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열기)(예화) 주일날 하버드 의과대학 이븐 알렉산더 박사에 관해 말씀을 드렸죠.
2008년 그 분이 뇌수막염균에 감염돼 급성 뇌수막염을 앓고 뇌에 고름이 차 뇌사상태에 빠졌다고 말이죠.
그 당시 모든 의료진이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사망선고를 내리려고 하는데 7일만에 그분이 깨어났다고 했습니다.
그 기간에 천국을 보고 왔고 〈천국의 증거(Proof of Heaven〉라는 책을 냈는데 아마존에서 20주 베스트셀러가 되었죠.
그런데 그가 천국을 보고 왔다는 사실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믿지 않는데, 어떻게 그걸 증명할 수 있다고 했습니까?
세 가지인데, 첫째는 천국을 체험한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이 있다고 했죠.
그 천국은 하늘, 구름, 빛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또 ‘성경적인 이미지와 대상’이 나타난다는 점이죠.
만약 천국을 보고 온 게 거짓이라면 세상에서 즐거워했던 파티나 술이나 환락적인 이미지가 나타나야 할텐데 그렇지 않은 것이죠.
둘째로는 그와 같은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 곧 천국을 보고 온 사람들의 삶이 대부분 바뀐다는 것이죠.
그것은 이븐 알렉산더 박사만 그런 게 아니라 성경에 나온 바울도 마찬가지였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고향 다소에서 7년간 살면서 3층천 천국을 보기 전까지는, 바울도 이 세상을 목적으로만 살았죠.
하지만 빛되신 주님을 만나고, 천국을 보고 난 이후에는 그 삶을 주님을 위한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마지막 셋째는 임사체험에는, 천국을 체험하는 그 속에는 의도된 스토리가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의도된 스토리란 다른 게 아니라 영적인 세계에 관한 스토리, 곧 복음의 초대라는 주님의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죠.
(깨달음) 이것은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도 때가 되면, 주님의 우리를 그 나라로 부르시면, 언젠가 떠나야 할 존재들이죠.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도 실은 주님께서 부여하신 시한부 인생을 사는 존재와 다를 바 없는 셈이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진정한 영적인 세계의 가치, 천국의 가치를 늘 생각하며 사는가, 하는 것이죠.
이 세상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고, 시시각각 변하는 정보를 꿰뚫고 있어도, 영생의 가치를 놓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인생 아니겠습니까?
(적용) 그러나 이 세상만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은 진리나 영생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게 되죠.
더욱이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불법도 불사하고, 폭력배나 불량배도 서슴지 않고 동원해서 성취하려고 하죠.
그런 모습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전혀 달라지지 않는 사실입니다.
오직 영원한 진리와 영생에 대해 눈을 뜨고 사는 자만 영생의 가치를 좇아 살게 될 뿐입니다.
그 세계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한 자는 오직 이 땅의 것에만 목적을 두고 살 뿐이죠.
저와 여러분들은 이 땅에 두 발을 내딛고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궁극적인 가치는 천국에 두고 사는 자들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할렐루야. 축복합니다.
(역배)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데리고 빌립보에서 서남쪽으로 164km 떨어진 데살로니가로 옮겨왔죠.
그리고는 곧장 예전 습관을 좇아 유대인 회당을 찾아들어가 그곳에 있는 무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죠.
당시 유대인들은 성인 10명이 있으면 회당모임을 통해 구약의 두루마리 성경을 읽고 서로의 깨달음을 나눴죠.
바울은 그런 유대인들 앞에서 구약의 예언서를 읽으며 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나눈 것이었죠.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곳에 많은 헬라인들 다시 말해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그 귀부인들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이들이 많이 생겨났죠.
사실 그곳 데살로니가에는 그 뒤쪽에 해발 2,917m의 올림푸스 산 있는 곳이죠.
그 올림푸스 산에는 고대 그리스인들이 12개의 신이 활동하고 있다고 믿는 신전이 있는 곳이죠.
그런데도 데살로니가의 유대인 회당을 찾은 그 헬라인들은 유대교로 개종했다가, 지금은 바울이 전한 예수님의 복음을 믿게 된 것이죠.
그만큼 주님의 크신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들이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죠.
그때 유대인 회당을 관리하고 책임을 지는 유대인 중심세력들은 바울을 못땅할 수밖에 없었죠.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하듯이 수많은 헬라인과 귀부인들이 하루아침에 바울에게 넘어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그때 유대인들은 시기심에 들끓어 저자의 불량배들 곧 깡패들을 동원해 바울이 머물고 있는 야손의 집을 쳐들어갔죠.
