기에 유다 백성은 그래도 바벨론 백성보다 조금은 더 의로운 백성들인데, 왜 하필 저 악한 바벨론에게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하는지, 하나님의 뜻이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인과응보식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욥도 그런 심정으로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에서는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입이 음식의 맛을 구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간하지 아니하느냐”
그만큼 인과응보식으로만 만사를 판단할 게 아니라, 모든 일을 더욱더 주의 깊게 살피고 분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욥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자신의 고난을 헤아려달라는 뜻이죠.
그리고 더 나아가, 욥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말과 지혜가 아닌 전능자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여 자신을 변론하겠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너희들에게 말해 봤자 너희들이 그 하나님의 깊으신 속내를 알 까닭이 있겠느냐, 세상을 모두 인과응보식으로만 바라보는데 그 오묘하신 하나님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낫겠다는 주장이죠.
그런 욥이라면 그 친구들이 욥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무척이나 교만하고 오만한 자로 바라보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대목에서 자기 의만 드러내는 미숙한 자라고 정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죄당하고 비난당하는 것을 전적으로 욥의 잘못으로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니 고난당하는 욥이 욕을 먹어도 싸다가 여기는 것이죠.
그러나 무엇이 교만이고 무엇이 오만이며, 과연 누가 어리석고 형편없는 자이겠습니까. 까닭 없이 고통당하는 욥이겠습니까? 아니면 그런 욥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친구들이겠습니까? 바로 욥의 친구들이죠.
그런데 그들의 모습이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교만하다고 말하는 내가 정작 교만한 자이며,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내가 정작 형편없는 자라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고통에 내 신앙적인 지식과 경험으로 먼저 판단하는 경향이 앞서기 때문에 말입니다.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기보다 그에게 닥친 현실만 평가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것이 욥의 친구들의 모습이자 실은 나 자신의 모습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욥기서 1장에 나오는 욥의 믿음에는 박수를 보내지만, 나머지 장에서 고난 때문에 아파하고 억울해하고 괴로워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그 친구들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학개념 중에 ‘숨어계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과 오감으로 전능자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개념이죠. 그러므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은 신비이며 예측 불가능성이죠. 인과응보를 넘어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바로 그 하나님을 고난 속에서 찾아낸 것이죠. 그리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부당함을, 전능자이신 하나님 앞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죠. 이것이야말로 정직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욥은 끝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그런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시는 주님. 저희들 모두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스스로 옳다 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오직 전능자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여 하나님의 뜻이 임하기를 기도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고난당한 자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아픔을 함께 나누며,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고난 앞에서 정직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찾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고난 속에서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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