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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묵상DewSermon/아가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아6:1-13)

by 권또또 202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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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6장은 어제 읽은 말씀의 연장선상에 있는 말씀입니다. 언약식 곧 혼인식을 치르고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성숙한 결혼생활을 비유로 말씀해 주는 내용입니다. 한 무지랭이 여인이 일국의 왕을 만나 혼인하게 되는 것이 실은 꿈에 그릴 법한 일이라 어안이 벙벙하여 잠시 머뭇거리는데, 그 잠깐 사이에 왕이 다른 데 눈길을 돌리는데, 그럴 지라도 그 왕을 찾아 여인이 갈급한 마음으로 찾아나서게 되고, 급기야 두 사람 사이에 더 애틋한 사랑이 엮어지는 모습을 어제 살펴봤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말씀의 일환입니다. 혼인생활을 하다보면 갈등이 없을 수 없지만 그 갈등을 성숙의 기회로 삼도록 해야 하는 말씀을 일깨워줍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모신 이후에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에 갈등이 없잖아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부부가 한 몸을 이뤄야 하듯이, 나는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주님의 소유라는 사실을 더 깊이 인식하며 살아가도록 이끌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6장의 말씀은 드라마에 나오는 한 연인 사이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의 명대사로 구성돼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 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어떤 경위로 인해 남자가 떠나가고 이 여인이 남자를 찾아가게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제 읽은 5장 6절에서 그는 벌써 물러갔네"라고 기록돼 있고, 그 남자가 그 여자에게 찾아가 불러보지만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해”를 갖고 이미 돌아가버렸다고 생각을 하죠. 그 후에 그 여인의 친구들이 그 여인에게 찾아와 이야기를 해 줍니다.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느냐"하고 말입니다.

지금 이 남자는 여인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로 인해 분명 ‘오해’를 갖고 돌아간 것입니다. 그녀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단지 추측만 할 뿐입니다. 변심을 했는지, 아니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 화가 난 것인지, 여러 추측만 난무할 뿐입니다. 그런 상태로 남자가 돌아간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익히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이 ‘오해’의 근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입니까? 상대방의 입장이 아닌 내 ‘상황’에서만 볼 때 오해가 생깁니다. 그래서 오해를 영어로 ‘Misunderstanding'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Understanding은 이해지만 그 앞에 Mis가 붙는 게 오해가 되는 것이죠. 재밌는 말장난 같지만 Mis를 Me 곧 나로 생각하면 의미가 분명해지죠. 오해란 Me 곧 나의 수준으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일임을 말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그 남자가 떠나갔다고 오해하고 있는 그 여인을 향해, 그 친구들이 함께 찾아나서겠다고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떠나간 남자를 찾아갔을 때, 그 남자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마땅히 할 일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2절에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그 남자를 찾아가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을 것입니다. 여전히 ‘오해’를 갖고 찾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동산에 있는 그 남자를 보기 시작하자 ‘오해’가 ‘이해’로 변화되기 시작하는 모습이죠.

본문 3절에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 도다" 결국, 이 두 연인은 자신의 입장에서만 사실을 보았기 때문에 오해를 했고, 서로에게 찾아와 상대방의 입장에서 사실을 보기 시작하자 오해가 풀려 이해를 하게 되는 형국입니다. 얼마나 근사한 모습의 고백입니까?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어쩌면 이 말씀이 ‘두 사람이 한 몸이 될지라’한 결혼의 정의를 그렇게 표현한 말씀이지 않나 싶습니다.

이제 4-10절에 걸쳐 그 남자는 자신의 여인 곧 술람미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특별히 4절과 10절을 동시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그녀를 향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10절을 보면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하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4절과 10절은 동의반복어라고 할 수 이씁니다. 4절의 표현과 10절의 표현이 흡사하다는 뜻입니다. 4절에서는 ‘다르사’는 단어 자체가 ‘기쁜, 사랑스러운' 뜻을 내포하고 있고, 여로보암 때 북왕국의 수도가 다르사였습니다. 그만큼 빼어난 수도 가치와 의미가 있는 수도를 뜻하듯이, 지금 그 여인 너무나도 소중하고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또 다르사처럼 예루살렘도 도시로 그려주고 있는데 그만큼 깨끗하고 순결한 의미로 사용된 단어의 뜻입니다. 예루살렘을 수식한 ‘고운’이란 뜻의 히브리어 ‘야파'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에서 ‘당당하다'는 히브리어 ‘아유마'는 ‘두려움'을 의미하죠. 정리하면, 그 남자에게 그 여인은 아름답다 못해 두려움까지 자아낸다는 뜻입니다. 눈을 땔 수도 없고 근접하기도 어려운 여인이라는 뜻이죠. 그만큼 고결하고 사랑스런 아내라는 의미죠.

 

이런 표현은 이전의 오해가 풀려 이해로 넘어갈 때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남자는 기쁨과 사랑의 고백으로 충만해지면서 다른 곳에 마음과 시선을 쏟지 않는 것이죠. 자신이 사랑하는 그 술람미 여인만 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13절에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님에서 춤추는 것을 보는 것 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고 고백하죠. 여기서 ‘마하나임’을 지명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요단 동쪽, 얍압복 강가에 위치한 도시로 추정되는 곳이죠. 중요한 것은 그 지역의 중요성보다는 술람미 여인과 다른 여인들을 비교 하는 것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자신에게 절대적인 존재로 그 여인을 사랑하며 살겠다는 뜻입니다. 오해로 생긴 갈등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이해함으로서, 그렇게 성숙한 관계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사람 사이도 그렇고, 부부지간에도 그렇고 심지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아니 우리가 하나님을 갈등하는 부분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갈등의 원인은 대부분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오해는 모든 사실을 내 입장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에 빚어지죠. 그런 차원에서 볼 때 갈등이 일어날 때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관계 자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관계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며 사탄이 가장 좋아하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떤 관계인지를 기억하는 것이죠. 갈등이 있을 때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마음은 소속감입니다. 부부라는 관계의 소속감, 자녀의 부모라는 소속감, 가족이라는 소속감,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소속감을 붙들고, 사랑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을 때, 어떻게 그 관계를 회복할 것인지, 방법과 길이 생기는 것이죠.

물론, 갈등이 생기면, 가장 먼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안 보면 끝이라는 감정과 생각 말입니다. 그렇기에 감정이 생각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시간을 갖는 것도 지혜로운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감정이 생각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도리어 생각이 감정을 다스릴 수 있도록 시간을 갖는 것이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4;26-7)하는 말씀도 그런 차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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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권성권 - 교보문고

역전케 하시는 하나님 | 역대기서가 무너진 유다의 재건 곧 패망한 이스라엘의 재건을 꿈꾸는 설계도와 같다면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실제로 재건하는 건축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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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본문을 통해 궁극적으로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이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내 방식대로만 생각한 채 하나님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은 나의 통치자임을 믿는다면, 그런 오해를 불러오는 나의 어리석음을 한 차원 더 넓고 깊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나의 주관적인 감정도 시간을 갖고 이해를 하게 되면 더 큰 은총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부지간에도, 부모 자식 지간에도, 교우지간에도 다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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