하지만 야손의 집에 바울 일행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도리어 야손과 몇 몇 그리스도인들을 끌고 읍장에게 고발을 하죠.
“이 야손과 몇 몇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거역하고 전복하려는 바울이란 자를 모신 자들이다”하고 말이죠.
물론 바울은 로마 황제를 거역하거나 로마를 전복시키려는 세력을 규합하는 게 아니었죠.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님으로 모시는 복음을 전한 것 뿐이었죠.
그러나 모든 시대마다 시기심에 불타 오르는 세력들은 늘 진리를 거짓으로 꾸미고 모함하고 죽이려들 뿐이죠.
(본문) 이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본문 9절에서 이렇게 밝혀줍니다.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주니라.”
(원해) 이 말씀만 놓고 보면, 야손과 몇 몇 사람들이 돈을 내놓고 풀려났겠구나, 하고 생각하기가 쉽죠.
하지만 우리말 ‘보석금’으로 번역된 헬라어 ‘히카노스’(ἱκανός)는 ‘필요한만큼’(sufficient)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충분한 돈을 내고 풀려났다는 말이 아니라 일종의 ‘서약서’나 ‘각서’를 뜻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시는 바울과 같은 자들과 상종하거나 교제하지 않겠다는, 그 충분한 각서를 썼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바울이 은둔한 곳을 알고 있거나 알아내게 되면 곧바로 알려주겠다는, 그런 서약서를 쓰고 풀려났다는 뜻이죠.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예나 지금이나 이 땅의 것만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은 진리나 생명에는 관심이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것이죠.
그곳의 관리들은 천하를 어지럽히고 로마의 황제를 대항하는 세력이라면 진리로 따지지 않고 잡아들이려는 태도죠.
그것은 바울을 잡고자 불량배를 동원한 유대인들도 전혀 다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본문2) 그런데 이때 풀려난 이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그들은 바울과 상종하지 않겠다고 서약서를 썼고, 바울의 은거지를 알면 곧바로 신고하겠다는 각서를 썼는데, 정말 그렇게 했을까요?
본문 10절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깨달음) 그 밤에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는 80km 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왜 바울을 베뢰아로 보냈는데 왜 하필 ‘밤’에, 그것도 ‘곧’이라는 표현을 써 가면서까지 그렇게 보냈겠습니까?
뭔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 밤이 지나고 날이 새면 바울과 실라가 체포당해 그 성읍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해주는 말씀이죠.
그런데 ‘그 형제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바울 일행은 지난 3주 동안 야손의 집에 머물지 않았습니까?
바꿔 말하면 야손도 바울이 전한 예수님의 복음을 영접한 유대인이었고, 그와 함께 한 형제들이 모두 예수님을 영접한 셈이었습니다.
그처럼 야손과 함께 한 몇 몇의 형제들, 곧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 주님을 영접한 몇 몇 형제들이 그날 밤에 급박하게 바울 일행을 그 베뢰아로 보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야손과 몇 몇 형제들이 읍장들에게 끌려가 서약서를 쓰고 풀려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서약서를 쓴 것은 바울 일행을 베뢰아로 보내기 위한 서약서였을 뿐, 진리와 생명을 고발하고 짓밟기 위함이 아니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야손과 몇 몇 형제들 역시도 이 땅의 것보다도 저 영원한 생명과 진리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주문)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 그렇죠.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야손과 몇 몇 형제들처럼, 바울처럼, 이 땅의 것보다도 저 영원한 진리와 생명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주음성)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우리 각자에게 성령님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는 바울처럼, 야손과 몇 몇 사람들처럼, 이 땅의 것을 초월하여 영원한 진리와 생명의 가치를 바라보며 살고 있느냐?”
“아니면 바울을 고발하고 야손과 몇 몇 사람들을 끌고 가고자 불량배들을 동원한 유대인들과 읍장들처럼 이 땅의 것만 바라보며 살고 있느냐?”
“하버드 의과대학 이븐 알렉산더 박사도 천국을 보기 전에는 이 땅의 의학기술만 바라보며 살지 않았겠느냐?”
“하지만 그가 임사체험을 통해 천국을 봤을 때 그의 남은 인생을 이 땅이 아닌 영생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지 않았더냐?”
“그러니 내 사랑하는 딸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
“너는 이 땅에 주어진 사명을 위해 이 땅의 것을 분별하고 모든 정보도 다 꿰꿇고 살아야 하지만 보다 영원한 세계를 놓치지는 말도록 해라.”
“이 땅에 두 발을 내 딛고 살지만 언젠가 너를 부를 저 영원한 본향을 목적으로 하며 살았으면 좋겠구나.”
“바울 일행과 야손과 몇 몇 사람들엑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그 영원한 천국의 은혜였지 않겠느냐?”
“그렇기에 너도 이 땅의 것과 영원한 하늘나라의 것,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분별하며 살았으면 좋겠구나.”
(찬양)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에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온 맘과 정성다해
하나님의 신실한 친구되기 원합니다
(발췌) 이재철 목사님의 〈사도행전속으로〉 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1935년 미국인 데이비드 넬슨(D.Lelson)은 목사 신분이면서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는 미국 중부에 엄청난 규모의 농장과 많은 노예들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예제도 반대자의 연설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날 그는 목사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 양심의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노예를 통한 진수성찬보다 노예 없는 감자와 소금만을 먹겠다고 선언했죠.
그는 자신의 선언을 실천하고자 노예들을 풀어주고 농장도 처분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신앙양심에 따른 그 선언과 실천은 주위 사람들의 환영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많은 노예들을 소유하고 있던 이웃 농장주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이웃 농장주들은 떼를 지어 넬슨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넬스는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도피해야만 했죠.
그는 사흘 낮밤을 가리지 않고 숲과 늪지대를 헤치고 나아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미시시피 강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미시시파 강만 건너면 자신을 맞아 줄 사랑하는 친구 집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죽이려는 농장주들이 그곳까지 추격해 들어온 것을 알고는 밤이 될 때까지 숲 속에 엎들니 채 숨어 있어야 했죠.
엎드린 몸으로 고개를 들면 강둑 아래로 흘러가는 미시시피의 급류가 내려다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강 건너편에는 저 멀리 자신을 맞아 줄 사랑하는 친구의 집도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그때 넬슨의 깊은 심령에서 솟구치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가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485장의 가사 된 〈세월이 흘러가는데〉입니다.
세월이 흘러 가는데 이 나그네 된 나는
괴로운 세월 가는 것 금할 길 아주 없네
요단강에 섰는데 내 친구 건너 가네
저 건너 편에 빛난 곳 내 눈에 희미하다
저 뵈는 하늘 집으로 띠띠고 어서 가세
주 계실 때에 하는 말 들에 비하라셨네
요단강에 섰는데 내 친구 건너 가네
저 건너 편에 빛난 곳 내 눈에 희미하다
(깨달음) 무엇을 깨닫게 하는 찬송가 같습니까?
넬슨이 추격자들을 피해 숲 속에 엎드린 그 강둑은 그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가리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강둑 아래로 흘러가는 미시시피 강은 요단강을 상징하는 곳으로, 머잖아 우리가 맞아야 할 죽음을 상징하죠.
그리고 그 강 건너편에 자신을 맞이할 친구의 집, 그곳은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뜻하는 곳 아닙니까?
넬슨은 바로 그걸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에 입성한 믿음의 형제들을 바라보며 그 날을 대비해 살겠다고 결단한 것이죠.
(내음성)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떤 기도를 주님께서 기뻐받으실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요, 주님, 저도 이 세상에 두 발을 내딛고 살지만 언젠가 주님께서 부르시면 그 나라에 가야 할 존재예요.”
“주님, 넬슨도 영원한 진리와 생명의 가치를 내다보며 미시피 강, 그 요단강을 건너고자 했어요.”
“주님. 야손과 몇 몇 형제들도 진리와 생명의 나라를 바라보고 바울 일행을 베뢰아로 피신시켜줬어요.”
“주님, 저도 이 땅의 것을 잘 분별하며 살게 하시되, 언제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갈 수 있도록 깨어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것이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주님을 본받아 사는 지혜로운 인생인 줄 믿습니다.”
(설교닫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디모데후서 3장 1절 이하에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른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한다고 말이죠.
거룩하게 구별되지도 못하고 무정하고 절제하지 못하고 사납고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다고 말이죠.
그것이 이 세대의 특징이요, 궁극적으로 이 세상만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천국을 보여주고 말씀에 감동을 받아 영원한 세계를 소망하게 살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븐 알렉산더 박사도, 바울도, 본문의 야손과 몇 몇 성도들도, 그리고 데이비드 넬슨도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으로 살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이 세상 너머의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며 살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고 계신 줄 믿습니다.
이 땅에 우리 각자를 향한 사명을 완수하기까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날 요단강을 잘 건너왔노라고,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들도 삼아주실 줄 믿습니다.
그와 같은 은혜의 주인공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